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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4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4 본문
우면산의 겨울 14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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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4
정약종과 정약용
조선 후기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정약용과 그 형제들의 삶은 전통과 모더니티 사이에 서서 고뇌하고 새로운 방향을 치열하게 모색해간 개인사, 가족사, 사회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결코 범상치 않은 이 가족의 복잡다단하고 파란만장한 삶에는 언어로 전달하기 어려운 우리 역사의 한 시대가 있는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정약용의 삶과 사상을 다룬 책들이나 그 형제들의 삶과 사상을 다룬 책들은 이미 적잖이 나와 있다. 특히 역사학자 이덕일씨의 <정약용과 그 형제들 1,2>는 이 가족이 겪어야 했던 더없이 무거운, 그러나 치열했던 역사를 소설 못지않은 감동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이덕일이 재구성한 정약용 일가의 삶은 200년 이 지난 현재까지도 주목할 만한 메세지를 우리들에게도 던져주고 있다.
정약용은 집안에서 막내였다. 큰 형님은 약현, 둘째 형님은 약전, 셋째 형님은 약종이었으며, 누님이 한 분 계셨는데 남편이 이승훈이었다. 또 큰 형님의 처남은 이벽이었고, 그 사위는 황사영이었으며, 이승훈의 외삼촌은 이익의 증손자이자 당시 기호 남인을 이끌었던 이가환이었다.
이들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 우리 역사의 한 가운데를 걸어갔던 지식인들이었다. 이가환과 정약용은 체재공의 뒤를 이어 기호 남인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자 정조 개혁정치의 한 구심을 이뤘다. 이들의 비극은 1800년 정조의 돌연한 죽음 직후 시작됐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정약종, 이승훈, 이가환은 처형됐으며, 곧이어 일어난 황사영 백서 사건에서는 황사영이 처형됐다. 그리고 정약전과 장약용은 모진 고문을 받은 후 기나긴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시대적 구속을 고려할 때 두 사람은 이례적인 지식인이다. 그 이례성은 이들이 누구보다도 서학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이벽으로부터 서학과 천주교를 배웠으며, 결국엔 천주교를 떠났지만 당대 지식인으로서는 서구의 모더니티에 상당히 정통했다고 볼 수 있다.
귀양이라는 더없이 고단한 나날 속에서 정약전과 정약용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지식인의 본분인 연구와 저술을 계속해나갔다. 특히 정약용은 위기로 치닫는 조선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개혁 담론을 치열하게 탐구해나갔다. 정약용이 이룬 업적은 전통사회 시대정신의 근본적인 성찰을 요청한 것이자 실학과 시대정신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정약전은 1758년 영조 34년에 경기도 광주(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천전이며 호는 손암이다. 아버지는 이재원이며 어머니는 윤씨 부인이다. 정약전은 어린 시절부터 기호 남인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이익의 학설을 익혓으며,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 문하에서 학문을 더욱 연마했다. 1783년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1790년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전적, 병조좌랑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정약전은 친척인 이벽, 이승훈 등과 긴밀히 교유했는데, 이들을 통해 서양의 자연과학을 배우고 천주교 교리를 익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약전은 전라남도 신지도에 유배되었으며, 곧이어 일어난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치면서 연구를 계속해온 정약전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816년 순조 16년 흑산도에서 숨졌다.
북악에서 바라 본 남산
정약전이 우리 지성사에서 주못할 지식인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이 유배 시절에 <자산어보>를 저술했다는 데 있다. 정약전은 흑산도 근해의 생물을 조사하여 연구해 이를 책으로 기록했는데, <자산어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당시 수산생물 155종에 대한 이름.분포.형태.습성.이용 등의 매우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채로운 자연과학 저작이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자연과학에 대한 저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철학과 윤리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과학과 기술을 천시하는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뛰어난 자연과학 저작들은 그다지 많이 쓰인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의 기본적 방법론은 관찰이다. 정약전은 세밀한 관찰을 통해 수산생물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자산어보>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김려의 <우해이어보>와 함께 <자산어보>는 전통사회의 어류연구에 대한 더없이 소중한 자료로써 가치가 있다.
<자산어보>가 시선을 끈 이유는 네 가지다. 먼저, 이 책은 특유의 분류법을 보여주는데, 당시 수산물을 크게 인류, 무린류, 개류, 잡류로 나누고 있다. 인류가 비늘이 있는 것이라면, 무린류는 비늘이 없는 것이다. 개류는 겁질이 단단한 것이며, 잡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들이다. 정약전은 다시 비늘이 있는 인류 아래 석수어, 숭어, 농어, 강항어 등 여러 종류로 구분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분류법이 낯설고 거칠더라도 그 나름대로 수산생물들의 독특한 특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
둘째, 이 책은 당시 수산물의 방언과 특징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역시 매우 소중한 자료다. 예를 들어 짱둥어의 경우, 정약전은 자신이 지은 이름인 철목어 옆에 장동어라는 당시 방언을 함께 덧붙이고 있다. 또 청어와 고등어의 경우 그 회유와 분포에 대한 정보를 적어놓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실태와 비교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셋째, 이 책은 실사구시의 정신이 반영돼 있다. 정약전은 개별 생물의 말미에 의약상의 기능을 기술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홍어의 경우 배가 아플 때 효능이 있으면, 주기를 없애는 데도 효과가 있다고 적고 있다.
<자산어보>는 어류학자에 정문기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으며, 시인 손택수에 의해 주요 어류들의 소개와 해제를 담은 책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특히 손택수의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는 그림을 덧붙이고 현대 생물의 이름을 함께 소개하여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또 정약전은 흑산도 사람들과 같이 이 자료를 작성하고 관찰하였는데 섬사람들이 공동의 저자로 참여한 책이라고 불 수 있다.
<자산어보>는 유배라는 비극을 초극하려는 지식인 정약전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흑산도에서 이승을 달리했다.
동생 정약용은 '흑산'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고려해 '흑'자 대신 '자'자를 쌌다고 한다. '자'자도 '검다'는 뜻이 담겨 있으나 형님의 불우한 처지를 고려할 때 흑산보다는 자산이 섬세한 배려가 담긴 말일 것이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이 섬은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라 했다고 한다. 왜 '흑산어보'가 아니라 '자산어보'라 했는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처연해지고, 개인적인 비국에 의연히 맞서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정약전의 의지적 낙관에 새삼 숙연해지게 된다.
북악산
정약용은 1762년 영조 38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정약전의 둘재 아우로 자는 미용이고 호는 다산, 사암이며, 당호는 여유당이다. 그의 삶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첯 번재는 득의의 시기다.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89년 문과에 급제한 다음 벼슬길로 나갔다. 두 번재 시기는 유배의 시기다. 정조 사후 1801년 신유박해 때 그는 경상북도 장기를 거쳐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1818년 귀양이 풀릴 때까지 실의를 딛고 고독 속에서 빛나는 연구를 진행시켰다. 세 번째는 마무리 시기다. 18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신작, 김매순, 홍석주, 김정희 등과 교유하면서 자신의 저작들을 정리했다. 그 후 1836년 헌종 2년 고행 광주에서 세상을 떴다.
정약용이야 말로 다른 지식인과 비교할 수 없는 거인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방대한 저작들도 저작이러니와 더없이 치열했던 그의 삶과 연구는 시대정신 탐구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더욱이 그 지적 고투가 기나긴 유배생활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식인 정약용이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만날 수 있는 진정한 지적 거인일 것이다.
정약용의 고단한 삶과 탁월한 업적을 제한된 지면에 간략히 정리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는 흔히 실학의 집대성자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의 저술은 500권이 넘는다. 정약용의 학문세계는 유교 경전을 새롭게 해석한 경학과 국가 경영을 위한 정치.경제.법률 분야의 경세학이 두 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문학.역사.지리.언어.풍속.의학 등이 덧붙여질 수 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아언각비>, <마과회통>, <아방강역고> 등 그의 대표 저술들은 이 땅에서 중.고교를 다닐 때부터 이미 익숙한 제목들이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정약용의 사상을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1표 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로 알려진 경세학이다. 유학자답게 정약용은 경학에 심혈을 기울였고 앞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현재적 관점에서는 경학보다 아무래도 경세학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경학이 실학파의 관점에서 본 유학의 재구성이라면, 경세학은 현실개혁을 목표로 한 실학파의 본격적인 사회과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학파의 집대성이라는 그의 평가가 오롯이 반영되어 있는 영역 또한 다름아닌 경세학이기도 하다.
정약용이 '1표 2서'를 저술한 것은 유배 말년과 해배 직후다. 1817년 <경세유표>를, 1818년 <목민심서>를 저술했고, 고향에 돌아온 직후인 1819년 <흠흠심서>를 완성했다. 이러한 책에 담긴 정약용의 문제의식은 부국강병을 포함한 포괄적인 사회개혁에 있었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경세유표>는 '조선이라는 오래된 나라를 통재로 바꾸어버리자'는 문제의식이, <목민심서>에는 '현재의 법 테두리 안에서라도 우리 백성들을 살려내보자'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그리고 <흠흠심서>는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해 저술한 형법서다.
이 가운데 <목민심서>는 정약용의 대표작들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한마디로 <목민심서>는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해결하고 그 해법을 제시하기 위한 정치.행정 개혁론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총 12편과 각 편을 6조로 나누어 총 72조로 돼 있다. 각 조는 다시 강목을 두고 있는데, 강에는 의견의 대강을 제시하고, 목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 그 해법을 강구하였다.
유배 후반기에 경학에 대한 연구를 마친 이후 정약용은 국가의 제도 개혁론을 다루는 <경세유표>를 저술하다가 이를 중단하고 <목민심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당시 더없이 곤궁했던 백성들의 삶을 더 이상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는 그의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 책에는 당시 아전과 토호가 부정부패, 농민들의 처참한 실태가 있는 그대로 담겨 있다. 지방 행정은 국가 경영의 기초인데, 올바른 목민관이 되기 위한 지침을 다룬 <목민심서>는 사회개혁론의 출발점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정치가들이 이 책을 여전히 중시하고 가장 많이 읽는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약용의 연구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30년대이다. 그의 사후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936년 전국적 헌금을 통해 그의 저술을 출간하는 사업이 추진됐다. 1935년부터 5년간 여유당전서 76책이 신조선사에서 간행되었으며, 동시에 강연회를 포함해 그의 사상이 새롭게 재평가됐다. 이러한 재평가는 해방 이후 더욱 활성화됐는데, 홍이섭, 이을호, 금장태 등의 연구들이 잇달아 발표되면서 정약용은 실학파는 물론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북악 성벽에서 바라 본 인왕산
정약용은 앞서 다룬 밪지원, 박제가와 동시대 지식인이다. 북학과 그룹의 연구와 정양용의 연구는 실학파로 동칭되고 있지만 일정한 차이가 존재한다.
첯재, 북학파의 주요 활동이 정조 연간에 이뤄진 반면, 정약용의 주요 연구는 순조 연간에 ㅈ니행됐다. 북학파가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은 개혁정치 시대에 활동했다면, 정약용은 세도정치 시대의 고난 속에서 연구에 몰두한 셈이었다.
둘째, 북학파가 상공업의 발전을 강조했다면, 정약용은 이익의 문제의식을 계승하여 전제를 포함한 농업의 개혁을 중시했다. 북학파가 중상학파로 불리고, 정약용이 중농학파로 불린 연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앞서 발했듯이 정약용의 관심은 인문학에서 사회과학,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종합과학을 지향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모더니티에 대한 정약용이 가졌던 시대감각과 시대정신이다. 머더니티에 대한 정약용의 역량은 1789년 한강 배다리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수원성 축성에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기중의 방법을 다룬 <기중가도설>을 저술하고, 소규모 기중기를 만들어 공사 기간과 비용을 줄인 것은 뛰어난 자연과학적 업적이었다. 이뿐만 아니라그는 홍역에 대한 치료를 다룬 <마과해통>을 저술하기도 했다.
모더니티란 '기술의 모더니티'와 '해방의 모더니티'로 나눈다고 한다. 과학적 진보와 혁신이라는 기술의 모더니티의 관점에서 볼 때 정약용은 분명 모더니티의 선각자였다. 역사의 발전은 비약보다는 끄텂는 누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18세기 후반 정조 연간에 장약용 등에 의해 진행된 일련의 기술적 진보를 과소평가하기는 아려울 것이다. 사실 서구사회에서도 모더니티를 향한 변화는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되어 왔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방의 모더니티의 관점에서 볼 때 정약용의 사상은 문제적이다. 여기에는 서구와 동아시아의 차이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서구의 경우 모더니티의 전개는 중세의 기독교적 질서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서구 모더니티의 정신이 기독교 문ㅁ화와 혼재되어 전래됐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평등주의가 모더니티의 핵심 가치라면, 동아시아에 전파된 천주교는 하느님이라느 유일사상과 함께 이러한 머더니티의 정신을 담고 있기도 했다.
정약용은 그의 세례명 안드레아에서 보여주듯이 한 때 천주교 신도였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천주교를 떠났지만 천주교가 그 자신과 가족의 삶에 미친 영향이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여러 편지에서 암시하고 있다.그는 천주교를 포기하였지만 정신으로서의 서구를 과연 어덯게 생각하였는지가 문제다. 그는 저작과 편지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전통인으로서의 전형적인 특성을 부여주고 있다. 경학에 대한 일련의 연구 성과들은 그 직접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경제학에서 나타난 그의 애민사상이다. 백성에 대한, 즉 민중에 대한 진정한 사살의 의미를 담고 있는 애민이 통치의 근본이라는 생각은 앞선 유학자인 정도전과 이이의 사상에서도 중심으로 이뤘던 것이며, 정약용 역시 이익을 포함한 이러한 사상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애민사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정약용의 애민사상과 토지개혁론으로부터 모더니티의 단초, '근대인'의 특성을 찿으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소망의 과잉'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간단치 않은 것은 위와 같은 판단이 '서도서기(西道西器)적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려는 발상에서 기초하고 있다는 데 있다. 모더니티의 정신적 기초를 이루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평등주의가 반드시 서도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유효하다면, 소망의 과잉이라는 평가 역시 서구적 시각의 판단일 수 있다. 동아시아의 모더니티에서 서도서기와 동도서기 중 어던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는 결코 간단한 해답을 요구하는 문제가 아니며, 이는 우리 모더니티의 벽두에서부터 지식인들이 대면한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의 모더니티를 과연 어덯게 수용할 것인가. 정약용 형제들은 이에 대해 주목할 만한 삶과 사상을 보여줬다. 정약전과 정약용이 동조서기적 사유의 한 출발을 보여준 반면, 정약종과 이승훈은 서도서기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동도서기와 서도서기 가운데 어던 거시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 지식사회의 숙제이기도 하지만, 이 두 가지 산택 모두가 200년 전 한 가족의 삶과 사상에서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경이로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정약용과 그 가족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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