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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22 : 조선의 역사 364 (제24대 헌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822 : 조선의 역사 364 (제24대 헌종실록 2)
헌종가례도병
제24대 헌종실록 ( 1827~1849년, 재위 : 1834년 11월~1849년 6월, 14년 7개월)
1. 헌종의 즉위와 조선 사회의 총체적 위기
헌종시대는 내우외환으로 후기 조선 사회의 붕괴 조짐이 드러나던 시기였다. 안으로는 순조 대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의 여파로 관리 임명의 근간이 되는 과거제도 및 국가 재정의 기본인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 등으로 정국이 혼란해졌으며, 재위 15년 동안 9년에 걸쳐 수재가 발생하는 등 민생의 어려움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순조 대부터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기해박해'로 이어져 훗날 외교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연안에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이양선의 출몰로 민심이 소란해지는 등 내우외환이 그치지 않아 어린 나이에 즉위한 헌종으로서는 치세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 신정왕후 조씨이다. 18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으며, 1830년 순조 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고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어린 나이로 경희궁 수정문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관계로 순조의 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헌종이 15세가 되던 해인 1841년에야 비로소 친정을 시작하였다.
헌종 대에는 17, 18세기부터 시작된 사회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로 농민층의 분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도시나 광산으로 흘러들어가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 빈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농층과 부상인들이 생겨나면서 천민에서 양민으로, 양민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이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오던 신분질서와 봉건제도의 붕괴 조짐으로 나타났다. 또한 빈번하게 일어나는 수재와 전염병의 창권로 민생이 악화되었으며 삼정의 문란이 가중되자 살던 곳을 버리고 유랑하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불어났다.
현종 1년, 수렴청정을 시작한 순원왕후 김씨는 홍경래의 난 진압 후 사후 수습 겸 민심 안정책으로 서북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관리로 등용할 것을 교시한다. 현종이 열 살이 되던 1837년 3월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 4년 뒤에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왕비가 병에 걸려 돌연히 죽자 1844년 10월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을 계비로 맞이한다.
한편 순조 대부터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헌종 대에도 계속 이어져 1838년 헌종 4년 봄부터 다시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였다. 기해년에 일어난 박해라 하여 '기해박해'라 부르는 이 박해에는 조선에 들어와 있던 앙베르, 샤스탕, 모방 등 프랑스 신부와 유진길, 장하상 등 천주교 신자가 다수 처형된다. 헌종은 이 해 11월에 천주교를 금한다는 척사윤음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공식적으로 천주교를 금하는 교서를 내렸다.
1840년 헌종 6년 12월 순웡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안동 김씨의 세력이 다소 위축되면서 풍양 조씨의 세력이 우세해진다. 풍양 조씨는 헌종의 모후 조대비의 일문으로서 조대비의 부친인 조만영이 그 거두였다. 조만영은 어영대장,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헌종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풍양 조씨 일문이 현달하더니 일문의 내부 알력과 1864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 일문으로 넘어간다.
헌종 대에 정권을 잡아 안동 김씨를 견제한 풍양 조씨 일문은 정치 혁신 대신에 안동 김씨와 정권 경쟁에만 급급한 나머지 민생문제와 사회문제를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시켰다. 그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물론이요, 그로 인한 삼정의 문란을 더욱 초래하였다.
헌종 대에는 사회가 불안하고 민심이 이반되는 틈을 타서 두 번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헌종 2년에 있었던 '남응중의 모반'과 헌종 10년에 있었던 '민진용의 옥'이 그것이다.
1836년 헌종 2년 충청도로 내려가 있던 남응중은 남경중, 남공언 등과 함께 모의하여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도총집, 남경중을 좌총집으로 하여 청주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방 이속의 고변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남응중은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844년 헌종 10년 민진용의 역모는 안동 김씨의 세도가 풍양 조씨의 일문으로 넘어가는 권력의 공백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왕조의 위엄과 권위가 어느 정도 실추되었나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의원 출신인 민진용은 그의 뛰어난 의술로 이원덕, 박순수, 박시응 등을 포섭해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한다. 그들은 특히 하급 무관들을 동지로 규합한 뒤 자신들의 계획을 관철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 주모자는 모두 잡혀 능치처참형을 당하고 은언군의 손자 원경은 사사된다.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이나 몰락 양반이 일으킨 이 두 모반사건은 당시의 상황이 누구나 왕권을 넘볼 만큼 왕권이나 정치권을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헌종 11년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제주도와 서해안을 불법 측량하고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자, 조정은 청나라를 통해 광동에 있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또한 헌종 12년 6월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들어와 왕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해서 한때 조정을 긴장시키기도 하였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체포되어, 사교를 퍼뜨리고 국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7월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듬헤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에 답신을 보내는데 이것이 우리나라가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문서가 되었다.
헌종 15년에는 이양선들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동요되는 등 국내외적인 위협과 문호 개방 요구를 맞게 되는 등 본격적인 외세 대응기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나 주변 정세에 어두웠던 조정에서는 이양선의 출몰이나 위협에 별다른 방책도 세우지도 못하고 권력 장악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한편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를 잘썼던 헌종은 제위기간에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삼조보감> 등을 찬수하게 하는 등 학문적인 치적을 쌓기도 했다.
14년의 재위기간 중 6년의 수렴청정 기간을 제외하면 9년여의 짧은 친정기간을 갖게 되는 헌종은 그나마 이 기간 중에도 세도정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권을 잡기 위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일문의 권력 투쟁에 휘말려 적절한 민생 대첵도 세우지도 못한 채 스물셋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또한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정치력의 부족으로 거기에 적절하게 대응하거나 대비하는 모습도 보이지 못하였다.
헌종은 효헌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4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1849년 6월 6일 창덕궁에서 후사없이 죽었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남응중 역모 사건
1836년(헌종 2)에 남응중이 일으킨 역모사건.
남응중은 처음에는 서울에서 살다가 국내정세가 조대비의 복상문제, 서인과 남인의 대립 등으로 어지럽자 충청도 목천현 곡간리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남경중(南慶中)·문헌주(文憲周)·남공언(南公彦) 등과 함께 모의하여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할 계획을 꾸몄다. 남응중과 남경중은 청주를 점거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음모를 시흥(始興)에 사는 이속(吏屬) 천기영(千璣英)이 알고 고변하여 역모에 가담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그러자 남응중은 일본으로 탈출하기 위해 동래에 있는 왜관으로 피난하여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때 일본인들은 남응중의 요구를 거절하고 그를 붙잡아 조선에 넘겼다. 이에 정부는 남응중을 대역무도의 죄명으로 능지처참하고, 머리를 왜관에 매달아 걸었다.
또한 이 모의에 가담한 남경중·남공언·문헌주 등 20여 명을 극형에 처했다. 한편 남응중의 역모를 고발한 천기영은 오위장에 임명되었으며, 조선과 일본의 우애를 다진다는 의미에서 범인을 붙잡아 인도해준 왜관의 관수왜(館守倭)에게는 은자(銀子) 1,000냥을 주었다.
민진용 역모
1844년(헌종 10) 민진용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반역사건.
순조 말기부터 헌종 초기까지 안동김씨 세도정치권의 핵심이던 김유근(金逌根)과 김홍근(金弘根)이 1840, 1842년에 연이어 죽음으로써 잠시 권력에 틈이 생겼다. 이 기회를 틈타 하급의 무부(武夫)였던 민진용이 1844년 이원덕(李遠德)·박순수(朴醇壽)·박시응(朴時應) 등과 공모해 강화도에 유배된 은언군(恩彦君)의 손자 원경(元慶)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모의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당했다. 원경도 사사(賜死)되었는데, 뒤에 동생이 철종(哲宗)이 되었으므로 회평군(懷平君)으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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