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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7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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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7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7

두바퀴인생 2013. 2. 24. 04:41

 

 

 

우면산의 겨울 17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7

 

 

 

                                      남부순환로 예술의 전당, 병원 갔다 오는 날 버스 속에서......

 

 

"식민지 시대와 근대적 민족주의"

 

 

신채호와 이광수

 

전통사회에서 모더니티로 가는 길목에 식민지 시대가 놓여 있었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큰 비극의 하나였다. 우리 시회가 걸어온 길은 비서구적인 모더니티였으며, 그것도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도정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민족주의는 다시 한번 강렬하게 분출했고 근대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신채호와 이광수는 지난 20세기 전반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의 서로 다른 초상을 대표한다.

 

 

                                                                  예술의 전당 입구

 

 

식민지 시대와 민족주의

사전적 의미에서 민족이란 '한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언어.풍습.종교.정치.경제 등 다양한 사회 및 문화생활을 공유해온 공동체'를 뜻한다. 민족주의란 바로 이 민족이 갖는 정치적.의식적 기획, 즉 민족의 자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모색하고 추구하는 이념을 뜻한다.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 이러한 민족주의가 갖는 중요성은 실로 지대하다. 민족주의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는 가치이자, 나이가 들어 보수와 진보로 나뉜다 해도 대다수 사람들이 공유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가 백범 김구인데, 김구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민족주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가 드세게 분출하고 새롭게 재구성된 시기가 바로 식민지 시대이며 우리 민족 주권이 상실된 시대였다. 민족의 주권을 되찿으려는 독립운동에서 민족주의가 부상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식민지 시대의 36년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요즘 기준으로 평균 수명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며 인생에서 최성기를 누리고도 남을 기간이다. 더욱이 다른 국가의 식민지 통치와 비교할 때 일본의 식민통치는 더없이 강압적이었다. 마치 영구화된 식민지 건설을 목표로 한 듯 일제는 우리 사회를 철저히 통제하고 억압했다. 그 핵심적 국가기구는 헌병에 기반을 둔 경찰제도였다. 1919년 3.1운동의 결과 문화통치가 표방됐지만, 경찰제도에 의한 탄압과 수탈은 오히려 강화되었고, 한민족 말살정책은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추진됐다.

 

이러한 일제의 강압적 식민지배가 우리 모더니티의 형성에 개인적.집합적 주체의 정치.문화 경험과 제도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일제 식민지배 통치 기구는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는 감시국가의 성격을 강화함으로서 시민사회의 자발적 조직화를 저지하는 동시에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포함한 민족해방운동을 극도로 탄압했다.

 

이러한 식민주의의 맞은편에 놓인 것이 다름 아닌 민족주의다. 전통 사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우리 민족주의는 식민지 시대를 경유하면서 갈등과 분화를 겪으면서 근대적 이념으로 발전했다. 여기에는 역사학의 기여가 중요했는데, 박은식과 더불어 특히 신채호의 역활이 중요했다.

 

 

 

                                                                   강님대로 전경

 

 

민족주의에서 무정부주의로

신채호는 1880년 충청남도 대덕(현 대전시 대덕구)에서 태어났다. 널리 알려진대로 호는 단재다. 아버지는 신광식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 부인이다. 아버지가 죽자 신채호는 청원군 낭성면 구래리로 이사하여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898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 다음 <황성신문> 등에 왕성하게 사설을 쓰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신채호의 삶은 오로지 독립운동에 맞춰졌다. 1906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맡았고, 1907년 신민회에 가입했으며, 1910년에는 안창호, 이갑 등과 텐진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1910년 신한청년회를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수시로 만주 지역을 답사하면서 우리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작업에 착수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해 의정원 전원위원회 의장으로 피임됐으며,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철저한 독립운동 노선을 걸었다.

 

1920년대 신채호 독립운동의 주요 무대는 북경이었다. 그는 민족주의 역사학을 확립한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등을 집필하는 동시에 의열단 선언문으로 알려진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했다. 이즈음 신채호는 자신의 사상적 거처를 무정부주의로 옮겨깄다. 1928년 대만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되어 다렌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지역 10년형을 언도받아 뤼순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6년 해방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순국했다.

 

신채호는 언론인이자 역사학자, 무엇보다도 독립운동가였다. 이미 언론인으로 잘 알려진 그가 1931년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사'를 통해서였다. 곧이어 그는 <조선일보>에 다시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하여 한국사 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해방이 된 후 1948년 '조선사'는 이를 국내에 소개한 안재홍이 서문을 쓴 <조선상고사>로 간행됐다.

 

 

 

                                                                            강남대로 빌딩 전경

 

 

<조선상고사>, 민족주의 역사학의 확립

<조선상고사> 첯 머리에 신채호가 쓴 글에 의하면 신채호에게 역사란 '아'인 조선 민족과 '비아'인 다른 민족 간 투쟁의 기록을 뜻한다. 이러한 역사관은 민족적인 것과 비민족주의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사대적인 것, 고유한 것과 외래적인 것, 혁신적인 것과 보수적인 것의 투쟁으로 특정지어지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역사이론이다. 이러한 신채호의 역사관은 경쟁을 강조하는 사회 진회론과 변증법을 강조하는 헤겔의 역사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민족주의이론이 그 중심을 이룬다.

 

<조선상고사>는 총론을 포함하여 전체 11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체적으로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 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列國爭雄) 시대, 5편 고구려 전성시대, 고구려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백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 고구려 공수(功守)동맹, 8편 3국 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당전역(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상고사>가 갖는 의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첯째,역사를 모순관계의 상극투쟁을 통해 사회가 진보하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사료의 수집 선택과 그에 대한 비판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 방법을 제시하였고,

 

둘째, 고대사의 영역을 한반도에서 만주 지역으로 확장함으로서 고대사 인식체계의 일대 전환을 요구하였다. 신채호는 김부식의 역사인식을 일관되게 비판하면서 신라 중심의 역사에서 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로 전환시켰다. 그는 고려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 천년 이래 가장 큰 사건'으로 인정하며 사대파에 의한 북벌파의 좌절로 파악했다.

 

 

 

                                                                 특이한 디자인 빌딩

 

 

시대정신과 신채호의 민족주의

신채호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먼 길을 갔던 지식인이다. 애국계몽운동에서 시작해 독립운동으로 나아갔고, 다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무정부주의 운동에서까지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는 근대화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였으며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했다. 신채호라는 한 지식인의 사상적 편력을 통해 모더니티를 향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시대정신의 스펙트럼을 조망할 수 있다.

 

시대정신의 시각에서 신채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근대적 민족주의의 체계화다. 시채호는 국민의 생명.재산.권리를 보호한다는 민족국가를 중시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완전독립과 절대독립을 쟁취해 자주부강한 입헌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완전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가 선택한 것은 무장투쟁이었다. 현재적 관점에서 그의 민족주의론은 민족국가의 자율성과 입헌공화제를 특권화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민족주의론이라 할 수 있다.

 

1910년대 후반부터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1923년 의열단의 요청에 의해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에는 무정부주의자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이는 그의 후기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증거가 된다. 그는 외교론과 준비론을 주장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론을 비판했을 뿐 아니라 문화운동 등을 주장한 국내의 실력양성론 또한 거부했다. 그가 민족해방의 주요 전략으로 제시한 것은 테러에 기반을 둔 직접행동론이었다.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론은 그가 민족주의에서 민중주의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민중직접행동을 통해서만 민중의 자유가 보장되고 민중이 주인인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게 그가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이다.

 

신채호는 당대 많은 지식인과 교유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조선을 떠나면서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 들러 춘원 이광수를 만난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한때 독립운동을 같이 했지만, 신채호가 일관된 비타협노선을 고수한 반면, 이광수는 타협노선을 선택했고 그 종착역은 안타깝게도 친일이었다.

 

독립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신채호의 짧지 않은 생애는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여전히 가슴 한쪽을 시리게 한다.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신채호의 유해는 화장되어 유골로 국내에 들어와 고두미 마을에 토장되었다. 당시 한용운과 오세창이 비갈을 짓고 비석을 세웠으며, 1980년 그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무덤 앞에 영당을 지었다.

 

 

 

                                                                    눈덮인 우면산 정비된 계곡

 

 

이광수, 민족주의에서 친일로

신채호가 오산학교에서 만났던 이광수 또한 20세기 전반 우리 사회에서 문제적 지식인이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한데, 첯째, 이광수는 최초의 현대소설이라 할 수 있는 '무정'을 쓴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소설가다. 둘째, 그는 실력양성론, 민족개조론 등의 온건 독립운동 노선을 대표했다. 그의 이러한 노선은 근대 개몽주의를 널리 알린 그 나름의 기여가 있었음에도 결국 친일로 귀결됐으며, 이로 인해 해방 이후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이광수는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이버지는 이종원이며 어머니는 충주김씨 부인이다. 여러 필명을 사용했지만 대표적인 호는 '춘원'이다. 1902녀 부모의 죽음으로 고아가 된 이광수는 동학에 입도했고, 1905년 일진회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대성중학교와 메이지학원을 다녔으며, 1910년 정주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후 중국 등을 유랑하던 그는 1915년 다시 도일해 와세다대학교 예과에 편입했다.

 

1917년 기념비적 작품 무정을 발표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에는 <2.8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이후 상해로 탈출한 그는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일하다가 1921년 귀국했다. 1922년에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해 논란을 일으켰으며, 1923년에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이광수는 상하이 시절부터 안창호에게 큰 감화를 받았는데, 1926년 안창호의 영향 아래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수양동우회'를 결성했다.

 

1930년대 이광수의 삶은 드라마틱했다. 1932년 대표작 중 하나인 <흙>을 발표했고,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보석으로 풀려났다. 1938년 안창호가 죽자 큰 실의에 빠진 그는 1939년부터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가야마 마쓰로'로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 시.소설.논설 등을 발표하고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8.15해방  이후 1948년 반민법에 의해 구속되기도 했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남북돼 그해 12월 평안북도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면산 등산로에서 바라본 남부순환도로

 

 

민족개조론의 문제점

이광수는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며 사회운동가였다. 1910년대부터 그는 많은 논설을 발표했고, 안창호를 만난 이후에는 국내 흥사단운동을 이끌었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이광수의 활동에서는 후자가 전자 못지않게 중요했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책에서 국문학자 김윤식씨에 의하면 이광수에게 중요했던 것은 수양동우회였으며, 문학은 이광수 자신의 표현처럼 정작 여기였다고 지적한다.

 

아직 직업의 문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모더니티 초기에 어느 나라건 지식인은 일종의 르네상스적 작업을 하게 된다. 신채호를 보더라도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돌> 등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광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을 뿐 아니라 <민족개조론>, <민족적 경륜>등 여러 논설을 발표했다. 발표당시 큰 대중적 인기를 모은 소설 <흙>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 작품은 당시 동아일보사가 벌인 '농촌개몽운동'과 '동우회운동'에 밀접히 관련돼있다.

 

이광수 작품 가운데 특히 1922년 <개벽>에 발표한 장문의 소설 <민족개조론>은 당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리는 독립운동의 양대 노선을 이룬 '준비론'과 '투쟁론', '실력양성론'과 '무장투쟁론'에서 준비론과 실력양성론에 가까운 논리를 제시했다.

 

그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민족개조의 의미와 역사를 다루고, 중간 부분은 민족개조의 취지와 가능성을 검토하며, 마지막 부분은 민족개조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이광수는 논설의 결론은 문화운동을 통해 민족개조를 모색하려는 온건 민족주의 성향의 담론이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무엇보다 안창호의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안창호의 독립사상은 독립운동전선을 정비해 결정적인 시기에 대비하자는 '준비론'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안창호의 준비론은 일제와 타협하자는 소극적인 노선이 아니라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독립전쟁을 준비하자는 적극적인 노선이다. 실력양성을 위해 그는 민족혁신을 주목하고, 이 민족혁신을 위한 무실.역행.충의.용감의 자기개조 및 자아혁신을 강조했다.

 

문제는 민족개조론이 안창호의 사상에서 출발하고 있기는 하지만, 안창호의 준비론보다 훨씬 더 온건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데 이광수는 그동안 진행되어온 정치적 운동이 모두 일본을 적대시한 운동이었으며, 조선 내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기존 독립운동의 의의를 부정하는 이러한 논리는 발표 당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더욱이 이 민족개조론은 김윤식이 지적하듯이 3.1운동 이후 막 등장하기 시작한 사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총독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이용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광수에게 일본 식민주의는 일종의 애증병존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의 앞선 문명은 모델이기도 하고 식민지 억압의 주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증병존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 결국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적 문명화의 길을 따르는 민족개조론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광수는 조선독립과 문명개화의 상반된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갖고자 했다.  그러나 이 균형은 매우 위태로운 것이었는데, 그 균형이 문명개화의 열망 쪽으로 기울어졌을 때 그것은 친일 활동으로 나타났다. 물론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친일을 선택했을 테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일본에 대한 이광수의 애증병존적 인 태도에 친일의 길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눈덮인 우면산 등산로

 

 

민족주의의 현재와 미래

신채호와 이광수의 사상을 돌아보면 시대정신과 사회학적으로 우리 민족주의는 세 가지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첯째,우리 민족주의와 서구 민족주의는 사뭇 다르다. 서구 민족주의는 '상상적 공동체 의식'이라면, 우리 민족주의는 한민족이라는 문화적.사회적 독자성을 갖는다. 우리 민족 안에는 전통과 모더니티,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해 있는데, 역사의 굴곡이 컸던 만큼이나 우리 내면 안에는 민족주의가 강인하게 살아 있었다.

 

둘째, 우리 민족주의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민족해방의 전통을 갖고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그 연장선상에서 세계체제에 대응하는 이념적 구심을 이루어왔다. 일제 식민지 경험 속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고 신간회에서 보듯이 우파와 좌파가 함께 힘을 모으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근대적 민족주의의 형성에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기여해왔다는 점이다. 근대적인 민족주의의 기원을 어디에 두든 그것은 특히 개항 이후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저항 속에서 형성됐으며,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 민주주의와 결합함으로써 시민적 민족주의의 의미를 갖게 됐다. 이 과정에서 신채호, 안창호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역활이 특히 두드러졌는데, 준비론이든 투쟁론이든 이들은 모두 민족주의를 공통의 시대정신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근대 민족주의는 우파적 흐름과 좌파적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우파적 흐름이 자유민주주의와 결합했다면, 좌파적 흐름은 급진주의와 결합했다. 식민지 시대라는 구조적 조건 아래  우파적 민족주의는 문화운동을 중시하는 '실력양성론'으로 나타났다면, 좌파적 민족주의는 무장투쟁을 중시하는 '민중혁명론'으로 나아갔다. 이 점에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매우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셋째, 최근 세계화 추세로 민족주의는 경제적 민족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로 분화돼왔다. 지구적 차원에서 경제적 민족주의가 강화되면 될수록 문화적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이 커질 수밖에 없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 선진강대국에 의해 세계화가 강제하는 신자유주로의 구조조정이 지구적 차원에서 확산됨에 따라 경제적 의존 심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결과 사회.문화운동은 서구 중심의 세계화에 맞서는 이른바 '인정(認定)의 정치'를 상징한다.

 

다시 말해, 세계화 시대에 민족주의는 여전히 사회.문화적 저항의 이념적 거점을 이룬다. 지구 문화가 강제되어 가는 흐름 속에 '우리 것'에 대한 열망 또한 커지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이러한 경향은 일상생활에서 정신문화까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며, 한 예로 2002년 두 여중생의 죽음으로 평등한 한.미관계를 요구하며 촟불집회로 비화한 것처럼 사회운동으로 확산되기도 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지금 시대정신으로 우리 민족주의는 새로운 전환 시점에 도달해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21세기적 세계화와 다문화사회가 도래하는 모순적 경향 속에서 민족국가의 경계가 파열되는 모순적 경향 속에서 민족주의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자리메김해야 할 과제를 우리 사회는 안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전통과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가치를 추구하고 보존 발전시키려는 사회적.정신적 함의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분단의 극복과 보수와 진보의 이념 갈등, 계층간, 종교간의 갈등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내부적인 갈등이 분화되고 있는 지금 민족주의가 가지는 가치를 과연 타당한 것인지 재평가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고 본다. 이와 연관해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역사에는 비약이 없다는 점이다. 만약 민족주의가 우리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기획이라면, 그것의 재구성은 역사적인 시대정신을 탐구하고 특히 지난 20세기 전반의 근대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며, 새로운 지구촌의 미래를 설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채호와 이광수의 사상은 우리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함의를 안겨주고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