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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93 : 조선의 역사 435 (절망을 넘어서 10) 본문
한국의 역사 893 : 조선의 역사 435 (절망을 넘어서 10)
절망을 넘어서 10
10. 신흥무관학교
"구국사업과 교육 : 단군 땅에 세운 독립군 사관학교"
모든 열매에는 씨앗을 뿌린 사람과 가꾼 사람의 꿈과 노력이 담겨 있다. 결정적인 시기에 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건설한 망명객들이 그런 사람들어었다. 또한 척박한 땅, 혹독한 추위 속에서 단련한 씨앗들은 언 땅을 뚫고 나올 때를 기다렸다.
결정적 시기에 일본을 무력으로 구축하고 나라를 되찿는 독립전쟁을 전개하려면 먼저 독립군부터 양성해야 했다. 이관직은 <우당 이회영 실기>에서 신민회 시절 당시 이회영이 김형선.이곤직.윤태훈에게 "머지않은 장래에 만주 지방에서 독립군을 양성해야겠으니 해산된 군인 가운데 애국자들에게 만주로 건너가도록 권해줄 것을 미리 부탁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또한 같은 책에서 이회영 선생은 신흥군관학교 설립을 가장 먼저 앞장서서 제창한 주인공이었다. 선생의 학교 설립을 실현하기 위해 최초로 군사 교육 계획에 참여한 사람은 심형선, 이장녕, 이관직 등 세 사람이었다"고도 회고 했다.
이관직 자신이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부위로 있다가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된 인물이니 신빙성 있는 이야기다. 이상설과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방략을 정한 이회영은 독립군을 훈련시킬 교관들로 해산된 군인들을 주목했다.
1911년 음력 4월 유하현 추가가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를 결성한 망명객들은 무관학교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횡도촌에 망명했던 안동 유림 김대략은 망명기록인 <서정록> 1911년 5월 14일 기록에서 "가서 무관학교를 보았는데 마침 이날 하오에 개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이 신흥무관학교 개교일인데, 이 학교 생도대장이었던 원병상은 "1911년 봄에 이역 황야의 신산한 곁방살이에서나마 구국사업으로 일면 생취(백성을 기르고 재물을 모음), 일면 교육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내걸고 출발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신산한 곁방살이'라고 표현한 것은 현지인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서 개교했기 때문이다. 신민회의 '신(新)'자와 다시 일어선다는 '흥(興)'자를 붙여 교명을 지었지만 처음에는 중국인들의 의혹을 피히기 위해 '신흥강습소'라고도 불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군사력의 열세였다. 나라를 되찿는 데도 군사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조선의 군사력은 임진왜란 당시부터 이미 무력화된 상태였고 이후 공명첩이 남발되면서 군역을 면제받는 양반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고 이는 군사력의 약체를 가속화시켰다. 또 1802년 순조 2년 1월, 노론 벽파 영수인 영의정 심환지가 정조가 창설한 장용영을 해체시키면서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그 후 조선군은 지방 민란 하나 변변히 제압하지 못하는 약졸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서구 열강이 밀려들자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1896년 고종 33년 1월 11일, 칙령 제2호로 '무관학교관제'를 반포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무관학교 학도 모집령'에 따르면 무관학교생의 수학 기간은 1년이고, 식사와 의복은 국비이며, 약간의 용돈까지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한 달 뒤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년 후인 1898 고종 35년 4월 군부대신 이종건이 무관학교 재건을 주청하자 칙령 제11호로 '무관학교관제'가 다시 반포되었다. 그해 6월 200명 정원에 1,700여 명이 지원하는 열기 속에서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는데, 이때는 재학 기간이 1년 6개월로 늘었다. 고종은 1899년 고종 36년 6월 원수부를 설치하고 대원수로서 군대를 통솔하는데, 1900년 고종 37년 1월 장연창 등 128명의 원수부 졸업시험 통과자는 참위로 임관되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는 모두 500여 명의 장교를 배출했는데 이들의 행적은 군대 해산, 망국 등의 국난을 겪으면서 친일파와 항일 무장투쟁가로 극명하게 갈리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30일자에 따르면 1회 졸업생 대표였던 보병 대위 장연창이 서훈을 받은 것처럼 일부는 망국 후에도 일본군으로 복무했다. 반면 김창환, 이관직, 이장령, 이세영 같은 무관학교 출신들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했다.
무관학교 출신들 중 일부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는데, 이들의 행적도 마찬가지였다. 주일 공사가 1902년 6월 20일 의정부 찬정 겸 학부대신 민영소에게 보낸 '일본 유학생 현황에 대한 조회'에는 박영철, 김응선이 관비 유학생으로 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라고 나오는데, 이 들은 나중에 모두 친일에 가담한다. 반면 김경천, 나중소 등은 같은 일본 육사 출신이지만 김경천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고, 나중소는 훗날 북로군정서에서 세운 사관양성소의 교성대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한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모습
처음 신흥무관학교가 추가가의 옥수수 창고에서 개교한 것은 중국인들이 토지.가옥 매매를 거부한 데 따른 임시방편이었다. 이회영.이상설 등의 당초 계획은 정식으로 토지를 매입해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회영과 의형제까지 맺게 된 원세개의 비서 호명선이 이회영에게 "형이 토지를 사서 뜻하는 바를 이루어야 하겠는데, 기왕 돈 주고 토지를 살 것 같으면 하필 추가는 여러 십대를 누리고 살던 땅이라 팔기를 아까워하니, 다른 데 가서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소?"라면서 합니하 강 근처 토지를 권유했다.
당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105인 사건)'으로 신민회에서 모금하기로 한 각 도의 자금제공이 좌절되어 무관학교 설립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회영의 형인 이석영이 제공한 자금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만일 그가 학교 설립 자금을 내놓지 않았다면 무관학교 설립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현재 광화라고 이름이 바뀐 합니하는 추가가보다 훨씬 험한 요지였다. 동남쪽으로는 태산준령인 고뢰자가, 북쪽에는 청구자의 심산유곡이 펼쳐져 있으며, 남서쪽에는 요가구의 장산 밀림이 들러싸인 천혜의 요지로서 파저강 상류 합니하 강물이 반원을 그리며 압록강을 향해 흘렀다.
같은 해 음력 6월 드디어 새로운 교사가 완성되었고, 100여 명의 이주민은 낙성식을 기쁜 마음으로 실시했다. 신흥무관학교는 본과와 특별과가 있었는데 본과는 4년제 중학과정이고, 6개월.3개월 속성과는 무관양성을 위한 특별과였다.
전략.전술.축도학 등의 이론과 보, 기, 포, 총검술, 유술, 격검 등 전문적인 군관학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신흥무관학교의 특징 중 하나가 철저한 국사 교육에 있었다.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가 국사 교재였는데, 만주를 단군의 옛 강역으로 기술한 사서였다. 무관학교 학생들은 교가를 힘차게 부르며 결전의 날을 준비했다.
합니하 심산유곡에 노동과 군사훈련을 병행하는 젊은 청년들의 어깨 위에 빼앗긴 나라의 미래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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