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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4 : 조선의 역사 396 (제26대 고종실록 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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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4 : 조선의 역사 396 (제26대 고종실록 19)

두바퀴인생 2013. 2. 8. 09:27

 

 

 

한국의 역사 854 : 조선의 역사 396 (제26대 고종실록 19)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2. 고종의 가족들 

 가족 관계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영친왕, 덕혜옹주와 함께한 가족사진

  • 부 : 문조익황제 효명세자
  • 모 : 신정익황후 조씨
  • 사친 부 : 헌의대원왕 이하응(獻懿大院王 李昰應)
  • 사친 모 : 순목대원비 민씨(純穆大院妃 閔氏)
  • 황후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1895년)
    • 왕자 (조졸) : 4일만에 사망(1871년)
    • 공주 (조졸) : 222일만에 사망(1873년)
    • 순종효황제 이척 (純宗孝皇帝 李拓)(1874년~1926년)
    • 왕자 (조졸) : 14일만에 사망(1875년)
    • 왕자 (조졸) : 105일만에 사망(1878년)
  • 후비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1854년~1911년)
    • 의민황태자 은(懿愍皇太子 垠;1897년~1970년)
  • 후궁 : 영보당귀인 이씨(永寶堂貴人 李氏):이순아(李順娥;1843년~1914년)
    • 완친왕 선(完親王 墡)(1868년~1880년)
    • 옹주 (조졸) : 1871년~1872년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 의친왕 강 (義親王 堈)(1877년~1955년)
  • 후궁 : 광화당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이완흥(李完興;1887년~1970년)
    • 황자 육(皇子 堉)(1914년~1915년)
  • 후궁 : 보현당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1882년~1943년)
    • 황자 우(皇子 堣)(1915년~1916년)
  • 후궁 : 복녕당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1882년~1929년)
    • 덕혜옹주(德惠翁主)(1912년~1989년)
  • 후궁 : 내안당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1847년~1914년)
    • 옹주 (조졸) : 1879년~1880년
  • 후궁 : 삼축당상궁 김씨(尚宮 三祝堂尚宮 金氏):김옥기(金玉基;1890년~1972년)
  • 후궁 : 정화당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 후궁 : 궁인 서씨(宮人 徐氏)
  •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
  • 후궁 : 궁인 장씨(宮人 張氏)
  • 양숙부 : 철종장황제
  • 양숙모 : 철인장황후
  • 양형 : 헌종성황제
  • 양형수 : 효현성황후 김씨
  • 양형수 : 효정성황후 홍씨

 

 

 

 

명성황후 민씨(1851~1895년)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이다. 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되어 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순전히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들의 득세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하여 정권이 장악된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60년간의 세도정치의 폐단 대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부인 민씨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한 여자였기에 왕비에 오른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왕실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민비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정적 관계에 놓였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민씨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왕비 민씨가 아직 자녀를 낳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먼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인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애하면서 불안한 왕권을 공고히 해야 한다면서 그를 세자로 책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하고 있었다.

 

대원군과 사이가 악화된 이후 그녀는 끓임없이 그를 정계에서 밀어내려 하였고,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 안동 김씨 세력과 대원군의 권력 독점을 염려한 조대비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의 장자 재면의 세력 및 최익현 등의 유림 세력과 결탁하여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이끌어낸다. 1873년 이 상소를 계기로 섭정의 명분을 상실한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된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그녀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는 등 일련의 개화시책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위협을 받게 된다.

 

1882년 민씨 세력의 개화정책과 민씨 척족들의 부패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구식 군대가 봉량미 문제로 임오군란을 일으켜 궁궐에 난입하여 민씨 척족들을 살해하고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마침 궁궐로 들어온 흥선대원군 부인 민씨의 가마를 타고 재빨리 궁궐을 탈출하여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하여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녀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국군은 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끌고 감으로서 위기를 넘기게 된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김옥균을 포함한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때에도 민비는 청국군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이때부터 그녀는 외교에 눈을 뜨고 매우 민첩한 외교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1885년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 수습을 협상하는 한편 러시아아도 접촉하였고,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 등 유연성 있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1894년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에 빠지자,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자신들의 정략 추진에 방해가 되는 그녀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친러정책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이때는 이미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친러정책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에서 밀려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민씨를 포함한 친러 세력을 제거하게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그녀를 시해했는데, 1895년 일본 군인과 정치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 그것이다. 민비를 시해한 일본인들은 그녀의 시체를 불사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비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해 10월 10일 그녀는 다시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고 국장에 의해 숙릉에 안장되엇다. 그리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책되고,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로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에 남양주시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녀 소생으로 순종이 유일하다. 순종 이외에도 3남 1녀를 더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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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민씨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이다. 경기도 여주군 출신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둘째 아들마저 연이어 잃는 등 수난을 겪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척족을 기용하여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의 견제를 위해 청의 세력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초기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다가,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식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

 

 

생애

 

출생과 가계

감고당

 

명성태황후 민씨는 1851년 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1)에서 민유중의 6대손으로 사도시 첨정이었던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아영이었다.

 

아버지 민치록의 전부인 오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한산 이씨에게는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민유중의 아들 민진후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 민기현예조참판과 개성부유수를 지냈으나 아버지 민치록은 정3품 사도사첨정에 이르렀고 만년에 낙향하여 여주에서 선영을 돌보며 소일하고 있었다. 뒤에 대를 잇기 위해 위해 11촌 아저씨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였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그녀의 5대 대고모뻘로, 5대조 민진원의 누이였다. 생가 감고당은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해 지은 묘막집으로 이후 민유중의 종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민치록은 문음으로 출사하기에 앞서 감고당에 거주하며 민유중의 묘를 지키는 일을 하였다.

 

숙종인현왕후의 친정이라 하였으나 그녀의 가계는 가난하였고, 여주군의 산골 민유중의 묘소 근처에서 생활하였다. 그녀의 생가 근처 200m 지점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임원준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유년기

명성왕후는 어려서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小學)·《효경》(孝經)·《여훈》(女訓)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 오늘날 그녀의 공부방 자리에는 민비 탄강 구리비(생가 입구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김동인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도 명성왕후는 부친 민치록이 으로 자리에 누웠을때에 간호를 한 효녀로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이름은 영조가 하사했다. 형제도 없고 고아인 데다가 의지할 오라비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흥선대원군

 

 

간택

명성황후가 간택되어 왕후가 되는 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 가례도감의궤》(同治五年丙寅三月嘉禮都監儀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우선 1866년 음력 1월 1일 대왕대비 조씨가 조선에 있는 12세 ~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다. 그리고 음력 2월 25일 초간택을 행하였고,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더불어 재간택에 들어갔다. 3월 6일에는 삼간택에 뽑혀 왕비로 정해졌으며, 3월 21일 남편이 될 고종이 운현궁에서 명성황후를 데리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親迎)을 거행했다. 아버지 민치록은 왕의 장인에게 추증하는 예에 따라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해주 오씨는 해령부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생모 감고당 한산 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한편 흥선대원군고종이 즉위하기 전 안동 김씨 김병학의 딸, 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의 배필을 정하기로 비밀 묵계를 체결했으나, 약속을 뒤집게 되면서 김병학 등 대원군을 지지했던 일부 안동 김씨 세력이 등을 돌리게 된다. 왕비는 그 점을 간파, 후에 흥선대원군을 축출할 때 안동 김씨 세력과도 손잡게 된다.

 

 

왕비 시절

 

입궐, 흥선대원군과의 대립

 

남편 고종

 

 

그러나 명성황후가 입궁할 무렵,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에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그러다 1868년 4월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또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 선과 그를 낳은 귀인 이씨를 총애하였는데 이 점 역시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었다.

 

명성황후는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민승호 등 일가 친척,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의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기, 고종의 형인 흥인군 이재면(李載冕),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 등과 제휴했다. 이처럼 세력을 다지던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총애를 받아 1871년 왕자를 낳았으나 항문 폐색으로 인해 5일 만에 죽고 말았다. 왕자의 죽음을 두고 민씨는 흥선대원군이 왕자에게 산삼을 많이 주었기 때문이라고 의심하였으며, 두 사람 간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 무렵 세 살 된 완화군이 갑자기 죽자, 명성황후는 완화군의 생모 귀인 이씨를 궁궐에서 쫓아냈다. 흥선대원군이 귀인 이씨의 아들 완화군을 총애하던 것과 달리 자신이 낳은 아들들에게는 무관심과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점 역시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됐다.

 

 

고종의 친정 유도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집권에 공을 세웠음에도 축출당했던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와도 손을 잡았고,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그의 형 흥인군과도 손을 잡았다. 또한 서원 철폐 과정에서 척을 지게 된 유학자 세력과도 교류하여 최익현 등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최익현은 1873년 10월 임금이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익현의 뒤를 후원하였고 최익현은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으로 승진하였으며,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다. 대원군에게 무시당하던 종실 일부를 포섭하였고,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남인북인을 채용하자 여기에 반발한 노론계 세력 역시 포섭에 성공하였다.

 

이어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다시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으며,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흥선 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1873년 11월 고종과의 논의 끝에 운현궁에서 궁궐로 출입하는 대원군의 전용 문을 폐쇄하였다. 이로써 대원군의 11년 섭정은 종결되었다. 대원군은 양주 시둔면 곧은골(直谷)로 물러났으나, 은퇴 이후에도 대원군은 수시로 복귀를 꿈꾸었고 명성황후 및 민씨 일족과 수시로 갈등하였다.

 

 

흥선대원군 퇴진과 권력 투쟁

1873년에는 최익현으로 하여금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리도록 했다. 22세로 성인이 된 국왕을 두고 섭정의 명분이 없었던 대원군은 결국 정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1874년 2월에는 둘째 아들 척(坧)을 낳았으며, 이듬해 2월 척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흥선대원군 계열은 최익현을 암살하려 했고, 왕비는 배후에서 최익현을 일시적으로 유배보낸 뒤 다시 등용하여 승진시킨다.

 

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배제한 명성황후는 일가 친척과 개화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대외적으로도 쇄국을 버리고 1876년 일본과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자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화파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길준에 의하면 그녀가 개화파를 제거하려는 모의를 꾸미다가 시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74년 폭탄 테러로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어머니 등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슬퍼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복수를 노린다는 소문도 돌았으며 쇄국 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 등을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보냈다. 1882년 2월에는 친척 민태호(民台鎬)의 딸 민씨를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이에 긴장한 명성황후는 민씨 세력을 등용하여 보호 세력을 양성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노론 계열이지만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고,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함과 동시에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보냈다. 한편 흥선대원군 계열에서는 끊임없이 정계 복귀 시도를 했고, 1881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완은군)이 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되었던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삼아 유생들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탄핵하려 하지만 사전 발각되어 미수로 그친다

 

 

임오군란과 대원군의 정변 시도

1882년 6월 흥선대원군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임오군란 때 병사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왕비를 찾아내지 못했다. 허욱 등이 경복궁에 들이닥치기 전에 명성황후는 변복을 하고 홍계훈의 등에 업혀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하였다. 이때 명성황후는 홍계훈의 누이 행세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6월 10일 난병들이 대궐을 침입했는데 명성황후는 밖으로 도망가고,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살해되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하면서 흥선대원군을 쳐다보며,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말하였다.

 

 그는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밑에서 그를 죽이고 총칼로 시체를 난도질했다. 또 "중궁은 어디 있느냐"며 소리쳐 언사가 좋지 않았고, 처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

 

이때 대원군의 부대부인도 입궐했는데, 그녀는 명성황후를 본인이 타고 온 사인교에 숨겨놓고 나왔다는데 마침 이를 본 어떤 궁인이 난병들에게 밀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난병은 사인교의 포장을 찢어 땅에 팽개쳤다. 그때 무예별감 홍재희(홍계훈의 오타이다.)가 '그 여인은 상궁으로 있는 내 누이다. 그대들은 오인하지 말라'고 소리친 뒤에 등에 업고 궁궐을 빠져나왔다.

 

이 와중에 흥인군 이최응(李最應)과 민겸호가 군인들에게 살해당했고, 명성황후는 대전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長湖院)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한편 한양에서는 정권을 위임받은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찾아내지 못하자 "황후가 죽었다"고 발표하고 국상 절차를 밟았다.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재정과 병권을 맏아들 이재면에게 위임하고, 청나라 천진(天津)에 가 있었던 김윤식에게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청나라 군대의 개입요청과 임오민병 진압

 

김옥균

 

 

그 뒤 개화를 위해서 고종을 움직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게 하고, 대원군이 부활시켰던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전래되면서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을 접한 그녀는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비밀리에 호출하여 밀명을 내려, 청나라에 한·미수교를 주선, 후원해 줄 것을 부탁했고, 동시에 사람을 보내 개화승려 이동인(李東仁)을 불러들인 뒤 그에게 밀명을 내린 뒤 일본에 파견,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조미수교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한편, 명성황후에 의해 기용되었던 개화파 김홍집이 1881년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전했는데, 이 책의 내용을 문제삼은 유생들이 1881년 2월 척사(斥邪) 상소 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하기 위하여 역모를 계획했다. 그 해 8월에는 대원군의 주변 세력인 안기영, 권정호 등이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李載先)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고종 폐위를 위한 역모를 전개했으나, 사전에 고변으로 발각되어 이재선, 안기영 등 주동자들이 사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882년에는 별기군과 구식군 간의 처우 차별과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어 있었던 군대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다.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의 지휘를 받아 명성황후를 지지하던 인사들을 습격하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다.

 

청이 4,500명의 군대를 파병하자, 일본 측에서는 도주해 있었던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 義質)가 "일본인 보호"를 구실로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일본군은 협상을 요청하는 대원군을 무시한 채 한양으로 들어왔다가,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대원군의 표명으로 일단 인천으로 후퇴했다. 청의 제독 오장경(吳長慶)은 7월 일본군이 퇴각한 틈을 타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했고, 그날 밤 한성을 장악했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도 청군의 보호 하에 입궁했다. 이 사건 이후 명성황후는 친청 정책을 펼쳐 급진 개화파 등을 정권에서 점차 배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