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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0 : 조선의 역사 392 (제26대 고종실록 15) 본문
한국의 역사 850 : 조선의 역사 392 (제26대 고종실록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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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2. 고종의 가족들
고종은 명성왕후 민씨를 포함하여 7명의 부인에게서 6남 1녀를 얻었는데, 명성왕후 민씨가 왕자 척(순종)을 낳았으며, 귀비 엄씨가 영왕을, 귀인 이씨가 완화군 등 2남을, 귀인 장씨가 의왕을, 귀인 정씨가 1남, 귀인 양씨가 덕혜옹주를 낳았다.
이들 중 명성왕후와 영왕, 의왕의 삶을 약술하고 참고로 흥선대원군의 약력을 함께 덧붙인다.
가족 관계
- 부 : 문조익황제 효명세자
- 모 : 신정익황후 조씨
- 사친 부 : 헌의대원왕 이하응(獻懿大院王 李昰應)
- 사친 모 : 순목대원비 민씨(純穆大院妃 閔氏)
- 황후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1895년)
- 왕자 (조졸) : 4일만에 사망(1871년)
- 공주 (조졸) : 222일만에 사망(1873년)
- 순종효황제 이척 (純宗孝皇帝 李拓)(1874년~1926년)
- 왕자 (조졸) : 14일만에 사망(1875년)
- 왕자 (조졸) : 105일만에 사망(1878년)
- 후비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1854년~1911년)
- 의민황태자 은(懿愍皇太子 垠;1897년~1970년)
- 후궁 : 영보당귀인 이씨(永寶堂貴人 李氏):이순아(李順娥;1843년~1914년)
- 완친왕 선(完親王 墡)(1868년~1880년)
- 옹주 (조졸) : 1871년~1872년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 의친왕 강 (義親王 堈)(1877년~1955년)
- 후궁 : 광화당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이완흥(李完興;1887년~1970년)
- 황자 육(皇子 堉)(1914년~1915년)
- 후궁 : 보현당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1882년~1943년)
- 황자 우(皇子 堣)(1915년~1916년)
- 후궁 : 복녕당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1882년~1929년)
- 덕혜옹주(德惠翁主)(1912년~1989년)
- 후궁 : 내안당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1847년~1914년)
- 옹주 (조졸) : 1879년~1880년
- 후궁 : 삼축당상궁 김씨(尚宮 三祝堂尚宮 金氏):김옥기(金玉基;1890년~1972년)
- 후궁 : 정화당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 후궁 : 궁인 서씨(宮人 徐氏)
-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
- 후궁 : 궁인 장씨(宮人 張氏)
- 양숙부 : 철종장황제
- 양숙모 : 철인장황후
- 양형 : 헌종성황제
- 양형수 : 효현성황후 김씨
- 양형수 : 효정성황후 홍씨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년)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의 넷재 아들이다. 남연군이 어릴 때 사도세자의 둘재 아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촌수로 따지면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현손이 되는 셈이다. 그의 이름은 이하응이며, 자는 시백, 호는 석파였다. 12세에 어머니를 잃고 17세에 다시 아버지를 여윈 뒤 사고무친의 상태에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1세가 되던 1841년 흥선정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으며, 1864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철종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며 왕실과 종친에 대한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하였으므로, 호신책으로 천하장안이라고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인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규 등과 어울려 파락호 생활을 하였다. 또 이때 그는 안동 김씨 가문을 찿아다니면서 구걸도 서슴치 않았기에 '궁도령'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시정잡배와 어울려 지내는 호신생활을 통하여 서민 생활을 체험하였으며, 민간의 바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던 흥선군은 1863년 12월 자신의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고 자신 또한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져 신정왕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서원 정리, 무명잡세 폐지, 법전 편찬, 비변사 폐지 등을 시행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력에 눌려 왕권을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추진하였다.
그의 이러한 혁신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조금씩 제 모습을 찿아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경북궁의 무리한 중건과 지나친 쇄국정책으로 인한 천주교 박해 등으로 말미암아 안팎의 어려움이 초래되기도 했다.
그는 1873년 11월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해 대권에서 손을 떼야 했다. 그는 외척 세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영락한 향반 여흥 민씨 가문에 왕비를 간택했지만, 오히려 그녀에 의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고종은 그 당시 이미 22세의 성년으로 친정을 원하고 있었고, 왕비 민씨는 대원군 축출 작업을 추진하여 마침내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이끌어내게 한다. 그 결과 1873년 11월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 출입문이 사전 양해 없이 왕명으로 폐쇄되었고, 대원군은 하야하여 양주 곧은골에 은거하였다. 하지만 타의에 의해 축출된 그는 이때부터 왕비에 대한 악감정이 생겨 끓임없이 정계 복귀를 꾀하게 된다.
1881년 <조선책략> 반포를 계기로 민씨 일파의 개화정책을 비난하는 전국 유림의 척사 상소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자, 대원군 계파인 안기영은 고종의 이복형 이재선을 옹립하여 민씨 척족 정권을 타도하려는 국왕 폐립 음모를 꾸몄다. 대원군은 재집정을 위해 이 계획에 가담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오히려 척사상소운동을 탄압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고, 대원군 자신의 입지도 더욱 위축된다.
그러나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봉량미 문제로 일어난 '임오군란' 때 난병들에 의해 정국 개입을 요청받고 또 사태 수습을 위해 고종의 왕명으로 재집권하게 된다. 이때 그는 명성황후의 사망한 것으로 간주하여 왕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다시 정국을 주도하려 했지만, 당시 난병들이 궁궐에 난입하자 목숨의 위혐을 느낀 명성황후는 혼란함 틈을 이용하여 궁궐에서 도망쳐 나와 여주로 피신하였다. 또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긴급 사태수습을 요청하여 원세개가 이끄는 청국군이 사태에 개입함으로서 사태는 반전되어 청군에 의해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연행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청에 연행되어 3년 동안 중국 바오딩에서 유수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885년 2월 조선통상사무 전권위원으로 부임하는 원세개와 함께 귀국한 후 여전히 정계 복귀를 노리다가 1886년 민씨 정권이 조러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원세개와 결탁하여 이재면의 아들 이준용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 세력과도 연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실현되지 못하였고, 뒤이어 발발한 청일전쟁 이후 온건 개혁파가 갑오개혁을 추진할 때 잠시 영입되어 군국기무를 총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이 바라는 것과 달리 그가 자신의 소신대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자 은퇴를 강요당하였고, 김홍집 내각에 의해 경장 사업 추진이 진행된다.
이후에도 그의 정계 복귀 노력이 계속되자 그의 행동을 제약하는 '대원군존봉의절'이 제정되어 사림들과 접촉을 제한받았을 뿐 아니라외국 사신들과의 만남도 정부의 관헌 입회하에 가능하게 되었다.
을미사변 때 일본의 요청에 따라 입궁하여 왕비 민씨가 죽은 후 일시적으로 재집권하였으나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감에 따라 다시 실각하여 곧은골로 내려가야 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898년 79세를 일기로 운현궁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뒤 부대부인 민씨와 함께 공덕리에 안장되었다. 1907년 대원왕에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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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백과사전에 나오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자세한 자료이다. 참고하시길......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1일) ~ 1898년 음력 2월 2일(양력 2월 22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의 황족, 추존왕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고종 황제(高宗皇帝)의 친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다. 직접 며느리 명성황후를 간택하였으나, 도리어 명성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된다. 1873년 11월 명성황후와 유학자 및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이후 명성황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일본인과 결탁하여 며느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유길준에 따르면 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흥친왕, 이재선 등을 조선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을미사변의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쇄국정책과 천주교도 대량 학살, 학우조비선의 실패, 무리한 경복궁 중건 과정, 일본에 명성황후의 제거를 청탁한 점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성 출신으로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고,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4]
생애
출생과 소년기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1일) 한성 종로방 안국동(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남연군은 본래 인조의 넷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 이병원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후사가 없이 사망한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어 남연군의 작위를 받았다.
8세에 맏형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의 사망에 이어 12세에 어머니 군부인 여흥 민씨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아버지 남연군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인척인 인연으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수학하기도 했다. 17세 때에는 아버지 남연군을 여의었다. 일찍 고아가 되었으나 13세에 외가의 먼 일족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결혼하였다. 부인에게서는 딸 1명과 장남 흥친왕 이재면, 차남 명복(고종으로 즉위)이 태어난다. 그밖에 소실 계성월에게서는 이재선과 서녀로 우봉 이씨 이윤용에게 출가한 딸 1명을 더 얻는다.
그밖에 기녀 출신으로 오래 그를 시중든 추선(1885년 사망)과 평민 출신으로 서씨 성을 가진 양인 첩이 더 있었다.
청년기
1841년 (헌종 7년) 흥선정(興宣正)에 봉작되었다가 흥선도정(興宣都正)을 거쳐 1843년(헌종 9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후 도감(都監)에 참여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으며, 비변사 당상을 거쳐 1847년(헌종 13년)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었다.
1847년 종친부(宗親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직책인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재직할 때, 선파인(璿派人·전주 이씨 중에서 왕실에서 갈려 나온 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신역 면제를 관장하는 등 종친부의 권한 확대를 추진하였다. 종친부의 권한확대를 위해 흥선군은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 세력과 정치적 거래를 시도하였다. 종친부 유사당상 재직 중 그는 왕실의 족보 편찬을 종친부에서 간행할수 있도록 추진하였다.
청년기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흥선군은 난과 그림을 그려 양반가에 매각하며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난을 잘 치기로 유명하였으나 석파란으로 알려진 난초화를 계속 그리자 그의 난초값은 하락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다른사람을 고용해 난을 그린 뒤 자신의 낙관을 찍는다는 소문도 유포되기도 했다. 심의면 등은 흥선군을 궁도령이라 부르며 조롱하였는데, 이 일로 고종 즉위후 불이익이 가해졌다. 이때 그를 보필하던 인물은 김병학과 김병국 형제로 이들은 안동김씨이지만 대원군 집정 후 불이익을 면하게 되었다.
이후 사복시 제조,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1853년(철종 4년)에는 궁궐에 무상으로 출입하지 않는다 하여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왕족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고, 청년기의 이하응은 세도정치하에서 그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고의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으며 생활했다. 투전에 가담하기도 했고 세도 가문의 잔칫집을 찾아다니며 걸식도 서슴지 않았다. 소설가 김동인은 《운현궁의 봄》에서 당시 흥선대원군의 모습에 대해 겉모습은 술에 취해서 사는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대장부로서의 기개가 있었다고 묘사했다. 그는 식은 전조각에다가 침을 뱉어 내던지면 그것을 얼른 주워 도포 자락에 닦아 크게 웃으며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모욕까지도 감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풍수지리를 굳게 믿어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기고 때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파락호가 되어 찌그러진 갓을 쓰고, 시장터나 돌아다니며 민중과 어울려 살지는 않았다. 단지 인간관계가 넓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쌀장수 이천일과의 우정
안동김씨의 왕족 숙청을 피해 건달행세를 해야 했던 비참한 시절인 파락호 시절에 흥선군은 춥고 배고팠다. 심지어는 홍종의 집의에게 음식을 얻으러 갔다가 훨씬 신분이 낮은 하인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뛰어난 통찰력으로 건달행세속에 가려진 정치적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쌀장수 이천일은 다친 흥선군을 치료해주었고, 대원군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이천일은 흥선대원군에게 “대감은 어찌해서 누한 곳에 행차를 하셨습니까”하고 물었고, 대원군은 “다른 이유가 없고 몇 년 전부터 내가 그대의 은혜를 입어 왔으나 지금 세모를 당하니 추운 걸기(乞氣)에 살아갈 길이 막연하여 염치불구하고 찾아왔네”하고 대답했다. 이천일은“형편이 그러시다면 물건 보내라는 패지(牌紙 쪽지) 한 장이면 족하실텐데 대감께서 예까지 친림하셨습니까. 송구할 따름입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내일 아침 일찍 조처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황송해 했다. 대원군은 집에 돌아왔으나 저녁을 굶은 터라 추위가 더욱 혹독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이천일은 약속대로 이튿날 아침 일찍이 물자를 보내왔다. 흥선군이 조반 후에 서강의 이천일에게서 보내온 목록을 보니 쌀 20섬, 돈 천꾸러미, 장작나무 50바리, 정육 100근, 서초(西草, 평안도에서 나는 담배) 30근이나 되었다. 이를 받은 흥선군은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라고 생각하면서 ‘만약에 하늘이 도와 내가 집권자가 된다면 제일 먼저 그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하였다.
이천일의 은혜를 갚다
흥선군이 국태공이 되었고,1863년 12월 8일 철종이 갑자기 승하하시니 운현궁에 왕기가 서렸다. 아들 고종 임금이 되고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뜬 것이다. 즉 막중한 실세가 된 것이다. 즉위식 날 대원군이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서강의 쌀장수 이천일을 특별히 부르니 천일이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날듯이 달려와 운현궁으로 들어섰다. 대원군이 친히 손을 잡고 인도해 갔으니 천일은 떨리고 황공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몸을 굽히고 있었다. 그 두터운 은혜를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 때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이 남편에게 잘해준 이천일이 온 것을 알고 궁중의 잔칫상을 내어오게 하니 천일은 손이 떨려 진수성찬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이에 대원군이 친히 천일의 손을 잡아 상에 앉게 한 뒤 큰 은반에 홍로주(紅露酒)를 가득 부어주니 천일에게 그렇게 큰 영광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천일은 대원군 집정후 선혜청 고직(庫直)에 임명되었다.
이장렴을 자기 사람으로 얻다
흥선군(이하응)이 기녀 춘홍의 집 드나들던 어느날 금군병장 이장렴과 시비가 붙어졌다. 이장렴이 뺨을 때리면서 한 나라의 종친이 창가(娼家)의 그러니까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천한 창기에게 외상술이나 먹어서 되겠느냐 하며 호통을 외쳤다. 후일 대원군이 된 이하응(흥선군)은 이장렴을 이 운현궁으로 불러 "그대는 아직도 내 뺨을 때릴 수 있겠느냐?"하고 묻자 이장렴은 당당하게 "대원위 대감께서 기녀의 집에 드나드실 때처럼 행동하신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며 술상을 차리게 했다. 한편 도정궁 이하전이 사사된 뒤 그의 소행으로 알고 운현궁에 자객으로 침투했던 이상지 역시 그를 돕게 된다.
집권 직전
관료 생활
이후 사복시 제조,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흥선군은 난과 그림을 그려 양반가에 매각하기도 하였다. 난을 잘 치기로 유명하였으나 석파란으로 알려진 난초화를 계속 그리자 그의 난초값은 하락했다. 흥선군의 집은 뒤에 덕성여대가 들어선 곳 근처의 큰 기와집이었다. 따라서 그의 가계는 어느정도 부유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가 전 국민의 0.1% 안에 드는 부자였음을 증명한다는 시각까지도 있다. 충청도 화양동의 만동묘에 갔을 때는 그를 따라온 사람들이 그를 부액(부축)하려 하자 화양동 서원의 한 유사가 그것을 말리며 나무라기도 하였다.
한편 대원군은 이호준과도 교분을 쌓게 되었다. 이호준은 첩에게만 아들 이윤용이 있었고 정실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완용을 양자로 맞이하였다. 흥선군은 이들 형제를 신임하여 이윤용에게 자신의 첩이 낳은 서녀를 시집보내 사위로 삼았다. 훗날 이완용·이윤용 형제는 친일파가 되는데, 그 빌미를 흥선군이 만들어준 셈이었다. 흥선군은 이호준을 통해 조성하와 그의 사촌동생 조영하와도 접촉하였는데, 조성하와 조영하는 이하전이 사사된 후 왕위계승감을 찾지 못하던 조대비에게 그를 소개하고, 흥선군은 그들을 통해 종친이라는 명분으로 조대비에게 접근하게 된다.
그는 숨은 능력을 감추기는 커녕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비록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그는 왕족에게 주는 관직을 계속 맡았다. 왕족이 맡는 관직 중에서 유일하게 실무가 있는 관청이 왕족들의 문제를 처리하는 종친부인데, 대원군은 1847년부터 계속해서 종친부의 유사당상을 지냈다.
세력 포섭
철종이 언제 사망할까 불확실하므로 흥선군은 궁중의 환관과 궁녀를 포섭해서 정보를 알아냈고, 조대비에게 접근해서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주겠다고 약속하여 동맹을 형성했다. 사돈인 이호준을 통해 조성하, 조영하와도 가깝게 지냈다.
흥선군은 안동 김씨 가문에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안동 김씨 문중에 반감을 가졌으면서도 일부 안동 김씨 인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안동 김씨 문중에서 흥선군과 줄이 닿은 사람은 김병학(金炳學)과 김병국(金炳國) 집안이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김병학은 자기 딸을 고종의 비로 삼기로 흥선군과 밀약을 맺었다고도 한다.
철종이 후사없이 시름 시름 앓게 되면서 후사 논의가 진행됐고, 그 중 김홍근은 흥선군을 추대하자는 주장도 했다. 흥선군이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계산에서였으나, 그의 파락호 행실과 그의 나이 등 여러가지 조건에 걸려 반대에 부딛쳐 묵살당하였다.
김병기(金炳冀)는 그에게 야심이 있는가를 시험하려 하였으나, 그는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그에게 장남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고의로 파락호 생활을 하며 천하장안으로 알려진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을 측근으로 삼아 가까이 했으며, 이상지, 이경하 등도 포섭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흥선군만이 왕실 족보상 왕위 계승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왕위를 계승하려면 능력을 보여야 했고, 정치적 작업도 해둘 필요가 있었다.
제1차 집권기 초반
고종의 즉위 전후
철종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후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조대비와 밀계(密計)가 있어 자신의 차남인 명복(이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시킨 뒤 자신은 대원군(大院君)이 되어 정책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1863년 12월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곧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을 보필하라며 형식상으로 수렴청정을 행하니 이때부터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일문을 축출하고 문벌과 사색당파를 배제한 인사등용을 하였으며, 영의정에 조두순, 좌의정에 김병학, 훈련대장 겸 포도대장에 이경하를 임명했다. 한편 집권 후 안동 김씨의 영수격이며 순원왕후의 동기간인 영의정 김좌근이 사임하였다. 1864년 판서와 좌찬성을 역임한 김병기는 광주부유수로 좌천되었다. 이후 김병기(金炳冀) 등 일부 안동김씨 세력을 축출하기도 했지만,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명문 양반가를 일부 포섭하면서 조대비와의 동맹관계 및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 등 안동김씨 일부 세력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좌근과 김병기는 그의 섭정역할을 반대했다. 그러나 조대비는 김좌근 등의 반발을 무릎쓰고 흥선군의 정치 참여를 공식화했다. 명목상은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지만 실제로는 흥선군이 권력의 일선에 등장하였다.
인사 개혁 단행
조선 500년의 금기를 깨고 종친들을 요직에 등용하였으며, 서얼의 관직 진출도 확대했다. 정조 사후 확정된 노론의 일당 독재도 깨트리고, 소외되어 있던 다른 당파를 이전보다 고르게 등용했다.
그는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하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또한 그동안 세도를 누려온 안동 김씨일족들을 대부분 몰아내고, 파벌과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역량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 행정을 펴나가려 노력했다. 대원군은 타락하고 훼손된 낡은 왕조를 재가동시키고자 했지만, 왕조에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편 김좌근 등은 그에게 왕의 아버지로서 대군의 예에 준하는 예우를 한뒤 정치참여는 불가하게 하였으나, 흥선군 스스로 정승들이 타는 사인교를 타고 예우는 받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실무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공식 호칭은 대원군으로 최초로 살아있는 대원군이므로 존봉 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사적인 호칭으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대원위합하(閤下)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고종이 즉위하자마자 왕의 교서 대신 '대원위분부'라고 시작하는 공문을 전국에 발송하기 시작했다. 그는 집권 전에 화양동 서원에 갔다가 모욕당한 일을 기억하던 흥선대원군은 자신을 모욕한 화양동 서원 유사를 잡아 죽였다. 이때 화양동서원의 고지기를 불러 "내가 지금 화양동 서원에 가도 부액을 못하게 하겠느냐?"고 추궁하였으나 고지기는 그자리에 다시 와도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대원군은 그 고지식한 고지기는 살려주었다.
명성황후 간택
한편 안동 김씨가문에 빼앗겼던 세력을 되찾아오고자 했던 조대비는 고종의 비를 자신의 친정 일가인 조면호의 딸로 정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역시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취소해야 했다.
1865년 대원군은 왕비 간택을 시도한다. 그 중 민치록의 딸 민자영이 최종간택되었다. 그가 명성황후를 간택한 배경에 대한 설은 두 가지가 전해진다.
'첫째는 대원군이 사람을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닌데 명성황후의 본성을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장차 자신의 최대의 정적이 될 것이 틀림없으나, 그래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가족관계에 있어서 민규수만한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설마 장차 자기를 없애려고 들기야 하겠느냐 하는 생각으로 눈감고 왕비로 간택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사실 당시에는 명성황후가 대원군이 만족해할만 한 아주 얌전한 규수였다는 것이다. 그 밖에 부인 여흥부대부인이 적극 추천했다는 주장도 있다. 윤승운 화백이 2000년 어린이 잡지 생각쟁이에 연재한 역사만화에 의하면 대원군은 명성황후를 보고는 호랑이같은 기개에 놀랐다고 알려져 있다. 정치적으로 야망이 큰 인물임을 한 눈에 알아본 것.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를 두려워한 그는 일부러 아버지도 없고 형제나 혈육이 없는 민자영 규수를 최종 왕비로 낙점했다.
이렇게 해서 왕비가 된 명성황후였으나 처음 중전이 됐을 때의 명성황후는 첫인상 그대로 얌전하고 온순한 중전이었으나,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은 1868년(고종 5년)에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았을 때부터라고 한다. 고종 3년, 궁인 이씨가 고종의 첫아들인 완화군을 낳았을 때 대원군은 도에 넘칠 정도로 몹시 기뻐했고, 이로써 종묘사직이 더욱 튼튼해졌다고 하며 고종에게 기쁨을 털어놓았는데, 그때 옆에 있던 명성황후를 거의 무시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에 명성황후가 원자를 낳았으나 생후 수일만에 죽자, 명성황후는 임신 중에 대원군이 보낸 산삼을 너무 많이 달여 먹었기 때문에 어린애가 죽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이 무렵의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얼마나 싫어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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