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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5 : 조선의 역사 407 (제26대 고종실록 3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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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65 : 조선의 역사 407 (제26대 고종실록 30)

두바퀴인생 2013. 2. 19. 07:33

 

 

한국의 역사 865 : 조선의 역사 407 (제26대 고종실록 30)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서재필, 그는 누구인가? (계속)

 

 

정치, 사회 개혁 활동

 

갑신정변과 망명

 

김옥균

 

 

당시 양어머니 안동김씨의 상중이었으나 그는 그해 7월 기복(起復, 부모의 3년상인데도 사직이 윤허되지 않고 특별 채용되는 것)의 특혜를 받고 사관생도 교관으로 배치되어 신식 병사 양성을 맡게 된다.

 

1884년초부터 서재필은 기회를 잡다가 그해 7월 귀국 후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과 더불어 갑신정변을 계획하고, 신분제 폐지, 문벌 폐지, 청나라에 잡혀간 대원군의 복귀 등을 담은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다. 서재필은 행동대를 총 지휘하고 병력들을 이끌고 궁궐로 진입하였다. 7월부터 치밀하게 준비하여 12월초 정변 준비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 거사 자금 등을 동원한다.

 

정변계획 중에는 일본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재조선주둔 일본육군 중대장 무라카미(村上)와 개화당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일본의 토야마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웠고, 정변진행중에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현장 지휘를 맡았고 그의 동생 서재창박영교 등은 병력을 이끌고 수구파 대신들의 처단 등을 계획했다.

 

 

갑신정변과 삼일천하

 

홍영식

 

 

1884년 10월 17일 오후 6시 한성부 정동에 신축한 우정국 낙성식에는 우정국총판 홍영식(洪英植)의 초청으로 많은 내외 귀빈의 참석하여 낙성 축하연을 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김옥균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 서기관에게 이날 거사를 일으킬 것임을 은밀히 알려서 일본군 동원을 준비시켰다. 김옥균의 연락을 받은 서재필은 바로 병력을 집결, 이동시켰고, 우정국 입구에 매복시켰다.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 우정국 북쪽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화재가 발생했다. 가장 먼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던 민영익이 매복하고 있던 개화파 무사들에게 칼을 맞고 한쪽 귀가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허겁지겁 다시 들어오자 연회장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를 틈타 김옥균,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은 급히 우정국을 빠져나와, 매복하고 있던 서재필 휘하 사관 생도들을 다시 경우궁으로 이동시키고 김옥균은 교동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후에 대궐로 향했다.

 

정권장악 후 구성된 정부에서 병조참판후영정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토야마군관학교에서 같이 훈련받은 생도들과 함께 한때 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를 처단하였고, 문신 조영하(趙寧夏)와 민태호(閔台鎬), 민영목 등을 대한제국 고종이 지켜보는 데에서 살해하였다. 그러나 살아남은 민씨 대신들은 그를 증오하였고, 복수의 칼을 갈게 된다.

 

그러나 민씨 척족 정권은 청나라와 연락하여 청나라군대의 조선개입을 요청하였다. 그는 외세의 개입을 규탄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민가로 은신하였다.

 

12월 12일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이들의 피신을 주선해주었다. 그러나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에 있던 일본 상선 천세환(千歲丸)에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과 함께 숨어있던 중 묄렌도르프가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 다케조에에게 서재필과 김옥균 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배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행은 수중에 든 비상으로 자살까지 결심하였다. 우물쭈물대던 다케조에는 배로 올라와 일행에게 내렸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그러나 제물포항에 있던 일본인 교민들은 자국 공사의 비열함에 혀를 차며 질타했고, 선박의 선장 역시 공사를 신뢰해서 이들을 태웠는데 이제와서 내리라 하면 이들을 죽이는 것밖에 더 되느냐며 다케조에의 신뢰 없음을 질타하였다. 천세환 선장은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은 없으며, 일본의 선박을 함부로 수색할수는 없다, 임의로 수색했다가는 본국에 통보하여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묄렌도르프 일행을 되돌려보냈다. 선장의 배려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변의 실패와 가족의 최후

갑신정변청나라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일본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아 일본 정부조선의 망명 정객들을 냉대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미국 선교사들이 이들을 도왔다. 갑신정변 주역은 역적으로 몰렸고 서재필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은진 감옥에 투옥당했다. 서재필의 부모를 비롯하여 3명의 친형제 등 가족들이 사약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당시 서재필에게는 두 살난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굶겨서 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어머니 김씨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있던 독이 아이 몸 속에도 퍼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원래 서재필의 부인 광산 김씨는 양가 시댁에서 쫓겨나 친정으로 갔다. 친정으로 찾아갔는데, 친정 부모들은 대역의 죄인이라 하여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그 대신 가엾게 된 딸을 시집 문안에 가서 자결하도록 설득하며, 가마에 태울 때 독약 그릇을 하나 넣어 시집으로 쫓아보냈다. 이에 서재필은 후일 귀국한 뒤 그의 장인이 찾아오자 거지 취급하고 냉대하였다.

 

생부 서광효는 옥중에서 절곡 끝에 '만일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맏형 서재춘약을 먹고 자살하였고, 둘째 형은 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노사령들이 화석이 앞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마주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사망했지만 며느리는 못다 죽어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 그러나 생모 성주이씨나 부인 광산김씨는 바로 죽지 않고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그의 서모 역시 관비로 끌려갔고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종로방 화동 1번지에 있던 그의 집은 김옥균의 집과 인접해 있었는데, 김옥균의 집과 서재필의 집터는 조정에 의해 몰수당한 뒤 후일 관립한성고등학교의 부지가 된다.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徐載昌)과 17세 된 남동생 서재우(徐載雨) 역시 처형당하였다. 서재창은 연좌제로 처형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노를 앞세우고 도주하던 중 붙잡혀 의금부로 끌려갔다가 처형당했다. 이미 시집간 큰 누나는 이미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면할수 있었다.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경도로 피신했다. 이후 서기석은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후에 이씨 성을 가진 평민과 결혼했다. 그의 양가(養家)에도 화가 미쳐 그의 양아버지이자 재종숙인 서광하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하였다.

 

1884년 초에 죽은 그의 양어머니 안동김씨를 제외한 그의 가족은 모두 몰살되거나 화를 입었다. 그의 가족 중 살아남은 이는 형인 서재춘의 아들이 두 명 살아남아 손자인 서명원과 서희원 등이 있었고, 기생으로 끌려간 동생 서재우의 처가 아들 서호석을 두었다. 서재우의 일가 역시 겨우 후사를 잇게 되었다. 이미 시집가서 화를 모면한 큰 누나와, 피신한 여동생인 서기석이 살아남아 그 외손들이 있었다.

 

연좌제는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던 친 외가에도 미쳤다. 가산은 탕진되고 가족은 이산되는 참변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외사촌 형제인 이교문과 그의 아들 이용순 등은 살아남았고, 일제 강점기 당시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그의 일가족이 몰살당한 소식이 외가인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에 전해지자 그의 외삼촌들, 외사촌들 등 그의 외가 친척들은 약사발을 든 금부도사나 포졸들이 나타나지 않나 하고 문덕마을 어귀를 수시로 내다보며 오랫동안 전전긍긍했다 한다. 비통한 소식을 해외에서 접한 서재필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분노와 슬픔에 치를 떨었다. 서재필과 평소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그의 친구들 역시 투옥, 심한 고문을 당했다. 정변의 실패와 그의 가족, 친지들이 몰살당하자 민중에 대한 증오와 함께 조선 사회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고 이후 일본에서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국내 문제에는 관심을 서서히 줄여나가게 되었다.

 

 

일본으로 피신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인 윤치호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할 때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배는 다음 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망명 초기 그는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의 위협에 시달려 은신하였으나 후쿠자와 유키치와 친분이 있던 독지가의 후원으로 도쿄 근처의 판자촌에 숨어 지냈다. 일본 도착 직후 그는 혁명의 실패와 서툴렀음을 자책하며 대성통곡을 하다 실신했다. 한달 가까이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1개월 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수시로 자객을 보냈고 그는 변장하고 은신해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그의 딱한 소식을 듣고 생활비와 음식과 옷을 지원해 주었다.

 

서재필 자신은 1년간 일본에 피신해 있었지만, 갑신정변 주역들을 둘러싸고 일본-청나라 사이의 외교문제가 생겼고, 일본조선갑신정변에 깊이 참여했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을 냉대하였다. 일본 정부의 박대에 분개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 김옥균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선교사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게 된다.

 

낮선 땅에서 대화가 통하지 않아 손짓과 발짓으로 어렵게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고, 불청객이나 정신병자, 부랑아로 몰려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고단한 미국생활에서 연락을 주고 받은 유일한 친구는 윤치호였다. 여러 번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윤치호는 선뜻 그에게 생활비를 우편환으로 송금해주었다. 주소가 수시로 바뀌었지만 그가 먼저 윤치호에게 연락을 하였으므로 연락이 계속될수 있었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한 차례 만났었다. 1893년 가을 에모리 대학을 마치고 상하이로 되돌아가기 전인 윤치호는 인사차 서재필을 방문했었다. 서재필은 윤치호의 방문이 내키지 않았다. 그를 만나자 잊고 있었던 십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정변이 떠올라 회한에 잠겨 스스로 부끄러워지며 자신 때문에 죽은 부모와 처자를 떠올렸다. 서재필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치호는 왜 그런지 알면서도 무척 서운해했다.

 

아버지 서광하의 묘소는 충청남도 은진에, 어머니 성주이씨의 묘소는 논산군 연무읍 죽평리(현재의 연무대 자리)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육군 제2훈련소가 입주하면서 그 근처로 이장되었다. 부인 광산김씨의 시신 역시 수습되어 근처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동생 서재창의 시신과 굶어죽은 어린 아들, 그리고 서모가 낳은 이복 동생들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고 묘소도 없다. 뒤늦게 살아남은 맏형 서재춘의 아들들과 동생 서재우의 아들이 서광하 내외의 묘소를 돌보았다. 그러나 이 일로 큰 상처를 받은 서재필은 귀국해서도 부모의 묘소나 전처의 묘소에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미국에 있는 그를 제거하려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그와 친분이 있던 인물들에 대한 감시, 탄압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조선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민중에 대한 희망과 기대 역시 배신감과 증오로 변하게 된다.

 

 

 

 

1차 미국 망명

미국 망명 직후

1885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미국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비용이 없었고,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을 피해 숨어있어야 했던 이들은 조선기독교선교사를 보내려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후원과 후쿠자와 유키치이노우에 가오루가 보내준 생활비와 차비 덕분에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처음에 미국에서 생활하며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렸다. 대화도 통하지 않았고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불이익과 차별을 당하는 것에 좌절하여 사람들을 기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서히 영어도 익히고 미국 생활에도 적응해가기 시작한다.

 

처음 그는 막노동과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 인쇄소 전단지 돌리는 일, 농장 업무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언어 장벽과 유색인종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등으로 여러 번 일자리를 바꾸기도 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낮선 환경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으며 차가운 시골과 변두리의 판자집을 전전해야 했는데 위생상태의 불결함 등으로 그는 피부염증, 동상에 자주 걸려 육체적으로도 고생하기도 했다.

 

훗날 서재필은 그가 처음 미국 땅에서 살기 위해서 발버둥쳤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 뿐, 말도 모르고 풍속이 다른 남의 나라에서 스스로의 진로를 개척하려던 고독에 겨운 참담한 생활은 그의 자립정신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문방구점의 경영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근면과 창의력은 상점의 번영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유색인종에 대한 무시와, 차별에 시달림을 당했고 열차에 탑승할 때도 짐칸으로 밀려나는 등의 모욕을 당한다.

 

 

 

미국 망명생활 초기

1885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조병옥에 의하면 이들은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상륙하자마자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닥쳐올 생활위협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던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서광범도 얼마 동안은 언더우드 박사의 후원으로 뉴욕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결국 앞서 돌아간 박영효의 뒤를 따라 그도 일본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박영효서광범 등은 양반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힘든 일을 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서재필은 막노동과 잡역, 청소부,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등 잡일을 가리지 않고 하며 견뎌냈다.

 

서재필은 미국생활을 견뎌냈으며 이역만리를 다니며 고학의 길을 찾아 헤맸다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서재필은 낮에는 아르바이트와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으며 교회에 나가던 그는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적 인권사상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신념을 키울 수 있었다.

 

나중에 서재필은 스스로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는데,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이 두 가지 각성은 깊이 각인되었다.

 

낮선 이국 생활에 향수병과 조선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한 서재필은 이런 저런 편지를 써서 보성군 문덕면의 외가로 보냈다. 그러나 그의 외가에서는 서재필이 편지를 보낼 때마다 찢어버리거나 불에 태워버렸다. 해방 직후까지도 가내마을에서는 서재필이 편지를 보내면, 보낸 편지들을 찢어버리거나 불에 태웠다. 1947년 귀국한 서재필이 보성군 가내마을로 내려가 외종손 이용순을 불러 "내가 놀던 정자나무며 연못은 그대로 있느냐"하고 물으니 이용순은 "서 박사님 편지가 올때마다 역적으로 몰릴까봐 가내마을에서는 편지를 태워버리곤 하였다"고 답하였다. 서재필은 고생들 했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한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며 1년을 보낸다. 언어도 통하지 않았고 노동법령의 보호를 받지 못해 임금을 받지 못하고 사업장에서 쫓겨나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한다.

 

영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서재필이 처음 구한 일자리는 가구점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이었다. 서재필은 다른 노동자들이 하루 5마일을 다닐때 10마일을 뛰어 다니면서 일했다. 저녁에는 YMCA 야간학교를 통해,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낮엔 막일을 하고 밤엔 영어를 배우던 서재필은 그러던 어느 날 운 좋게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사립고를 마치고 워싱턴 컬럼비안 대학(지금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했다. 서재필은 어느 교회 신자를 통해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는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1886년 서재필은 홀렌백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 배리(Wilkes-Barre)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886년 9월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1889년 6월 졸업했다.

 

서재필은 해리 힐만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머무를 거처가 없었던 서재필은 해리힐맨 고등학교 교장 집에서 집안 일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또한 언론에 칼럼을 기고할 때의 필명은 오시아(N. H. Osia)라 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1888년에는 야간반으로 전과했는데 이때 그는 낮에는 워싱턴 D.C에 가서 미국 육군 군의학 도서관에서 사무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생계와 학비를 부담했다. 1888년 가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워싱턴콜롬비아 대학의 예과(대학 예비 과정)의 야간부인 코크란 단과대학(Corcoran Scientific School) 야간반에 입학, 1년간 자유전공으로 전공 없이 주로 자연과학역사를 배웠다.

 

1889년 6월 서재필이 코크란 단과대학을 졸업하자, 홀렌벡은 서재필을 불러 놓고,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라파예트(Lafayette) 대학에서 일단 공부를 마치고 그 다음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대를 졸업하여 조선기독교선교사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더 서재필을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역적의 신세에 묶여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홀렌벡의 서면 약속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서재필은 곧 라파예트 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에 다닐 무렵, 서재필은 하루 3불의 품삯을 받고 유리창닦이 등 잡역부로 노동을 하였고, 노동의 여가로 틈타서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한다. 그 뒤 교회당을 찾아 신앙을 발견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으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워싱턴컬럼비안 대학(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의과대학에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문구점을 설립했는데 낮에는 문구점 주인으로 밤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하였다.

 

 

 

의사 면허, 미국 시민권 획득

 

1892년 콜럼비안 대학 졸업 사진

 

 

콜롬비아 대학 예과를 마친 서재필은 콜롬비아 대학교의 본과로 진학, 유태인 및 유색 인종은 의대에 입학할 수 없었던 당시 사정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1892년 콜롬비아 대학교를 졸업하여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사(M.D.)가 되었다.

 

콜롬비아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었는데, 황인종에게 시민자격을 부여하지 않던 당시의 제도에 비추어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귀국 후 한국에서는 그를 '서재필 박사'라고부르는데 이는 그가 정식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아니었고 의사라는뜻의 닥터(Doctor)가 박사로 번역됐기 때문이었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 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서적번역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과 재혼하고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됐다. 미국 시민권을 받자 바로 병원에 처음 취직한 그는 세균학 연구를 주로 하였다.

 

1892년 콜롬비아 대학교을 졸업하고 바로 가필드 병원(Garfield Hospital)에서 1년간의 수련의 과정을 거쳤다.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처당숙 제임스 뷰캐넌
(그의 노예 해방론에 감동, 깊이 공감한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서재필로 하여금 근대적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했다. 미국과 서구적 안목으로 조선을 돌아볼 때 그의 피는 끓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여전히 열강의 각축장이 된 채 외세종속적이면서 후진적인 사회로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의 불결함과 미개함, 민주주의 정치를 정착시키려던 개화당 인사들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와 증오에 환멸을 느낀 그는 미국 사회를 동경하게 되었다.

 

서재필은 1894년 한 호텔에서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을 만나 연애를 시작, 같은 해 6월 20일 워싱턴 D.C의 카버넌트 교회에서 결혼하였다.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무시와 차별, 냉대 등으로 이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그에게 뮤리엘 암스트롱은 친절하게 대했고, 때로는 그의 고충을 들어주기도 한다. 뮤리엘의 인간미에 감격한 서재필은 곧 뮤리엘에게 청혼하였고, 뮤리엘은 가난할 것이다, 힘들 것이다, 유색인종이다 등등의 이유로 주변의 반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혼 비용에 부담을 느낀 서재필을 배려하여 간단하게 친지들을 불러 카버넌트 교회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뮤리엘 암스트롱에게서는 두 딸 스테파니 제이슨뮤리엘 제이슨이 태어났다.

 

 

 

복권과 귀국

뮤리엘은 제임스 뷰캐넌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했던 미국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로 그 아버지는 이미 작고한 상태였지만, 의붓아버지가 워싱턴에서 유명 인사였던 탓에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서재필과 뮤리엘 암스트롱은 두 딸 스테파니(Stephanie Jaisohn)와 뮤리엘(Muriel Jaisohn)을 두었다. 서재필은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1894년 6월 워싱턴에서 의사 개업을 하였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로 생계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신혼 살림도 워싱턴에 있던 주미조선공사관 직원 관사에 방을 빌려 차렸다.

이후 평생을 독립운동 참여 등 그가 가정 생계에 초연하여 빚과 파산,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아내 뮤리엘은 남편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고 이는 그가 전심전력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할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193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내에는 노예시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당연하다는 시각과 흑인,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당연하다는 시각이 존재했는데 그는 노예 해방론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제임스 뷰캐넌의 사상에 감동, 깊이 공감하게 된다.

 

한편 1894년 6월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조선에서는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95년초 모교인 컬럼비아 대학 의과대학의 세균학 강사로 출강하였다.

 

1895년 3월 1일 법무대신(法務大臣) 서광범(徐光範)의 건의로 작위가 회복되었다. 1895년 가을, 서재필은 10년 전 헤어졌던 박영효워싱턴 시내에서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조선의 정세를 접하게 된다. 그의 권유로 같은 해 12월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조선으로 돌아올 때 주미조선 공사관에서 마련해준 여비를 받아 11월 10일 워싱턴을 출발, 필라델피아에서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1895년 12월 26일 배편으로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개화 계몽 운동

국 직후

당시 그는 조선의 모든 것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에 크게 낙심, 좌절했고 이를 역적시하는 고종 등의 태도, 일가족이 처참하게 희생된 것, 일본 망명생활 중 조선 조정에서 자신을 암살할 자객을 보낸 것, 미국생활 초반에 당했던 온갖 인종차별과 멸시는 그에게 원한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거의 영어로 대화했고, 되도록 독립문 기공식 때에도 영어로 연설했다.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일부 기록해두었다. 또한 윤치호 등과 살아남은 조카들이 그에게 자결로 죽은 전처의 묘소와 논산 연무대 근처에 있던 생모 성주이씨의 묘소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보라는 권고를 거절한다. 윤치호는 이를 두고 그가 냉정한 인물이라며 비토하였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사건으로 천민(賤民)이 되어 자살한 전처의 무덤을 찾아보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거지꼴이 된 양부(養父)가 찾아오자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냉혹하고 거만한 사람이 되었다.


그를 파양했지만 연좌제에 의해 천민으로 격하된 양아버지이자 7촌 당숙인 서광하가 그를 찾아왔지만 서재필은 못본 척 냉정하게 외면하였다. 이를 본 윤치호는 그가 무례하다며 껄끄러워했다. 고종명성황후의 앞에서 그는 절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악수를 청하였다. 이를 본 조정 대신들은 충격을 받았고,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박정양, 박영효, 김홍집, 유길준, 윤치호 역시 경악했다. 영재 이건창은 이를 듣고 사람이 망가졌다며 그를 비난하였다.

 

 

 

귀국 초기와 조선 정부 고문

 

유길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한 민씨 정권이 몰락한 후 개혁 내각이 들어서자 1894년 김홍집에 의한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청나라의 패망을 두고 그는 조선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고 하였다.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국을 방문 중 워싱턴 시에 들른 박영효를 만나,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귀국을 결심한다.

 

박영효를 만난 뒤 다시 조선을 개혁해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그는 박영효의 권유로 망명 10년 만인 1895년 12월 배를 타고 하와이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체력이 좋았던 그는 한번도 뱃멀미를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경유할 때 일본 동경의 모교 토야마 사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다시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12월 25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당시 내각을 맡고 있던 유길준이 그를 초빙형식으로 귀국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서울대 사학과 명예교수 신용하에 따르면 갑신정변이 민중의 지지가 결여되었기에 실패했던 교훈을 되새긴 유길준은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하다고 생각했다. 갑오경장개화파 내각의 주도로 제도 개혁을 하면서 일본측의 한성신보에 대항할 신문을 만들 한국인을 물색했는데, 그가 서재필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유길준은 유길준 대로 개혁과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고, 일본은 일본 대로 1895년 무렵부터 조선신문 창간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신문 개설을 권고하였고, 이에 내부대신 유길준은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의사 생활을 하던 필립 제이슨을 초빙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귀국 직후 연설에서 그는 조선단군이래의 4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자주국임을 전제하고, 과거 조선이 대대로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등의 식민지 노예와 다를바 없는 생활을 하였으며 조선이 살 길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민중 혐오와 합리주의적인 태도

그는 갑신정변 직후의 쓰라린 기억을 생각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고, 오히려 냉정해지려 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윤치호, 유길준, 박정양, 이상재를 비롯한 동지들과 다른 조선인들에게 반감과 거부감을 주게 된다. 한편 그는 다른 조선인들에게도 상당히 냉담하게 대하였다.

 

그(서재필)의 미국인 고우(故友)는 그와 함께 거리를 걷다가 그가 가까이 오는 거지를 발길로 걷어차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윤치호 일기 1898년 1월 15일


그의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한성을 다니던 중 미국인이 구걸하러 오는 조선인 거지를 발로 걷어차고 모욕을 해도 그는 이를 지켜보면서 방관하였다. 영어를 주로 구사하는 그의 태도를 의문스럽게 여긴 윤치호는 왜 영어만 쓰느냐고 물었고 그는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이를 알던 윤치호는 '나는 서재필이 쓰거나 말하는 모든 것에 걸쳐 모국어를 거의 잊어 버렸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1896년 7월 그는 한성에 사는 진사 정모를 고소하였다. 1896년 7월 고등재판소 판결문에 '한성에 사는 미국 의사 서재필'이 원고로 등장한다. 서재필은 진사(進士) 정모씨가 올린 ‘거짓 상소(上疏)’ 때문에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손해배상금 2000원을 청구한 사건이다. 재판부는 “서재필을 상하게 하려던 정씨의 나쁜 마음이 드러났다”며 “피고 정씨는 손해배상금 1000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의정대신(議政大臣, 국무총리)의 연봉이 5000원(현재 1억 2000만원)인 점에 비추어 손해배상금은 요즘 돈으로 2400여만원 정도의 고액인 셈이다. 이는 또한번 조선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조선에서는 명예를 중시 여겨, 탄핵 상소가 사실여부를 떠나 자신에 대한 탄핵상소가 올라오면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나거나 반론을 제기하였지, 자신을 탄핵한 사람을 고소하는 일은 없었다.

 

 

 

조선 정부 고문과 계몽 활동

1896년 1월 김홍집 내각으로 부터 10년 임기의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동시에 평민들에 대한 교육, 계몽활동과 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어 유길준에게 신문간행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였다. 이어 1월 19일 한성부에서 최초의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장기체류를 결심하고 우편으로 컬럼비아 대학 의과대학의 세균학 강사직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유길준, 박영효, 박정양 등을 만나 '조선근대화를 하려면 반드시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중국의 노예가 아닌데도 중국에 해마다 인삼과 황금, 석탄, 여성, 환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유길준박영효 등의 적극적인 후원과 주선으로 쉽게 조선에 입국할수 있었으며, 10년 계약으로 월급 300원을 받는 중추원 고문에 취임하였다. 당시 환율은 원과 달러가 같았으며 미국에서 받는 월급은 100달러였다. 귀국 직후 그는 고종을 찾아가 연좌제와 고문 등 신체를 상하게 하는 악법을 폐지할 것과, 문벌과 집안을 살피지 말고 인재를 등용할 것과, 과거 제도에 평민들도 응시할 수 있지만 가난한 농사와 기술에 종사하는 평민 자제들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점을 들어 조정에서 비용을 들여 인재를 기를 것을 건의하였다.

 

서재필이 처음 귀국했을 때 윤치호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가 체포대상이 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었다. 서재필은 두문불출하던 윤치호를 찾아 정세에 대해 자문했고, 윤치호는 선배 서재필의 공백기에 조선 정세를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동시에 정동구락부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 서재필이 귀국하자 정부의 외척 고관들은 그가 갑신정변으로 동료들이 처형당하고 가족까지 연좌된 것에 원한을 품고 자신들에게 보복할 것을 우려, 서재필을 제거하려 했다. 그가 미국과 외국의 힘을 빌어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 한다는 것이다. 윤치호는 이를 서재필에게 알려주고 각별히 조심할 것을 부탁했다. 서재필은 곧 미국인 경호원들을 대동하였다.

 

 

 

관직 거부와 독립신문 준비

 

독립신문 초판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인 윤치호

 

 

귀국 직후 시도했던 신문 간행이 일본에 의해 좌절될 뻔했을 때 서재필의 상심을 들어주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윤치호였다. 윤치호아관파천 직후 신문 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재필을 돕고 싶었지만, 이미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에 다녀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았기에 도울 수 없었다. 1895년 유길준은 그에게 벼슬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사양하였다. '갑신정변이 민중에 뿌리를 박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느껴 민중 계몽 사업을 하겠다며 조용히 거절했다. 바로 고종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그는 절하지 않고, 안경을 쓰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팔짱을 낀 채 고종의 물음에 그대로 말대답을 하였는데 이는 임석한 조정 대신들을 경악하게 하였다. 이범진 등은 이를 계속 소문을 내서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매천 황현 역시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서재필은 미국에 살면서 본국에 있는 본처와 헤어지고 미국여자와 결혼했다. 그는 갑오년에 환국한 뒤 고종을 알현할 때 안경을 쓰고, 궐련(卷煙, 담배의 번역음)을 꼬나물고, 뒷짐을 지고 나타나 외신(外臣, 다른 나라의 신하)을 칭했다. 이에 조정이 온통 분노했다
 
매천야록


당시 대한제국은 상사나 연장자 앞에서는 담배를 피워도 안되고, 연장자나 상관 앞에서는 안경을 끼는 것도 불경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서재필은 곧 외무부 협판(지금의 외교부 차관)자리를 제수받았으나 거절하고, 형식적으로만 대한제국 정부의 고문 겸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수락할 수 없다고 하여 중추원 고문관 자리를 주었으며, 신문 창간을 할 수 있도록 국비를 지원했다. 개화파정부는 개화인사 중 몇안되는 지도자인 서재필을 외무부협판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보수파와 민씨 척족들로부터의 만약의 방해와 모략에 대비하기 위해 권력의 내부에 들어가기보다는 권력의 외부에서 안전한 미국시민으로 민중을 계몽하려고 하였다. 그의 포부를 본 박영효는 5천 원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나 약속은 박정양 내각이 들어선 뒤에 이행되었다.

 

대신 그는 개화파 정부와 근대화 운동의 한 방편으로 신문의 발간을 합의하고 신문 창간의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받아 활동하였다.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점과 민씨 내각의 반대를 잘 알던 그는 내각에 입각하는 대신 중추원 고문직으로 돕겠다고 하여 개화파 정치인들을 일단 안심시킨다. 신문 창립 비용으로 국고에서 3천원과 정착 자금으로 1400원 등 4400원을 받았고, 월 300원씩 10년간 중추원 고문직을 맡기로 한 것이었다. 1896년 1월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귀국 직후부터 신문은 계몽의 한 방법이라는 유길준의 설명을 듣고, 그는 신문 발간을 준비해 왔고, 국내 온건 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원, 일부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성금 모금 등으로 그는 신문을 발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