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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1 : 조선의 역사 413 (제26대 고종실록 3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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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1 : 조선의 역사 413 (제26대 고종실록 36)

두바퀴인생 2013. 2. 25. 04:04

 

 

 

한국의 역사 871 : 조선의 역사 413 (제26대 고종실록 36)                 

              
 

                                          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망국의 몇 가지 풍경들

 

2. 을사늑약

 

"국제정세에 깜감한 고종, 러일전쟁 후 미국에 발등 찍히다"

 

일본은 러일전쟁 때 외교에도 전쟁처럼 임했다. 개전 전부터 강화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했다. 미국과 사전 거래하고 대한제국을 완벽하게 봉쇄했다. 고종이 열강이 도와줄 것이란 환상에 젖어 있는 동안, 일본은 냉정하게 영국 및 미국과 이권을 주고받고 러시아를 상대했다. 게임은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가자 고종은 미국으로 밀사를 파견했다.  <일한외교자료집성>은 고종이 밀사 이승만을 미국에 보내 강화회담을 조금이라도 한국에 유리하게 이끌려고 시도했다고 전한다. 독립협회의 열렬 청년 이승만은 1899년 '박영효 총리추대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위기까지 몰렸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겨우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4월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11월 4일 고종의 밀사로 도미길에 올랐다. 무기수에서 밀사로 극적인 변신을 한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을 대표하는 목사 윤병구와 함게 미 본토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이 믿었던 주미 대리공사 김윤정은 한국 정부의 공식 훈령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도와주지 않았다. 주미 일본 임시대리공사는 이들의 행동 일거수 일투족을 일본에 보고했다. 김윤정은 이미 일본을 선택했고,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충북도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김윤정 공사가 이승만을 도왔더라도 별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1905년 8월 18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강화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일본의 한국 지배는 이미 기정사실로 밀약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만주의 러시아 이권을 얼마나 넘겨받을 것인지와 배상금이 문제였다.

 

일본 각의는 강화회담이 열리기 4개월 전 4월 8일, 이미 한국에 대해 이른바 '보호권 확립' 방침을 결정했다. <일보외교 연표 및 주요문서>명치 38년(1905) 4월 8일조에 따르면 "한국의 대외관계는 모두 일본에서 전담한다.",  "한국은 직접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지 못한다.",  "일본은 한국 자차관(통감)을 두고 한국의 시정을 감독한다."는 등의 내용을 이미 결정했다고 한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반쪽짜리 독립국으로 전락시키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면서 일본 각의는 "이 조약으로 한국과 열국과의 조약상 관계가 일변할 것"이므로 반응에 마지막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국의 반발은 그들에게는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일본은 1902년 1월 이미 영일동맹을 체결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영국으로부터 승인"받았다. 일본이 1904년 2월 귀족원 의원 가네코 겐타로를 미국에 특사로 보낸 것은 그가 루즈벨트 대통령의 하버드대 동창생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본이 루즈벨트 대통령을 중재자로 점찍고 루즈벨트가 중재자로 자처하고 나선 것 자체가 일종의 사기였다. 포츠머스강화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1905년 7월, 미국 대통령 특사인 테프트가 필리핀 방문 길에 일본을 찿았고 그때 필리핀은 미국, 한국은 일본이 차지하기로 서로 밀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1924년까지 극비였던 세칭 '가스라-태프트 밀약'에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 평화에 직접적으로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고 확인해주고는 자신들은 필리핀을 차지했다. 1905년 9월 5일 체결된 포츠머스강화조약에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한국은 물론 여순과 대련의 조차권과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까지 양도받았다. 일본과의 거래 사실을 숨긴 악덕 중계인 루즈벨트는 포스머스강화조약 주선의 공으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 약소국을 한 강대국이 확실히 차지하는 것이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평화관이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배상금 지불을 끝내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 내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승리하긴 했지만 일본의 희생도 막대했던 것이다. 1904년 8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벌어진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은 전사자 1만 1,100여 명(러시아는 7,400여 명)이 발생했다. 총 사상자는 5만 9,000여 명에 달하였다. 1905년 3월 초의 봉천회전에서 전사자 1만 5,000여 명(러시아는 8,700여 명)이 생겼다. 전비도 10년 전 청일전쟁 때의 2억 48만 엔에 비해 8배 많은 15억 8,400만 엔이나 들었으니 배상을 꼭 받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대 러시아 강경파가 주축인 '강화문제동지연합회' 등은 조약 체결시 조약 파기 국민대회를 열었다. 9월 5일부터 7일까지 일본 각지에서 17명이 사망하고, 2,000여 명이 체포되는 소동까지 발생했다.

 

 

                                                       러.일 대표단의 포츠머스 강화회담 전경

 

루즈벨트가 이미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 것을 몰랐던 고종은 1905년 10월에도 미국인 헐버트를 통해 루즈벨트에게 친서를 보냈다. 고종은 이미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패전국 러시아까지 매달렸다. 11월 하순, 측근 이용익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 주 러시아 공사 이범진과 러시아 외무대신 람스도르프를 만나 "러시아에 한국의 이권을 주는 대신 보호를 요청한다"는 고종의 계자(국왕의 결재 도장을 받은 문서) 공문을 전했다. 당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은 이용익이 상해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과정을 자세히 적고 있을 정도로 고종의 특사 외교는 일본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고종은 1906년 1월에는 <런던트리뷴> 기자 스토리를 통해 북경 주재 영국 공사에게 5년간 열강의 보호를 요청하는 국서를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이미 열강들은 한국을 일본의 몫으로 인정한 후였다.

 

1905년11월 9일 일본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가 방한했다. 그런데 나흘 전인 11월 5일 친일파 송병준이 결성한 일진회에서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했다.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는 것이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영원히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란 내용으로 이토가 할말을 대신한 것이다. 나중에 송병준과 이완용은 누가 한국 멸망에 더 공을 세우는지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한국이 부강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이로서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인 통감에게 넘어갔다.

 

그해 12월 21일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결정되는데, 외교 외에도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사실상의 준총독이었다. 외교권 강탈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조약 체결 당시 외무대신이던 박제순을 비롯해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와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황성신문>은 조약 체결 다음 날인 11월 18일, "수십 인의 군중이 학부대신 이완용 집에 돌입하여 불을 질렀다"고 보도했다. 20일에는 주필 장지연이 '이 날을 목놓아 통곡한다'는 논설을 실어 항의했다. 전국 각지에서 을사오적 처단과 조약 파기를 외치며 의병이 봉기했다.

 

그러나 고종은 협상 체결 당사자였던 외부대신 박제순을 11월 22일자로 과거의 정승 격인 의정부 의정대신으로 승진시켜 정권을 맡겼다. 다음 날 전 의정 조병세가 고종에게 "박제순에게 방형(사형)을 실시하고 나머지 대신들도 매국의 율로 다스려야 한다" 고 주청하고 민종묵.윤두병.이상설.안병찬 등도 항의 상소를 올렸다. 자결 항쟁도 잇따랐다. 1905년 11월 30일 시종부무관장 민영환이 자결하고, 다음 날에는 조병세가 음독자살했다.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은 영국에서 음독자살하고 12월 4일에는 학부주사 이상철, 시위대 김봉학이 자결했다.

 

성토 대상이 된 을사오적은 12월 16일 공동으로 상소를 올려 "새 조약의 주지로 말한다면, 독립이란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잠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진다면 도로 찿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궤변과 함께 사직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자결자들에게 따로 시호와 훈장을 내려 표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을사오적의 공동 상소에도 "지금처럼 위태로운 때에는 오직 다 같이 힘을 합쳐 해나가야 할 것"이라며 사직을 만류하는 이중적인 정치행보를 계속했다. 고종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정치노선을 선택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열강들이 대한제국을 이미 일본의 몫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줄타기 정치 수완과 외교적 방법으로 되찿을 수 있을 것이라는 허망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