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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8 : 조선의 역사 400 (제26대 고종실록 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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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8 : 조선의 역사 400 (제26대 고종실록 23)

두바퀴인생 2013. 2. 12. 14:00

 

 

한국의 역사 858 : 조선의 역사 400 (제26대 고종실록 23)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3. 떨어지지 않는 녹두꽃 전봉준과 동학혁명 

통상 우리 역사에서 동학이라고 하면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한 단순한 민족종교 단체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동학은 단순히 서학으로부터 민족의 문화와 국가를 지키겠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서학을 적극적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위대함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동학은 외세의 영향 없이 조선 사회의 봉건질서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계급을 철폐하고 새로운 근대국가의 형성을 통해 민족의 부강을 꾀한 가장 자주적인 정치 조직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어떤 단체보다도 가장 탄탄한 조직과 힘, 그리고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다수의 농민과, 선각적인 양반의 상당수를 참여시킬 수 있었던 거대한 민족 조직이었다. 따라서 동학은 그 어떤 이름보다도 민족적이며, 적극적인 민중 사회운동체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만민이 평등하고, 인류애가 살아 살아 있는 이상적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던 동학도들은 1894년 민란을 주도하면서 이른바 혁명적 농민 봉기를 주도한다. 이 농민들의 봉기는 제도적, 정치적으로 근대화를 목표로 하였던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이었다. 이 혁명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전봉준이다.

 

전봉준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1854년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지금의 정읍시)에서 향교의 장의를 지낸 정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의 초명은 명숙, 호는 해봉이지만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흔히 녹두라 불리었다.

 

그는 젊은 시절 생업을 위해 약을 팔기도 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무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일과 상관없이 늘상 버릇처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그는 약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잇지 못하자 태인 산와리 동곡 마을로 이사하여 세 마지기의 전답을 소유한 소농으로 지내면서, 스스로 선비를 자처하며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훈장노릇을 겸하였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던 그는 19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급변하고 외세가 밀려드는 것을 보고 민족과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신념으로 1890년 37세의 나이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이대부터 그는 사회개혁을 꿈꾸는 혁명가적인 기질을 발휘하게 된다.

 

입교한 직후 그는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 접주로 임명된다. 그의 인품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 주변 교도들의 추천에 힘입은 일이었다. 접주가 된 전봉준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5리 정도 떨어진 말목장터에서 주로 포교 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는 포교의 일환으로 병자들을 고치는 일도 함께 하였다. 일찍이 읽은 의서들과 함때 약초를 취급한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들에게 처방전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1892년 그가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란 자가 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배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에게는 가차없는 형벌을 가하였다.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였고, 이로 인해 전창혁은 심한 매를 맞고는 귀가한 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조병갑의 횡포는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1천 냥이나 되는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백석을 착복하기도 하였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들을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였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관의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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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동학혁명)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은 1893년~1895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3월의 고부 봉기(제 1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 2차)로 나뉜다.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초기에는 동학난으로 불리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원인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값을 받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이에 분격한 농민은 한문교사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입경하여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동학도들은 동학도들 대로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편 1893년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동학농민운동 연대기

  • 1892.5 조병갑 고부군수 부임
  • 1893.11. '배들' 이평 농민들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보세 감면 진정
  • 1893.11.30 고부군수 조병갑 익산군수로 전임, 고부군수에 이은용 발령
  • 1894.1.9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부임(열흘 동안 6명의 고부군수가 바뀜)
  • 1.10 전봉준 농민군 말목장터에 모여 고부관아 습격(조병갑 도망)
  • 2.15 고부군수 조병갑 파면, 박원명 발령, 장흥부사 이용태를 고부군 안핵사로 임명
  • 3.3 고부군수 박원명의 효유로 전봉준 농민군 해산
  • 3.20 동학농민혁명군 무장기병, 포고문 선포
  • 3.25 동학농민혁명군 백산 기병, 전봉준 동도대장, 김개남, 손화중 총관령, 호남차의대장소 이름으로 4대 강령과 격문 발표
  • 4.7 황토현(황토재) 전투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전라감영군에 대승
  • 4.18 전라감사 김문현 파직, 김학진이 새 감사로 부임
  • 4.23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동학농민혁명군 전라병사이자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에 대승
  • 4.27 전주성 점령 - 동학농민혁명군 전주 입성
  • 4.28 경군과 1차 접전
  • 5.3 2차 접전
  • 5.5 청국군 충청도 아산 상륙
  • 5.6 일본군 인천 상륙
  • 5.7 전주화약(全州和約) - 전봉준과 홍계훈 협의로 성립, 동학농민혁명군 전주성 철수
  • 5.20 전라감사 김학진이 6개항의 수습방안 제시,
  • 6.7 전라감사 김학진 농민군중 1명의 집강선발 각 고을 질서 유지 방안 제시
  • 6.21 일본군 경복궁 점령, 대원군 정계복귀
  • 6.23 청일간 풍도해전(일본군이 청군 습격), 김홍집 내각 수립(민씨 정권 무너짐)
  • 6.29 순천에 영호대도소(영호도회소) 설치 - 김개남이 김인배를 영호대접주로 임명
  • 7.5 최경선 나주성 공격
  • 7.15 남원집회-전봉준과 김개남은 이 대회를 통해 전라도 53군현에 빠짐없이 혁명적인 집강소체제 실행
  • 7.중순 경상도 영해, 영덕, 경주, 영천, 고령 등지에서 동학농민항쟁 개시
  • 8.17 청일간 평양전투 - 일본군 대승으로 청 굴복, 조선 내정 간섭 본격화
  • 8.25 김개남 남원 재봉기 준비(7만명 집합)-곡식비축 및 각종 물자 준비(전봉준, 손화중은 재봉기 만류)
  • 9.초 전봉준 삼례에 대도소 설치 - 재봉기 준비
  • 9.1~3 순천 영호도회소 김인배 등 약 1만 농민군 섬진강 건너 하동부 장악
  • 9.4 강원도 영월, 평창, 정선 동학농민혁명군 평창 집결하여 강릉부 점령
  • 9.6 경상감사가 경상도 농민항쟁 발생지역이 60여 곳이라고 보고
  • 9.9~16 전봉준 동학농민혁명군 재기병 준비 - 전라도 각지의 농민군 지도자에게 통문 발송(삼례집합 요청)
  • 9.17 동학농민혁명군 진주 무혈입성 - 현지 농민군과 순천 영호도회소 김인배 농민군 약 1천명
  • 9.18 전봉준 농민군 삼례봉기(전봉준 영향아래 지역 농민군 삼례 모임), 동학교주 최시형 각포에 동원령, 청산 봉기(손병희)
  • 9.24~10.6 충청도 음성,서산,태안,괴산 등 각지의 농민군 봉기
  • 9.25 경상도 안동부 농민군 3천여명 봉기
  • 9. 27~10.4 경상도 하동, 문경,진주 등 전투 - 일본군과 토포사 지석영의 관군
  • 10.6 평안도 해주에서 농민군 수만명 봉기, 강령현과 해주감영 점령
  • 10.12~20 전봉준-손병희의 남북접 논산대회(약 5만명)
  • 10.13 경상도 진주 고승당산 전투 -일본군과 접전으로 농민군 180여명 전사
  • 10.14 전봉준 농민군 강경출발, 김개남 농민군도 남원 출발 - 16일 전주성 재입성 ; 이용헌 신임 남원부사, 양필환고부군수, 이수홍순천부사 처벌
  • 10.20 섬진강 하류 섬거역에서 일본군과 접전
  • 10.22 농민군 하동부 점령, 성주성 습격, 홍천 풍암리 자작고개 전투
  • 10.23 강원도 평창의 봉평 전투에서 농민군 패함
  • 10.23~25 전봉준 농민군 공주 이인전투, 곰티전투
  • 10.27 하동 광평동에서 농민군 일본군에 패함
  • 10.28 섬거역 2차전투, 곤양 금오산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해 농민군 70여명 전사, 홍주(홍성)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함
  • 11.8~9 전봉준 농민군 공주 우금치, 효포, 곰티, 곰나루, 금학동 전투
  • 11.10 김개남 농민군 진잠현 점령, 11 회덕과 신탄진 점령
  • 11.12~13 김개남 농민군 청주전투 - 청주 병영군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 15 연산에서 일본군에 다시 패배
  • 11.16 논산 황화대 전투 - 전봉준과 김개남 연합 농민군 패배
  • 11.24 원평,태인 전투 - 일본군에 전봉준과 김개남 연합 농민군 패배
  • 11.16~25 전라 좌수영 전투 - 김인배 농민군과 좌수사 김철규의 관군 및 일본해군(축파호)
  • 11.27 해주전투에서 농민군 패함
  • 12.1 손화중, 최경선 농민군 광주에서 해산
  • 12.1 김개남 체포됨 - 임병찬의 밀고로 태인 종송리 매부 서형기의 집에서 황헌주의 강화수비병 80여명에 침입
  • 12.2 전봉준 체포됨 - 부하 김경천의 집에 머물던 중 김경천의 밀고로 붙잡힘
  • 12.4~5 장흥전투에서 패배
  • 12.7 광양읍성 전투 패배 - 김인배 효수됨, 이방언의 장흥 농민군 강진 점령
  • 12.11 손화중 체포됨, 일본군 장흥, 강진지구 총공격령
  • 12.13 김개남 참수됨 - 전라감사 이도재가 서울로의 압송시 습격우려 등으로 전주에서 임의로 처형
  • 12.15 농민군 장흥 반격 석대들에서 제2차 전투
  • 12.18 해남 전투에서 패배
  • 12.24 최시형 북접군 충주 외서촌에서 해산
  • 12.25 이방언 장흥에서 체포됨
  • 12.27 관군, 일본군 서울 환군
  • 1895.1.1 김덕명 원평 안정사동에서 체포됨
  • 1.24 대둔산에 숨어있던 농민군 30여명 일본군과 관군 공격으로 몰사
  • 3.29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등 농민군 지도자 사형집행(교수형)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그는 농민 운동 당시 북접 소속 동학군 부대 지휘관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1893년 12월부터 94년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긴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