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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27 : 조선의 역사 369 (제25대 철종실록 3) 본문
한국의 역사 827 : 조선의 역사 369 (제25대 철종실록 3)
철종의 예릉
제25대 철종실록 ( 1827~1849년, 재위 : 1834년 11월~1849년 6월, 14년 7개월)
2. 세도정권하에서의 철종의 친정
세도정권의 막강한 힘과 독단 앞에 선 철종은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불우한 왕이었다. 빈민 구제책이나 이재민 구휼에 남다른 열정을 보여주었지만, 짧은 학문과 얕은 경륜에 대한 철종 자신의 자격지심과 순조 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막강한 세도정권의 바람을 막아내고 삼정의 문란을 혁파할 개혁의 방도를 찿지 못한 채 임술민란 등 전국적인 위기 상황을 맞게 된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전계대원군 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셋재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였다.
철종은 즉위 3년 후인 1852년부터 친정을 하게 되지만 정치의 실권은 여전히 안동 김씨 일족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철종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도 민생을 돌보는 데 남다른 애정과 성의를 보였으며, 철종 말기에 일어난 민란의 수습과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친정을 시작한 다음 해인 1853년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 전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민간에 대여해주도록 하였고, 또 그해 여름에 가뭄이 심각하지 재물과 곡식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 화재를 입은 1천여 호의 민가에 은전과 약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고,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 냥을 지급하였다. 그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천 냥, 단목 2천 근, 호초 2백 근을 내려 구재하게 하는 등 빈민 구재에 성의를 다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의 실권이 안동 김씨 일파에 있었고 그들의 전횡으로 탐관오리가 득실거리고 삼정의 문란 등 백성들이 토탄에 빠지게 되었다. 1862년 철종 13년에 드디어 진주에서 탐관오리의 학정에 반발하여 민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리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세도정치의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안동 김씨의 강고한 세도 앞에 그 뜻을 펴지 못하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절정에 달해 있던 철종 대는그들에게 도전할 만한 다른 정치 세력의 성장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안동 김씨 일문은 왕족 중에서도 나중에 왕위에 올라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자가 있으면 미리 처단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대원군의 형 이하전의 죽음이 바로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당시 철종은 이미 세도가의 첩자 등이 온 궁중에 퍼져 있었을 것으로 믿었고, 자칫하면 임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철종은 이렇듯 계속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에 마땅히 대항할 방법이 없자, 자연히 국사를 등한히 하고 술과 궁녀들을 가까이 했다. 술과 여색에 빠지게 되자 본래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철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서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인 33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철종의 능은 예릉이며,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에 있다.
3. 철종의 가족들
철종은 철인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8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5남(혹은 6남) 1녀의 자녀를 얻었다. 그러나 철종의 아들들은 모두 유난히 명이 짧았는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철종의 선천적인 신체적 문제이거나 아니면 왕족의 후사를 단절시키려는 안동 김씨 세력이 은밀히 모략을 꾸민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철인왕후 김씨가 아들 원자를 낳았으나 조졸하였고, 그 외에 후궁들에게서 아들 넷(혹은 다섯)을 얻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모두 일찍 죽는다.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는 숙의 범씨가 낳은 영혜옹주가 한 명 있을 뿐인데 그 또한 박영효와 혼인한 지 3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여기서는 철인왕후 김씨, 숙의 범씨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 본다.
가족 관계
- 생부 : 전계대원군
- 생모 : 용성부대부인 염씨
- 법통상의 부왕 : 순조숙황제
- 법통상의 모후 : 순원숙황후 김씨
- 왕비 : 철인장황후 김씨(哲仁王后 金氏,1837년-1878년)
- 원자(元子,1858년 음력 10월 17일 ~ 1859년 음력 4월 23일)
- 후궁 : 귀인 박씨(貴人 朴氏)
- 왕자(王子,1854년 음력 7월 10일 ~ ? )
- 후궁 : 귀인 조씨(貴人 趙氏)
- 왕자(王子,1859년 음력 10월 13일 ~ ? )
- 왕자(王子) 조졸
- 후궁 : 숙의 방씨(淑儀 方氏)
- 왕녀(王女)
- 왕녀(王女)
- 왕자, 조졸
- 후궁 : 숙의 범씨(淑儀 范氏)
- 영혜옹주(永惠翁主,(1859년~1872년 음력 7월 4일) - 하가 금릉위(錦陵尉) 박영효 朴泳孝, 1861년~1939년)
- 후궁 : 숙의 김씨(淑儀 金氏)
- 왕녀(王女)
- 왕녀(王女)
- 후궁 : 궁인 이씨(宮人 李氏)
- 왕자(王子, (1862년 음력 윤 8월 8일 ~ ? )
- 후궁 궁인 박씨(宮人 朴氏)
- 왕녀(王女)
철인왕후 김씨(1837~1878년)
철종 대에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던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이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근친인 그녀는 1851년 열다섯 나이로 왕비에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온다. 1858년 원자를 낳앗으나 곧 죽었다. 왕비 김씨는 탐욕스러운 그의 아버지 김문근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즐거움이나 성냄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는 등 부덕이 높은 것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한다.
1863년 철종이 서른셋의 나이로 죽자 명순의 존호를 받고 이듬해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66년 휘성에 이어 정원, 1873년에 다시 수령의 존호를 받아 '명순위성정원수령대비'가 되었다. 1878년 42세의 나이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죽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의 예릉이다.
숙의 범씨(淑儀 范氏, 1838년 ~ 1883년 )
조선의 제25대 왕 철종의 후궁이다.
본관은 나주이다. 철종의 승은을 입고도 별다른 작위가 없이 '궁인 범씨(宮人 范氏)'로만 불리다가, 고종 연간인 1866년(고종 3년)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 조씨에 의해 종2품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때 그녀가 낳은 딸도 옹주에 봉해져 영숙옹주(永淑翁主)의 작호를 받았다. 영숙옹주는 훗날 영혜옹주(永惠翁主)로 개봉되었다.
1863년 철종이 사망한 후 궐밖에서 딸 영혜옹주와 함께 살았으며, 이때 저택을 짓는데 필요한 금액 및 생활비는 모두 호조에서 지급하였다.
1883년(고종 20년) 음력 12월 26일 4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상사에 필요한 물건이 호조로부터 지급되었으며,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녀의 묘는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서삼릉 경내의 후궁 묘역으로 이장하였으며, 1970년 5월 26일에는 서삼릉과 함께 대한민국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다.
남편 철종과의 사이에서 딸 영혜옹주를 낳았다. 철종은 정비인 철인왕후를 비롯한 여러 비빈에게서 여러 자식을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고 영혜옹주만이 살아 남아 박영효에게 하가하였다. 하지만 영혜옹주도 하가한지 3개월만인 1872년(고종 9년) 음력 7월 4일 자식도 얻지 못한 채 14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로써 철종의 후계는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가족 관계
- 남편 : 철종(哲宗, 1831년 ~ 1863년, 재위 : 1849년 ~ 1863년) - 조선의 제25대 왕
- 딸 : 영혜옹주(永惠翁主, 1859년 ~ 1872년)
- 사위 : 박영효(朴泳孝, 1861년 ~ 1939년)
아래는 야사로 전해오는 강화도령 원범(철종)과 사랑을 맹세했던 양순이란 처녀의 이야기로 소야님의 카페에서 퍼왔다.
강화도령 원범(철종)과 양순이 사랑 이야기
강화도령 원범은 왕족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농사를 짓다가 왕이 되어 통치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아무것도 없는 동시에 왕실의 예 또한 알지 못했습니다.
하루아침에 한나라의 지존이 된것은 정권을 장악하려던 대왕대비 순원왕후김씨와 안동김씨의 술수였습니다.
부사 정원용이 보영 대신이 되어 강화도로 건너와, 덕온군으로 봉해진 원범을 모셔왔고, 1949년 6월 4일 인정전에서 즉위를 하니 그가 곧 강화도령 철종 임금입니다.
어릴 때 부친이 죽어 형편없이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왕이 되니 궁중예절을 몰라 실수를 자주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즉위 3년만에 친정을 하였지만 명분뿐이었고, 안동 김씨에게 정치 실권이 다 넘어 갔습니다.
이런 형편이니 허수아비 임금이 철종이 할 일이란 술을 마시고, 아름다운 후궁을 탐닉하는 일 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임금이 된지 13년만에 병을 얻어 승하하시니 그의 춘추 32살이었으며 서기 1863년이었다.
이런 능력없이 보이는 것 외에 친정을 시작한 다음 해인 1853년 봄에는 관서 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민 간에 대여해주록 하였고 또 그 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재물과 곡식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 겨 재용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습니다. 1856년 봄에는화재를 입은 1천여 호의 민가에 은전과 약 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으며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 냥을 지급하였습니다. 그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 지역에 내탕 금 2천 냥, 단목 2천 근, 호초 200 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 구제에 성의를 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안동 김씨와 문란한 정치로 탐관오리가 횡행하며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어 상황을 반전 시킬 수 는 없었습니다. 제 25대 철종대왕은 대왕대비와 안동김씨의 세력에 엄격한 궁중생활에 “강화도가 좋았다”라는말을 하곤 했다고합니다.
이런 상황의 철종대왕은 강화도에 살던 시절 사랑했던 첫사랑 양순이를 그리며, 답답한 궁중 생활을 한탄하며 젊은 나이에 죽고 철종의 혈손 또한 유난히 단명하여 혈손이 끊기게 됩니다.
철종대왕의 죽음의 목전에서도 그리워한 양순이 철종대왕이 강화도로 유배를 가있던 시절 위로를 해주고 삶의 희망을 심어주며, 사랑을 준 여인이 양순이입니다. 양순이는 철종대왕의 첫사랑이자 마지막까지 그리워하던 여인입니다. 양순의 진심어린 마음과 순박한 모습에 강화도령 원범은 마음을 뺐기게 됩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는 찬우물약수터 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강화도령 원범과 강화처녀 양순이가 사랑을 속삭이며, 미래를 약속했던 약수터라고 아직까지 전해지고있습니다. 그러나 나뭇꾼 강화도령과 양순이는 못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철종 원범의 강화도 생가
임금으로 등극한 강화도령은 찬우물 사랑을 잊지 못하고 궁중생활을 답답해하며 “강화도가 좋았다”는 말을 틈만 있으면 했다고 전합니다.
원범이 왕이 되어 갑자기 한양으로 가던날 헤어지기 싫어 슬피 울면서 금씨 친구가 원범 이에게,
"원범아 어디를 가느냐 왜 가느냐" 물었습니다.
철종은 그 사연을 설명할 수 없어 그냥 이런 말만 하고 갔습니다.
"이다음에 서울에 놀러오거든 제일 큰집을 찾아 오라"
얼마 후 금씨 총각은 원범 이를 만나러 서울 대궐을 찾았습니다. 원범 이가 강화도에 서 살 때 좋아하던 개 한 마리를 메었으니, 그 꼴이 말이 아니라 대궐의 문지기가 통과시킬 리가 없었습니다.
마침 철종이 행차하다 이 모양을 보고, 즉시 신하를 시켜 불러들 이라 하니 벼슬이 없는 천민은 입궐이 안 된다 하였습니다. 생각다 못한 철종은 금씨에게 벼락감투를 씌우는데, 벼슬이름이 도사였습니다.
철종은 친구인 금도사에게 양순 이의 소식도 물으며 후한 대접을 하고 보내면서, 강화유수에게 명하여 금도사가 달라는 대로 농토를 주라고 명했습니다. 금도사는 자기집 뒷산에 올라가, 보이는 땅을 몽땅 달라고 해서 얻은 재산은 아직도 후손에게 전해진다고합니다.
왕실에서는 임금의 이런 모습을 그냥 보고있지않았습니다. 헌종비 효현왕후와 익종비 신정왕후를 비롯한 왕가의 사람들은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양순이를 독살시킵니다.
[그이외에 양순이는 평생 철종을 생각하며 수절하며 살았다고도 전해집니다.]
[동네 불량배에게 강간을 당한 후[왕실사주] 살해되었다는 내용도 전해집니다.]
설은 여러가지 이지만 양순이를 죽여야만 했던 이유는 천민인 양순을 궁에 들일수 없는일이고 천민으로 살았던 철종이 천민의 여자에게 정을 준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용납 할수도 없는 일 이었을것입니다. 천민으로 살던 시절의 모든것을 잊어야한다는 것이 그들이 생각이었을것입니다.
그럼 후궁..?
천민은 원칙적으로 궁녀가 될수가 없습니다. 영조의 모후인 숙빈최씨도 무수리 였지만 천민을 왕가에 들인것은 왕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일은 다시는 반복하지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뒤늦게야 양순이 죽은 사실을 알고 철종은 비탄을 이기지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삼정의 문란과 국가의 잇다른 민란을 자초하지만 그런 어떠한 것도 수습할 의욕도 가지지못한채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전설이 전해지게된것은 안동김씨와 대왕대비의 문란한 정치에 국가가 혼란하자 천민에 불과한 여인을 잊지못해 나라를 방탕하게 운영하며 , 주색잡기에 빠져살았다며, 철종에게 그 모든 허물을 씌우기 위해 만들어낸 픽션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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