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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1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1 본문
우면산의 겨울 11 :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1
방배역 근방, 남부순환도로 방향
영하의 맹추위를 떨치던 겨울 날씨가 한풀 꺾였다. 기상 예보를 보니 새벽에는 영하, 낮에는 영상의 날씨가 계속될 거라 한다. 이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날씨가 계속될 것이다. 전세계 곳곳이 맹추위와 가뭄 등으로 인명 피해는 물론 농작물 피해도 많다고 한다. 난방비가 올라 비닐하우스 채소가 모두 얼어버렸고 가축들도 동사하는 등 농촌의 피해도 막심하다. 그래서 각종 물가가 폭등하고 있어 장보기가 겁이 난다.
수도계량기 동파사고뿐만 아니라 빙판길 교통·낙상 사고 속출되었다. 제설작업이 제대로 안 된 도로에 눈이 그대로 얼어붙으며 빙판길 사고가 이어졌다. 맹추위를 피하려는 급한 마음에 화재도 잇따랐다. 눈이 내려 길바닥이 꽁꽁 얼어버리는 바람에 빙판길 골절사고, 차량 접촉, 충돌, 전복 사고 등 사고도 많았다. 또 각종 화재사고 등으로 아까운 생명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도 많았다.
최고의 미인이었던 자살한 유명 여배우 전남편이 또 자살하였다. 그래서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잃은 남매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다. 미인이고 잘생기고 돈이 많다고 꼭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으로 전기료가 오르고 택시 요금도 오를 전망이다. 전기료는 4% 정도 오를 전망이고 1년 반 만에 벌써 네 번째이다. 한저의 도덕적 해이는 달라진 것이 없다.
한국이 세계 1위를 지키던 수출품목이 2011년 61개로 전년도보다 10개나 줄었다고 한다. 16개 품목이 신규로 1위에 진입했지만 26개 품목이 중국 등 경쟁국에 추월당해 1위를 빼앗겼다. 특히 중국은 한국의 1위 품목을 12개나 빼앗아 갔다. 적극적인 기술 개발과 수출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중반부터 시작된 국제 곡물 가격 폭등 여파가 본격적으로 국내 장바구니 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원재료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식품업계는 ‘원가 압박’을 이유로 지난 연말 이후 앞다퉈 가격 인상에 나서고 있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의 행정지도 등을 통한 가격 통제로 억눌려 있던 가격 인상 수요마저 정권 교체기를 틈타 분출하면서 밥상 물가 불안이 증폭되는 양상이다.
경북 상주시가 지난 12일 발생한 염산 누출사고에 대한 주민 첫 신고를 묵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날 사고업체는 염산 누출 사실을 3시간 넘게 숨겼고, 상주시 또한 주민신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은 탓에 초등조치는 사고 발생 후 3시간30여분후 이뤄졌다. 이미 대량으로 누출된 염산은 물 등과 만나 증발, 공기 중으로 수 백m 가량 퍼진 상태였다.
이처럼 나라는 점점 활력을 잃어가고 있고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으며 국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만 있다. 삶의 변화를 시도해보지만 전망은 불투명하기만 하다. 이번 겨울이 가장 춥고 유난히 마음이 허한 것은 이런 삶의 고단힘이 증가하기만 하고 희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서민들의 주머니는 가진자들의 쌈지 주머니가 되었고 각종 정책은 무기력하고 정권 말기 도덕적 이완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시대의 문화적 소산에 공통되는 인간의 정신적 태도와 양식또는 이념을 말한다. 시대정신은 어둠 속 망망대해에서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북극성처럼 미래 좌표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정신이며 비젼이다. 즉 시대정신은 한 사회가 지향할 가치의 집약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주조하는 이들이 곧 지식인들이다. 지식인은 지식 또는 진리의 탐구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아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독해하여 이를 바탕으로 미랠르 전망하는 사람들이다. 즉 이는 시대정신의 탐구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모든 지식인들이 시대정신을 탐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경우 일차적인 과제는 진리 탐구에 있으나 그 탐구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미래에 새로운 비젼과 계몽의 빛을 비춰주는 것, 곧 시대정신의 모색에 있다고 본다.
어떤 지식인들이건 시대적 구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고 자기 시대가 주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어떤 인문.사회과학자가 논하기를 전자를 '존재구속성'이라면 후자는 '자유부동성'이라고 했다. 존재구속성에서 벗어나 지식인이 속한 사회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장차 그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게 지식인의 자유부동성이라면 이 자유부동성은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며 자세라고 생각된다.
무릇 어떤 사회, 어떤 시대라 하더라도 인간이 배움과 성장의 과정에서 받게되는 사고의 편협성으로 말미암아 사상의 갈등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식 사회에서 영원한 진리는 부재한다.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 역사가 발전해오듯이 피지배계층의 자발적인 동의를 목표로 하는 주류의 지배 헤게모니에 맞서는 비주류의 대항 헤게모니가 등장하기 마련이고, 비주류가 지배 헤게모니를 획득했을 때 이에 맞서는 또 다른 비주류의 대항 헤게모니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사상 갈등은 언제나 사회 갈등과 짝을 이룬다.
그럼 과연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대외적으로는 분단된 민족의 통합과 대륙과 해양 세력의 충돌 지역인 한반도의 외교.안보.국방의 자립과 영세중립국화일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정치적으로는 이념갈등을 해소하여 사회 통합을 이루고 정의.공정.평등.인권이 살아 숨쉬는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효율적인 시장경제와 소득재분배로 양극화를 해소하여 다같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경제민주화를 이룩하고 저출산, 초고령 사회의 문제점 해소를 위한 사회구조 변혁을 통해 복지국가와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일 것이다.
아래는 김호기씨의 저서 '시대정신과 지식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우리 역사에 나타난 시대정신과 지식인
원효와 최치원
시대정신을 구현한 지식인들을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통일 신라와 말기, 고려초에까지 원효,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등을 들 수 있으며 고려 시대는 김부식과 승려 일연, 그리고 고려말 조선초 정몽주와 정도전, 그리고 조선 전기 세종과 조광조, 중기에 류성룡과 충무공 이순신, 숙종대의 송시열과 윤규,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파와 개화파는 이런 지식인들의 엇갈린 운명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효는 신라가 통일을 이룩하는 데 사상적 통합을 이루어 신라 사회를 통합하는 데 시대정신을 구현한 사람이다. 그는 여러 종파들의 통합을 강조했고 그것이 이른바 '화쟁사상'에 집약되어 있다. 이 화쟁사상은 편견에 사로잡힌 싸움을 지양하고 회통적인 이해를 통해 원용무애한 관계를 이룩하는 데 있다고 보고 화쟁의 공동체로서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무엇보다도 강조했다.
화쟁은 모순과 대립을 넘어서는 통합을 지향한다. '바람으로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나 파도와 바다는 둘이 아니다. 우리의 일심에도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와 무명이 동시에 있을 수 있으나 이 역시 둘이 아닌 하나라고 주장했다.
최치원의 경우는 12살에 당나라로 들어가 유학과정을 밟았고 874년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당나라 관리가 되었다. 879년 황소의 난이 발발했을 때 종사관으로 '토황소격문'을 지어 문장가로서 이름을 대륙에 크게 떨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후 최치원은 885년 고국 신라로 돌아와 관리의 길을 걸으면서 저작 <사산비명>을 남겼는데 신라의 불교사뿐 아니라 그 시대의 역사와 정치, 문학과 사상 또한 담겨 있다. 그가 품고 있던 사상은 유교를 기반으로 하되, 불교와 전통사상을 통합하려는 데 있었다. 894년 그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정치적으로 좌절하고 말았고 진성여왕은 보기드문 난정으로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김부식과 승려 일연
고려시대는 유학자 김부식과 승려 일연이 있었다. 김부식과 열연은 우리 고대사를 대포하는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저자이기도 하다. 김부식이 전형적인 유학자라면 일연은 대표적인 불교 승려이다. 무엇보다도 김부식이 고려시대 중기에 활약한 지식인이라면, 일연은 고려시대 후기에 활동한 지식인이다. 두 저서에서도 비교되듯이, 두 사람의 특징과 배경 또한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우리 역사에서 김부식이 알려진 것은 두번의 큰 사건을 통해서다. 첯째가 1135년 인종 13년 묘청, 정지상, 백수한 등이 이른바 서경 세력이 난을 일으키자 김부식은 이를 평정하는 원수로 삼군을 지휘했다. 두 번재 일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일이다. 난 진압 후 승승장구하던 김부식이 묘청의 난에서 함께 활약한 윤언이와의 갈등에서 결국 사직하지만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삼국사기는 우리 고대사를 이룬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정사다. 삼국사기는 사관들을 지휘하여 김부식이 논찬을 집필하고 사관들이 기록한 <구삼국사> 등 기존 자료에 바탕을 두고 사실 기술을 편찬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모방하여 편찬한 삼국사기가 갖는 의의는 고구려.백제.신라, 그리고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고대 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을 상세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담긴 김부식의 시대정신은 시대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 시대는 고려가 황금기를 지나 무신시대로 들어가기 직전의 시기였다.거란족과 여진족의 침입으로 오랜 와침을 겪게 되지만 유교와 불교를 통치의 양대 이념으로 한 내치가 나름대로 유지되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바로 이 내치가 새로운 전환점에 도달하던 시기였다.
이 전환점은 개경의 문신을 중심으로 한 지배 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구체화되었는데, 바로 '묘청의 난'과 1170년부터 시작된 '무신의 난'이다. 묘청의 난이 수도 개경 세력에 대한 지방 서경 세력의 저항이었다면, 무신의 난은 정치를 독점해온 문신 계급에 대한 무신 계급의 저항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김부식의 역사인식과 사회인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를 둘러싼 논란 가운데 가장 큰 쟁점을 이뤄온 것은 사대주의 문제다. 이러한 문제는 당대에도 제기되었다. 이규보는 김부식의 민족주의 의식이 부족한 점에 대해서 그의 저서 <동명왕편>에서 김부식을 비판하고 있다. 또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묘청의 ㄴ나을 '조선 역사 천ㄴ녀 이래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한학과 수구사상대 국풍의 진취사상의 일대 격돌로 평가하고 있다. 서경 세력의 칭제건원론이나 금국정벌론은 기존 중앙 세력의 사대주의적 담론에 맞선 일종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담론이었다. 한맞디로 김부식의 사상은 사대주의적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부식의 시대정신은 중국식 유교질서의 구현이라는 당대의 문제의식을 넘어서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대주의는 12세기 당시 지배하던 지식인 세계가 공유하던 시대정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모방 전략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과 민족 자율성과 독립성을 과소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 시대정신으로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업었다.
이에 비하여 일연의 <삼국유사>는 유사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정사가 아니라 야사다. 전통사회의 관점에소 보면 정사보다 다소 처지는 역사책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대다수 역사책은 기본적으로 야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산국유사는 야사이기에 우리들에게 새로운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기이' 편에서 '단군신화'를 다루고 있다. 이는 <삼국유사>가 갖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또 신라시대 향가를 포함하여 삼국 당시의 사회와 문화생활을 다양하게 기록함으로써 우리 고대 문화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비록 불교와 연관된 내용들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지만 당시 불교의 절대적인 위상을 고려할 때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며 , 유교적 성향이 강한 상국사기에 비해크게 보완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빛나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사이의 시대적 공간에 중국에서는 송나라의 멸망과 원나라의 성립이라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하늘처럼 알았던 한족의 송나라가 중국 변방의 오랑캐인 몽골족에 패배한 사건은 당시 고려인들의 사대주의적 사유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미 그 징후가 요나라와 금나라의 설립에서 나타났지만 원나라의 등장은 한족 중심의 세계관을 해체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부여한 셈에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몽골족의 고려 침공으로 고려 사회가 격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우리와 그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했다. 전국토가 유린되고 처참하게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이들이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살상되는 것을 목격함으로서 비로소 민족에 대한 본격적인 자각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식의 형성에 대내적 계기를 부여하였던 것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고려에 의한 후삼국통일이었다. 특히 고려는 통일신라보다 북쪽으로 영토를 더 확장하였을 뿐 아니라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볼 때 <삼국유사>의 기저에 흐르는 것은, 삼국시대에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희노애락에 대한 찬가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민족 본래의 모습에 대한 자각이다. 일연은 자기정체성을 확고히 갖고 있었으며 때로는 대담하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삼국유사>에 담긴 세계관이 불국토를 지향하는 불교적 세계관이라면, 그 역사의식은 민족의 주체성과 독창성을 주목하려는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고조선시대부터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 남겨놓은 놀랍고 인간적인 이야기들을 생생히 전달함으로써 일연은 민족의 발견, 민족주의를 고취하려고 하였다.
정몽주와 정도전
전통사회에서 지식인과 정치가 대다수가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연마하고 과거시험을 통해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여기서는 학문적 연구와 정치적 실천을 통합하고자 한 유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물론 사경적이나 조식처럼 재야 학자로 연구에만 전념한 이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황과 이이, 송시열과 하목, 빅지원과 정약용처럼 학문과 정치를 병행한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전통사회의 주요 지식인들 다수는 '지식인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지식인들이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사회개혁을 모색하고자 한 것은 멀리 통일신라 말기의 최치원과 고려 초 최승로가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들이 본격적으로 정치 일선에서 활동한 시대는 고려 후기였다. 신진사대부 세력이 바로 그들이며 이제현,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엇다. 이들은 한편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유교사상을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유교적 질서의 현실적 구현이야 말로 이들의 정치적 기회이자 시대정신, 다시말해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려 후기에 씨가 뿌려지고 조선 개국을 통해 구체화된 이러한 시대정신은 이후 조선시대 500년 내내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 유교사회의 기초를 세운 이들이다. 고려 말기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던 두 사람은 삶은 널리 알려졋듯이 대단히 서로 극적이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노선을 함께 했지만, 조선의 개국을 놓고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정몽주가 고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면, 정도전은 고려를 버리고 조선을 세우는데 목숨을 맡겼다.
운명의 역설은 두 사람 사후에 이뤄졌다. 정몽주는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받는 반면,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은 관심 밖에 버려졌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야 복권됐다. 그가 조선 개국의 핵심 세력으로 창업에 주도적인 역활을 하였고 태조의 최측근이며 창업과 개혁의 핵심 브래인으로 개국을 주도하면서 사병 혁파와 왕위 계승자 문제로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때 주살되었는데, 그의 일생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지식인 정치가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태종에 의해 신권을 주장하며 왕권을 위협하려던 인물로 조선 중기까지 철저하게 폄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몽주는 1337년 충숙왕 6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정운관의 아들로 태어나 1360년 문과시험에 합격, 1362년 예문검열.수찬이 되었고 이후 승승장구 대내 개혁을 모색하고 대명 외교를 주도하는 등 고려 후기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할동했다.
정몽주의 일생은 외기의 고려를 쇄신하는 데 일관했다. 그는 이성계 세력과 연대하여 친원 권신 세력과 맞서서 기울어가던 고려를 바로 세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읺았다. 하지만 정도전, 조준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반이성계 세력의 중심에 섰다. 궐력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중 1392년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는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정몽주의 비극적인 최후는 곧 고려의 최후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추구한 조선의 역사에서 불사이군의 충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조선 초기 사육신과 생육신은 정몽주의 경우와 매우 유사하다. 그들은 단종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 세조를 거부했다. 당대에는 죽음을 선택했지만, 후대에는 영광을 얻었다. 정몽주의 선택은 책임윤리보다 신념윤리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결과를 고려한다기보다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정치적 선택을 결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몽주는 유교 질서의 한 축을 이루는 충의 상징을 이뤗고, 이러한 그의 정신은 조산시대 내내 추앙됐다. 정몽주는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학의 시조로 자리매김되었으며, 조선 후기 성리학의 최대 권위자였던 송시열도 칭송한 바 있다.
어느 사회나 왕조건 그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헤게모니, 혹은 정치적 정당성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이 고갈된 체제는 결국 몰락하고 새로운 체제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정몽주가 활동하였던 시기에 고려왕조가 갖고 있던 헤게모니는 이미 상당히 고갈된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신진 사대부 세력의 등장은 고려왕조의 쇄신을 가져왔고, 특히 1388년 조준 등이 ㅈ주도한 토지개혁인 과전법의 시행은 기득권 세력을 혁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고려왕조는 정치적 헤게모니가 상당히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는 데 있다. 결과론적이지만 다시말해 정치적으로 수명이 다한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정치적 헤게모니가 고갈된 체제였다는 점이다.
군주의 신성한 권위에 대한 피지배층의 자발적 동의는 왕조의 지속을 위한 매우 중요한 사회적 조건이다. 그런데 고려는 무신시대 이후 서서히 약화되었고, 원나라 지배 아래서 그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조의 권위를 위해 기능해오던 기성 불교가 상당히 부패해졌고 유교의 상징적 자원은 고갈되기 시작한 반면, 새로운 이념적 대안으로 떠오른 성리학이 부상했다. 신진 사대부 세력의 핵심 이념적 기반이 된 성리학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한 포괄적인 사회개혁 사상으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사회학적으로 권력이란 타자의 의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힘이다. 다시말해 권력은 타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기도하다. 이런 점에서 구너력은 인간 존재의 그늘을 이룬다. 하지만 권력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구너력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경쟁은 정치의 본질을 이룬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권력투쟁 앞에서는 부모와 자식도, 오랜 동지 관계도 무색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성계와 이방원의 관계도, 정몽주와 정도전의 관계도 그러했다. 두 사란의 엇갈린 길 앞에서 새삼 권력의 속성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정도전은 1324년 충청북도 단양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형부상서를 지낸 정윤경이며 어머니는 노비 우연의 딸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정도전은 평생 자신의 모계에 대한 출신 성분으로 곤욕을 치르곤 했다. 그는 1362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곧이어 충주사록 등을 역임했다. 아버지와 이곡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정도전은 이곡의 아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정몽주, 이승인, 이존오, 김구용. 박상충, 박의중, 윤소종 등 신진 성리학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정치적 야망을 서서히 키워 나갔다.
이후 정도전의 인생에서 세번의 중대한 전환점을 이루는 시기가 있었는데, 첯 번째가 1357년 우왕이 즉위하고 이인임 일파 세력이 집구너하면서 전라남도 나주 회진현으로 유배를 간 일이다. 이대 정도전은 유배와 유랑으로 이러진 10여년 동안 당시 농촌 현실을 직접 체험하였고 학문과 정책 연구를 심회시킬 수 있는 시기였다.
두 번째로는 1383년 함경도 함주의 이성계를 찿아가 그의 막하에 들어가 이성계와 정치적 운명을 같아하게 된다. 위화도 회군과 쿠테타, 우왕 폐위와 창왕 옹위, 창왕 폐위와 공양왕 옹위 등에서 정도전은 이성계의 최측근 브레인으로 활약했다. 그는 이성계와 자신을 한나라 유방과 그의 군사 장량에 비유했다고 한다.
세 번째는 1392년 이성계를 새로운 조선의 오앙으로 옹립한 역성혁명을 주도한 일이다.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 이어 조선왕조의 제2인자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병권을 장악하고 한양을 설계하여 궁궐과 도성문 이름을 짓는 등 조선의 설계자였다.
정도전의 삶에서 비극이 잉태하기 시작한 것은 1396년 외교문서인 표전문 사건으로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회되고 그가 추진하던 요동정벌이 좌절되면서부터다. 결국 그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에서 1398년 태조 7년 살해되었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정도전의 개혁성은 정몽주와 비교할 때 선명해진다. 정몽주가 보수적 개혁을 통해 고려의 쇄신을 자신의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면,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이라는 더 큰 변화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진보적 개혁을 모색한 셈이다. 비록 그는 권력투쟁에서 희생되었지만 정도전이 설계한 조선왕조는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으며, 그가 제시한 일련의 정치.경제.문화의 원리는 조선사회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
정몽주가 신념윤리의 지식인 정치가라면, 정도전은 책임윤리의 지식인 정치가다. 대내정책과 대외정책 모두에서 정도전은 성리학에 입각한 일관된 개혁노선을 견지하고, 그 정책의 결과를 중시했다. 개혁을 위해 당시로서는 혁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도 역성혁명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던 왕조 교체를 감행하였다.
정치학자 최상룡씨의 글에 의하면 정몽주는 '이념형의 정치가', 이방원은 '권력형의 정치가', 정도전은 '이념과 권력의 통합형 정치가'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정몽주는 불사이군이라는 신념에 따라 조선 개국에 반대했다면, 이방원은 정치이념보다 권력의지에 철저했고, 정도전은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을 둔 조선왕조 건설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동시에 이를 위한 권력의지 또한 강력했다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이 이념과 권력의 상호작용에 있는 한, 세 사람 가운데 정도전이 가장 주목할만한 정치가라고 말했다.
<삼봉집>은 우왕 말년경 정도전이 남긴 문집이다. 조선 개국 후 1397년 개간됐고, 1465년 증손자 문형에 의해 중간됐다가 1791년 정조가 규장각에 명하여 다시 편찬하게 했다. <삼봉집>은 크게 시문과 <조선경국전>, <경제문감별집>, <불씨잡변>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왕조 관제의 대강을 서술하여 조선의 통치 이념과 조직의 종합적인 체계를 제시한 것이다. 주례에서 재상 중심의 군력 체제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 군사제도의 정신을 가져오고, 한당의 제도에서 부병제, 군현제, 부세제, 서리제 등의 장점을 수용하고 있다. <경제문감>은 군신의 직능과 관리 선발 방법을 다룬 <조선경국전>의 한 부분인 치전의 내용을 보완한 것이며, <경제문감별집>은 군주의 역활을 제시한 것이다. <불씨잡변>은 불교의 교리를 비판하고 그 사회적 폐단을 고발한 것이다.
한마디로 정도전의 정치적 기획은 거시와 미시, 제도와 의식을 결합한고자 한 일종의 정치적 종합 프로그램이었다. 이는 이념적 기반으로서의 '주자학', 경제적 기반으로서의 '공전제', 권력적 기반으로서의 '재상제'로 정리한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재상제다. 정도전은 재상이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통치의 실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설령 군주가 현명하지 못하더라도 재상이 현명하면 정치가 잘 운영될 수 있다는 견해로 오늘날의 내각책임제와 비슷한 개념이다.
시대적 관점에서 정도전은 재상이 중심으로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 관료 지배 체제를 기반으로 하되, 그 통치권이 백성들의 삶을 위해 기능해야 한다는 민본주의를 추구한 것이었다. 비록 성리학에 입각한 전통적인 방식이었지만, 백성들의 헤게모니 창출을 위한 토지제도를 포함한 일련의 제도개혁을 중시했으며, 이러한 제도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실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도전의 재상제는 새로운 정치적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정도전이 재상권 강화를 주장한 것은 현실적으로 자신이 정치적 실권을 가지려는 의도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적 정치질서가 재상 중심 체제를 강조한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왕조의 정치를 군주 중심으로 할 것인가, 재상 중심으로 할 것인가는 왕권과 신권 가운데 어느 것을 중시할 것인가는 전통사회 정치의 최대 문제 가운데 하나다. 조선 전기에 이 문제는 <경국대전>에서 다소 애매한 형태로 재상 중심 체제로 규범화되어 있지만, 이 이슈를 둘러싼 논쟁은 이후 조선시대 내내 되풀이 되었다. 전통 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변동은 그 권력의 원천이 왕에서 국민으로 이행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전통사회에서도 재상제를 둘러산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군주와 관료 사이의 권력 경쟁은 대단히 치열하였다.
정도전의 이러한 재상제, 즉 왕권보다 신권을 중시한 그의 정치관은 왕권 세력에게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주도함으로써 당시 사병을 보유하고 왕권을 대표하던 이방원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정몽주 세력에 맞서 힘을 모았던 이들은 다시 권력을 놓고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와중에 정도전은 이방원의 선제 일격을 맞고 결국 패배의 쓴 잔을 마시고 말았고 조선시대 내내 그의 사상과 이론은 잊혀지고 말았다.
정치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백성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역사를 보면 정권의 정통성이나 도덕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권력을 군주가 가지던 제상이 가지던 어느 것이 좋은지는 이론은 많지만 문제는 백성들의 풍요로운 삶이며 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루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창업은 비난을 이유가 없다. 이성계의 쿠테타(위화도 회군)는 부분적으로 정당성을 얻을 지 모른다. 역사적으로 신라후기처럼 한 왕조가 몰락할 즈음에는 사방에서 군웅이 일어나 활거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시대에 세력을 통합하여 통일을 이룬다음 왕조를 세운 왕건의 고려 건국같은 경우는 정치적인 정당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기울어져가던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은 오늘날의 혁명이나 쿠테타와 비견될 것이며 박정희의 5.16 군사혁명이 비난받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비슷할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의 창업은 도덕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현실은 부패한 왕조나 수명이 다한 왕조가 정치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백성들의 삶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대부분 혁명이나 쿠테타가 일어났고 왕조가 교체되었다. 이처럼 대부분의 권력교체가 도덕성을 상실한 방법이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현실적인 삶을 다시 윤택하게 할 수 있다면 누구나 새로운 왕조를 지지할 것이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정치적인 기능을 상실한 권력이나 도덕적. 윤리적이지 못한 권력이나 군주에 대해서 마저도 오로지 충을 강조하고 있는 성리학적 '충'에 대한 새로운 변화된 개념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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