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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28 : 조선의 역사 370 (제25대 철종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828 : 조선의 역사 370 (제25대 철종실록 4)
철종의 예릉
제25대 철종실록 ( 1827~1849년, 재위 : 1834년 11월~1849년 6월, 14년 7개월)
4. 60년간 이어진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
본디 '세도정치(世道政治)'라 함은 조광조가 도학의 원리를 정치사상으로 심화시킨 데서 주창된 것으로 사림들이 표방했던 원리였다. 즉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정학을 북돋는 일 등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세도정치가 성립되기 위한 운영의 기반은 무엇보다도 공정한 언론과 인재의 등용, 그리고 이에 대한 군주의 신임 내지는 위탁 등이었다. 이 때문에 각 계파 간에 시비와 분열이 일어났고 이것이 사화니 당쟁으로 비화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군주의 신임과 위탁을 빙자한 변태적인 '세도정치(勢道政治)'를 낳았다. 이렇게 척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를 세도정치라 했는데, 이때의 세도는 사림 청치가 지향했던 본래의 '세도(世道)'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독재정치였기 때문에 '세도(勢道)'라 표기하였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정조의 유탁을 받은 김조순이 영조의 계비이며 사도세자의 죽임에 깊이 관여하였던 김귀주의 누이이기도 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협조하면서 그의 딸을 순조의 비로 들이는 데 성공한다. 1804년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1805년 세상을 뜨자, 이때부터 안동 김씨가 본격적인 척족 세도를 시작하게 된다.
김조순은 본래 정조의 신임을 받던 시파였지만 벽파정권에 협조하면서 겉으로는 전혀 당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모난 짓을 하지 않았다. 정순왕후가 죽자 정순왕후 편에서 세도를 휘둘렀던 벽파 일당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힘을 쓰게 된다. 여기에는 안동 김씨 이외에 시파의 대가인 남양 홍씨, 풍양 조시, 여흥 민씨, 동래 정씨, 나주 박씨 등이 제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으로 풍양 조씨 만영의 딸이 간택되는데, 이때 풍양 조씨 일문 세력이 정치 전면에 나타났지만 효명세자가 일찍 죽자 다시 안동 김씨들이 정권을 독점하게 된다.
순조가 죽자 효명세자의 소생인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8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탓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아래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정권을 잡아 여전히 안동 김씨 일문의 독재가 지속된다. 한때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 일문이 정권에 접근했으나 김조근의 딸이 헌종의 비로 간택됨에 따라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은 그대로 이어진다. 그 이후 순원왕후의 근친인 김문근의 딸이 철종의 비로 간택됨에 따라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기까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가 정국을 휘어잡게 된다.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가 어찌나 드셌던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 외에는 못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851년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은 철종을 보필한다는 핑계로 거의 모든 국사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의 조카인 김병학이 대제학을 맡고, 병국이 훈련대장을 맡았으며, 병기가 좌찬선을 차지함으로써 조정을 장악했다.
이렇듯 왕권을 배제시킨 세도정권은 정치적 견제 세력이 없는 조건하에서 삼정 문란으로 나타나는 수탈정책의 극을 치닫게 된다. 모든 법도가 안동 김씨 일파에 의해 좌우되고, 뇌물이 성행함은 물론이거니와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관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들을 착취하여 그것을 벌충하였으며, 이 같은 수령들의 부정에 편승환 아전들의 횡포 또한 백성들의 고혈을 짰다. 도학을 논해야 할 서원에서는 세도정치의 외형적인 지주로서 노론측 당론의 소굴이 되었으며, 불법적인 수세권을 발동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수탈하였으며 왕권을 침해함은 물론 관령보다 더 위세가 당당한 묵패로 향촌민에 대한 체벌과 착취를 서슴치 않았다. 또한 무관의 자제들은 활도 쏘아보지 않고 오로지 가문의 덕을 입어 벼슬길에 오르곤 하였다.
반세기에 걸쳤던 안동 김씨 시파계 일문의 독재는 세도정치의 온갖 병폐를 전형적으로 드러내어 전국적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졌고 잦은 민란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곧 세도정권을 변질시키고 붕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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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안동 김씨 가문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는 차원에서 자료를 올려본다.
누구는 안동 김씨 가문이 조선 후기 역사에서 세도정치로 조선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 주요 원인으로 평가하고 있고 누구는 명문 가문으로 충절과 학문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조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문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각자 보는 각도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높은 학문을 구가하였던 충절의 인물이 태어나 역사에 기록되었던간에 그 가문이 권력을 잡고 위로는 임금을 모시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위해 얼마나 부국강병을 이룩하였고 태평성대를 이루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안동 김씨 가문을 포함 세도정권을 누렸던 대부분의 가문들이 오로지 자신과 자신들 가문의 대를 이은 영광과 부귀영화만을 추구하였지 진정 나라의 발전에는 기여하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아래 자료를 살펴보고 각자 나름대로 평가하시기 바란다.
안동 김씨 가문에 대하여......
안동 김씨(安東 金氏)는 대한민국의 안동을 본관으로 삼은 서로 다른 두 씨족이 존재한다. 김은열의 둘째 아들 숙승(叔承)을 시조로 하는 세칭 구(舊)안동과 고려 태사(太師) 김선평(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新)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이 두 ‘안동’은 조선시대에 정승 19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배출하였다.
구 안동 김씨
관향 | 안동 |
시조 | 김숙승 (金叔承) |
주요 중시조 | 김방경 |
주요 집성촌 | |
주요 인물 | |
인구(2000년) | 425,264명 / 132,645가구 (18위) |
구(舊)안동 김씨는 신 안동 김씨처럼 경주 김씨에서 파생된 씨족으로 경순왕 김부(金傅)의 손자인 평장사(平章事)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경순왕의 8대손으로 고려의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삼는다.
충렬공은 고려조에 삼별초를 평정하여, 벼슬이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에 이르고,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져 구 안동김씨를 일명 상락 김씨(上洛金氏)라고도 한다.
신 안동 김씨
관향 | 안동 |
시조 | 김선평 |
주요 중시조 | 김극효 |
주요 집성촌 | |
주요 인물 | |
인구(2000년) | 47,702명 / 15,068가구 |
신라 말 안동의 성주로 있다가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어 고려 태조로부터 안동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태사공(太師公)에 봉해진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한다. 김선평(金宣平)은 고려 태조로부터 성을 하사 받은 안동 권씨(권행), 안동 장씨(장정필)와 함께 안동의 3태사묘에 모셔져 있다.
조선 중기에 도정(都正)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을 지낸 김극효(金克孝)를 서윤공파의 중시조로 삼는다. 조선말기 세도정치의 주요 가문이다. 조선이 몰락한 근세사에서 언급되는 안동김씨는 바로 이 신 안동김씨다. 이 안동김씨를 구안동김씨와 구별해 신(新)안동김씨라고도 한다. 2000년 인구는 구 안동 김씨에 비해 10분지 1 수준이다.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부의 지역으로 예천(풍기) 밑에 있고 고대에는 창녕국(昌寧國)인 소국이었다. 신라가 이곳을 정복하고 고타야국(古陀倻國)으로 불렀고, 757년(경덕왕 16)에 고창군으로 개칭하였다. 또 석릉(石陵), 능라(綾羅), 지평(地平), 일계(一界), 등의 별호가 있었다. 조선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 안동군이 되고 1896년에 경상북도 안동군이 되었다. 안동면에는 일직(一直)면이 있어 안동을 관향으로 하는 본관들이 일직(一直)을 관향으로 하기도 하였다.
안동 김씨의 내력
안동 김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김선평(金宣平)이다. 그러나 그 중간의 10여 대는 고려조에서 드러난 벼슬자리를 못했기 때문에 나열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더니 조선 성종 연간에 김계행(金係行)이라는 인물이 비로소 문과에 급제해 안동 김씨 가문의 문호를 열었다. 김계행은 호가 보백당인데 당시 사림에도 명망이 있어 김종직과 교유했고 그의 외손자 함양 박씨 다섯 명도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김계행의 형은 김계권으로 세칭 장동(壯洞) 김씨의 중시조이다. 김계권은 5남 6녀를 두었는데, 제일 막내가 김영수이고 그 아들이 김번이며 김번의 처가가 바로 양주의 석실이다. 이 석실은 안동 김씨가 서울에 들어오기 직전의 교두보였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김번이 병이 들어 처가인 남양 홍씨 홍걸의 집에 가서 요양을 하는데 그의 백부 학조대사(學祖大師)가 문병을 왔다가 조카가 더 살 가능성이 없는 것을 보고는 터를 잡아 주었다고 한다. 그때 옥으로 된 호리병에 물이 담긴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의 명당 터를 잡아 준 일로 그 뒤 안동 김씨가 그렇게 번창했다는 것이다.
실제 안동 김씨가 60년 세도를 부리게 된 먼 기반은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의 충절에 있었다. 이들은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서 청나라 오랑캐를 배척하는 선봉장들이었다. 김상용은 강화도에서 순절했고 김상헌은 삼각산과 한강수를 뒤로 하고 심양에 붙들려가 감옥 생활도 했다. 이러한 두 형제 덕에 안동 김씨는 그 손자인 김수흥, 김수항 등이 모두 출세해 영의정에 오르기도 하고 당쟁의 소용돌이에 몰려 귀양지에서 죽기도 했다.
그 아랫대인 김창협이 학문으로 대성하고 그 동생 김창흡 역시 명망 있는 학자가 되어 ‘창(昌)’ 자 돌림의 6형제가 모두 이름을 날리는 이른바 6창(六昌) 시대를 열었다. 이때부터 안동 김씨는 골수 노론에 편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이미 이때 서울에 살면서 세련된 문화생활을 하던 그들은 송시열을 이은 권상하 계통의 시골 출신 학자들과는 다소 학문적 경향과 현실 인식을 달리하고 있었다. 충청도와 서울 지역의 학계가 분열되고 있었던 것이다.
1721~1722년 신임사화 때는 6창의 한 사람인 김창집이 소론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러나 그 뒤 김원행이 영조 연간에 기호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 부상했다. 그는 화양서원 원장이 되어 송시열로부터 권상하,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충청도 학맥을 서서히 따돌리고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른바 호(湖), 즉 충청도와 낙(洛), 즉 서울의 정계와 학계의 갈등인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는 송시열을 더 높이느냐 그렇지 않으면 김창협을 더 높이느냐 하는 문제까지 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파와 벽파와의 싸움과도 맞물려 있었다. 호를 지지하는 벽파는 정순왕후를 등에 업은 경주 김씨 세력이었고 시파는 김조순 등 안동 김씨 세력이었다.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1804년(순조 4) 정순왕후가 죽자 시파가 승리했다. 이에 앞서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되어 정권은 이제 경주 김씨에서 안동 김씨로 넘어갔다.
김조순이 살았던 자하동은 시내가 흐르고 숲이 우거진 골짜기가 있어 아늑했다. 또 바로 경복궁 북쪽으로 창의문의 아래 지역인데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였다. 이 자하동의 ‘하’ 자를 생략하고 ‘자동’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또 급히 발음하면 장동이 되어 버리기도 했다. 어쨌든 이 김씨들이 서울 장동에 터를 잡고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장동 김씨(壯洞 金氏) 또는 장김(壯金)이라고 불렀다.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 된 뒤 조정의 권한을 휘두르고 장동에서 교동(校洞)으로 이사했다. 그 후 국왕 대신 대권을 잡고 헌종과 철종 대에 이르기까지 3세에 걸치는 왕실 혼인의 기반을 확고하게 마련했다. 홍경래난 후 관서의 시인 노진은 “가문의 성세는 장동의 갑족 김씨요, 이름자는 서울에서도 유명한 ‘순(淳)’ 자 항렬이라네.”라고 한 것이 이 무렵의 장동 김씨를 일컬은 것이다.
김조순이 죽고 아들 김유근(金根)과 김좌근(金左根), 손자 김병기(金炳冀)가 이어서 교동에 살게 되었다. 또 김문근(金汶根)이 철종의 장인이 되어 조카 김병학(金炳學)과 김병국(金炳國)이 정권을 잡고 전동(典洞)에 모여 살면서 김병기와 권력이 비슷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서울에서는 권력을 가리켜 전동, 교동이라 했고 한말까지 민간에서는 ‘전교동 시절’이라는 유행어까지 퍼져 있었다.
이같이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김수항(金壽恒), 김창집(金昌集)이 모두 명망과 덕망을 갖추고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들이었고 김조순도 문장에 능하고 일 처리에 익숙하며 후덕이 있다고 칭송되었다. 그러나 그 자손들에 이르러 탐학하고 미련하며 교만하고 사치해 외척이 국가를 망하게 하는 화의 기반이 되었다. 이들은 다만 장김이 있는 것만 알았지 국가가 있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안동 김씨는 60여 년간 정권을 좌지우지하면서 세도를 부렸다. 심지어 1863년(철종 14) 겨울에 대원군(大院君)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이들은 몇년간 권력의 주변을 맴돌면서 여전히 요직을 맡고 있었다.
세도정치의 기원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도학적인 의미에서 '세도(世道)'란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길'을 뜻했다. 그래서 위대한 학자는 세도를 스스로 감당해 한 시대의 국가와 사회를 책임지고자 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세도정치(勢道政治)는 신하가 강력한 권세를 잡고 온갖 정사를 좌우하는 정치형태를 말한다.
이러한 정치형태는 조선 후기 정조 연간 홍국영이 전권을 휘두르면서 등장했다. 그래서 조선 속담에 정권 잡은 것을 세도라고 했다. 왕명 한 번으로 세도를 맡게 되면 그 사람이 비록 낮은 벼슬과 한가한 지위에 있더라도 정승 이하가 이 세도가의 명령을 따랐다. 모든 국가의 기밀 업무와 관료의 보고문도 세도가에게 의논한 다음 임금에게 아뢰고 또 세도가에게 먼저 물은 다음에 결정했다. 그래서 모든 뇌물이 세도가에 모이는 반면 삼정승과 육판서는 그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세도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는 '권신(權臣)'이라는 말만 있었다.
이러한 세도의 시작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홍국영의 보호를 받아 여러 번의 위기를 모면하고 집권하자 홍국영에게 정권을 맡겼던 데서 비롯되었다. 홍국영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세도를 부렸다.
그러나 실질적인 세도정치는 순조 이후부터 나타났다. 순조 연간에는 반남 박씨 박종경과 안동 김씨 김조순, 풍양 조씨 조만영이 대표적인 세도가였다. 우리나라 속담에 ‘10년 가는 세도가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한 개인이 10년간 권력을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데 19세기 초부터 60년간 세도를 부린 정치 세력이 바로 안동 김씨 일문이었다.
당시 정치 운영은 실질적으로 안동 김씨 일문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전정, 군정, 환곡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해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마침내 1862년(철종 13) 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전국 도처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한데, 백성이 전국적으로 들썩거리게 되었으니 나라가 편안할 리 없었다. 조선 왕조의 체제 자체가 근본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구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려는 매우 어수선한 사회 상황에서 경상도 경주에서는 위대한 사상가 최제우가 혜성처럼 나타나 동학(東學)을 창도했다.
그런데 1863년 조정에서는 최제우에게 혹세무민(惑世誣民), 즉 세상을 혹하게 하고 백성을 속였다는 죄목을 씌워 서울로 압송하게 했다. 철종이 죽자 최제우는 대구 감옥으로 이송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되었다.
또한 철종 조에는 전국적인 민란 수습에 대해서도 기껏해야 '삼정이정청'이라는 임시 특별 기구를 설치해 삼정의 문란을 구제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데 그쳤다. 철종이 안동 김씨와 힘을 합해 근본적 정책 수립은 하지 못하고 그저 모든 관료와 재야 선비들에게 그 대책을 강구해 올리게 했다. 물론 철종으로서는 60년 안동 김씨 세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구제책이란 것도 고식적인 정책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철종은 1863년 12월 7일 갑자기 병이 악화되어 그다음 날 서른세 살을 일기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서거했다. 5개월장(葬)으로 1864년 4월 7일 경기도 고양의 희릉 오른편 언덕에 장사지내니 능호는 예릉(睿陵)이다. 슬하에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가 유일한 혈육이었다. 영혜옹주는 금릉위 박영효에게 출가했다.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정치의 시작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1803년 12월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경주 김씨와 이를 중심으로 한 벽파의 정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 대신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시파가 정계에 등장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1804년부터 순조가 국혼을 반대했던 권유와 그 배후자로 지목된 김노충을 제거하는 데 직접 앞장서고 있었으니, 이는 장인인 김조순의 뜻을 받들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차츰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는 권력의 핵심인 비변사를 장악해 그 실권을 행사했다. 1804년 김조순은 규장각 제학과 검교 등의 관직을 역임함으로써 정조의 권위에 기탁해 이를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키워 갔다.
한편 18세기 말에 등장한 두 정치 세력인 벽파와 시파는 경종 연간에 노론 4대신을 처형한 '신임사화'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임오화변'에 대해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다. 신임사화는 1721년(경종 1) 신축년에 노론이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서두르다가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 4대신이 소론의 공격으로 정치적 피해를 당한 사건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임인년에 노론 4대신과 60여 명의 노론 인사가 소론 목호룡의 고변으로 경종에 대한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그런데 영조 연간부터 신임사화를 놓고 당시 노론의 처형에 대한 경종의 처분이 소론의 조작이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로 노론과 소론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노론은 소론의 조작이라고 보는 입장이고 소론은 조작이 아니라는 견해를 보였다. 또한 1762년 임오년에 사도세자를 죽인 임오화변에 대해 당시 영조의 처분이 정국 주도 세력이던 노론의 책임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로 노론의 책임이라는 측은 시파이고 노론의 책임이 아니라는 측은 벽파로 갈려 있었다.
정조와 순조 연간에도 신임사화와 임오화변에 대해 무엇이 진정한 의리인가라는 의리 논쟁이 자주 일어났다.
집안 내부 싸움
김달순 옥사도 그와 관련된 정치적 사건이었다. 김달순은 1805년 12월 벽파의 핵심인 김관주의 추천으로 우의정에 올랐다. 그는 조선 후기의 명문 안동 김씨 가문에서 1760년 1월 9일에 태어났다. 자는 도이(道爾)이고 호는 일청(一靑)이다. 그의 가계는 김수항, 김창흡, 김양겸, 김범행, 김이현으로 이어지는 혁혁한 가문이었다. 특히 그는 삼연 김창흡의 현손으로 대산 김매순과는 바로 사촌 형제간이었다.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어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1801년(순조 1)에 전라도관찰사, 1803년에는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그 뒤 더러 유배 생활도 겪어 정치적 역경이 없지 않았으나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805년에 호조판서를 거쳐 특지로 우의정에 발탁되었던 것이다. 그는 안동 김씨 집안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시파에 속하지 않고 벽파에 속했다. 김관주의 도움으로 우의정에 올랐기 때문이다.
벽파의 후견자였던 정순왕후가 1805년 1월에 죽자 벽파의 정치적 구심점인 김관주는 순조가 점점 자라는 것을 보고 늘 근심에 싸였다. 왜냐하면 순조가 장차 장성하면 반드시 아버지 정조를 본받아 벽파를 원수처럼 여겨 정치 보복을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는 순조가 아직 어릴 때를 틈타 일찍이 사도세자에 대한 안(案)을 정리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김관주는 조용히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조카인 박종경에게 “영조 때에 박치원, 윤지겸 두 사람이 일찍이 사도세자의 잘못을 간했으니 그대가 대궐에 들어가 순조를 뵙고 두 사람을 포상해 돌아가신 사도세자가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덕이 있었다고 드러내면, 곧바로 이어 우의정 김달순이 들어가서 그 이야기를 다시 아뢰면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안이 확실하게 정해질 것”이라 했다.
이 말을 들은 박종경이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하자 김관주는 그 사실을 김달순에게 알렸다. 그러자 김달순도 이에 협조하기로 하고 박종경과 같이 순조에게 아뢸 날짜를 정했다. 그런데 약속 날짜가 되어 박종경이 대궐에 막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의 아버지 박준원이 그 사실을 알아채고는 “집안의 박씨 종자를 말릴 화가 장차 이르겠도다.”고 하며 박종경을 방에 가두어 꼼짝 못하게 했다. 김달순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박종경이 이미 대궐에 들어가 순조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고 생각하고 순조를 만났다. 그러고는 사도세자를 항상 두둔해 온 영남 만인소의 주모자 이우에 대한 처벌과 사도세자로 하여금 잘못을 시인하게 했던 박치원과 윤재겸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려 주기를 청하니 순조가 어리둥절해 가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1806년 1월 순조는 “사도세자가 간쟁을 용납하는 덕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미 정조가 임오화변에 관한 문서를 파기했고 ‘차마 듣지 못하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건으로 마무리 지었기 때문에 박치원과 윤지겸 두 사람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리는 일은 결코 불가하다.”고 했다. 이에 김달순은 “정조가 의리를 천명하는 데 어긋남이 없었으며 차마 듣지 못하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겠지만 이 사건에 대해 장차 부득불 말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순조가 “임오년에 관계되는 모든 의리는 정조께서 굳게 고수한 것으로 매우 정미롭고도 은미한 문제여서 이 사건을 드러낼 것은 없고 이처럼 문자에 올리는 것이 매우 황송한 일이니 다시 이 문제를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했다.
일이 이렇게 전개되자 평소 김달순과 정치적 적대 관계에 있던 김명순이 개입해 김달순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같은 안동 김씨로, 김수항의 5대손인데 촌수로는 10촌 간이었다. 평소 시파의 편에 서서 김달순과 적대 관계였던 김명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일에 대해서는 선왕 정조께서 이미 누구도 이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는데 지금 김달순이 박치원과 윤지겸 두 사람을 포상하기를 청하니 이는 선왕의 뜻이 아니지 않는가.”라고 했다. 이에 순조가 찬동하자 김명순은 드디어 형조참판 조득영으로 하여금 김달순을 탄핵하게 했다. 이어 대사간 신헌조가 김달순의 죄를 계속 문제 삼았고 이어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합동으로 왕에게 거듭 아뢰어 중도부처(中途付處)에 처해졌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과 의금부는 또다시 그를 사람이 살지 않는 먼 섬에 귀양보낼 것을 주장해 경상도 남해현의 한 섬에 보내졌다. 그는 다시 강진현 신지도로 옮겨져 4월 13일에 사사되었다.
결국 김달순 옥사를 계기로 벽파는 시파로부터 정치적으로 철퇴를 얻어맞았다. 조득영의 김달순 공격으로 김달순이 사사되면서 바로 김관주, 심환지, 김구주, 김일주, 정일환 등 벽파의 핵심 인사들도 추풍낙엽처럼 권력에서 떨어지게 되었다. 시파 정권이 들어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한편 1762년 사도세자가 화를 당할 때 김관주의 아버지 김한록이 대의를 위해서는 친함도 저버릴 수 있다는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문자인 대의멸친(大義滅親)의 설로써 영조에게 아뢰자 부제학 김시찬(金時粲)이 이를 꺾었던 적이 있었다. 김시찬은 김상용의 현손으로 자는 치명(穉明)이요, 호는 초천(苕川)이다. 이때 이미 김시찬은 사도세자를 지지하는 편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806년 5월에 도승지 김이양은 이 사실을 거론해 김한록을 소급해 탄핵하고 역률을 베풀기를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얼마 후 영의정 이병모가 김시찬의 벼슬을 이조판서에 추증할 것을 건의했다. 또한 그해에는 남인 채제공의 관작이 회복된 반면 벽파의 골수 김구주(金龜柱)는 소급해 역률로 다스려졌다. 그러나 이 당시 시파와 벽파의 정치적 갈등과 보복에는 각자 말할 때마다 의리를 들먹이고 있으나 그 자신들의 경제적정치적 이익이 더 우선이었다.
김달순이 처형된 이후 1807년 이경신은 김달순의 행위를 변호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를 계기로 벽파의 김종수, 김종후의 관작은 소급해 박탈되고 김종수는 정조의 묘정(廟庭)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이심도가 소를 올려 시파와 벽파의 원류를 논하고 두 파의 대립과 갈등을 싸잡아 비판하면서 순조가 강력하게 정국을 주도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불손한 말이 홍봉한에게 미치자 혜경궁 홍씨가 이를 듣고 식사를 아예 거들떠보지 않았다. 순조는 이를 걱정해 이심도를 처형해 버렸다. 그리하여 순조 즉위 이래 지속되어 온 시파와 벽파의 논쟁은 시파의 승리로 끝났다.
김달순 옥사에서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 세력은 그동안 벽파 공격에 소극적이던 반남 박씨 세력의 정치적 협찬을 받고 여기에 풍양 조씨 조득영의 후원을 받아, 경주 김씨와 벽파를 물리치고 명실상부하게 정권을 장악했다. 풍양 조씨로서도 조득영이 안동 김씨를 도와 벽파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기에 후일 그의 8촌인 조만영의 딸이 세자빈(익종비, 조대비)으로 간택될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세도정치의 전개
세도정치의 핵심 인물은 김조순, 김좌근, 김문근, 김병기이다. 60년 동안 안동 김씨는 항렬로 보면 ‘순(淳)’ 자, ‘근(根)’ 자, ‘병(炳)’ 자가 벼슬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전주 이씨는 영락해 종실의 관례를 치를 때 주례로 세울 사람이 마땅치 않을 정도로 망했는데 순조, 헌종, 철종의 처가인 안동 김씨는 호화스러운 사치 생활을 마음껏 누렸다.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이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조상들이 충절과 학문을 숭상해 온 덕택이었다. 일찍이 김상용과 김상헌이 정유길(鄭惟吉)의 외손자여서 안동 김씨와 동래 정씨는 정치적으로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서울 회동(會洞)에서 대대로 벼슬을 해온 동래 정씨는 세칭 회동 정씨라 하는데, 조선조에 정승을 가장 많이 낸 집안이다. 정태화, 정만화, 정치화 때 이 정씨들이 모두 정승에 올라 송시열은 이 집안을 큰 기러기와 고니에 비유하고 자기 집은 지렁이라고 하며 엄청난 차이를 둔 적이 있다. 헌종이 죽고 후사를 세울 때 정원용(鄭元容)은 안동 김씨의 부탁으로 강화도에 가서 강화도령 원범(元範)을 데려와 왕위에 등극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정원용은 정유길의 후손이니 멀리 따져 보면 안동 김씨의 외가가 되는 것이다.
정원용은 순조 초에 과거에 급제했는데 일찍이 김조순이 발탁해 영의정의 벼슬까지 올랐다. 그는 90세까지 장수를 누리고 수십 년 동안 삼정승을 두루 거친 인물로 조정의 정치에 익숙하고 노성한 정치가여서 조정과 재야에서 명망이 있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 권력에 아부해 세상을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를 얕잡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철종의 비가 김문근의 딸로 정해지자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에 봉해져 모든 정사가 그에 의해 결정되었다. 김문근은 사람됨이 너그럽고 두터워 아랫사람을 은혜와 의리로써 거느렸다. 그는 몸집이 비대해 사람들이 뱃속에 많은 물건을 싸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포물부원군(包物府院君)이라 불렀다.
김문근의 조카 김병국과 김병학은 모두 넉넉한 도량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들은 각각 훈련대장,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김병기는 그 사람됨이 조금 호방했는데 좌찬성이 되었다. 그러나 김문근의 아들 김병필은 약하고 병이 잦아 김문근은 그를 요직에 임명하지 않고 대교 자리에나 머물러 있게 했다.
남병철은 김병기와 내외종간인데 총명했다. 학문이 넓고 글도 잘하며 더욱이 천체 관측에도 정밀했다. 그가 직접 수륜(水輪)을 제작해 지구사시의(地球四時儀)를 움직이게 해 지전설을 증명해 보이자 김문근은 더욱 그를 사랑했고 철종도 특별한 총애로 대우했다. 안동 김씨의 권세가 궁궐 안팎을 압도하게 되자 남병철도 승지가 되어 제법 권력을 휘둘렀고 여러 김씨를 깔보기도 했다. 이를 김병기가 싫어해 남병철을 전라감사로 내보냈는데 남병철은 분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지냈다. 마침 암행어사가 전라도에 가서 남병철의 부하 관리인 판관을 조사하려고 우선 판관의 속리를 잡아 관청의 뜰에서 잡아 족쳤다. 이에 남병철은 아전과 군졸 수천 명을 풀어 어사를 공격하게 했다. 이 때문에 남병철은 파직되었고 김병기와는 더욱 원수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남병철은 곧이어 다시 직제학이 되었고 안동 김씨와 화해했다. 남병철은 마음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으나 외로운 처지였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 놓고 불평도 못한 채 오로지 서화와 여색으로써 세월을 보냈고 철종 대까지는 벼슬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세도정치기에는 뇌물 거래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수령들은 백성들의 피를 짜내어 장동 김씨에게 뇌물을 주고 그 집에 손이 되기를 바랐다. 이러한 집이 모두 열두 가문이어서 열두 사랑(舍廊)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바로 사랑방 정치를 방불케 하는 것이다.
한편 나주 기생 양씨는 김좌근의 첩이 되어 권력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김좌근은 이미 늙었으나 양씨는 잘 늙지도 않고 매우 영리해 김좌근을 잘 돌보았고 심지어 조정의 인사에 간여해 벼슬을 팔고 뇌물도 받아 돈도 많이 벌었다. 그리하여 그녀에게는 나합(羅閤), 즉 나주합부인이라는 호칭까지 붙여졌다. 사실 나합이라 한 것은 정승에게나 붙일 수 있는 합자인데 그녀를 그렇게 부르면서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당시 나합의 말이라면 대감의 집을 한 자 낮출 수도 있었다고 하니 권력은 그녀의 치마폭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안동 김씨 세상
철종은 안동 김씨 세력을 두려워해 아무 일도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신하에게 요직 한 자리를 임명할 때도 반드시 좌우에 묻기를 “교동 아저씨(김좌근)가 아는 일인가?”라고 물을 정도였다.
당시 안동 김씨 고위 관료가 눈(雪)을 읊은 시에는 안동 김씨의 위엄이 천지를 진동하고 세인을 업신여기어 지나치게 교만을 부리는 모습이 역력히 베어 나고 있다.
흰 눈 덮인 뭇 산은 푸른 기미 없고요. 群山不敢生心碧
지는 노을 오히려 홍염을 토하고 있네. 落照猶能盡力紅
- 윤효정, 《최근 육십 년의 비록》
철종도 딱 한 사람만은 관직에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했다. 강화도에 살 때 이시원이 훌륭한 관원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즉위 후 인사 서류가 올라오면 비록 두 번째나 세 번째 후보 자리에 그의 이름이 있더라도 반드시 임용했다. 한 번은 개성유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철종이 직접 이시원의 이름을 추가로 써넣어 임용하게 하기도 했다.
철종은 1852년(철종 3)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이듬해 봄에는 관서 지방에 심한 기근이 들자 대책으로 선혜청의 돈 5만 냥과 사역원에서 인삼세로 거둬들였던 세금 중 6만 냥을 내어 구제하게 했다. 또 그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식량이 없어 구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재용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계를 명했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약 1천여 호나 되는 여주의 민가에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내려 주어 구휼하도록 했다. 그리고 함흥의 화재를 당한 백성에게도 3천 냥을 지급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 지역에 내탕금 2천 냥, 단목 2천 근, 호초 200근을 내려 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 구호 정책에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역사 그리고 피빛 향기' 블로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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