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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26 : 조선의 역사 368 (제25대 철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826 : 조선의 역사 368 (제25대 철종실록 2)
철종의 예릉
제25대 철종실록 ( 1827~1849년, 재위 : 1834년 11월~1849년 6월, 14년 7개월)
1. 농부에서 제왕이 된 강화도령 원범
철종시대는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때였으며, 세도정치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전황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걸 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도 따지면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왜냐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안동 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왕가의 법도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황을 저지른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이다.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세손이 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세력들이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자기들의 위치가 위험할 것 염려되어 새 왕자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막내 아들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에 유배되나,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병사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 인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큰 아들인 상계군 담은 1779년 정조 3년 홍국영의 음모로 모반죄로 몰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한편 은언군의 아내 송씨와 큰며느리 신씨는 1801년 순조 1년에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어 사사되면서 은언군 인도 사사되었다.
그러던 중 1844년 헌종 10년에 민진용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순조 말기부터 김유근과 김홍근에 의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이루다가 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나자 권력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을 포섭했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여기에 연루된 전계대원군 이광의 첯째 아들 원경이 사사된다. 여기서 둘째 아들 경응과 셋째 아들 원범만이 살아남는데 이들은 또다시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리하여 천애고아가된 두 사람은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년여가 지난 어느날 갑자기 원범에게 왕통을 이어라는 교지가 내려진다.
그가 바로 후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왕위에 오른 철종이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 거리가 먼 농부였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별안간 명을 받은 원범은 봉영의식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튼날 6월 9일 창덕궁 희정단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학문을 연마한 바 없다는 이유로 1851년까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21세가 되던 1851년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게 되었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이 되어 국사를 돕게 되니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된 셈이었다. 여기서 의문이 되는 것은 둘째를 제치고 셋재인 원범에게 왕위를 잇게 한 내력이다.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둘째 경응은 아마도 강화도에서 병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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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철종의 왕위 계승과 관련한 '하교길 길 옆에서' 님의 블로그에서 퍼온 글이다. 참고하시길......
철종의 왕위 승계
조선은 명군 영·정조 시대(1725~1800년) 르네상스를 맞았다. 하지만 이 부흥기는 오래가지 못했고 일순간 몰락했다. 국가 재정의 근간인 삼정(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문란이 대표적이다. 순조 11년(1811년) 홍경래의 난과 철종 13년(1862년) 임술민란 등은 그 결과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미 철종 시절 예고돼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안동김씨 세도정권이 있었다.
안동 김씨 세력은 나라를 좀먹은 전형적인 정치악의 사례로 세간에 기억돼 있다. 친일파가 아니었다면 조선 멸망의 책임은 온전히 그들의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 왕실을 대신해 국정을 수행하는 가문으로서 안동 김씨가 제 역할을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부풀려진 측면도 없잖아 있다. '능력이 출중한 왕족 이하전 대신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이원범(철종)을 내세워 왕위를 잇게 했다'는 얘기가 그렇다. 안동김씨가 자신들이 조종하기 쉬운 사람을 왕으로 고르느라 똑똑한 왕실 종친들을 다 죽이다 보니 문맹이나 다름없던 몰락 왕족이 임금이 됐단 것이다. 왕좌에 오른 이가 가난한 농사꾼이라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라 그런가 보다 여기기 쉽다.
[철종의 잠저 강화도 용흥궁, 본래 초가집이던 걸 즉위 후 지금의 한옥으로 새로 지었다]
하지만 이는 안동김씨에 대한 세상의 부정적 인식이 빚어낸 소설에 가깝다. 헌종이 승하한 1849년 당시 이원범 아닌 다른 이가(가령 이하전 등)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먼저 강화도령 이원범의 가계도를 보자.
영조(21대) - 사도세자 ┌ 2남 정조(22대) - 순조(23대) - 효명세자 - 헌종(24대)
└ 3남 은언군 - 1남 상계군,
2남 풍계군(이희),
3남 전계군 - 1남 이원경, 2남 이경응, 3남 이원범(철종, 25대)
※ 이원범의 가계는 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인 은언군 계열이다. 정조 계열의 잠재적 왕위 경쟁자로 간주돼 끊임없이 견제 받았다. 은언군의 동생 은전군, 아들 상계군(전계군의 맏형), 손자 이원경(이원범의 맏형) 등이 역모에 연루돼 죽임을 당했다. 유력한 왕족임에도 강화도에서 영락한 신세로 살게 된 건 이 때문이다.
헌종과 이원범은 사도세자를 같은 할아버지(헌종에겐 고조부, 이원범에겐 증조부)로 둔 사이다. 둘의 촌수는 7촌으로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멀다고도 볼 수 있다. 사도세자에겐 가계를 이은 아들이 둘 있었지만(정조와 은언군), 정조 대부턴 왕실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이 잇달아 요절하며 사실상 3대 독자 집안이 돼 버렸기에 헌종 무렵엔 임금의 근친 중 6촌 이내 왕족은 없었다.
7촌으로 넘어가면 이희(26살), 이경응(22살), 이원범(19살) 세 명이 있었는데 이 중 이원범이 성년 전이라 가장 유리했다. 새 임금이 성년 전이면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수렴청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철종 즉위 후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김씨(안동김씨 출신)가 3년간 수렴청정하게 된다.
반면 이하전의 가계에서 왕을 찾으려면 조선 중기의 선조(1567~16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49년 당시 기준으로 봐도 282년 전 일이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삼남인데, 이하전은 덕흥대원군의 장남 하원군의 후손이다. 선조 이후의 임금들은 모두 덕흥대원군 계열인데 선조가 셋째였던 관계로 왕실이 방계, 지가支家가 됐다. 그래서 장남 하원군의 직계 후손들은 덕흥대원군 집안의 종갓집(도정궁)으로 이후 삼백 년 넘게 왕실의 각별한 배려를 받았다.
중종(11대) ┌ 1남 인종(12대)
├ 2남 명종(13대)
└ 7남 덕흥대원군 ┌ 1남 하원군 - · · · · · · · · · · · · · - 이하전(덕흥대원군의 13대 종가 직손)
└ 3남 하성군(선조, 14대) - · · · · · · · · · · · · - 헌종(덕흥대원군의 12대 방계 손)
[덕흥대원군 종갓집이던 도정궁 경원당, 현재 건국대학교 안에 있다. 서울시 민속문화재 9호]
하지만 종갓집으로 배려 받는 것과 왕위 계승은 별개 문제다. 종가·지가로 갈린 게 거의 삼백 년 전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헌종과 이하전은 촌수를 따지면 무려 25촌이 된다(헌종이 덕흥대원군의 방계 12대 손이고 이하전은 직계 13대 손이다. 더하면 25촌이다). 사실상 남남이다. 아무리 족보를 중시하던 시대였다지만 삼백 년쯤 전에 같은 할아버지를 둔 걸 근거로 친척이라 하긴 어렵다. 조선왕실은 대군 소생으로 4대 손까지, 군 소생으로 3대 손까지만 왕실 종친으로 인정했다.
촌수가 멀고도 먼 이하전이 7촌 왕족들보다 유리했던 게 하나 있었으니 그가 항렬상 헌종의 조카뻘이란 점이었다. 헌종이 덕흥대원군의 12대 손이고 이하전은 13대 손이니, 이하전은 헌종의 조카뻘이 된다. 반면 이원범 등은 사도세자의 3대 손이고 헌종은 4대 손이니, 이들 중 임금이 나오면 삼촌이 조카의 뒤를 잇는 꼴이 된다(역항렬 계승). 왕통(王統)이든 가통(家統)이든 아랫 항렬로의 순항렬 계승이 자연스럽다. 이를 근거로 안동김씨의 정적이던 또 다른 외척 풍양조씨 세력은 이하전을 지지했다.
삼촌이 조카를 계승하는 게 더 무리인지 25촌 친척이 7촌 친척을 제치는 게 더 무리인진 가치 판단의 문제다. 개인적으론 이원범을 지지한 안동김씨의 판단이 더 상식적이었다고 본다. 25촌은 너무 멀다. 이원범 다음에 왕이 되는 이재황(고종)조차 헌종과 18촌으로 이하전보단 가까웠다.
아울러 어느 입장에 선다고 해도, 안동김씨가(또는 풍양조씨가) 자기들 입맛에 맞는 인물을 왕으로 내세웠다 비난하는 건 지나친 평가라 생각한다. 왕실에 적합한 다른 후보군이 있던 것도 아닌 상황인데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양측 모두 나름의 계승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 왕자의 難
선왕과 25촌 거리의 인물이 왕위 후보로 거론될 만큼 당시 왕실엔 왕자의 씨가 말랐던 상황이었다. 일부에선 이를 두고 안동김씨가 왕족들을 제거한 후유증이라 보는 시선도 있는데, 이는 순전히 낭설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심각한 왕자난(難)에 시달렸다. 조선왕실의 왕자 수는 총 124명인데 봉군(封君)된 왕자 기준)으로 왜란 전이 103명, 후가 21명이다. 왜란 전 임금들의 평균 왕자 수는 7.4명이었으나 후엔 1.6명에 그쳤다. 저출산과 함께 잦은 요절도 문제였다. 가령 숙종은 아들을 6명 봤으나 이 중 성년을 넘긴 건 셋뿐이다. 숙종 이후엔 한층 더 심각해져 영조, 정조, 순조 세 임금을 합쳐 얻은 왕자가 6명이고 이 중 장성한 이가 셋이다.
안동김씨의 위세가 대단했던 건 사실이지만 왕족들에게 손을 대진 않았다. 일부러 잡아 죽일 만큼 왕족의 수가 많지도 않았다. 안동김씨 손에 죽은 종친은 이하전 한 명 정도다. 이하전의 경우엔 철종의 경쟁자였던데다 풍양조씨 세력과 이어져 있어 이례적으로 제거됐을 뿐이다.
※ 이하전에 대하여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people.aks.ac.kr)'에서 이하전을 검색한 결과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족 중 기개 있는 인물로 왕위 계승권자 후보 물망에 올랐다'고 기술돼 있다. 이하전이 비범한 인물이었단 세간의 통설과 같은 내용인데, 1849년 당시 이하전은 8살 어린애로 기개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반면 강화도령 이원범은 비록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19살 청년이었다. '종합정보시스템'은 행정안전부와 한국정보화진흥원이 국가DB사업의 일환으로 구축한 사이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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