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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3 : 조선의 역사 415 (제26대 고종실록 38) 본문
한국의 역사 873 : 조선의 역사 415 (제26대 고종실록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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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가족 사진
제26대 고종실록 ( 1852~1919년, 재위 : 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망국의 몇 가지 풍경들
4. 헤이그 밀사
"고종과 일제,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을 놓고 두뇌싸움을 벌이다"
고종 통치의 특징 중 하나가 이중성이다. 그는 을사늑약 체결 주범들에게 정권을 내주는 한편 의병들에게는 밀지를 내려 거병을 축구했다. 하지만 각 지방의 진위대는 고종의 명령에 따라 의병을 진압했다. 고종은 표면적으로는 통감 이토에게 순응하는 한편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 외교권을 되찿으려 했다.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당사자인 박제순을 승진시켜 내각을 맡겼지만 의병들에게는 거병을 촉구했다. '밀지 정치'도 고종 정치의 한 특징인데, 전 도사 정환직이 을사늑약 후 아들 정용기와 함께 영남의 '산남의진'을 일으킨 것도 고종의 밀지에 따른 것이었다. 고종이 정환직의 승리를 바랐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정환직이 과거 삼남검찰 겸 토포사로서 동학 및 의병 진압에 나섰던 것처럼 진위대도 고종의 명에 따라 의병 진압에 나섰다는 점이 문제였다.
고종은 재위 41년 9월에도 동학 비적 잔당이 다시 창궐한다면서 각 지방 진위대에 진압하라고 명했다. 그해 12월 말 참정대신 신기선은 사직 상소에서 "진위대 군사들은 비적을 핑계 대고 백성들을 침학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위대 입장에서는 비적이지만 국권회복 차원에서는 의병이었다. 의병은 고종이 몰래 내린 밀지에 따라 거병했고, 진위대는 고종의 공개된 명령에 따라 진압하는 웃지못할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고종의 이중성에 백성들만 서로 죽이면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고종은 외교적으로도 외국 여러 나라에 밀사를 보내 외교권을 되찿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큰 기대를 걸었다. <어담소장회고록> 등에 따르면 고종은 참정대신 박제순에게 밀사 파견에 대해 미리 상의했는데 박제순이 "일본은 저를 신임하고 있어 발각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고, 훗날 고종이 "박제순을 믿은 것은 짐의 착각이었다"고 토로한 것을 보면 을사늑약 체결자 본인을 믿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밀사 파견을 결심한 고종은 통감 이토와 머리싸움에 들어갔다. 당초 이토가 밀사로 짐작한 인물은 친러파 이용익이었다. 러일전쟁 때 러시아를 방문했던 이용익은 1906녀 상해로 귀환했다가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했다. 살아 있었다면 밀사가 되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그는 1907년 2월 급서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후 일제는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를 주목했다.
<통감부문서> 1907년 5월 9일자, 통감부 총무장관 진다 스테미가 외무차관에게 보낸 기밀보고서를 보면 "헐버트가 8일 서울을 떠나 고베와 쓰루가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러시아로 갔다가 미국으로 갈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헤이그에서 한국을 위해 무언가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보고했다.
위 보고서는 "헐버트가 헤이그에 간다는 것은 소문에 지나지 않지만 혹시 한국 조정의 밀사라 칭하고 각국 위원을 역방하는 일이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덧붙여서 고종의 밀사 파견을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었다. 박제순에게 발설한 내용은 이미 비밀일 수 없었다. <통감부문서> 5월 19일자는 이토가 하야시 곤스케 외무대신에게 보낸 '한국 황제 밀사 헐버트 헤이그평화회의 파견에 관한 건'이란 전신을 싣고 있었다. 이토도 이 전신에서 "한국 황제가 ....러시아.프랑스를 믿고 독립을 회복하려 기획하고 있다. 미국인 헐버트에게 거액의 자금을 주어 파견했다"며 밀사를 헐버트로 단정지었다. 당시 일제는 고종의 카드가 헐버트가 아니라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라는 것 정도만 일본이 몰랐을 뿐이다. 당시 이상설은 을사늑약 체결 닷새 후인 1905년 11월 22일 고종이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자 격렬한 항의 상소를 올렸다.
왼쪽부터 이상설, 이위종, 이준 열사
이상설은 상소에서 "아! 장차 황실이 쇠해지고 종묘가 무너질 것이며, 조종이 남겨준 유민들은 남의 신하와 종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국의 운명을 정확하게 예견했다. 제국의 운명을 알면서도 이상설은 박제순, 이완용처럼 그 운명에 편승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상설은 1906년 4월 18일 이동녕과 함께 비밀리에 출국해 상해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통감부 간도 파출소장 사이토는 보고서에서 "전 군부대신 이용익과 주 서울 러시아 공사 파바로프 사이를 왕복한다"는 이상설의 행적에 대해서 조사 보고를 올렸고, 그때 이상설은 이용익을 만나 헤이그 밀사 파견에 대해서 논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헤이그평화회의는 당초 1906년 8월 개최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상설은 여기에 맞춰 출국했다가 회의가 연기되면서 연길현 용정촌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열고 임시로 교장이 되었다고 한다.
용정의 이상설과 서울의 고종을 연결한 통로에 대해서 그간 많은 추측이 있었는데,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각종 사료와 일가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고종의 조카인 조남승.조남익 형제라고 보고 있다. 이들이 마련한 자금이 바로 밀사 파견 지금인데, 일제의 '흑룡회' 자료에 따르면 고종이 20만 원을 내탕금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전기.철도를 운영하면서 궁중에 자주 출입하던 미국인 콜브란을 통해 지출했다고 전한다.
또한 고종과 아상설의 연결 역활을 한 곳이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교였다. 상동교회 뒷방에는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이희영, 이상설, 이준 등 지사들이 무시로 모여 국사를 논하던 곳인데, 이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 사건의 온상이라고 전한다.
1907년 4월 20일 고종은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이위종을 평화회의 특사로 내락하고 수결과 국새가 찍힌 백지 위임장 등을 내려주었다. 위임장은 시종 조남익과 내시 안호영의 손을 거쳐 조남승에게 비밀리에 전달되었고 다시 상동청년학원에 극비리에 보내졌다. 상동청년학원 이희영.이시영 형제, 진덕기, 양기탁 등은 이것을 부사로 인준된 이준에게 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준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이상설과 합류했다. 일본이 헐버트에게 신경을 쏟는 동안 고종은 이상설 카드로 허를 찌른 것이었다.
<통감부문서>를 보면 당시 블라디보스톡 주재 무역 사무관 노무라가 통감부 총무장관에게 보낸 문서 내용은 이상설, 이준, 이범윤에 대한 행동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고 고종의 밀사 파견 행위가 우매한 행위로 어린이들 장난같은 일로 폄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청일전쟁 후 일제가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다시 돌려준 삼국간섭 같은 기적이 일어나 주기를 바랐지만, 그런 기적은 재연되지 못할 상황으로 국제정세는 변하고 있었다.
고종과 대한제국 지식인들은 미국인 선교사 마틴이 미국 법학자 휘튼의 저서를 번역한 <만국공법>에서 '독립국 유지 이론'을 찿았다. 이 책은 기존의 화이관적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활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국제법이 강대국들의 약소국 침탈을 합리화하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헤이그만국평화회의
이상설, 이위종, 이준 3명의 밀사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열렸던 제2차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 회복을 역설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고종과 밀사들은 일본이 빼앗은 한국의 외교권을 되돌려 받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했지만 강대국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다른 개념이었다. 열강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약소국을 차지하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였다. 열강들이 평화회의를 개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식민지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서로 간에 군사충돌을 방지하는 데 있었다. 전통적인 숙적 독일과 프랑스의 충돌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두 나라가 충돌하면 동맹관계의 다른 열강들도 휘말릴 수 있었기에, 이 경우 교전 규칙이라도 미리 만들이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것이 평화회의의 개최 목적이었다.
제1차 평화회의는 1899년에 열렸는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제안해 그해 5월에서 7월까지 헤이그에서 개최되었고 모두 26개국이 참가하였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와 미국, 멕시코, 청나라, 일본, 시암(태국)이었다.
제 1차 평화회의는 군축, 전시국제법, 중재재판소 등 3개 분과로 나누어 진행되었고, 군축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주제였다. 그나마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선언하고 1901년부터 헤이그에 상설중재재판소를 설치한 것이 가시적 성과였다. 또 육상전에 관한 법규와 관례에 대한 조약을 체결해 육군 전투시 규칙을 제정했으며, 1864년 제정한 제네바협정을 해전에서도 적용하기로 했으며 그 외 비행기구에서 폭탄을 떨어드리지 못하게 금지한 정도였다.
그러나 불과 3개월 후 남아공에서 '보어전쟁'이 일어났는데, 남아공과 영국이 남아공 북부 세계 최대 금광단지 트란스발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1900년 3월에는 중국에서 의화단운동이 일어나자 영국,프랑스,독일,미국,일본, 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8개국 군대가 그해 8월 북경을 점령했다. 보아전쟁은 트란스발을 영국이 차지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중국은 열강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처럼 헤이그에서 울려퍼졌던 평화의 본질은 명확히 드러났고 20세기는 이처럼 약육강식의 치열한 약소국 침탈의 시대였다.
평화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대한제국은 회의가 파한 후에도 이 체제에 들어가기 위해 각국 정부 관계자를 만나다니면서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이런 요청에 대해서 각국은 대부분 본국과 상의한 후 답변하겠다는 의례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대한제국을 러시아나 일본의 몫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1년 4월 독일의 주영 대리공사 에카드슈타인은 주영 일본 공사 하야시 다다스에게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독일.영국.일본의 3국동맹이 필요하다"고 제안했고, 이 제안으로 1902년1월 영일동맹으로 가시화되는데,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정치.경제적 이익을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 이것은 중대한 국면 변화로 이 무렵 외교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고 있던 대한제국은 다시 비상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서울의 하야시 공사가 박제순에게 "영일동맹은 동아시아의 큰 국면으로 봐서 평화를 인전하게 유지하려는 소견에서 비롯된 것이니, 한국 정부도 이를 거울삼아 앞으로 한층 더 양국 간의 친교를 진전시키고 분우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고 말하자 "외부대신은 지극히 안심한 표정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신중한 태도로 본 공사의 구두진술을 청취했다"고 전한다. 이렇듯 영일동맹의 의미 자체도 모르면서 그저 외교에만 매달렸던 것이 대한제국 고종과 외교력의 실상이었다.
1907년 6월 15일부터 열린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의 직접적인 계기는 러일전쟁이었다. 러일전쟁은 승전국 일본의 피해가 더 컸던 전쟁이었다. <일로전쟁사>에 의하면 약129만 명이 참전했던 러시아는 5만여 명이 전사했지만 108만 명이 참전했던 일본은 8만 4,000여 명이나 전사했다. 이른바 평화회의가 열린 것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제안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주창으로 열리게 된 것도 두 사람 모두 러일전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성격의 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독립을 되찿겠다는 고종의 구상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애굿은 열사들의 목숨만 잃고 만 꼴이 되고 말았고 결국은 자신이 왕위에서 강제 퇴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고종은 이토가 예상한 헐버트 대신 이상설을 밀사로 보내 이토의 허를 찔렀지만, 이에 잠시 당황했던 이토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 구실로 삼는 극단적인 처방을 계획하게 된다. 이토는 고종의 음모가 확실하다면 국면 일변의 행동을 취할 좋은 시기로 생각하고 세권.병권 또는 재판권을 빼앗을 기회로 만들게 된다.
일본은 1906년 2월부터 통감 통치를 실시했지만, 고종이 궁내부를 통해 외국과 이권 계약을 맺는 등 일부 통치권을 계속 행사하면서 혼선이 발생했다. 1906년 이탈리아 광업회사가 갑산광산 채굴권, 1907년 2월에는 프랑스인이 평안북도 구성.신천 등의 광산 채굴권을 신청하는 등 각종 특허와 자원 개발권을 신청했다. 통감부는 그간 대한제국이 체결한 각종 조약 원본과 외교 문서를 의정부 의사국으로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궁내부는 '궁중 화재때 모두 소실됐다'며 거절하고 고종의 조카 조남승을 통해 프랑스 주교 뮈텔에게 그것을 맡겨두었다.
앞에서는 이토에게 순응하는 척하면서 뒤에선 다른 태도를 보이는 고종을 일제는 통감 통치의 가장 큰 장애물로 인식하고 고종을 끌어내리기로 결정했다. 참정대신 이완용, 법부대신 조중응, 농산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등이 포진한 친일 내각의 군주는 이미 고종이 아니리 이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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