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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87 : 조선의 역사 429 (절망을 넘어서 4)
절망을 넘어서 4
4. 국외 독립운동의 근거지
"서진서숙 세운 이상설, 백성들의 복, 사대부의 영예"
1905년의 외교권 박탈은 사실상 대한제국의 종말이었다. 이어 1907년에는 군대 해산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도,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되었다. 국왕은 순종이었지만 모든 주요 직책은 매국 친일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긴 어둠으로 빠져들었다. 춥고 척박한 동토였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숨 쉴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국외로 나가서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자는 구상이 나왔다. 국외에서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서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나라를 되찿자는 '독립전쟁론'이었다. 이 운동을 따라가다 보면 공통적으로 만나게 되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보재 이상설(1870~1917)과 우당 이회영(1867~1932)이다.
이 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첯 번째는 을사늑약 직후이고, 두 번째는 망국 직후이다. 이회영의 평생 동지였던 독립운동가 이관직은 <우당 이회영 실기>에서 "1906년 여름 선생은 광복운동의 원대한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는 행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상설.유완무.이동녕.장유순 등과 심심밀의해서 광복운동을 만주에서 전개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이상설이 설립한 서진서숙
만주에서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할 적임자로 손꼽힌 인물이 바로 이상설이었다. 이회영과 함께 활동했던 아나기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이정규는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회영이 이상설을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을 지도할 인물로 추천되었다"고 전한다. 이관직은 이상설 자신이 "내가 재주는 없는 사람이지만 만주에 나아가 운동을 열고자 한다"고 자청했다고 한다. 이회영 선생은 서울 모퉁이에서 만리절역으로 홀로 떠나는 지우 이상설을 전송했다. 이때 이상설의 나이 만36세였다. 그가 1917년 망명지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만 47세의 나이로 병사했을 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통곡하고 두고두고 아쉬워한 데는 이유가 있다. 명실상부한 국사였던 그를 제쳐두고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노선 투쟁과 자리 다툼을 벌이기는 어려웠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망명 당시 이상설은 대한제국 고관을 역임한 데다가 국제적 시야까지 갖추고 있었다. 양명학의 한 반향이었던 충북 진천군 덕산면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자로 서울로 올라와 이회영과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일화는 많다. 10대 때 신흥사에서 학우들과 합숙하면서 수학.영어.법학 등 신문학을 공부했는데, 위당 정인보는 스승 없이 영어에 능통하였다고 회고했다.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도 능통했는데, 선교사 헐버트에게 배웠다고 전해진다.
이회영 동생 이시영은 "이상설은 모든 분야의 학문을 거의 독학으로 득달했는데 하루는 논리학에 대한 문제를 반나절이나 씨름하다가 못 풀고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풀었다고 기뻐한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이상설은 영명학의 거두 하곡 정제두와 같이 양명학을 공부했고 , 이건창은 이상설을 율곡 이이의 뒤를 이을 대학자로 지목한 것은 조선의 전통을 바탕으로 양명학은 물론 서양의 신문학까지 흡수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물에 뜬 돛대로 생각했고 선비들은 학문의 주석으로 의지했다. 스물여섯 나이로 관제 개혁 이전의 성균관 대사성에 해당하는 성균관 관장에 올랐으며, 이건창은 그를 가리켜 "나라의 부유함의 상징이요, 백성들의 복이요, 사대부의 영예"라고 말한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설은 자신의 영달보다 나라의 앞날을 더 앞세우면서 고난의 인생길을 선택하게 된다. 1905년 정2품 의정부 참찬이던 이상설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머리를 돌에 찧어 자살을 시도하는데 이 광경을 때마침 김구가 목도하고 <백범일지>에 "옷에 핏자국이 얼룩더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가면서 울부짖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을사늑약 체결 후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1906년 4월 18일 양부 이용우의 제사를 지낸 후 망명길에 오른다. 이관직은 이상설의 망명 행로에 대해 "웃는 얼굴로 이회영을 이별하고 인천항에 이르러 중국인 상선에 올라 상해로 잠항하여 거기서 해삼위(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용정촌에 안착했다"고 묘사했다.
용정촌은 지금의 연길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인데, 이상설은 천주교 회장 최병익의 집을 매입해 '서진서숙'을 연다. 북간도이면서 동만주에 속했던 용정촌은 북동쪽으로는 러시아령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두만강을 사이로 국내와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고 무엇보다도 교포들이 계속 이주하고 있어서 국외 독립운동기지로 적당한 장소였다.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 운동'이 우리 역사에 끼친 중요한 업적은 좁은 반도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대주의적 유학자들이 만든 쇄국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깨져나갔다. 이 시기 독립운동가들이야말로 국제화의 선구자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상설이었다. 이상설은 1907년 4월 용정촌을 떠나 네들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갔다가 1908년 8월에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에 참석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오는 등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회영
이때 블라디보스톡에는 유림 출신 의병장들도 망명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강원도 춘천 출신의 유인석과 경상도 성주 출신의 이승희였다. 유인석과 이승희는 같은 유림이지만 사상적 배경은 조금 달랐다. 1908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유인석은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었는데, 이항로는 '이(理)'를 '기(氣)'보다 높이는 '이존기비(理尊氣卑)'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가 주가되고 '기'가 역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지고 천하가 편안해지나, '기'가 주가되면 만사가 어러워지고 천하가 위태로워진다고 보았다. 이런 '심전주리설(心專主理說')은 대와적 관점에서 '이'를 '명나라 .소중화(조선)'로 대치하고, '기'를 '일본.서양'으로 대치하면 강력한 침략 저항 논리가 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국내적인 관점에서 '이'가 양반계급으로 대치되고 '기'가 일반 백성으로 대치되면서 다시 성리학 체제로 회귀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항로가 고종 3년 1866년 대원군이 철폐한 만동묘(명 신종.의종 사당) 복설을 청한 것이 그의 이런 사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승희는 영남 유림의 거두였던 한주 이진상의 아들이었다. 이진상은 남송의 주희(주자)와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심(心)과 이(理)를 별개로 본 것과 달리 '심'이 곧 '이'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심즉리설은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이단으로 몰았던 왕양명의 주요 사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명학자로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상으로 양명학에 동조했던 셈이다. 이진상의 학맥인 한주 학파에서 명우 곽종석, 회당 장석영, 심산 김창숙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다. 이승희 문집인 <한계유고> 연보는 이승희가 을사오적 참수 상소를 올렸다가 대구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렀고, 1907년 국제보상운동 때는 경상도 성주 국채보상회 회장을 역임한 개신유학자였다고 전한다.
이승희는 1908년 5월 블라디보스톡로 망명해 함북 사람 김 감리의 집에 거주할 때 헤이그에서 돌아온 이상설을 만난다. <한계유고> 연보는 그가 1909년 러시아령 연추(클라스키노)를 거쳐 그해 겨울 동가강 밀산부로 이주했다면서 "이승희 선생이 보재 이상설과 상의해 황무지를 매입하고 먼저 한기욱의 집에 들어가 우거하면서 한인들에게 입주해 개간할 것을 청하니 비로소 100여 호가 되어 마을 이름을 '한흥'으로 정하고 한흥동의 규약과 학사를 설치하였다고"고 전한다.
이렇게 망국 이전의 만주 용정촌에 이어 '한민족이 흥하는 터전'이란 뜻의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한흥동'이 개신 유림과의 합작으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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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
양명학(陽明學)은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의 호인 양명(陽明)에서 이름을 따서 붙인 유가철학(儒家哲學)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속한다. 양명학이라는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퍼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육왕학(陸王學) 또는 왕학(王學)이라 불렸다. 육왕학(陸王學)은 육구연(陸九淵)의 학풍을 이어 왕수인이 대성한 유학(儒學)을 뜻하고, 왕학(王學)은 왕수인의 유학을 뜻한다.
심즉리(心卽理) · 치양지(致良知) ·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명학의 3강령이다.
양명학 이전
송나라 시대를 거쳐 오면서 학자들은 유교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수나라나 당나라 이전에는 경서의 음독이나 훈고(단어의 의미)를 중시한 훈고학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유교가 거쳐오면서 송나라 시대의 학자들는 유교 경전에 담겨진 공자나 맹자등의 본래 의미와 달리 왜곡되었고, 그런 성인들의 본래의 의미를 이해 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수,당나라 이전의 훈고학을 가르치면서도, 훈고학 중심의 사회를 고치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송나라 시대 이후의 유교 사상은 훈고학에서 주자학으로 새로운 학파가 생겨났다.
주자학이 중요시한 건 성인들의 말이나 경전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사상이 아니라는 데 의견을 맞추어서 새 경전을 만들었다. 새 경전들은 「사서」라고 불리는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책은 「예기」로부터 분리된 「대학」과 「중용」, 그리고 이 책들보다는 하위 취급을 받고 있던 「논어」와 「순자」, 중간 정도인 「맹자」 이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경전들은 내용이 짧고 잘못된 해석을 고치는 데 적당했기 때문에 이용되었다. 특히 주자학이 맹자의 「성선설」을 중요시하는 등 이 주자학은 중국 여러 지역에 점차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의 여러 지역에 퍼진 까닭은 주자학이 왕이 집권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은 중국 전역뿐만이 아니라 조선,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주자학도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 전역으로 퍼지긴 했지만, 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왕들은 왕권을 다졌고, 오히려 훈고학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인들의 본래 의미가 전혀 다른 왕의 집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주자학의 본래 의미는 퇴색되었다.
양명학의 등장
주자학은 왕들의 왕권이 대한 이유로 전락했다. 그래서 주자학은 도덕적인 측면이 없어져 갔다. 그 도덕윤리를 다시 되살리려는 노력을 한 학자가 바로 왕수인이다. 그는 당초 도덕적인 측면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하려는 작은 시도였다. 그래서 왕수인도 주자학을 믿었지만 사회가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그는 주자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양명학을 주장해 드디어 양명학은 생겨난 것이다.
주자학은 정치학, 존재론, 주석학, 윤리학, 방법론등을 모두 포괄하는 종합적인 학파였다 그러나 양명학은 그 중의 윤리학 및 방법론 등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윤리학적 측면이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크게 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양명학은 여러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중국
중국에서는 왕수인의 제자들이 양명학을 많이 발전 시켰다. 그렇지만 양명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 하나의 방법을 고집하지 않고, 각자의 재질이나 습성에 따라 가르쳤다. 누구에게는 본체를 강조하는가 하면, 누구에게는 정반대로 공부를 강조하기도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양명이 죽은 이후 제자들이 받아들인 학설의 차이에 따라 크게 귀적파(歸寂派), 수증파(修證派), 현성파(現成派)로 나뉘었다. 그 뒤 양명학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며 발전해 나갔다.
양명학 우파
양명학 유파 중 정통파(正統派)로 간주되었다. 귀적파와 수증파가 우파에 속한다. 양명의 ‘심즉리(心卽理)’는 선악을 포함한 마음이 이(理)가 아니고 마음이 발동할 때 이미 그 마음은 이(理)라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의 악폐(惡弊), 즉 사욕(私欲)을 극복하여서 마음을 양지(良知) 그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유파는 양명의 〈4구결(四句訣)〉에서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심(心)의 체(體)라 한 것을 심(心)의 본체는 지선무악(至善無惡)이라고 하여 전통적인 성선설(性善說)과 타협하고, 심(心)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양명 심학(陽明心學)으로부터 떠나서 점차로 주자학적 이(理)를 문제로 하여 실제적·현실적 연구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양명의 문인 전서산(錢緖山, 1496~1574)이 왕용계(王龍溪, 1498~1583)와 〈4구결〉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분파한 이후, 우파에는 추수익(鄒守益, 1491~1562), 나홍선(羅洪先, 1504~1564), 유종주(劉宗周, 1578~1645) 등이 있었다.
양명학 좌파
양명학 유파의 하나이다. 현성파가 여기 속한다. 이 파의 왕용계는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심(心)의 체(體)요,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는 것은 의(意)의 움직임이며, 선(善)을 지(知)하고 악(惡)을 지(知)하는 것은 양지(良知)요, 선(善)을 하고 악(惡)을 버리는 것은 격물(格物)이라 한다는 왕양명의 〈4구결〉에 대하여, 이것은 일반 사인(士人)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설치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의 실천적 주체의 입장, 즉 실천을 주로 하는 도(道)·이(理)에의 오입(悟入) 내지는 그것의 체득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의(意)·지(知)·물(物)에 선악의 대립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학문은 오득(悟得)만을 존귀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왕용계는 마음이 본래 무선무악(無善無惡)하면 그때 발하는 행위는 양지(良知) 그것이며, 따라서 양지는 배우지 않고 사려하지 않아도 사람이 본래 완전하게 구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사고방식은 이 파의 이탁오에게 전해지면서 한 걸음 나아가 적극적인 인욕(人欲)의 긍정으로 발전하였다. 이 파의 특색은 유(儒)·불(佛)·도(道) 3교의 혼융, 선학적(禪學的)경향, 소농(小農)·도장(陶匠)·나무꾼·염정 등의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서민 교육에의 실천, 전통의 부정이나 반체제적(反體制的)·신비적인 점 등에 있었다. 이 파는 특색있는 사조를 형성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사상 내용을 갖지 못하고 공론적·신비적 경향만을 강조하다 오래지 않아 소멸하였다. 왕용계, 이탁오 외에 왕간, 왕벽(王檗-東崖, 1510-1587), 안균(顔鈞-山農, 생몰년 미상), 양여원(梁汝元), 나여방(羅汝芳-近溪, 1515-1588) 등이 이 파에 속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시대부터 양명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증학에 밀려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양명학은 성리학을 약간 보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갈수록 쇠퇴해 갔다. 이후의 옹정제, 건륭제의 시대를 지나면서 청나라의 황제들은 성리학을 더욱 확립해 양명학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는듯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메이지 유신으로 양명학의 영향이 중국에도 다시 부활했다. 1840년을 주기로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인들은 개혁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양명학이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일본에서 양명학이 역수입되었다. 양명학은 중국 국민들에게 개혁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조선
박상(1474~1530)의 《눌재집(訥齋集)》연보 48세 조에 “왕양명 수인의 《전습록》을 변(辨)하다. 명의 학설이 동래(東來)하였는데 동유(東儒)들은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몰랐으나 선생이 그것을 보고 선학(禪學)이라 변척하여 김십청(金十淸)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삼절시(三絶詩)가 있었다.”는 내용을 볼 때 양명학 전래 시기는 중종 16년(1521년) 이전이다. 이후 16세기∼18세기에 조선 유학계에서 양명학의 찬·반 논쟁이 전개되었다. 양명학 배척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그 도입을 억제하고, 양명학 찬성론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異端)’이라고 규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먼저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지행합일설을 비판하였는데, 양명학을 불교의 선학(禪學)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비판했다. 양명의 《대학》 친민설, 심즉리설도 여러 논변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 중에 양명학의 가장 핵심 논지인 치량지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에서 그가 양명의 모든 전적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비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유성룡은 왕양명의 주자학 비판을 조목별로 반박했다. 그 뒤로 퇴계의 문하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 전체가 양명학을 배척하여 양명학은 조선에 발 딛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로는 남언경(1528~1594)과 이요가 있다. 그들을 이어 장유(1587~1638), 최명길이 미미하나마 연구했으며, 특히 장유는 조선 유학계의 주자학 일변도를 개탄하였다. 또한 이익(李瀷)도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비판하고 행(行)을 강조하였다. 이후 정제두(1649~1736)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근대 초 정인보·박은식까지 그 학풍이 이어진다.
일본
일본에서는 양명학이 반체제적인 성격을 가져 혁명가들이 주로 양명학을 연구하기도 했으며, 또는 양명학을 연구하게 되면 혁명적인 지향이 되기 쉽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양명학 역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카에 도주나 구마자와 반잔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에도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에 사상적 영향력을 끼쳐서 양명학은 이후 더 발전했다. 양명학과 관련한 책이나 잡지는 수없이 만들어졌으며, 양명학 주요 책은 쇠퇴하고 있던 중국에 역수입 되었다.
양명학의 근본 사상
양명학의 사상은 《전습록》, 《주자만년정록》, 《대학문》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심즉리
심즉리(心卽理)는 양명학의 윤리학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성(태어날 때 생겨난 순수한 선성)과 정(감정으로서 나타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대면시킨 마음 그 자체가 리와 다름없다고 하는 사상이다.
치양지
치양지(致良知)는 양명학의 방법론적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왕수인이 독자적으로 만든 사상이다. 치양지란 양지를 전면적으로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며, 양지에 따르는 한 그 행동은 선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양지에 근거하는 행동은 외적인 규범에 속박 되지 않는 말이다. 마음은 선악을 넘은 것이지만, 뜻에서 선악이 태어난다. 그 선악을 아는 것이 양지 말고는 안 되며, 그러므로 선을 바로 잡기 위해서 양지를 키우라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의 영향을 받았다. 양지를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주장과 양지를 가리고 있는 선악을 제거하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나뉘어 양지는 양명 사후 제자들의 분파의 이유가 된다.
지행합일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말과 실천은 같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말은 지, 실천은 행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본다는 것은 지(知)에,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행(行)에 속한다.
모든 물체의 인과 양지의 결합
이것 역시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의 육체이며, 다른 사람의 괴로움은 스스로의 괴로움이며, 그것을 달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모든 물체의 인은 양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양명학은 사회 구제의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사상마련
사상마련(事上磨鍊)은 수양처를 말하는 것으로, 주자학에서는 독서와 거경궁리를 통해서 수양을 한다고 하지만 왕수인은 이런 의견에 반대하여서 일상에서 양지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고, 실제로 일을 하면서 정신을 단련한다는 뜻이다.
격물(格物)
주자는 격물을 사물에 임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즉물궁리(卽物窮理)라 하였으나, 양명은 격(格)을 정(正)으로, 물(物)을 사(事)로 보아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해석했다. 전습록에 나오는 격물하고자 며칠 동안 대나무를 바라보았더니 정신만 혼미해지더라는 일화에서 주자의 격물을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양명학이 연 지평
사람의 욕구
양명학은 사람의 욕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사람의 욕구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사람의 욕구를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욕구를 잘 다스리려고 하는 노력을 했다.
붕우 관계의 중시
붕우, 즉 인간 관계를 중요시 여겼다. 유교에서는 남존여비 사상과 아이가 어른을 받드는 '상하 관계' 사상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유교 이념이 지배적인 중국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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