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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29 : 조선의 역사 371 (제25대 철종실록 5) 본문
한국의 역사 829 : 조선의 역사 371 (제25대 철종실록 5)
철종의 예릉
제25대 철종실록 ( 1827~1849년, 재위 : 1834년 11월~1849년 6월, 14년 7개월)
4. 60년간 이어진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계속)
세도가와 사대부의 기로에 선 그들
'권력이란 이름으로 평가받는 안동 김씨 이야기'
양반의 사회적 우대를 근본으로 했던 조선은 양반으로 하여금 권리만큼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했다. 왕과 국가에게 충성을 바치는 절개, 불의에도 굴하지 않는 지조 등이 대표적인 덕목이다. 책임과 의무를 다한 양반은 충신의 이름으로 포장돼 국가적 귀감이 됐다. 송시열, 이이, 이황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수많은 양반들이 위의 덕목들을 충실히 수행한 ‘거룩한’ 신하다.
고려 태조 때의 공신이며 안동김씨의 시조인 김선평(金宣平)의 단소(壇所)
세간의 평가와 다른 김조순의 기록
이런 수많은 양반들 가운데서도 김조순은 조금 특이한 인물이다. 위에 제시된 신하들에 비해 이름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조선후기 세도정치에 대해 공부했다면 김조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조 사후 60여년 동안 조선의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왕보다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안동 김씨 가문의 시대를 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국사교과서나 역사서는 김조순을 세도정치를 몰고 온 척신, 조선말기 권력을 등에 업고 사회를 도탄에 빠뜨린 권신 정도로만 해석한다. 그러나 실록에서는 김조순을 온화하며 권력에 욕심이 없는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런 성품으로 인해 그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공직생활동안 단 한번도 지방으로 파견된 적이 없었고 급기야는 순조의 장인이 됐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세도정치의 ‘폐단’은 김조순 이후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가 이렇게 고속승진을 하기까지는 무엇보다 조선의 손꼽히는 명문가였던 안동 김씨라는 이름이 큰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안동 김씨는 열다섯 명의 정승, 서른다섯 명의 판서, 여섯 명의 대제학, 세 명의 왕비를 배출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세도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이런 비정상적인 정치를 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종가인 안동 김씨의 내력을 알아야 한다.
당파싸움의 소용돌이 속에 이룩한 명문가
안동 김씨는 신라 말기 고창군 성주였던 김선평에서 비롯돼 역사가 매우 길지만 조선 초기까지 이렇다 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향인 안동을 떠나 서울 장동 일대로 옮겨오면서 안동 김씨는 변혁기를 맞게 됐다. 서울로 올라온 후 안동 김씨는 북벌의 대표적 인물인 김상용ㆍ상헌 형제를 배출했다. 이들이 활약했던 시기는 당파싸움이 나타난 시기였고 안동 김씨는 서인이었다. 병자호란이 터지자 형 김상용은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인평대군을 보호해 강화도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김상용은 척신 김경징의 전횡을 비판하고 대군을 보위했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그는 대군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화약고에 들어가 담배 불씨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이 때 그가 남긴 말이 의미심장하다.
“나는 대신이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구차스럽게 살려고 하겠는가”
한편 아우 김상헌은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서 그를 보살폈다.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였던 그는 목숨을 걸고 주전론을 고수하며 주화파 최명길과 대립했다.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문과 함께 남한산성내 여론은 주화로 기울었다. 적에게 투항한다는 국서가 작성되자 68세의 노신 김상헌은 국서를 찢고 며칠동안 단식했다. 결국 조선은 후금에 투항했고 주전파의 수장인 김상헌은 후금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갔다.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의 마지막은 이처럼 순탄치 못했지만 이들의 희생은 안동김씨를 노론의 명문가로 발돋움시켰다. 이들은 효종이 주도했던 북벌론과 청나라에 저항했던 추모에 힘입어 절의의 상징이 됐기 때문이다.
사화를 넘어 이룩한 세도가문
김상용ㆍ상헌 형제의 희생 이후로 안동 김씨는 노론의 핵심가문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후 정계에 진출한 일족은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증ㆍ수흥ㆍ수항 형제였다. 이들 가운데 정치에 뜻이 없는 수증을 제외한 수흥ㆍ수항이 모두 영의정에 오르는 ‘기록’을 세우며 안동 김씨의 가세를 더욱 키웠다.
특히 막내 김수항은 당시 서인을 대표하는 산림이었던 송시열과도 친분이 두터워 평소 자주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형제는 숙종의 잦은 환국과 남인의 공격에 의해 결국 모두 사약을 받았다. 갑술환국 이후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수흥ㆍ수항 형제는 다시 복권돼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 남았다. 이후로도 수항의 아들 김창집이 영의정에 오르는 등 안동 김씨는 노론의 수장 역할을 자임했다.
그러나 신임사화에 말려들면서 이들은 또다시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 사화로 인한 희생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됐던 김창집을 비롯해 3대가 몰살당한 것이다. 여기에 김수흥ㆍ수항 형제까지 더하면 안동 김씨는 당파싸움으로 인해 무려 4대가 화를 당하는 아픔을 겪은 셈이다. 안동 김씨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으로 기록된 신임사화로 인해 이들 가문은 한동안 정계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후 안동 김씨는 창집의 4대손 김조순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다시 정계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까 했던 논의로 돌아가보자. 집안의 내력이 이렇다보니 김조순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방을 내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라. 어린 김조순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사약을 받고 죽는 모습을 지켜봤다. 평생을 나라에 충성을 바쳤지만 돌아온 보답은 죽음이었고 억울함을 호소하기에는 당파싸움의 광풍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당시 정권이란 그저 권력과 부를 잡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을 놓는 순간 죽음을 의미했다. 왕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사람이 죽고 사는 상황에서 그는 다음의 왕이 누가 될 것이냐를 항상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비롯해 자신의 아들, 손자들에게 자신처럼 부모를 잃는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면서 안동 김씨는 정치적으로 쇠락했다. 당시 영의정 자리에 있던 가문의 수장 김좌근을 시작으로 권력에 요직에 있던 수많은 안동김씨가 쫓겨났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그토록 축출하고 싶었던 판서 김병기는 결국 쫓아내지 못했다. 그의 머리가 비상했고 가문의 위세가 대단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김병기가 누구보다 국가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천주교 탄압의 보복으로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가 벌어졌을 때 그는 여주 땅에 은거하고 있었다. 한성을 벗어나려는 피란민이 넘쳐나고 이양선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불안으로 대두되는 가운데 김병기는 가족들을 이끌고 한성으로 올라갔다. 그는 양반으로서, 나라의 녹을 먹는 자로서 자긍심과 긍지가 있었던 것이다. 한성에 올라갈 때 그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고 살아왔으므로 사직과 함께 존망을 같이해야 하니 너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조선 말기 조국을 개화하려했던 김옥균도 안동 김씨의 일원이었다. 비록 안동 김씨 주류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조국의 근대화를 꿈꾸게 하는 배경이 됐다. 1884년 그는 일본과 손을 잡고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실패하면 바로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의 평가는 아직도 엇갈리고 있지만 적어도 그가 꿈꿨던 개혁이 타성에 젖어있던 당시 조선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구한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김좌진도 안동 김씨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다. 김좌진은 김상용의 11대손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깨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16세 때 집안의 노비를 자유민으로 풀어줬다. 또 집안의 재산을 풀어 노비들의 생계를 챙겨줬다.
이후 여러 행로를 거쳐 그는 북로군정서군의 사령관이 됐다. 그의 군대가 항일운동 역사상 최대의 승리로 기록된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안동 김씨 내에서도 비주류였던 김옥균과는 달리 주류였던 그가 일제에 순응하면 부귀를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김좌진은 이 모든 것을 사양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분명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고 사회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이 사실에만 입각한 나머지 모든 안동 김씨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들 중에는 개인의 영달에 앞서 조국을 걱정했던 이들도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한다.
일러스트 주소희 기자
참고자료 : 「조선명가 안동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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