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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85 : 조선의 역사 427 (절망을 넘어서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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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85 : 조선의 역사 427 (절망을 넘어서 2)

두바퀴인생 2013. 3. 11. 03:32

 

 

 

한국의 역사 885 : 조선의 역사 427 (절망을 넘어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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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 주역들, 앞줄 왼쪽에서 3 번째가 김구 선생

 

 

 

절망을 넘어서 2

 

 

1. 떠나는 사람들, 강화학파

 

 

"살아서 싸우리라" -자결대신 항일을 택한 양명학자들-

 

 

1910년 망국 당시만 해도 광복은 불가능해 보였다. 집권당인 노론은 당론으로 매국에 앞장섰다. 전국의 많은 양반 사대부는 일제가 주는 은사금에 기뻐 날뛰었다. 의병은 1909년의 남한 대토벌로 쑥대밭이 됐다. 그러나 그런 폐허 속에서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진 일단의 사대부가 있었다.

 

1910년 순종 3년 8월 22일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의 정식 명칭은 '일한병합조약'이었다. 합방이 두 나라가 합친다는 뜻이라면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가 고안한 병합이란 말은 강국이 약국을 삼킨다는, 일제의 시각이 그대로 담긴 말이었다. 이렇게 대한제국은 조선 개창부터 치면 518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일제가 정식으로 순종의 통치권을 빼앗은 날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8월 29일이었다. 그 일주일 사이에 있었던 조치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첯째, 일제의 물적 수탈 기반을 만드는 것인데, 8월 23일 법률 제7호로 '토지조사법'을 제정했다.  이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으로 막대한 국.공유지 및 신고 거부, 또는 누락 토지를 강탈한다. 둘째, 민중의 반발을 누르는 조치였다. 8월 24일에는 내각 고시로 정치에 관한 집회와 옥외 대중 집회를 금지한다고 포고했다. 위반자는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협박했다. 세째, 지배층 회유였다. 8월 24일 대원군의 장남 완흥군 이재면을 이희로 개명하고 흥친왕으로 봉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벼슬아치를 승진시키고 훈장을 주었으며, 이미 죽은 자에게도 벼슬을 추증하거나 시호를 내렸다. 민중은 억압하고 양반 사대부는 회유한다는 것이 일제의 한국 점령 키워드였다. 양반 사대부가 민중과 결합해 투쟁에 나서면 식민통치가 어렵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조치를 완료한 8월 29일 드디어 이제는 순종으로부터 통치권을 양도받는 형식으로 대한제국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순종이나 고종이나 그 누구도 동의한 적이 없는 불법 양위권 탈취였다. 같은 날 일왕은 병합 조서를 내리는데, 여기에도 대한제국의 황실과 대신들, 양반 사대부를 우대한다고 규정했다. 고종은 이태왕, 순종을 이왕이라고 칭하고, 고종의 아들 이강과 대원군의 장남 이희를 공으로 삼았다. 또한 고종.순종에게 전하라는 경칭을 쓰게 했다. 고종과 순종을 대공으로 격하시키려 했던 이완용의 구상보다 그나마 나은 대접이었다. 일왕은 이날 발령한 칙령 제318호에서 "한국이란 국호를 다시 조선이라 칭한다"며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환원시켰다. 황제국이었던 대한제국을 제후국으로 강등시킨다는 의미였다.

 

같은 날 칙령 제 319호는 "조선총도부를 설치한다. 조선 총독을 두어 위임 범위 내에서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여 일체의 정무를 통합하게 한다." 고 규정했다. 일왕은 "조선 민중은 직접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을 증진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이 역시 사기였다. 한국민은 일본 헌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총독부 설치령은 이미 6월 3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추인한 데 지나지 않았다.

 

일본 내각은 6월 3일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을 결정해 한국에는 일본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에 의해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대권이란 헌법이 아니라 일왕 자의에 의해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황에 직속된 조선 총독이 대만처럼 일체의 입법.사법,행정권을 갖게 되었다. 일본 헌법을 적용하면 한국에서도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내각을 구성해야 했기에 총독제를 적용한 것이었다.

 

일왕은 8월 29일, "한국 백성이 그 울타리에서 편안치 못하니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며 민중의 복리를 증진함을 위한다"고 표방했지만 일본 헌법의 적용 대상에서도 제외된 한국 민중은 객관적인 일제의 노예였다. 이날 일왕은 칙령 제 327호에서 "조선에서 하는 임시 은사에 충당하기 위해 정부는 3,000만 환에 한하여 5분 이자를 붙여 국채를 벌행할 수 있다"고 정했다. 이는 황실령 제14호의 '조선귀족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조치였다. 3,000만 환의 거금으로 황실과 귀족으로 봉한 자들의 매국 대신들, 그리고 유력한 양반 사대부들에게 은사금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대원군의 장남 이희, 순종의 장인 윤택영 같은 왕실 인사들, 이완용과 조중응 같은 매국 대신들은 물론 지방의 일부 유력한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일제가 하사할 은사금을 기다렸다. 작위와 은사금은 10월 7일 내려졌다. 대한제국은 완전히 멸망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보름 전쯤인 1910년 9월 24일 새벽, 이건창의 동생인 경재 이건승은 선조들의 위패가 있는 강화도 집의 가묘로 올라갔다. 할아버지 충정공 이시원의 위패가 있는 곳이었다. 이시원은 소론계 인사로서는 드물게 정2품 정헌대부에까지 올랐지만 1866년 고종 3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자 78세로 자결한 인물이었다. 막내 희원에게 집안 일을 맡기고 동생 지원과 음독한 후 담소하며 죽어갔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런 이건승이야말로 자결의 길을 택하기 좋았다. 선조들의 뒤를 따른다는 명분으로 먼저 간 자식 뒤를 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건승이 1905년 을사년 고종 42년 '황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해에 아들이 죽고 금년 봄에 며느리마져 죽어 늙은 부부는 눈물만 흘리며 서로 마주 보고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토로했듯이, 1904년 고종 41년 8월 외아들 석하가 후사마져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에는 며느리마져 세상을 떠났다. 이건승은 "저는 공적으로 근심스럽고 분노하지만 죽지못하고, 사적으로도 참혹한 독을 겪었지만 죽지 못했습니다"라고 한을 토로했다.

 

그러나 맥 놓고 질긴 목숨을 이어간 것은 아니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건승, 기당 정원하, 문원 홍승헌 세사람의 소론계열 양명학자는 목숨을 끊기로 약조하고 간수를 준비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간수를 발견해 엎어버렸다. 그러자 정원하는 자결하기 위해 칼을 집으려 했다. 가족들이 먼저 잡는 바람에 정원하는 칼날을 잡았다. 정원하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가족들은 대성통곡하면서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놓았다가는 목이나 팔목을 그어버릴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정원하는 칼날을 잡은 한쪽 손이 불구가 되었다. 그렇게 을사년을 살아남아 치욕스런 경술년을 맞이한 것이었다.

 

이 후 세 선비는  다시는 스스로 묵숨을 끊지 않기로 결의했다. 매천 황현의 자결 소식을 듣고도 따라 죽지 않았다. 매천에게는 매천이 가는 길이, 자신들에게는 자신들의 길이 있다고 여겼다. 세 번이나 약사발을 입에 댓다 떼었다는 매천의 길보다 쉽지 않는 길이었다. 살아서 일제에 맞서는 선비의 길이었다.

 

9월 24일 새벽, 이건승은 그 길을 떠났다. 집을 나섰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걸음걸음마다 되돌아보며 마을 문을 나섰다"는 시를 남긴 것처럼 이웃 동네 마실이라도 가는 것처럼 대지팡이 하나 짚은 단출한 차림이었다.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렇게 걸어서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에 사는 신주현의 집에 도착했다. 온수리 언덕 위에는 영국 성공회에서 세운 성당이 우뚝 서 있었다.

 

그날 저녁 이건창의 아들이자 유일한 혈육인 이범하가 이불을 들고 찿아왔다, 돌아오기 힘든 길을 떠나는 삼촌에게 이불가지나마 가져다주기 위한 것이었다. 201년 전인 1709년 숙종 35년 하곡 정제두가 스스로 유배지로 강화를 선택한 후 입도한 이후 줄곧 지켜왔던 선비들의 처신이었다. 주자학과 노론이 주류인 세상에서 비주류로 일관했지만 양반 사대부임에는 틀림 없었다. 선비의 도리, 지배층의 도리를 다해야 했다.  황현이 죽기 전 강화도 이건창의 묘소를 참배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9월 26일, 이건승은 강화 승천포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개경으로 올라갔다. 개경에는 사헌부 집의와 홍문관 시강 등을 역임한 원초 왕성순이 있었다. 왕성순은 이듬해 중국 상해에서 황현의 유고인 문집 <매천집>을 간행하고 김부식.박지원 등 고려와 조선의 문장가 10인의 문장집인 <여한 십가문초>를 1921년 한묵림서국에서 발행하기도 하는 창강 김택영의 문인이었다.  개경의 양명학자 왕성순의 집에 도착하여 이건승은 홍승헌을 기다렸다. 홍승헌은 보재 이상설의 고향이기도 한 충청도 진천에서 주변을 정리하고 올라오기로 약조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