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823 : 조선의 역사 365 (제24대 헌종실록 3) 본문
한국의 역사 823 : 조선의 역사 365 (제24대 헌종실록 3)
헌종가례도병
제24대 헌종실록 ( 1827~1849년, 재위 : 1834년 11월~1849년 6월, 14년 7개월)
1. 헌종의 즉위와 조선 사회의 총체적 위기(계속)
기해박해
기해박해(己亥迫害)는 조선 후기 1839년(기해년, 헌종 5년)에 발생한 천주교 탄압을 말한다.
1801년(순조 1년)의 신유박해로 천주교의 교세는 몹시 위축되었으나 안동 김씨가 세도를 누리면서는 김조순이 시파였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없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 천주교 조선대목구를 설정하여 독립된 교구가 탄생하였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그리고, 서양인 천주교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피에르 모방(1836년)신부·자끄 샤스탕(Jacques Chastan, 1836년)신부·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1837년)주교 등이 들어와서 천주교의 교세가 회복되고 신도는 증가되어 갔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다시 박해 의논이 일어났고, 드디어 1839년(헌종 5년)에 제2차 박해를 전개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헌종의 할머니인 명경대왕대비 김씨를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에 대립하여 헌종의 모후(母后)인 효유왕대비 조씨의 척족 풍양 조씨의 벽파가 새로 등장하면서 무자비한 박해 선풍이 휘몰아쳐 3인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투옥·처형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서세동점을 막자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되었고, 따라서 박해와 살육도 무자비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헌종은 사학(邪學)을 배척한다는 뜻의 척사윤음을 내리고,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나머지 네 집도 처벌하도록 하여, 백성들이 서로 감시케 한 오가작통법을 강화하여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다.
병오박해
병오박해(丙午迫害)란 1846년 헌종 12년 병오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이다. 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처형하였다.
청년 김대건을 천주교 선교사로 선택한 프랑스 교회는 나름대로의 동기가 있었다. 아편전쟁 당시 조선·중국에서 이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프랑스 군함들이 동아시아에 파견되었다. 마카오에서 신학 과정을 마친 김대건은 바로 그 프랑스 군함을 타고 1842년 양자강에 도착하였다.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가도록 명령받은 김대건은 프랑스 해군 군함을 타고 중국에 입국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대건의 역할 중 하나는 서양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돕는 도우미 역할이었다.
1844년에 그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아 외국인 신부들의 조선 입국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조선에 잠입하는 데에 성공한 바 있다. 또 동년 10월 그는 페레올 신부를 모시고 배편으로 충청도에 잠입하는 데에 성공한 바 있다. 이때 그는 페레올 신부를 한양까지 안내했다. 2년 뒤인 1846년에는 만주에 머물고 있던 메스트로 신부 등의 입국을 돕기 위해 서해안 루트를 모색한 바 있다. 김대건 신부는 이 활동을 하던 중에 서해안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해 10월 한성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프랑스 해군의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항해해 왔으나, 김대건이 순교하기 전까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실제 임무가 조선에서 전교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양 선교사의 한국 잠입을 안내하는 역할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기독교에 대한 감시는 한층 더 강화하였다.
김대건 신부
김대건(金大建, 1821년 8월 21일 ~ 1846년 9월 16일, 세례명: 안드레아)은 한국 기독교역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신부이자, 천주교회 순교자이다. 어린 시절 이름은 김재복(金再福)이었으며, 세례명으로 쓰일 때는 대건 안드레아로 한다. 천주교의 성인으로 축일(기념일)은 7월 5일이다. 그의 세례명 안드레아는 아버지 김제준의 동생이자 순교자인, 김대건의 작은 아버지 김한현(김종한이라고도 하지만 본명을 따라 김한현이라고 이름을 통일하였다.)의 세례명을 이어받았다.
출생과 유년 시절
고조부 김진후
1821년 8월 21일 충청남도 솔뫼(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김제준(金濟俊, 1796년 ~ 1839년, 세례명 이냐시오,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9월 26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로 순교.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와 고 우르술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 김진후(金震厚, 1738년~1814년, 세례명 비오) 이후 집안 대대로 천주교를 믿었다. 김진후는 본래 하급관리였다가 며느리의 모범적인 행실을 보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791년(신해박해)에 체포되어 1801년(신유박해) 때 배교하여 유배되었다가 1805년 해미읍성으로 압송되어 사형처결을 받았다. 배교한 잘못을 뉘우친 김진후는 해미읍성에서는 형리들을 감화시켰다고 전해질 정도로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형은 집행되지 않았으며, 충청도 해미읍성에서 10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14년에 옥에서 죽었다.
김종한
김대건의 작은 아버지이자 김진후의 세째 아들인 김한현도 1816년 대구감영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감옥에서 형님에게 보낼 글을 쓸 기회를 얻자 "사람이 천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이 영광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동생의 뒤를 이어 김제준(이냐시오)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미리내 마을
이렇듯 극심한 박해를 피해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김대건은 7살 때까지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에서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경기도 용인의 산골인 미리내 마을로 피신하였다. 당시 용인 미리내 마을에는 박해를 피해 온 천주교회 신자들이 옹기 판매로 생계를 유지하며 복음을 전하는 천주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은하수 마을을 성지로 삼고 있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 성인)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김대건은 1836년 청소년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미리내 마을을 방문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의 배려로 한양에서 라틴어 등의 기초적인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모방 신부는 김대건의 집안 내력을 듣고는, 김대건을 천주교 신부로 키울 생각을 했다고 전해진다.
신학생 시절
한양에서의 기초 신학공부를 마친 후에 김대건은 1836년 12월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유학 중에 병으로 1838년 별세) 등과 함께 조선을 떠났으며, 만주와 요동을 거쳐서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중국인 신학교에서 간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조선에서 온 신학생들에게 직접 신학, 철학, 지리, 역사, 라틴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쳤다. 마카오 신학교에서의 신학생들의 공부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학문을 성실히 해야 함을 말하는 교회사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민중항쟁 등으로 공부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공부는 꾸준히 진행되었다.
신학생 시절 김대건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상당히 성숙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 | 네로 황제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받았습니다. 집에서 사자를 키우던 어느 그리스도인도 잡혀갔고, 경기장에서 사자와 마주쳤습니다. 사람을 보고 달려들던 사자는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사자는 그리스도인이 키우던 사자였습니다. 자신을 키우던 주인을 보고 조용해진 것입니다. 사자도 제 주인을 알건만, 왜 사람들은 천주님을 못 알아보는 것일까요? | ” |
가톨릭 잡지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의하면 김대건은 마카오 신학교 시절 그를 가르친 교수들이 만약 신학생이 되지 않았다면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학문과 미술 모두 뛰어난 박식가이었던 것이다. 김대건,최양업,최방제 신학생이 공부하던 시절은 서양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로써 저항하는 동방 민중들간의 대립과 투쟁이 있던 시대였다.그래서 마카오에서의 민중운동으로 필리핀 롤롬베이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1842년 조선 잠입을 시도한 그는 의주 검문소의 검문이 심해서 실패했으며, 마카오의 민중 반란을 피해 청나라로 옮겨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사목과 순교
김대건은 1844년 부제서품을 받았으며,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금가항(金家港)교회에서 천주교 조선교구장인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의 서품성사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해 10월 조선에 도착하여 12월까지 한양과 경기도 일대에서 기해박해 당시 교회 지도자들인 선교사들의 순교로 교회가 무력화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사목을 했으며, 남편과 사별한 후 거지꼴을 면하지 못하던 어머니를 위로했다.
순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 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학 죄인(邪學罪人) 김대건(金大建)을 효수(梟首)하라고 명하였다. 김대건은 용인(龍仁)사람으로서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廣東) 에 들어가서 양교(洋敎)를 배우고, 계묘년(1843년, 헌종 9년)에 현석문(玄錫文)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都下)에서 교주(敎主)가 되었다. 이 해 봄에 해서(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唐船)을 만나 광동에 있는 양한(洋漢)[7]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포청(捕廳)에서 한 달에 걸쳐 힐문하였는데, 그 말하는 것이 교활하여 양박(洋舶)의 강한 것을 믿고 협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마침내 그 교(敎)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은전(銀錢)을 흩어서 경외(京外)에서 흔하게 쓰는 재화는 다 양한이 책중(柵中)에서 실어 보낸 것이다.’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양외(洋外)의 제번(諸蕃)의 말에 능통하므로, 천주교 신부(神父)로서 각국을 위하여 통사(通事)한다.'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현석문과 아울러 같이 주벌(誅罰)하였는데, 현석문은 신유년(1801년, 순조 원년)의 사도(邪徒)로 처형된 현계흠(玄啓欽)의 아들이다.
—《헌종실록》 13권 12년(1846년)(음력) 7월 25일 (무신) 1번째 기사, 《헌종실록》 헌종 대왕 행장(行狀) |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을 돕기 위해 활동하던 김대건은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페레올 주교의 조선입국에 필요한 비밀 항로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1846년 6월 15일 그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학식이 출중하여 옥중에서 몇몇 대신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고, 또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하여 번역과 함께 색칠하기도 했으며, 그 지도는 헌종에게 바쳐졌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박학다식함을 아깝게 생각하여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김대건이 신학공부와 사목을 위해 외국인들과 접촉한 사실을 반역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그해 9월 15일 반역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김대건의 시체는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되었으나, 17세의 청소년이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프랑스 해군의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항해해 왔으나, 김대건이 순교하기 전까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당시 그의 유언은 “주교님,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였다.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어머니의 안위를 부탁한 것이었다. 또한 순교하기 전 하느님을 경외하고 죄를 짓지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 |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 ” |
— 김대건, 참수형을 당하기 전에 한 말 |
장례
김대건의 목은 군문에 걸려 효수당했으나, 비밀리에 천주교도들이 시신을 미리내 성지로 옮겼다. 1960년 7월 5일 김대건의 시신은 혜화동의 가톨릭대학교안의 교회에 이장되었다.
시성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김대건을 가경자로 선포하였으며, 1960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복자로 선포하였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영성
김대건은 하느님을 가리켜 임자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세상을 만든 임자이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 세상에 난 보람이 없고, 그분을 배반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닌 난 것만 못하다는 것이 김대건의 영성이었다.
가족 관계
- 증조부 : 김진후 (순교)
- 조 부 : 김한현 (순교)
- 아버지 : 성 김제준 이냐시오 (순교)
- 어머니 : 고 우르술라
2. 헌종의 가족들
헌종은 효현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계비 효정왕후 홍씨, 그리고 후궁 3명을 두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헌종 대에는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의 위상이 커지면서 풍양 조씨 일문이 득세 하게 되었다.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 원비인 효현왕후 김씨, 계비인 효정왕후 홍씨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가족 관계
- 조부 :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 조모 :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김씨
- 부 :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 익종(翼宗)
- 모 :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조씨
- 원비 : 효현성황후 김씨(孝顯成皇后 金氏)
- 계비 : 효정성황후 홍씨(孝定成皇后 洪氏)
- 후궁 : 순화궁 경빈 김씨(順和宮 慶嬪 金氏)
- 후궁 : 숙의 김씨(淑儀 金氏, 1906년(광무 10년) 숙의로 책봉되었다.)
- 딸 : 옹주(翁主)
- 후궁 : 경빈 김씨,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의 제
신정왕후 조씨(1808~1890년)
순조와 순원왕후의 아들 효명세자(익종)의 비이며 헌종의 어머니로서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이다. 12세 때 효명세자의 비로 책봉되어 세자빈이 되었고 효부라는 칭찬을 들었다. 1827년 순조 27년에 헌종을 낳았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에 추존되자 왕대비에 봉해졌는데, 이때부터 풍양 조씨 일문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세도를 이루게 된다.
1857년 순조 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없이 죽자 왕실의 권한을 쥐게 되었다. 이때 조대비는 전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흥선군 이하응, 조카 조성하와 손을 잡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해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1866년 2월까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제 정권은 모두 흥선대원군이 잡도록 하교하였다. 그 후 조대비가 대거 기용한 친정 세력들이 잇다른 정변에 희생되어 조씨 가문이 쇠락해지자 그것을 슬퍼하였으며 나라가 재난에 시달리자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1890년 83세로 세상을 떴으며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효현왕후 김씨(1823~1843년)
안동 김씨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이며 1837년 헌종 3년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4년 뒤에 가례를 올렸다. 왕후가 된 지 2년 만에 병에 걸려 죽었다. 1851년 철종 2년에 경혜, 정순의 휘호가 내려지고 다시 단성, 수원의 존호가 더해졌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효정왕후 홍씨(1831~1903년)
판돈녕부사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로서 1844년 헌종 10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헌종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1849년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왕대비가 되었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시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경빈 김씨(慶嬪 金氏, 1832~1907년)
조선 헌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는 김재청(金在淸)이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 신명하의 딸이다.
1832년(순조 32년) 8월 27일 한사루동 사제의 유연당(悠然堂)에서 탄생하였다. 1847년(헌종 13년) 순원왕후가 헌종이 나이가 많은데도 후사가 없자 정식으로 간택하여 들인 후궁으로 이 해 음력 10월 20일 경빈(慶嬪)으로 책봉되었고, 궁호를 순화(順和)라 하였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해 창덕궁 내에 낙선재(樂善齋)를 지어 자신과 경빈의 사랑채로 사용했으며, 같은 창덕궁 내에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경빈의 처소로 쓰게 하였다.
1849년(헌종 15년) 6월 6일 헌종이 승하함에 따라 순원왕후, 신정왕후를 정성을 다하여 받들었으며, 효정왕후에게 예를 다하면서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6월 1일(음력 4월 21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고종은 깊이 애도하고 조문을 직접 지어 내렸다. 이 해 7월 5일 양주 전 휘경원 천봉 국내 서록 손좌에 예장하였다. 현재 묘소는 서삼릉 내 귀인묘역에 있다.
가족 관계
- 아버지 : 김재청 (金在淸, 1807년 ~ 1855년)
- 어머니 : 정부인 평산 신씨(貞夫人 平山 申氏), 신명하(申命河)의 딸
- 양남매 : 김응현(金膺鉉), 백부 김재경(金在敬)의 3남
- 양남매 : 김문현(金文鉉), 숙부 김재홍(金在弘)의 2남
- 서모
- 이복 남매 : 김철현(金哲鉉)
- 남편 : 헌종 (憲宗, 1827년 ~ 1849년, 재위:1834년 ~ 1849년)
- 소생 없음.
3. <헌종실록> 편찬 경위
<헌종실록>은 총 17권(부록 1권)으로 되어 있으며 1834년 11월부터 1849년 6월까지 재위 14년 7개월간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부록에는 대비언교, 시문책, 애책문, 비문, 지문, 시장, 행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
<헌종실록>은 헌종이 죽은 지 6개월 뒤인 1849년 철종 즉위년 11월 15일에 편찬을 시작하여 1851년 8월에 완성되고 9월에 인쇄하여 각 사고에 봉인되었다.
헌종 시대의 세계정세는 청나라와 영국이 아편전쟁으로 혼란을 겪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서구 열강들과 속속 통상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빈번해지는 이양선의 출몰에 대비하여 해안 경비를 강화하는 등 자의반 타의 반으로 서구 열갈들과 교류를 준비하게 된다.
한편 유럽에서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시민혁명이 발발하면서 근대 국가로의 이행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임금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자협회가 결성되고 자본주의 노동가치설을 내세우며 마르크스, 엥겔스에 의한 공산주의 이론이 만들어진다.
미국에서는 모스가 유선 전신을 발명하여 통신 부문에 일대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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