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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20 : 조선의 역사 362 (제23대 순종실록 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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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20 : 조선의 역사 362 (제23대 순종실록 9)

두바퀴인생 2013. 1. 4. 04:32

 

 

한국의 역사 820 : 조선의 역사 362 (제23대 순조실록 9)  

 

 

             
                                                                     순조의 인릉

 

 

제23대 순조실록 ( 1790~1834년, 재위 : 1800년 7월~1834년 11월, 34년 4개월)

 

 추가로 정조부터 철종 대까지 살아간 조선의 거상 임상옥 일대기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한 시대를 살아간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는 얼마전 TV 드라마 '상도'를 통해서 우리 한국인들에게 새로 조명되었다. 그 드라마의 최고 절정 부분은 바로 연경에서 인삼을 매각하는 순간이었다.

 

도 드라마에서는 조정의 실력자 대신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자신들의 영달을 취하려는 부류와 그렇지 못한 임상옥의 처세술에 대해서도 잘 나타나 있다. 댓가를 바라고 거래되는 뇌물은 결과적으로 한 순간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은 패가망신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으며 모든 어려움에 원칙과 정도를 잊지않고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포착하여 지혜롭게 대처하는 그의 재능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 드라마에서 우리들의 가슴 속에 은은히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말은 "장사란 오로지 이윤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드라마를 통해서 자영업자를 포함한 중.소.대기업인 기업인은 물론 일반 대중들의 삶에도 참고가 될 귀중한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거상 임상옥 그는 누구인가?

 

1779(정조 3)∼1855(철종 6). 조선 후기의 무역상인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약(景若), 호는 가포(稼圃). 아버지는 중국 연경에 내왕하던 상인인 봉핵(鳳翮)이다. 의주에서 출생하여 주로 그곳에서 활동하였다.

 

1796년(정조 20)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이조판서 박종경(朴宗慶)의 정치적 권력을 배경삼아 우리나라 최초로 국경지방에서 인삼의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이때부터 천재적인 상업수완을 발휘하여 1821년(순조 21) 변무사(辨誣使)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북경(北京) 상인들의 불매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분쇄하고 원가의 수십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1812년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에는 방수장(防守將)으로 성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으며,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연경에 다녀온 뒤 오위장과 전라감영의 중군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민구제 등의 자선사업으로 천거를 받아 1832년 곽산군수가 되고, 1834년 의주의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논척을 받자 사퇴하였다.

 

이후 빈민구제와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 시를 잘 지었으며 일생 동안 지은 시를 추려 『적중일기(寂中日記) 라 하였다. 그밖에 저서로 『가포집』이 있다.

 

 

임상옥에 대한 평가

 

『조선왕조실록』에는 거상 임상옥에 관련한 기사가 단 한줄 나온다. 비천한 상인 출신인 임상옥이 ‘구성부사(龜城府使)’라는 고위 관직에 임명되자 비변사 대신들이 반대하는 내용을 다룰 때 이름이 한번 언급되는 것이다.

 

임상옥 최종.JPG

 

 

임상옥의 행적,특히 상인으로서 행보에 대한 기록은 더더욱 드물다.후손들이 임상옥이 쓴 글을 모아 간행한 『가포집(稼圃集)』이라는 문집에는 임상옥의 일생을 정리한 행장이 실렸다고 하는데 현재 그 문집은 전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알려진 임상옥에 관한 얼마안되는 정보를 전하는 것은 일제시대 역사학자 문일평이 『조선명인전』이란 책에서 임상옥에 관한 짧은 평전을 쓴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임상옥 처럼 의주 출신이었던 문일평 선생은 당시까지 구전되던 임상옥에 관한 얘기들을 어린 시절부터 접했던 점이 평전기술에 큰 역할을 했다.또 임상옥의 평전을 쓸 때 당시까지 전해지고 있던 『가포집』을 참고했는데,『가포집』에는 상인이 아닌 지식인·시인의 이미지만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무려 임상옥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그저그런 수준의 시 1000편이 수록돼 있었던 것. 임상옥 자신은 또 『가포집』에 수록된 여러 글들에서도 자신이 꿈꿨던 인생은 “상인이 아니었다”고 단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같은 점을 고려하면 진짜와 가짜 산삼을 한눈에 구분하고,가격을 후려치려는 중국 상인 앞에서 홍삼 수만근을 불에 태웠다는 등의 상인으로서 임상옥의 활약상 대부분은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기 힘든 내용들이다. 이들 에피소드들은 상당수 당시 상인과 서민들의 바람이 투사된 ‘전설’이라는 게 이욱 한국국학연구원 고전국역실장의 시각이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묘사되는 것 같은 “신뢰를 최우선으로 하는 반듯한” 모범인은 존재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고, 전적으로 “그랬으면 하는” 희망이 반영된 허구라는 설명인 셈이다.

 

하지만 이처럼 불명확한 점을 모두 인정하더라도 그가 조선후기에 인삼 무역 등을 통해 막대한 부를 일궜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그가 정치적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도 분명하다. 그는 정치권력에 의해 구휼을 명분으로 상당한 재산을 희사하도록 압력을 받았고, 권력자들로 부터 크고 작은 재산 갈취 압력을 받았다.

 

이같은 정치권력의 침탈의 ‘사소한 예’로 전해지는 것으론 의주부윤이 자신이 아끼던 ‘옥로(玉露·갓 장식)’가 부서지자 임상옥에게 새옥로를 부탁했다거나,지역 관료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산호지팡이가 부러지자 임상옥 집에 들려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가져간 것 등이 거론된다.

 

이와 함께 평양감사와 의주부윤 일행 700명이 한번에 찾아와 700명이 한꺼번에 음식대접을 받고 가기도 했다.그것도 요리를 각상으로 준비해서 일시에 대접했다고 전해진다. 또 집안에 호수같은 연못을 파고 인공산을 둔 호화주택을 뒀지만 당시 의주에 파견된 어사가 “상인주제에 분수에 어긋날 정도로 화려하다”며 집을 허물고 그를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정치적 위협에 직면한 임상옥은 자신의 재산을 자손이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 자신 소유 토지를 왕실명의 토지인 궁방(宮房)으로 명의 이전하는 ‘꼼수’를 사용하기도 한다.

 

객관적이고 꼼꼼한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전통시대 상인의 모범같은 이미지를 지닌 임상옥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탁월한 상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부를 일궜고, 정치권력과 결탁하면서도 정치권력의 핍박과 수탈을 받았던 임상옥이라는 상인출신 거부가 존재했다. 그와 그의 후손들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인에서 찾지 않았고, 상인으로 기억되기도 원치 않았다. 다시 말해 존경받고, 경탄받을 만한 측면을 분명히 지녔으면서도 어둡고 냄새나는 결점도 같이 지녔던 한계를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를 둘러싼 정치권력은 끊임없이 돈의 단물을 빼먹으려 했고, 상인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보전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시간앞에 그의 모든 노력은 무위가 돼버렸다.

 

얼마전 전경련 회장이 정치권의 각종 정책에 대해 “근시안적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가 정치권이 “청문회 출석을 시키겠다”며 일제히 발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충 정치권 주장의 요지는 “대기업 권력이 오만방자하게 건방진 모습을 보였다”정도로 요약되는 듯 하다. 이런 공방을 보면서 일반 대중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대기업·대상인의 모습이나, 힘을 앞세워 상인을 핍박하는 모양세를 취하는 정치권의 모습이나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변하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한 책>

이욱,‘임상옥과 중인 거부들-조선 사람들을 꿈꾸게 한 당대의 명인’,사람으로 읽는 한국사 기획위원회 편, 부자의 탄생-그들은 어떻게 시대의 부자가 되었나,동녘 2011 中

 

 

최인호 소설 '상도'

 

최인호의 ‘상도’(商道)가 한국일보 연재소설이 아니었다면, 또 책이 나오자마자 매스컴이 앞다퉈 최초로 조선후기 거상 ‘임상옥’을 재조명한 소설이라고 떠들지만 않았다면, 책 읽기는 훨씬 흥미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 미리 제공된 정보가 오히려 소설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김기섭 회장-석전 선생-거상 임상옥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저자는 추리기법으로 풀어가려 했지만, 독자에게는 답이 뻔한 문제를 푸는 것처럼 싱겁다. 김기섭 회장은 임상옥의 존재를 처음 알려주고 석전 선생은 거기에 토를 달아주는 단순 전달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도’의 1권 3분의 1 분량을 차지하는 김기섭 회장과 석전 선생 이야기는 지루하게 느껴진다. 읽다보면 ‘본론(임상옥 이야기)은 언제 나오지’하며 자꾸 책의 뒷장을 들추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건은 기평그룹 김기섭 회장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당연히 시점도 임상옥이 활약하던 1800년대가 아닌 20세기 마지막 성탄절 전야로 설정돼 있다. ‘굴러가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써 별명이 바퀴벌레였던 김회장이 독일 아우토반에서 암호명 E-카로 불리는 신차의 시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의 유품인 지갑에서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한자가 적힌 쪽지가 나온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회사측으로부터 그 쪽지의 의미를 확인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학자 석전 선생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글의 주인공이 150년 전 죽은 의주 상인 ‘임상옥’임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가 서론이다.

 

본론에 해당되는 임상옥의 생애 부분은 김정희, 홍경래와 같은 역사 인물이 등장하고 각종 사료가 인용되는 등 본격 역사소설의 모양새를 갖춰 보다 흥미진진하다.

 

의주 태생의 임상옥은 사신행렬을 따라 중국 연경을 드나들며 인삼을 밀매하던 임봉핵의 아들로 태어났다(1779~1855년). 그러나 빚을 지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종살이를 하다 그 자신도 인삼 장수로 나선다. 첫번째 홍삼 장사로 큰 돈을 번 그는, 사창가에 팔려온 장미령을 사서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지만 자신은 공금유용죄로 ‘상계’에서 파문당한다. 스무살 남짓한 임상옥이 이처럼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 임봉핵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상도의 제1원칙을 ‘商卽人’(상즉인)’이라 했다. ‘장사는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장사’라는 것. 장미령의 몸을 사서 그녀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준 것도 ‘이(利)를 남기기보다 의(義)를 좇으라’는 상도를 지킨 것이었다.

 

그 후 승려가 된 임상옥은 고관대작의 첩이 된 장미령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환속을 결심하는데 이때 석숭스님이 ‘죽을 사(死)’자와 ‘솥 정(鼎)’, 가득 채우면 없어지고 오직 팔 할쯤 채워야 온전한 ‘계영배’(戒盈盃) 이렇게 세 가지 비결을 내려준다.

 

중국 상인들이 인삼불매 동맹을 맺고 장사를 방해하자 스스로 인삼을 태워버리는 방법으로 물리친 것이 ‘死’의 비결이요, 다른 상인들이 홍경래와 손을 잡았을 때 그만은 ‘鼎’의 비결로 홍경래의 유혹을 물리치고 혁명의 와중에도 목숨을 부지한다. 마지막으로 ‘계영배’를 통해 자족(自足)이야말로 최고의 상도(商道)임을 깨달은 그는, 자신에게 빚을 진 상인들을 모두 불러 빚을 탕감해주고 금덩어리까지 들려 보낸다. 개성상인 박종일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차피 빚이란 것도 물에 불과한 것.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었다고 해서 그것이 어찌 받을 빚이요 갚을 빚이라 하겠는가. …그들이 없었다면 나 또한 상인으로서 성공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 물건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에 불과하다.”

 

저자가 기업인들로부터 “우리나라에 본받을 만한 역사적인 상인이 없다”는 탄식을 듣고 구상을 시작했다는 이 소설이 왜 임상옥을 주인공으로 택했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마지막 부분은 다시 현대로 돌아와 김기섭 회장의 기념관 개관식이 열리는 장면이다. 이곳에서 ‘나’는 임상옥의 문집인 ‘가포집’과 전설 속의 술잔 ‘계영배’가 전시돼 있는 것을 본 뒤 추사가 임상옥을 위해 쓴 발문을 천천히 읽고 발길을 돌리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다시 한번 ‘상도’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굳이 ‘나’란 화자를 빌려 저자가 나서지 않아도 임상옥의 삶 자체가 ‘상도’이지 않은가. 5권으로 된 이 소설에서 김회장 부분은 자꾸 사족(蛇足)처럼 느껴진다.

 

 

거상 임상옥의 목숨을 건 한판 승부

 

- 최인호 『상도』(여백 미디어) 중에서

 

조선후기 최고의 거상 임상옥은 당대 최고의 세도가였던 박종경에게 적심(赤心; 조금도 거짓이 없는 참되고 충성스러운 마음, 丹心)을 주고 인삼교역권을 얻었다. 1809년 순조 5년 10월 그는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들을 따라 5천근의 인삼(홍삼)을 마차에 싣고 연경을 향해 출발했다. 2개월간의 긴 여행 끝에 마침내 조선의 인삼왕 임상옥이 5천근의 질 좋은 홍삼을 가지고 연경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약재상들이 임상옥 일행이 머무는 여인숙 회동관으로 몰려들었다. 견본을 본 약재상들은 이번에 온 인삼이 극상품임을 알아보고 인삼값을 마음속으로 가늠해보았다.

 

조선에서 건너온 인삼은 개별적으로 거래되지 않고 공시가로 정해져 일괄 거래되었다. 다음날 아침 한 약재상 앞에 내걸린 인삼의 공시가를 본 중국 약재상들은 모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인삼 1근당 은자 40냥.

중국상인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가격 1근당 은자 25냥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2백년간 인삼 가격은 25냥으로 고정되어 불변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그 동안 인삼거래가 대부분 역관과 만상들에 의한 사무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삼가격을 담합할 만한 조직력도 없었고 자본이 영세해 중국상인들과 장기전을 벌일 만한 여력도 없었다. 따라서 조선 상인들은 2백여 년 동안 울며겨자먹기로 고정가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정이 인삼교역권을 공표함으로써 개별적인 사무역은 불법이되고 거의 모든 인삼 교역은 임상옥을 포함한 일부 대상들에게만 단일 창구화되었던 것이다.

이제 오랜 관행을 깨뜨릴 때라고 생각한 임상옥은 지난해 인삼의 흉작으로 연경 일원에서 인삼의 씨가 말라 있음을 꿰뚫어 보고 마침내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임상옥이 극상품 인삼 5천근을 한꺼번에 가지고 온 것도 중국 상인들과의 단판승부에서 유리한 선제공격을 가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시가로 내건 인삼 1근당 은자 40냥은 당시 중국상인들에게 던진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었다. 이 선전포고는 그가 상인으로서 죽느냐 아니면 천하 제일의 상인이 되느냐는 명운이 걸린 한판의 진검 승부였다.

임상옥의 이러한 선전포고에 대해 중국 약재상들은 불매운동으로 맞섰다. 과거에는 인삼 가격이 공시된 후 2-3일이면 전량이 판매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도 중국산 인삼이 대량 약재상들에게 도입되어 판매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조선 상인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으나 임상옥은 동요하지 않았다. 임상옥이 연경에 도착한 것이 동지 무렵인 12월 22일이었으니 여느 때같았으면 그 해가 가기 전에 인삼이 다 팔려나갔을 것이다. 해를 넘겨 새해가 되면 중국인들은 먹고 마시며 거의 한 달 동안을 명절 연휴로 보낸다. 그리고 2월초면 환국(還國)하는 사신들과 함께 임상옥도 조선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같이 인삼 무역을 위해 연경으로 갔던 조선의 경상과 송상들은 자신들의 인삼을 결국 헐겂에 매각하게 되고 임상옥은 그 인삼도 중국인을 통해 은밀히 자신이 모두 매입한다. 같이 간 사람들은 이해를 할 수가 없다며 임상옥에게 빨리 처분하기를 권유하지만 임상옥은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 상인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임상옥에게 공시가를 정정하여 종전 값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일방적 통고와 같은 것이었다. 만일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체의 거래를 중지함으로써 인삼을 그대로 갖고 가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연경의 상계에서 추방하겠다는 의미이며 그렇게 되면 임상옥은 다시는 연경 상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는 금치산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임상옥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사면초가에 빠져버린 셈이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중국 상인들의 요구대로 공시가를 종전의 값으로 낮추거나 아니면 인삼을 그대로 갖고 돌아가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임상옥에게는 파산을 의미했다. 공시가를 종전대로 내리면 인삼은 모두 팔 수 있겠지만 그것은 굴욕을 의미하는 것이며 앞으로 연경 상인들과의 거래에 있어서 그는 칼자루를 쥐지 못하고 칼날을 쥐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인삼값은 영원히 25냥으로 굳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인삼을 조선으로 가지고 돌아간다면 자존심은 지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농부와 사상들에게 인삼 대금을 치르고 나면 임상옥은 완전히 빈털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진퇴양난,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임상옥은 석숭 큰스님의 뇌성과 같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 '죽을 사(死') 자가 너를 첫 번째 위기에서 살려줄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오직 이 죽을 사 자, 한 자뿐이다"

그러나 임상옥은 죽을 사 자가 어떻게 자신이 처한 현재의 위기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임상옥의 고민에 해답을 내려준 사람이 바로 추사 김정희였다. 임상옥의 이야기를 들은 김정희는 필사즉생 생즉필사(반드시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오, 반드시 살기를 꾀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이순신 장군의 글을 설명하고 백척간두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길뿐이라고 말했다. 순간 임상옥은 석숭 큰스님이 써주신 '죽을 사(死)' 자의 의미를 이해하고 큰소리로 웃고나서 김정희 앞에 세 번 무릎을 꿇고 절했다.

다음날 임상옥은 인삼 가격을 새로 조정하여 공시했다.


인삼의 새 가격이 공시된다는 소식을 들은 중국 상인들은 마침내 임상옥이 자신들의 요구대로 인삼가격을 낮췄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환호성을 올리며 동인당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새로 공시된 인삼가격을 본 중국상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삼 1근당 은자 45냥.'

 

중국 상인들은 침을 뱉으며 임상옥에게 꾸에즈(귀신같은 사람), 토우(도둑) 등의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새로운 최고가의 공시 가격을 내붙이고 난 임상옥은 장사일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김정희를 따라 학계의 거목들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2월 2일 마침내 임상옥이 중국 상인들과 건곤일척의 상전을 벌여야 할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다음날인 2월 3일은 조선의 사신들이 환국을 위해 연경을 출발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연경의 상인들은 그간 사람을 풀어 은밀히 임상옥의 일거수 일투족을 염탐하고 있었고 내일이면 임상옥이 사신들과 함께 연경을 떠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5천근의 인삼바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임상옥의 인삼은 연경에서 팔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는 팔 데가 없을 것이다.

마침내 귀국할 모든 채비가 끝나자 임상옥은 인삼을 모두 여인숙 마당에 쌓게 했다. 5천근의 인삼이 쌓이자 임상옥은 한켠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게 했다. 갑자기 대낮에 장작을 태우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화광이 충천하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인삼을 불속에 집어 넣게." 임상옥이 단숨에 말하였다.

곧 인삼의 독특한 향이 매캐한 연기에 섞여 번져 나갔다. 때아닌 불놀이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임상옥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던 거간꾼들은 혼비백산하여 중국 약재상들에게 자신들이 목격한 내용을 낱낱이 고했다. 어쩌면 도라지를 태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여인숙으로 달려온 중국 상인들은 사포닌에서 나오는 인삼 특유의 냄새를 맡고 인삼이 타오르고 있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들은 상상을 초월한 임상옥의 광기에 기가 질렸다. 그리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인삼은 조선의 무역상들에게만이 아니라, 연경의 약재상들에게 있어서도 생명 그 자체였다. 천하의 명약인 인삼을 불속에 태워버리는 임상옥의 태도에 연경의 약재상들은 분노를 느꼈다. 이제 다급해진 것은 연경 상인들이었다. 인삼이 불에 타 모두 사라져 버리면 임상옥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임 대인, 제발 불을 끄시오."


"...당신들은 내 인삼이 필요치 않다고 불매운동을 맺지 않았소이까. 필요치 않은 인삼을 남겨 무엇을 하겠소이까 그대로 가져간들 소용없고 남겨두어 버림받아 쓸 일도 없으니 자연 태울 수밖에."

"아이구, 임대인 우리가 졌습니다. 일단 불을 끄고 말을 하도록 합시다."

불을 껐을 때는 5천근 중 반이 이미 불길 속에 사라져버리고 난 후였다. 그러나 임상옥은 2월 2일 단 하루 만에 새로 공시한 1근당 45냥의 가격에 남은 인삼을 모두 팔아 치울 수 있었다.

임상옥은 단 한번의 상전을 통해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있었던 연경 상인들의 불매운동을 통쾌하게 물리치고 조선 최대의 무역왕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기회는 이처럼 위기 속에 있는 법이니 정치, 경제, 예술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사는 자신을 버리고 반드시 자아포기의 죽음이란 무(無)를 통해야만 생명의 기쁨인 존재의 유(有)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 최인호 『상도』(여백 미디어) 중에서

 

 

거상 임상옥의 삶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재물 위의 평등함은 흐르는 물과 같고, 사람의 마음이 바르기는 저울과 같다.)는 조선의 상업왕 임상옥이 남긴 말이다. 임상옥은 순조때 의주 출신으로 인삼으로 일확천금을 번 거상이다.

 

그를 일대기화한 최인호의 <상도>나 이것을 극화한 MBC 드라마 <상도>는 재물보다 사람이 중요하고,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일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임상옥이 단지 인삼으로만 돈을 번 것만 설명할뿐, 그가 정경유착의 시초라는 사실을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정치판을 헤어릴 수 있는 안목이 있어 나중에 종 3품직인 부사직까지 수행했다. 일개 중인 출신이 부사직까지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조선말에 이르서 신분제가 완전히 붕괴했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그리고 조선은 국초부터 선비를 제일 우대하고, 상업을 천대하여,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상업은 쇠퇴하였다. 고려시대때는 벽란도라는 거대한 국제 무역 도시가 있어 상업이 융성했으나 조선시대에는 절약과 검소를 중요시하는 유학이 조선의 국교가 되면서 상업은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아예 상업이라는게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비단, 무명, 어물, 모시, 명주, 종이등 조정에서 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관영 기업체 성격의 육의전이 존재했었다. 이 육의점은 국가로부터 독점권을 인정받고 조선시대 상업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토지는 황폐화되고, 잇단 병란과 조정의 혼란으로 인해 백성은 유리걸식하게 되어 더이상 농토를 지킬 수 없게 되자, 점차 한양으로 옮기게 되고, 백성들은 사람들이 다니는 골목에 난전을 설치하였는데, 이 난전은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성행하게 되어 독점을 누리던 육의전(市廛)에게는 가시같은 존재였다.

 

시전 상인들은 국가로부터 난전을 단속하여 몰수하는 금난전권을 행세할 수 있었는데, 그 행위가 지나쳐 난전으로부터 항의가 빗발쳤고, 조정에게도 난전은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농업을 우선시하는 조선시대로써는 난전의 인정은 곧 농민의 토지 이반화를 양산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국가의 세금이 줄어 국가 재정에도 위협받기 때문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조시대 이후 금난전권에도 불구하고 난전은 조정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고, 시전이 고관대작을 매수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이 난전에서도 조정대신들을 매수해 시전에 대항했다. 마침내 1791년 시전과 난전의 오랜 대립이 끝나게 되었다. 정조는 일부 품목을 제외한 육의전의 난전금지권을 폐지한 것이었다. 결국 난전의 승리였다.

 

그렇다고해도 조선시대 상업이 영국의 산업혁명처럼 혁명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제한이 있었고, 지금과 같은 국제무역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물론 청나라로 떠나는 사신을 따라 청나라 상인에게 물건을 파는 행위는 가능했다.

 

청나라 상인들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조선의 인삼이었다. 삼을 건조시켜 수분을 제거한 것이 백삼이었는데, 처음에는 청나라의 무역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했으나, 백삼이 독소가 있어 배의 위를 헐게 만든다고 해서, 청나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송상에서 홍삼을 개발하게 된 것이었다. 홍삼은 6년된 인삼을 증기로 쪄서 담황갈색이나 담적갈색의 빛을 띠게 되어 홍삼이라고 불렀는데, 이 홍삼은 백삼의 단점인 독소가 제거되어 백삼때보다 더 인기를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무역왕 임상옥은 바로 이런 홍삼의 등장과 함께 탄생했다.

 

임상옥은 홍경래의 난이 평안도에서 일어났을때 정부에 협조해 난을 진압하는 데 일조했고, 당시 세도가인 박종경의 권세에 힘입어 조선의 인삼을 독점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상권은 서울 상인인 경강 상인과 개성 상인인 송상, 의주 상인인 만상등인데, 조선후기는 송상이 전국적인 체인망인 송방을 개설해 그 위세를 떨쳤으나, 홍경래의 난때 송방의 일부 상인이 난에 협조하여 그 위세가 꺾이게 되고, 후발주자였던 만상이 그 자리를 꿰차고 조선 인삼의 대부분을 독점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의 상술 역시 뛰어났다. 청나라 상인이 임상옥이 가져온 인삼 가격을 내리기 위해 불매운동을 했다가, 임상옥이 자기 인삼을 불태우자, 이에 놀란 청나라 상인들은 달려와 막으며, 임상옥이 종전의 가격에 몇배를 부르는데도 사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는 사람 보는 눈도 타고났다고 한다. 홍경래가 임상옥을 찾아가 서기가 된다고 했을때, 임상옥이 거절하며 홍경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상가가 아닌 조정에 있을 사람이오."

 

그뿐만 아니라, 전라도에서 한 이방이 살기를 띠며 임상옥에게 돈 5만냥을 빌릴 것을 요구하자, 임상옥은 군말없이 이를 빌려주었다. 이상하게 여긴 서기가 임상옥에게 빌려준 이유를 묻자,

 

"안빌려주면 두 사람다 죽고, 빌려주면 두 사람 다 사는데, 그깟 돈이 중요하겠는가?" 서기가 따라가보니 그 이방이 강에 칼을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임상옥의 창고엔 없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창고를 일명 부엉이 창고라고 하는데, 부엉이가 어떤 물건이든 모두 모아두는 습관을 비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조정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도 임상옥의 창고에는 1,20개 정도는 있었다고 한다.

 

임상옥이 인삼교역으로 번 돈이 약 1백만냥, 당시 조선 비축 금고(예산)이 42만냥에 불과한 점을 본다면 임상옥이 얼마나 부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해가 뜨게되면 지는 법, 임상옥에도 시련은 닥쳐왔다. 궁궐에 못지않는 집을 지었다가 옥에 갇힐 뻔했고, 수해민을 구제한 공로로 얻은 부사직은 비변사로부터 논척을 당해 파면당했다. 천한 상민이 종 3품직인 부사직에는 어울리지 않다나 뭐라나..

 

임상옥은 작은 집을 짓고, 그 앞에다가 채마밭을 길러 호를 가포라고 하고 은거생활을 했다, 야인생활을 하며 시를 짓고, 문인들과 교류하며 지냈는데, 일설에는 김정희와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최인호씨의 <상도>에는 임상옥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했으나, 임상옥의 토지가 후손이 임상옥의 재산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서 궁장토(비빈또는 왕자의 궁원에 속한 전답)에 넣었다는 기록을 보아 꼭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