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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95 : 조선의 역사를 마치며......

두바퀴인생 2013. 3. 21. 04:32

 

 

 

한국의 역사 895 : 조선의 역사를 마치며......    

 


 

 

작년초부터 시작한 500여 년의 조선의 역사를 숨가쁘게 달려와서 이제 거의 15개월 간 대장정의 막을 이제 내리려 합니다. 매일 블로그에 역사를 올리면서 나름대로 많은 고충도 있었고 자료를 검색하면서 배움도 많았으며 관련 역사 드라마도 다시보기로 보면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용이 빈약하고 허술한 부분도 많고 남을 글을 퍼오는 것도 쉽지가 않은 상황에서 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치면서도 즐거웠던 것은 매일 찿아주시는 애독자님들 때문이며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내 책상 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하여 조선 역사에 관계된 몇 권의 책이 그동안 흘린 커피 자국과 묻은 떼로 지저분한 상태로 1년 이상 저와 동고동락하며 뒤척이다가 이제는 책장으로 돌아갈 예정 입니다. 매일 눈 앞에 펼처진대로 표시를 하고 새벽에 일어나면 글을 올리고 자전거를 타고 나갑니다. 새벽 자전거 길은 저에게 새로운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희망을 주는 듯 합니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달리는 자전거 길은 기분이 우선 상쾌합니다.

 

먼동이 트올 때 쯤이면 서울 강남의 역동적인 삶의 기운이 솟구치는 모습을 봅니다. 죽음의 고요한 밤이 지나고 삶의 찌꺼기들이 널부러져 있는 강남 뒷 골목길은 이 나라의 미래를 적라라하게 보여 줍니다. 분노와 슬픔이 쌓여 사방에 딩구는 소주병, 담배 꽁초, 술취해 비틀거리는 젊은이, 밤새도록 퍼마시고 길바닥에 쓰러져 잠이 든 사람, 미니 스카트에 짙은 화장을 하고 새벽길을 가는 여자, 청소차와 환경 미화원, 골목길 폐지 줍는 노인들, 신문 배달하는 사람들, 빌딩으로 열심히 출근하는 건물관리 용역회사 아줌마들, 밤새 불켜진 편의점과 불친절한 주인, 차량 속에서 무언가 기다리는 예비 범죄자들, 순찰차에서 깊이 잠든 경찰과 캡스 회사 직원들, 버스에 가득한 새벽 인력 시장으로 나가는 사람들...... 이러 모든 것이 현실이며 새벽 풍경 입니다. 

 

비록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없이 오늘에 이러기까지 인생과 가정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으나 그래도 큰 불행없이 지내왔고 이제는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마음 편한 만년을 보내면서 오늘 새벽 이런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도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독립국가로 되살아 있음이며 모두가 선조들이 흘린 눈물과 피로 얼룩진 오욕과 투쟁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이런 조그만한 행복이라도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역사 전문가도 아닌 제가 글을 올리면서 제대로 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의 우리 역사를 알게 해주었고 많은 것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역사를 보는 시각도 달라진 느낌입니다. 지난 시절 우리 역사도 잘 모르면서 잘난척 했던 자신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이제는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 거리도 풍성해졌고 자녀나 사위, 며느리에게도 역사를 이야기하면 신기해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께서도 역사를 취미삼아 공부하시어 잘못된 교육으로 학교에서 전혀 듣도 보지도 못했던 역사를 실감나게 이야기해주면 자녀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 학교만 아니며 가정교육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시대가 온통 남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으로 보육원, 유치원, 사설학원으로 비싼 돈을 들여가며 사교육을 시켜야 안심이 되는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부모는 아마 다를 것 입니다. 보모가 어떤 부모냐에 따라 자녀는 인격과 성품이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바위위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지만 옥토에 떨어진 씨앗은 힘차고 멋있게 성장하는 것처럼 부모가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여 선조들의 역사적 영광과 실패를 자녀들에게 교훈으로 이야기해 준다면 미래는 밝게 전개될 것입니다.

 

지금 현실의 우리사회는 지도층이 부패하고 솔선수범하지 않으며 5%의 가진자가 95%의 서민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살아가고 있는 양극화의 극심한 부의 편중은 양반 사대부들이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살아가던 조선 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정의가 사라진 우리사회는 역동성이 사라지고 불의와 불공정과 편법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공교육이 붕괴되고 폭력, 성폭행 등 패륜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지금의 학교교육이 개혁하여 변화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간판위주, 입시위주, 암기위주의 무능한 교육은 무능한 인재를 양성하는 길 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스스로가 역사를 공부하고 자녀들과 같이 토론한다면 자녀들은 부모를 존경할 것이고 우리 조상들의 고난의 역사도 기억에 생생하게 될 것이며 역사적인 오류를 두번 다시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 입니다.

 

우리와는 달리 유태민족은 구약성경이 바로 그들 조상들의 역사입니다. 자녀들이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오면 자녀들은 그날 배운 것에서 의무적으로 부모님께 5가지 이상의 질문을 하도록 하고 부모는 최선을 다해서 자녀에게 자료를 찿아서라도 성실한 답변을 해 줍니다. 그리고 매일 집회소에 가서 유태사회 성직자나 지도자로부터 조상들의 위대한 역사를 공부하며 자부심을 갖도록 하고 민족 정신을 불어넣고 동료애를 쌓고 같이 협동하고 봉사하는 정신을 길러줍니다. 평소 기부와 봉사활동은 마일리지로 저축되며 노후가 되면 자녀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국가로부터 요양시설, 간병, 장례까지 무상으로 되돌려 받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사회로 나갈 때 창업 자금으로 수억원씩 무상지원해주며 추후 기업 이익금에서 기부 등으로 상환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유태사회는 가난한자를 돕는 제도가 있으며 자립할 때까지 단체나 국가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답니다. 그래서 각자 선택한 전문 분야에서 마음 놓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고 연구하며 세계 최고가 되도록 노력합니다. 지금까지 세계 노벨상의 30%가 유태인 출신이라는 사실은 바로 그들의 교육체계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우리는 학교교육에서 역사 과목이 천시받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전통문화도 잊은지 오래됩니다. 또 우리들 역사를 망각하고 기억하기를 꺼립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나요? 우리는 자신들의 역사도 잘 알지 못하니 똑같은 망국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려는 무능한 민족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우리는 남에 의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고 남북으로 두 동강 났으며 강대국에 의해 남과 북의 정권이 태어난 사생아들입니다. 그러나 북의 김씨 세습정권의 공산당 일당독재로 인해 신음하는 북한 동포들이 살고 있는 고난의 동토에 비해 남쪽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 한국전쟁 후 초토화된 이 땅이 오늘의 영화가 있기까지는 해방 이후 선조들의 피와 땀이 일군 기적의 성공 스토리 입니다. 

 

그러나 경제 발전 좀 했고 소득이 높아져 삶의 질이 향상되었고 먹을 거리가 넘쳐나 살기가 좀 좋아져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조선이 망국된 지 겨우 100년이 지난 지금 나라 돌아가는 꼴이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모래성을 쌓아 놓고 키타치며 여름 내내 나무 밑에서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곧 닥쳐올 추운 겨울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늘의 안락함과 방만한 자유에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고 전통과 민족을 잊고 폭풍한파가 몰려오는 줄도 모르고 날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 젊은이들이 군복무를 인생의 큰 손해를 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회풍조, 군대를 면제받기 위해 갖가지 추악한 방법으로 안감힘을 쏟는 부모, 이공계를 회피하고 대학 간판을 따야 인정받는 허울좋은 가식이 넘쳐나는 사회구조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성형을 해야 되고 아이돌 배우, 가수 등 연예인 만들기에 분주한 세태도 문제입니다. 물론 그런 직종이 소득도 많을 것 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연예인 지망자들이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실패하는 날에는 창녀.창부가 되거나 사기꾼이 되어 어두운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 입니다. 실패한 연예인의 노후는 비참합니다. 재산도 없이 결혼도 실패하고 무절제한 생활로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지고 혼자 노년에 단칸방에서 일거러지고 쭈그러진 얼굴에 외로이 라면을 끓여먹고 있는 자신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는 돈이 최고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버는 직종이 모두가 선호하는 직종임에는 틀림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광대패 만들기에 부모들이 안간힘을 쏟고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인기는 거품에 불과하고 눈부신 경제발전도 내.외부적인 리스크를 감내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언제 순식간에 붕괴돌지 모른다는 점 입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모래위에 집을 짖고 북치고 장구치며 마음껏 포식을 하고 성형을 하고 뽐내며 연예인.스포츠맨이 되려고 노력하고 결혼을 회피하고 이혼을 쉽게하며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인간성, 몸, 가족, 양심도 팽개치고 사기, 비리, 부패의 늪에 빠진 것도 모르고 지금 즐거워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주변 4대 강대국들이 패권주의를 지향하고 있고 북한은 김씨 세습체제 유지를 위해 주민들은 굶어 죽더라도 미사일, 핵무기 개발에 안감힘을 쏟고 있으며 호시탐탐 대한민국을 적화시킬 궁리에 몰두하고 있읍니다. 휴전선 일대의 수많은 장사정포는 물론 핵무기를 장착한 미사일 한 방이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며 생지옥을 발불케 될 것 입니다. 미국이 손을 놓는 순간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것이나 마찬가지 꼴이 될 것입니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우리는 무역로가 봉쇄되거나 원유 공급이 중단되거나 전기, 급수, 개스가 중단되는 순간 경제 발전은 물거품에 불과하고 우리 사회는 생지옥을 방불케 할 것 입니다. 그러면 현해탄에는 보트 피플이 넘쳐나고 해외로 도망치는 부자, 정치인, 지도층이 부지기수로 넘쳐날 것 입니다.

 

국방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지도층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병역을 면제받고 국가 지도층이 된다면 그 나라는 미래가 보나마나 불투명한 나라입니다. 고대 로마 원로원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자진하여 병사로 전투에 참가하여 목숨을 바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 선진국들의 왕족을 포함한 귀족, 지도층 자녀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맨 먼저 앞장서서 전장터로 나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 입니다. 평소에 국가로부터 대접받던 지도층과 가진자들이 솔선수범하여 국가 난국에 앞장서지 못한다면 억압박고 천시받고 상대적 빈곤감에 불만이 가득했던 서민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누가 바칠 것이며 앞장서서 망국을 주도한 친일파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 입니다. 그래서 유사시 중국, 일본, 미국, 북한 인민군의 앞잡이가 되고 정부 전복에 앞장서며 조선말 매국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나 마찬가지 꼴이 될 것 입니다. 

 

 

 

 

조선은 과연 어떤 나라였나?

 

블로그에서는 이씨 왕조실록 위주로 역사를 기술하였지만, 조선 사회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과연 조선은 어떤 나라였나를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는 조선에 대해서 냉철하게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과거의 역사적 오류를 반복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여 보다 낳은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러한 반성과 교훈을 얻지 못하고 조상들이 어떤 잘못된 사상과 탐욕에 빠져 나라를 망치게 만들었지를 반추하지 못하고 망각한다면 그것은 또다시 망국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조선은 한 줌의 양반계급과 대부분의 헐벗고 굶주렸던 상놈들로 이루어진 나라였습니다. 오백 년 내내 놀라울 정도로 인간 차별을 받아 온 상놈들이 살아 온 나라였고, 헐벗고 굶주린 땅에서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고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서 허덕였던 백성들이 넘쳐난 땅, 그래서 서로 헐뜯고 싸우고 거짓과 탐욕과 이기심만 찌꺼기처럼 쌓인 땅. 그곳이 우리 조국 한반도이며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조선 오백 년의 역사는 양반과 상놈이 대립하고 양반끼리는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음모와 계략을 펼치며 피나는 싸움질을 벌였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회와 옥사로 얼룩졌으며 그 와중에 민중은 양반 사대부를 위해서 존재했고, 양반 사대부만을 위한 나라였으며, 양반 사대부  지배층의 수탈과 학정으로 노예처럼 살았고 유랑민이 되어 떠돌이가 되었던 삶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조선 오백 년은 노비들의 피눈물 위에 존재해 온 세월에 불과했으며, 태반의 백성이 상놈이거나 노비로 낙인 찍혀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한 번 상놈이면 자식도 상놈이고 한 번 노비이면 자자손손 모두 노비일수밖에 없었던 나라, 그런 인구가 백성의 태반이었으니 조선의 실체를 정의할 때 상놈들의 나라, 그 이상의 적합한 표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왕조와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역사를 일단 마무리 하고 뒤이어 조선 사회에 대해서 잠시 살펴 볼까하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우리들이 갖는 조선 왕조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2. 껍데기로만 이어간 왕조 오백 년

3. 끊임없이 이어진 역모와 반역

4. 언제 한번 죽기 살기로 싸워본 적이 있는가

5. 굶어 죽고 병들어 죽다 망한 나라

6. 애국이란 단어는 없었다

7. 조선 사대부들의 두 얼굴

8. 국가 최고의 가치는 허례허식

9. 독도는 정말 우리 땅인가 

 

 

당분간 자료도 좀 준비하고 휴식도 좀 가질겸 글을 매일 올리지는 못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선 사회에 이어서 일제 식민지 시대를 기술해 보려 합니다. 자료가 부족하고 찿기도 힘들어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예정이오니 많은 애독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함석헌 옹이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마지막 부분의 글을 옮겨 실으면서 조선의 역사를 마칠까 합니다. 그동안 블로그를 방문하여 역사를 애독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꾸~벅~   

                                                                                                 서초동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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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을 열렬히 추구한 지식인 함석헌의 사상과 <뜻으로 본 한국 역사> 마지막 부분을 소개합니다. 

 

 

함석헌, 그는 누구인가?

 

함석헌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씨알의 사상'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오십이 넘은 사람들은 그를 기억할 것이다. 흰 수염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권력을 준엄하게 꾸짖던 함석헌의 모습은 민주화운동의 대표적인 상징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190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 1921년에는 오산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1924년에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 1928년에 졸업해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다. 1934~1935년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의 역사'를 연재한 그는 일제에 의해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5년 해방 직후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에 추대되었으며, 소련군에 의해 다시 옥고를 치렀다.

 

함석헌은 1947년 월남하여 YMCA에서 강의를 하는 등 사회 할동을 벌이면서 1956년부타 <사상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발표해 큰 관심을 모았고, 이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기도 했다. 1962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둘러본 다음, 이어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연구소에서 연구했다. 1963년 귀국하여 왕성하게 글을 쓰면서 한일협정 반대 등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1970년대는 함석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10년이었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고,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시국선언, 1976년 3.1구국선언 등을 주도해 유신독재에 맞서는 재야 구심을 이뤘다. 그는 1979년 세계퀘이커회에 의해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에 추천되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민주화를 향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1978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시대가 열리면서 1988년 <씨알의 소리>를 복간한 그는 다음해인 1989년 그는 세상을 떴다.

 

함석헌의 삶은 지난 20세기 우리 역사와 그대로 대응한다.식민지 시대에 일본식 교육을 받았지만 교사가 돼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씨알농장을 운영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함석헌은 장준하와 함께 산업화 시대 재야인사의 전형이었다. 재야란 말 그대로 벌판에 있음을 뜻하는데, 여기서 벌판이란 공적 기구가 아닌 민간 조직, 곧 시민사회를 말한다.

 

우리 사회 민주화 과정에서는 이 재야의 역활이 중요했다. 정치사회의 기본 구조가 정당 간의 대립보다는 정부와 재야 간의 대립, 다시말해 정부와 시민사회 간의 대립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 이후 국가가 산업화를 주도했다면, 재야는 민주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정치구도의 역사적 기원은 조선시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냉전분단체제로 인한 정치사회의 이념적 협소화, 독립운동으로부터 이어져온 사회운동의 활성화 등 다른 요인들 또한 이러한 구도에 중요한 역활을 미쳤다.

 

어떻게 해석하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의 구심으로 재야의 역활은 막중했다. 재야라는 말에는 권력에 맞서는 민중(씨알)의 뜻이 담겨 있었는데, 함석헌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러한 도덕.민주주의.민중을 상징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관찰할 수 있는 특징이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면 그 사회운동의 맨 앞자리에는 언제나 함석헌이란 이름이 놓여 있었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그의 대표적이다. 원본은 일제하에서 <성서조선>에 실린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였는데, 1961는 <뜻으로 본 한국 역사>로 이름을 바꾸고 내용을 수정했으며, 1965년 다시 개정판을 냈다. 제목에서 '성서'가 '뜻'으로 바뀐 것은 함석헌이 종교관을 바꿨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우라무치 간조의 무교화를 따르다가 나중에는 퀘이커교도가 됐다. 기본적으로 그는 기독교인 동시에 종교다원주의자였다.

 

이 책에서 함석헌이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고난의 역사로서의 한국 역사다. 함석헌에게 역사란 기본적으로 고난의 역사이며, 그의 역사철학은 고난사관이다. 상실된 나를, 나와 너를 포함한 씨알의 진정한 자아를 찿아가는 게 역사이며, 한국 역사는 바로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것은 고난의 선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책에는 식민시대에 함석헌이 가졌던 역사 인식이 반영돼 있다. 당시 그는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에 맞서서 기독교와 민족주의에 기초해 우리 역사를 재구성하고, 고난의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통해 민족적 자아를 회복하고자 했다.

 

전문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함석헌의 역사 해석이 지나치게 주관주의적이고 과잉 규범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관심은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에 있지 않았다. 그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민족적 위기라는 시대 인식 아래 상실된 자기를 찿아가는 규범저 지향으로서의 역사 서술을 목표로 했다. 내가 씨알이며 세계이며, 이 씨알들이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 역사가 나아갈 방향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에게 나와 세계, 민족과 세계는 동등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바로 이 점이 그의 역사 및 사회인식의 중요한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함석헌 옹이 쓴 <뜻으로 본 한국 역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지친 민족

이때 역사의 요청은 한마디로 깨는 데 있었다. 민족으로 깨고, 세계에 깨고, 시대에 깨야 한다. 역사는 무서운 속도로 급선회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국 중국.왜눔이 문제가 아니라 영국.미국.독일.불란서.러시아.화란 등 얼굴이 다르고 말과 글이 다른 그리고 색깔도 다른 수많은 외국들이 들어 닥치고, 전에 보지도 못하던 총.육혈포.자명종.천리경.인쇄기 등이 들어오니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지 그 누구하나 그들의 문명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강변한 사람은 없었다.

 

일이 급해졌다. 이제까지 바다 가운데서 노략질이나 하던 왜구의 나라 일본이 '명치유신'을 하여 봉건시대의 막부를 집어치우고, 근대식의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천황이라 하고,  나라를 열어 세계 모든 열강과 교통을 하면서 우리더러 나라를 열라고 트집을 해온다. 일찌기 이런 세상은 보지를 못하였다. 우리나라 유신들이 보기에는 '사서삼경'에서도 못보던 것이요, '팔만대장경'에서도 못 보던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김씨고 이씨고 양반이라 자랑하고 있을 수도 없고, 양반이요 상눔이요를 가릴 수도 없다. 노론이요 소론이요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토록 조상 대대로 섬겨오던 대국 중국이 코쟁이 양눔들에게 꼼짝을 못하고 청국군대가 서양군대에 대패를 하고, 그래서 항구를 조차하고, 땅을 빼았기고 ,배상을 물지않나? 이런 경우는 절대로 본적이 없는 조선은 천지가 개벽하고 모든 사상과 사고가 혼돈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이때 유신들이 하는 일이란 제것 챙기고 나라 망하기 전에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손대에 물려주는 일만 생각하고 백성들 쥐어 짤 궁리만 하고 있었으니 가련한 것은 우리 조선의 선량한 민중들 뿐이라! 이때에 살려거든 우리도 한 민족으로 깨어 말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 낡은 생각을 버리고 나날이 발달해 가는 새 지식.새 기술을 배워 여러 나라와 어깨를 겨루고 나갈 결심을 했어야 할 것이었지만......

 

그것을 하자는 실학이었는데 실학파가 그것을 못하고 낡은 책장만 뒤집다 말았지 민심을 뒤집지 못하였다. 그래서 천주교였는데 천주교는 천당.지옥만 찿다가 말았다. 그후 홍경래가 나타나 한번 역사를 뒤집어 보려 하였지만 비만 들다가 조선의 더러운 찌꺼기를 쓸지도 못하고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고, 개신교도 바람을 불러 일으켰으나 민중의 힘으로는 중과부적이라 그만 지쳐 수구려들고 말았다.

 

역사에는 그래도 행운.시운이라는게 있는 법이라, 일본이 '페리 제독'의 강권에 못이겨 나라를 열게 된 것은 참 운이 좋다 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으나 종내 그저 지나가고 말았다. '하멜' 일행이 십수 년을 제주에 있었건만 서양 소개를 못하였고, '병인양요'에 불란서가 물러간 것은 저희 나라 일 때문이건만 이쪽에서는 우리 세력이 세서 됐거니 생각하여 점점 더 문을 닫게 되었고, 대동강에 '셔먼 호'가 들어온즉 때아닌 홍수에 속아 불타 실패하게 되고, 일이 모두 이런 식이어서 기회는 다시오지 못하였다. 우리에게도 '페리' 같은 강한 함대가 몰려와서 조선 양반눔들 간담을 쓸어내려 왜 강제로라도 열게 하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 막

그때 우리나라 꼴은 무엇보다 전주 이씨 집안에 잘 나타나 있다. 하필이면 대원군이요, 민비인가? 이것이 다 마지막 망국극을 하기 위해 준비된 마지막을 선택된 배우들이었다. 당파 싸움을 하다 하다, 외척이 전권 세도를 하다 하다, 끝마무름이 그 궁중의 싸움이었다.  흥선은 영악한 왕족이었다. 안동 김씨 세도천하가 계속되는 동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미친척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철종이 후사가 없으니 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다 계산된 임금 만들기를 예견하고 죽임을 피하면서 때를 기다린 사람이었다. 거지처럼,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미친척 숨죽이고 있다가 철종이 후사가 없이 갑자기 죽자 왕족의 혈육으로 임금이 된 자신의 아들 열두 살짜리가  고종으로 등극하고, 그리고 섭정을 보게 된 그 아버지 흥선군은  영화를 누리자는 생각이었지, 그 운명이 그 아이의 손에 잡혀 있던 연줄처럼 끓어져 나갈 것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어린 임금의 왕후를 구하는데 고르고 골라 외척들이 말썽이 없을 만한 민씨집 딸을 대려올 때, 그것이 다음날 자기와 세력을 겨루다 집안 망치고 나라를 망칠 싸움의 적수인 민비가 될 줄은 천만 뜻밖이었을 것이다.

 


'마지막황실 대한제국과 덕수궁' 사진전

 

정국은 혼란을 거듭하는 가운데, 위로는 임금과 왕후를 포함하여 모든 당상관들은 매관매직에 정신이 없고, 평양감사 자리는 민씨네 집안이 독식하고, 지방의 모든 관리는 부패와 무능이, 매관매직으로 본전 뽑기에 백성 수탈이 판을 치고 백성들은 굶고 지치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유랑민이 되어 도적떼가 되거나 낭인신세가 되어 이 장터, 저 장터를 돌아다니며 시장터 국밥이나 한 그릇 얻어먹는 거지신세가 된지 이미 오래고, 지방곳곳의 향교는 유신들이 진을 치고 백성들을 대려다가 곤장을 치고 관리를 협박하고 향교에 몰려 앉아 양반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수구파요 개화파요, 친일이요 친청이요, 친로요 친미요 하는 파들을 갈라 배치되어 서로 싸우고 물고 뜯고 하고 있는 모습은 그 모양이 늙은 창녀촌 갈보와 같다 아니 할 수 있으랴!

 


전주박물관, 흥선대원군 특별전
전주박물관, 흥선대원군 특별전
 

 

제가 스스로  제 운명을 개척하고 사람 노릇을 하자는 생각은 없고 오늘 이눔에게, 내일은 저눔에게 빌붙어 가랑이 벌리고 그때 그때 구차한 안락을 탐하고 돈푼께나 받고 군것질 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이눔에게도 사랑을 잃고 저눔에게도 미움을 사 몹쓸 병이 들어 자식 하나 없이 단칸방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늙은 창녀처럼 한 몸이 망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부 먼저 깬 사람들이 갑신정변.갑오경장 하는 운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싸움의 결과 대원군은 중국에 붙들려 가고, 민비는 일본눔들 손에 죽고, 임금은 자리에서 쫓겨나고 아들이 대신 들어섰다가 그나마도 오래 못가고 1910년 8월 28일에 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아주 망해 버렸다.

 

이 민족의 부끄럼이 이제는 끝에 간 것이다. 고구려 때에는 욕을 먹었는지 모르고, 신라때는 매 맞았는지 모르고, 고려 때에는 넘어졌는지 모르나, 이번에는 아주 거꾸로 쳐박혀 버렸다. 고구려에는 발해가 있고, 신라에는 마의태자.궁에가 있고, 고려에는 최도통.정포은이 있었으나 이조에는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들 뿐이었다. '이준'이 헤이그에서 붉은 피를 뿌리고, '민충정'이 서울에서 푸른 대를 올렸으나, 그것으로 가리기에는 그 허물이 너무나 컸다.

 

신라가 당나라에 수구렸다 하나 그래도 반도의 땅을 찿는데 힘을 쏟았고, 고려가 몽고에 굴복하였으나 나라는 지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라가 아주 없어지고 남의 한 개 식민지가 되어버렸으니, 5천년 역사에 먼저간 조상들이 바라볼 때 얼마나 한심한 모습이었을까! 수많은 영웅과 충절을 지키던 선조들이 지하에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하였을 것이다. 이순신의 7년 전공 23전 23승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항몽.항청을 통해 수많은 애국 충신들은 무어라 통곡하였을까? 5천년 역사에 나라 팔아먹는 일, 이런 일은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일본이냐? 일본은 우리민족이 고대로 부터 바다를 건너가 구주지방에 정착한 민족의 물결이었다. 그들의 신화가 말해주고 석기시대의 유물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에게 한자와 유교.불교를 전해주었고 대륙의 모든 문물이 우리들이 전해 주었고 그래서 임나도 나온 말이요 왜구도 그래서 긴 세월을 두고 그렇게도 반도 해안을 들락거리며 약탈과 행패를 일삼아온 집나간 자식같은 말성꾸러기 일본이었다.

 

우리가 고구려 이래 전래된 용맹한 기상과 상무정신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힘과 제도를 정비한 힘찬 주권을 가지고 만주를 뒷마당 근거지로 북만주와 한반도를 호령하고 일본 열도를 앞 방파제로 삼아 대국경영을 펼칠 수가 있었다면 역사는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친일.친로.친청 하며 몇십 년을 국제 매음을 하다가 우리가 길러내고 업신 여기던 섬나라 일본한테 나라를 몽땅 빼았겼으니, 이것은 마치 행랑체 머슴한테 그집 주인 아내 주부가 정조를 주고 집문서 내주면서 서방눔은 독살하고 그 머슴눔의 바지가랑이 밑에서 힘찬 밤일 즐기기를 좋아하는 창녀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그래서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많은 민족이 해방되었으나 우리는 빠졌다. 3.1운동의 물결이 일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이었다. 세계 2차 대전을 통해 민족의 의식은 실날같이 꺼져가는 촟불같은 신세로 빠져 들고 있었다. 수많은 청년과 처자들이 전선으로 끌러가서 천황눔의 총알받이가 되고, 정선대가 되어 이팔청춘 다 썩히어 썩은 몸이 되었고, 온 반도는 먹는것 입는 것 지하지원 할 것 없이 모두가 수탈의 극을 달했다. 몽고도, 중국도, 만주족도 그토록 이 땅에서 고혈을 빨아가지는 않았다. 씨를 말리고 이름을 바꾸고 모든 것을 일본눔들 제도로 바꾸려고 하였다. 36년간의 길고긴 암흑의 시대.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 흡혈귀처럼 빨려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빨릴 피마져도 남은게 없는 앙상한 여윈 몰골로 휘청이는 민족, 그것이 피맛이냐 ? 물맛이냐? 고통이 온 반도에 뼈저리도록 사무치게 휘몰아 쳤고, 민족은 짐을 싸서 만주로 간도로 사할린으로 고향을 떠났다.

 


창덕궁 마지막 단풍

 

이것으로 우리 고난의 역사 대충 보기는 끝났다. 돌아보면, 아, 아, 삼국시대 이래 그 걸어온 길이 얼마나 잔혹했나? 눈물과 피로 걸었다기보다 기었고, 기었다기보다 굴러왔고 발길에 채어왔다. 그리고 5백 년 수난도 오히려 부족하여 돌아오던 회복의 기운도 사라지고 다시 더 심한 연옥의 바닥으로 거꾸러져 내려가는 뒷모양을 보며, 아니다, 우리 자신이 그것임을 의식하면서, 그러나 그보다도 날이 장차 오면 이것이 다 뜻이 있는 한 구절이 될 줄 믿으면서 이 글을 마친다.

                                                                                                                      

                                                                                                                                                                                                             (끝)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