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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3 : 조선의 역사 395 (제26대 고종실록 18) 본문
한국의 역사 853 : 조선의 역사 395 (제26대 고종실록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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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2. 고종의 가족들
가족 관계
- 부 : 문조익황제 효명세자
- 모 : 신정익황후 조씨
- 사친 부 : 헌의대원왕 이하응(獻懿大院王 李昰應)
- 사친 모 : 순목대원비 민씨(純穆大院妃 閔氏)
- 황후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1895년)
- 왕자 (조졸) : 4일만에 사망(1871년)
- 공주 (조졸) : 222일만에 사망(1873년)
- 순종효황제 이척 (純宗孝皇帝 李拓)(1874년~1926년)
- 왕자 (조졸) : 14일만에 사망(1875년)
- 왕자 (조졸) : 105일만에 사망(1878년)
- 후비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1854년~1911년)
- 의민황태자 은(懿愍皇太子 垠;1897년~1970년)
- 후궁 : 영보당귀인 이씨(永寶堂貴人 李氏):이순아(李順娥;1843년~1914년)
- 완친왕 선(完親王 墡)(1868년~1880년)
- 옹주 (조졸) : 1871년~1872년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 의친왕 강 (義親王 堈)(1877년~1955년)
- 후궁 : 광화당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이완흥(李完興;1887년~1970년)
- 황자 육(皇子 堉)(1914년~1915년)
- 후궁 : 보현당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1882년~1943년)
- 황자 우(皇子 堣)(1915년~1916년)
- 후궁 : 복녕당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1882년~1929년)
- 덕혜옹주(德惠翁主)(1912년~1989년)
- 후궁 : 내안당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1847년~1914년)
- 옹주 (조졸) : 1879년~1880년
- 후궁 : 삼축당상궁 김씨(尚宮 三祝堂尚宮 金氏):김옥기(金玉基;1890년~1972년)
- 후궁 : 정화당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 후궁 : 궁인 서씨(宮人 徐氏)
-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
- 후궁 : 궁인 장씨(宮人 張氏)
- 양숙부 : 철종장황제
- 양숙모 : 철인장황후
- 양형 : 헌종성황제
- 양형수 : 효현성황후 김씨
- 양형수 : 효정성황후 홍씨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년) : 계속
은퇴와 죽음
명성황후 암살 계획
위정척사파, 동학 농민군, 개화파 일부와 손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본격적으로 명성황후 폐출 작업에 착수한다. 청나라와 일본 공사관의 청나라 외교관, 일본 외교관을 설득하여 명성황후의 패륜성을 지적하며 그를 폐출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1895년 일본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이 명성황후 제거를 모의했는데 이들은 대원군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대원군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장손 이준용이 교동에 유폐된 이래 불만을 품고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면서 외출도 하지 않고 있었다. 뒤에 오카모도가 운현궁을 찾아 대원군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비밀리에 일본 공사관을 자주 출입했는데, 유길준은 그가 수시로 일본 영사관을 드나들었다고 지적했다.
8월 16일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 사랑에서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우노스케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한 4개항의 각서를 대원군에게 제시하고 대원군의 자필 서명을 받아냈다. 각서는 거사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한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아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이 각서에 자필 서명하는 자리에는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도 함께 있었다.
대원군은 출발에 앞서 자신의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고유문은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척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 이는 일본의 강요가 아닌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적은 성명서였다. 일본에서 명성황후 암살을 계획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거사 고유문이 발표되면서 첩보를 입수한 조선의 식자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을미사변 전후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한 자객이 파견되자 사람을 보내 그들을 돕도록 했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양력 10월 8일을 전후하여 친일적 성향으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성향에 대해 단지 ‘반일 성향이 아니었을 뿐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1895년 가을 그는 일본 영사관을 찾아 일본 공사관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만나 도움을 요청한다. 유길준에 따르면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화당(개화파) 모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흥선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데 협력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명성황후가 살해됐다는 것은 경복궁 내 강령전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즉각 보고됐다. 대원군은 겁에 질린 고종이 그를 부르는 형식을 빌려 이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아들과 대면하게 된다. 대원군이 건청궁으로 향하던 바로 그 시각, 명성황후의 시신은 홑이불에 싸인 채 대궐 소나무 숲으로 옮겨져 석유가 뿌려진 가운데 초가을의 새벽 하늘로 한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대원군은 고종과 대면한 자리에서 대원군은 고종의 형이자 자신의 장남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옥호루에서 시해된 뒤 손자 영선군 이준용은 일본의 도움으로 석방됐다. 이준용의 석방 직후 흥선대원군은 즉시 강화군 교동도로 사람을 보내 을미사변의 실패에 대비해, 손자인 이준용에게 일본으로 도망가라고 했다. 그러나 이준용은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고 강화군 교동도에 머무르다가 한성부로 갔다.
명성황후의 암살은 바로 한성부에 체제하고 있던 프랑스와 청나라 공사관의 외교관 및 외교관 부인, 언론인들의 입을 통해 외국에 알려졌다.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 주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의심했다.
명성황후 살해 배후 의혹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암살되자 유길준은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유길준은 그가 명성황후를 평하기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민비(명성황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라고 진술하였다.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한편 유길준 역시 명성황후 살해 당시 협력한 조선인 중의 한사람이었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도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데 협력했다는 직접적 증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일본 측에서 대원군을 밤중에 강제로 끌어낸 점, 을미사변 이후에 대원군과 고종황제를 강제로 반유폐한 점 등으로 비춰 볼 때 일본 측의 명분쌓기에 이용되었으라 여겨지기도 한다.
말년
1895년말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을 정하여 유폐생활을 강요당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은퇴하여 다시 양주로 가서 은거하다가 1898년 1월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죽음을 본 후,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죽었다. 그의 장례식에 아들 고종은 불참하였다 한다. 사망 직후 '아소당' 뒤뜰에 묻혔으며, 묘호는 흥원(興園)이라 명명되었다. 만년에는 국태공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그가 죽자 한성부에서는 7일장을 했으나, 고종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순종 즉위 후 1907년 8월 26일 장례원경(掌禮院卿) 이중하(李重夏)가 그를 대원왕으로 추존할 것을 건의하였고,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이에 따라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이라고도 부른다.
사후
1898년 5월 16일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처음 묻혔다가 1908년 1월 30일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으로 이장되었다. 1907년 왕의 예로써 다시 장례하라는 명이 내려진 이후 흥원의 천봉은 융희(隆熙) 원년(1907년) 11월10일에 시작돼 융희 2년(1908년) 2월1일에 마무리됐다. 1966년 6월 16일 다시 경기도 남양주군으로 이장되었다.
평가와 비판
외모에 대해서는 '형형한 눈빛과 매섭고도 날카로운 하관'이라 한다.
긍정적 평가
헐버트(H.B Hulbert)는 자신의 저서 《대한제국멸망사》에서 흥선대원군을 이렇게 묘사했다.
헐버트에 의하면 '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백성들은 아무리 그를 미워하더라도 한편으로는 항상 그를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걸물이었던 것 같다.[9] 그는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해 나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작가 김동인은 역사소설《운현궁의 봄》에서 대원군은 지배계급의 횡포로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대원군이 강제추방의 위기에 놓인 민중들을 보면서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김동인은 대원군을 호랑이같은 사내대장부이면서도, 안동 김씨의 탄압을 피해 때를 기다리며 참고 견딜줄을 아는 속깊은 사람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대원군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그를 존경하는 기녀밖에는 없다고 보았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평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해서는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폐쇄정책'이라는 평가가 있고, 반면에 '그 당시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 곧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를 도굴한 사건, 두 차례의 외세 침공(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횡포와 문화재 약탈 등 서구열강의 위협 문제는 대원군으로 하여금 열강에 대해 경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에 따른 자구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는 또한 대원군이 중시했던 백성을 편안케 하고 조선을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게 하려는 국제적 공존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평가도 있으며, 이는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보낸 치서(致書)에서도 드러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비판, 부정적 평가
한편 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쇄국정책을 통해 개항과 개방을 막고 발전의 기회를 차단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쇄국정책을 통해 서구의 문물과 과학기술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고, 발전과 부흥의 계기를 막았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를 역행한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와 '왕권 강화 및 국권 융성을 꾀한 개혁가'라는 평가도 엇갈린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본에 줄기차고 거세게 저항했던 흥선대원군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식민사관의 유산이라는 반론이 있다. 또한 천주교인에 대한 대량학살과 동학 탄압, 서원 정리 과정에서의 유학자 탄압 역시 인권탄압과 종교탄압이라는 비판이 있다.
손자인 순종은 '태황제(고종)가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은 황제의 본생부로서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필했던 일을 떠맡았다. 구족을 돈목하게 하고 사색의 당파를 평등하게 기용하였으며, 요행의 문로를 막고 언론의 통로를 열며 침체된 사람들을 발탁하고 세도가들을 물리쳤다.'고 평가했다. 현재, 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병인박해의 피해를 입은 한국 천주교회, 안동 김씨, 여흥 민씨 가문 등 흥선대원군과 관련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므로 객관적인 평가는 어렵다.
쇄국정책에 대한 비판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金元鳳)은 그의 쇄국정책이 조선의 발전을 저해하였다고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격퇴시킨 병인양요(1868년)와 신미양요(1871년)는 그 나름대로 민족적, 국수주의적 견지에서 통쾌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세계 정세에서 살펴보면 민족의 장래를 그르치게 한 어리석은 짓이었다."라는 것이다.
월권행위, 독재에 대한 비판
역사가이자 유학자인 황현은 그의 월권행위와 독재를 지적, 비판했다. 황현에 의하면 '종전의 세도는 비록 한사람이 주관하고 있을지라도 아들과 조카, 인척들이 종종 한몫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섭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오직 실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내 대원군 때는 혼자 집권했기 때문에, 비록 음관 한 명이나 변방의 장수 한 사람이라도 대원군을 거치지 않고는 명령을 발령할 수가 없었다. 인사발령을 할 때는 언제나 그(대원군)가 미리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자리를 채운 뒤에 올리면 고종은 그것을 따라 낙점만 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선정비와 권력남용
대원군 집권시 전국 각지에는 대원군에게 감사하는 선정비도 세워졌다. 여러 고을의 불합리한 관행이나 해묵은 과제를 해결해주고,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선정비를 세웠다. 임용한에 의하면 '대원군 자신이 직접 세운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선정비 건립 자체가 불법이었고, 이를 대원군이 몰랐을 리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원군 개혁 정치의 핵심이자 목적인 불법적 관행을 제거하여 국가의 법체를 회복하는 것과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의 권력은 국왕의 아버지 라는 지위를 이용한 권력이었다. 그럼에도 대원군은 이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선정비를 통해 적극적으로 과시했다
임용한은 선정비와 척화비를 보면 독재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독재자로 변해갔다고 평가했다.
매천 황현은 그가 권력남용을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권력남용의 근거로 매천 황현은 대원군이 10년간 집정할 때의 위엄으로 '대원군분부'란 다섯 자가 곳곳에 퍼져 뇌정탕화(무서운 천중과 끓는 물과 달구워진 쇠붙이)같아 관리나 일반 색성들은 항상 관청의 법률에 저촉될까봐 노심초사했다. 이에 따라 대원군의 실각을 기뻐하며 축하하였다고 한다.
명성황후 암살 사주, 협력
명성황후의 암살을 사주, 협력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는 일본 공사관에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일본 공사관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명성황후가 반일성향으로 변신하자 명성황후 제거작업에 착수한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순(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유길준은 그가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명성황후가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하여 대원군의 개인적 욕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을미사변 당시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구미 국가 외교관들은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해 일본측의 책임을 추궁하면서도 이 사건의 주범이 대원군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대원군을 기피인물로 삼았다.
기타
민족주의 사가인 박은식은 "대원군은 그 지위가 군주와 같아 대권이 손안에 들고 모든 관료가 그 지휘를 따르면 만백성이 그 위세를 우러러보고 명령하고 행하고 금하면 그쳐 후세의 이윤이나 주공과 같이 될수도 있다"고 하였으며 "대원군이 섭정함에 주의 사정과 제반 조건이 중흥을 기대할수 있었으나 학식의 부족함이 애석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박은식은 그를 명성황후 살해의 동조자로 보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황현 역시 매천야록에서 그를 명성황후의 암살 협력자로 지목했고, 유길준 역시 그를 명성황후 살해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지목했다.
인재 채용에 있어서 폭넓게 지지세력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소극적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소설가 장덕조는 그가 '오랫동안 불우한 환경에서 염량세태의 무정함과, 인간의 배신을 뼈저리게 느껴온 대원군은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좁은 범위 안의 복심인물(復心人物)과 골육을 등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평하였다. 편협하고 용렬하다는 비판도 있다.
권력욕에 대한 비판
본심을 숨기고 안동 김씨 문중을 찾아가 굴욕을 자처한 뒤 권력을 획득한 점 등 권력욕의 화신으로도 평가된다.
쿠테타를 일으켜 아들 고종을 몰아내고 이재면을 추대하려 한 점, 1881년 8월의 이재선 역모 사건을 배후조종하여 이재선을 왕으로 앉히려다가 실패한 점,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제거하려 한 점, 일본 공사관에 찾아가 명성황후를 제거하는데 협력해줄 것을 계속 요청한 점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집권 후 사적인 보복을 한 것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원 철폐에 대한 평가
서원을 철폐하려고 7년여를 기다린 일에 대해서도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는 평가와 '완고하고 고루하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논란과 의혹
정치 테러 의혹
한편 대원군은 1874년 민승호 폭사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임오군란을 전후해 발생한 이 사건은 당대에 그가 하수인을 사주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876년 이준용 추대 음모에서 그 배후로 여겨지게 되나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그러나 1881년 이재선을 추대하려던 이재선의 역모 사건에는 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허욱, 권정호(權鼎鎬), 이두영(李斗榮) 등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의 사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친부이므로 흥선대원군은 처형하지 못했고, 대원군의 측근 안기영, 권정호와 이두영, 고종의 이복 형인 이재선을 처형하는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지어졌다.
1875년 11월 흥인군의 집에 원인을 알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다. 이것 역시 흥선대원군의 소행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개화파 암살 사주
1894년 대원군은 4회의 서신을 보내 개화파 암살 지령을 내렸다.
1894년 9월의 개화파 제거 계획은 비록 법무협판 김학우 한 사람을 암살하는 데 그쳤지만, 이 사건이 대원군파에 의해 자행되었으리라는 의혹이 강하게 일면서 조희연, 안경수, 김가진 등 개화당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공포를 느끼고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여 직무에 전념하지 못한 채 안경수, 김가진 같은 사람은 지방관으로 전임하기를 원하였다.
1895년 5월 23일 김학우 암살에 관여한 인사들 가운데 주동자였던 고종주, 전동석, 최형식은 특별법원에서 각각 모반죄와 모살죄로 교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으며, 하수인이었던 고치홍, 이여익, 서병규, 이영배, 김한영, 장덕현, 최형순 등은 모살죄로 종신유형을 선고받아 백령도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처럼 대원군파는 정국을 바꾸기 위해 김홍집, 김가진, 김학우, 이완용, 안경수, 유길준, 박정양 등 개화파의 중심 인물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김학우만을 암살하는 데 그쳐 성공하지 못하였다. 개화파 제거 계획은 대원군의 지휘하에 고종주, 김국선 등이 담당하였다.
개인적 정치 보복
파락호 시절 그가 가난한 종친으로서 안동 김씨 일문에 신세를 지러 드나들 때 심의면 등은 궁도령이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그는 이 모욕을 잊지 않고 있다가 1863년 섭정이 된 뒤 심의면 등을 처단하는 것으로 복수했다.
김병기에게는 고의로 바보행세를 했으나 김병기는 그를 의심했다. 섭정이 된 뒤 김병기의 연회에 방문, 국수를 먹더니 탈이 난 것처럼 연극을 했다. 김병기에게 독살을 기도했느냐는 눈총이 가해지자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대원군이 토한 음식을 맛보았다. 쓰러지는 시늉을 하던 대원군은 바로 일어나 장난이라 하며 되돌아갔다.
송시열을 모시는 화양동 서원에 놀러 갔다가 서원지기와 시비를 벌였다. 의관도 정제하지 않고 서원내에서 부채질을 하자 서원지기들은 그를 발로 그를 차서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다. 대원군은 이 수모를 기억했다가 권력을 잡자 화양동 서원의 서원지기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동학농민운동 배후 사주
한편 그가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1894년 2월 21일자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보낸 비밀 정보에 따르면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등이다."라는 것이다.
가족 관계
계보 : 조선 왕실 흥선대원군의 4대조 운현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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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 제16대 인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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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소현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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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제17대 효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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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 인평대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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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 제18대 현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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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 복녕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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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 제19대 숙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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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 의원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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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 제20대 경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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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 제21대 영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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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훤 연령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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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 안흥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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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 진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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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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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 낙천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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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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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제22대 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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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은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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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은신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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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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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 제23대 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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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 전계대원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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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 남연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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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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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 제25대 철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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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응 흥녕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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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완림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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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용 자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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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 의친왕의 7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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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제24대 헌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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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응 흥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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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완 완순군·후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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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용 자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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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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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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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최응 흥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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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긍 완영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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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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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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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백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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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 흥선대원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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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면 흥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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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용 영선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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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의친왕의 2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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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 장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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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 민씨 여흥부대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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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홍씨 정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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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홍씨 정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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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주 박영효의 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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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 차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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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이씨 계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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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김씨 계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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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혁 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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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완 서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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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선 윤치소의 3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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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용 차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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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장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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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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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차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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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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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씨 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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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삼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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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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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 제26대 고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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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척 제27대 순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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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 민씨 명성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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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 민씨 순명효황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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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 윤씨 순정효황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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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엄씨 순헌황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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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 영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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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장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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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코 영친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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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 차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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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 의친왕 9남의 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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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멀록 1982년 이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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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이씨 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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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완친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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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 장씨 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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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 의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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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의친왕의 1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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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 장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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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김씨 의친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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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코 1951년 이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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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차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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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자 장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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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양씨 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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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혜 덕혜옹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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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마사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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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다케유키 백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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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장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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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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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삼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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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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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월 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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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선 완은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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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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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차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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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용 남작 | |||||||||||||||||||||||||||||||||||||||||||||
- 양 조부 : 은신군(恩信君, 1755년 - 1771년)
- 양 조모 : 남양홍씨, 홍대현의 딸, 홍대용의 종질녀
- 생 조부 : 이병원(李秉源, 진사, 사후 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 인평대군의 5대손이)
- 아버지: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년 - 1836년)
- 어머니: 군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 ?년 - 1831년)
- 형 :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 1809년 - 1828년)
- 형 :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 1815년 - 1848년)
- 형 : 흥인군 이최응(興寅君 李最應, 1815년 - 1882년)
- 아내 : 여흥순목대원왕비 민씨(驪興順穆大院王妃 閔氏, 1818년 - 1898년 1월)
- 아들(적장자) :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완흥군(完興君), 1845년 - 1912년)
- 맏며느리 : 풍산 홍씨(豊山 洪氏, 1844년 ~ 1887년 12월), 통덕랑(通德郞) 풍산인(豊山人) 홍병주(洪秉周)의 딸.
- 며느리 : 여주 이씨(驪州 李氏, 1884년 ~ 1978년), 참봉(參奉) 여주인(驪州人) 이인구(李麟九)의 딸.
- 손녀 : 이씨, 주사(主事) 김규정(金奎定)에게 출가.
- 아들 : 고종(이재황(李載晃), 1852년 - 1919년 1월 21일)
- 장녀 : 이씨(李氏, ? - 1869년)
- 맏사위 : 조경호(趙慶鎬 1839년 ~ 1914년, 한양인
- 외손 : 조한국(趙漢國, 참판역임)
- 차녀 : 이씨(李氏, ? ~ 1899년)
- 사위 : 조정구(趙鼎九, 1862년 ~ 1926년), 풍양인
- 외손자 : 조남승(趙南升)
- 외손자 : 조남익(趙南益 ? ~ 1924년)
- 외손녀 : 조계진(趙季珍 1897년 ~ 1996년)
- 소실 : 계성월
- 서장자 : 완은군 이재선(完恩君 李載先, ?년 ~ 1881년 10월 27일)
- 서자부 : 군부인 신씨(郡夫人 申氏, 1844년 8월 11일 ~ ?)
- 서손 : 이관용
- 서손 : 이름 미상
- 서녀 : 이씨(李氏, ? ~ 1869년)
- 서녀 사위 : 이윤용, 이호준의 서자, 이완용의 이복 형
- 외손자 : 이명구(李明九)
- 소실 : 추선(秋善, 기생 출신 소실, ? ~ 1885년)
- 소실 : 서씨(徐氏, ? ~ 1914년 1월)
- 소실 : 진채선 (陳彩仙, 1842년 ~ ?, 조선 최초의 여성 명창, 경복궁 중건 축하 낙성연에서 처음 만나 애첩이 되었지만 흥선대원군 몰락 후, 곁을 떠나 어디서 죽었는지 확실치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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