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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59 : 조선의 역사 401 (제26대 고종실록 24) 본문
한국의 역사 859 : 조선의 역사 401 (제26대 고종실록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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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3. 떨어지지 않는 녹두꽃 전봉준과 동학혁명(계속)
동학 농민군의 제1차 봉기는 1894년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 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은 그 전날 밤에 태인의 최경선과 함께 3백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40리 길을 행군하여 말목장터에 미리 당도해 있었다.
대열을 가다듬은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그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고부군수 조병갑은 봉기 소식을 듣고 재빨리 전주 감영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생포하는 일은 실패하였다.
고부 관아가 농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용산현감 박원명을 신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였다.
이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세를 확대하여 백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동학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자, 그해 3월 전봉준은 인근 각지의 동학교도들에게 통문을 보내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일시에 1만으로 불어났다. 이것이 '제2차 봉기'이다.
집결한 교도들에 의해 농민군의 동도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 김덕명과 오시영을 총참모, 최경선을 총솔장, 송희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삼고 조직적인 전투 준비에 돌입하였다.
그는 싸움에 앞서 살인과 재물 탈취를 금하고, 일본군과 권력 귀족들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4대 강령을 발표하고, 규범 12조로 농민군의 규율을 바로잡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
태세를 갖춘 농민군은 4월 4일 부안을 점령하고, 4월 7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하는 한편, 정읍, 흥덕, 고창 지역을 습권하였다. 그리고 영광, 함평, 무안 일대를 거쳐 마침내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동학군의 힘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정은 청국군을 요청하였고, 청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텐진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조선에 진춣하였다. 이렇듯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동학군과 관군은 화의를 약속하고 교섭에 들어갔다.
교섭에 들어간 전봉준은 폐정개혁을 골자로 하는 27개 조에 달하는 조건을 내놓았고, 이에 관군 대표인 홍계훈이 무조건 수용함으로서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동학군은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잘못된 정치의 개혁을 위한 행정 관청 구실을 하게 하였다. 망하자면 전라도 지역은 동학의 자치구역이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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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계속)
경과
제1차 봉기
이리하여 농민들은 전봉준을 선두로 수백 명이 1894년(고종 31)(양력 2월 15일)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갔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줄행랑을 놓았고, 그들은 관아를 습격·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하였다. 또한 무력 봉기와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의 거병 반대와, 농민군에 대한 초기의 방관적 대응도 작용했다.
조선 말기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개는 조정에서 안핵사(按覈使)를 보내면 평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화약을 청했고 동학 농민군 대표들과 면담 후, 동학 농민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고 동학 농민군은 자진해서 해산한다. 이것이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으로, 고부 봉기, 1차 봉기, 정월 봉기 등으로 부른다.
제2차 봉기
그러나 머지 않아 안핵사 이용태는 위 사건을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일반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몰아 혹독히 탄압하였다. 이에 고부의 상황은 바뀌게 된다. 이용태의 탄압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무장(茂長)의 김개남,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 등으로 불리는 '제2차 동학 농민 운동'이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명의(四大名義)과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민중의 궐기를 호소했다.
#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 충효를 온전히 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 병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멸하라.
이에, 정읍시 태인·김제시 금구(金溝)·부안 등지에서도 농민들이 합세하여 그 수가 수천에 도달했다. 동학군의 봉기는 이로부터 본격화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음력 4월 초 금구 원평에 진을 쳤다. 실제로는 농민군의 구성원은 대부분 일반 농민이었고, 동학교도는 비교적 적었다. 농민군은 탐관오리의 제거와 조세 수탈 시정을 주장하였으며, 균전사(均田使)의 폐지를 촉구하였다.
고부의 황토현에서 감영 군대를 물리쳐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농민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유인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병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음력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음력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이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은 완산에 머물면서 포격을 시작했고, 동학군은 여기에 대항할 만한 병기가 없어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다. 홍계훈은 이미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이 징계를 당했으며 앞으로도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여 징계하겠다는 것을 밝혔고, 한편으로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도착하였으며 일본의 군대도 조선 내 자국민 보호를 핑계로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출병하기로 했음을 알렸다. (양력 6월 8일) 청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뒤따라 일본 정부는 톈진 조약 (1885년)에 따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양력 6월 7일)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의 통문(通文)과 원정(原情), 폐정개혁 요구안을 제시하면서 삼정(三政)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확인할 수 있다.
4월 4일 부안을 점령한 농민군은 법성포 이향에게 '동학군통문' 9개조를 보냈다. 4월 19일 중앙군을 이끌고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에게 '호남유생원정' 8개조를 제시하였으며, 5월 초 전주화약 직전 전주화약의 조건으로 초토사 홍계훈에게 27개조를 추가로 제시하였다.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한 후 5월 11일경 순변사 이원회에게 '전라도유생등원정' 14개조와 5월 17일경 '원정열록추도자' 24개조, 그리고 5월 20일경 장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개혁안' 13개조 등을 제시하였다.
-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 탐관오리 숙청
- 횡포한 부호 처벌
- 불량한 유림과 양반 처벌
- 노비문서 소각
-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 과부 재가 허락
- 이름 없는 잡세 폐지
- 인재 등용, 문벌 타파
-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 공사채(公社債) 면제
- 토지 평균 분작
— 폐정개혁 12개조
전주성에서 철병했으나 이미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내에 진입한 상태였다.
(양력 6월 11일) 관군과 2차 강화를 맺은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했으나 동학군은 교세 확장을 구호로 그들의 조직을 각지에 침투시키고 전라도 53군에는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특히 김개남은 5~6만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집강소 설치에 반대하던 남원 부사 이용헌과 나주의 현령들을 살해하고 그곳에도 집강소를 설치했다.
제2차 봉기의 성격
이 중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이 적극 호응하였음은 물론이다. 체포된 이후 전봉준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나 김개남은 대원군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자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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