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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21 : 조선의 역사 363 (제24대 헌종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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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21 : 조선의 역사 363 (제24대 헌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3. 1. 5. 05:46

 

 

한국의 역사 821 : 조선의 역사 363 (제24대 헌종실록 1)  

 

 

                   

                                                                                                  헌종가례도병

 

제24대 헌종

 

헌종(憲宗, 1827년 음력 7월 18일 ~ 1849년 음력 6월 6일)은 조선의 제24대 임금(재위 1834년 - 1849년)이자 서예가, 작가이다. 이(李), 는 환(奐), 본관전주(全州), (字)는 문응(文應), 는 원헌(元軒)이다. 아버지 효명세자가 일찍 요절하여 동궁에 책봉되고 1834년 8세의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실권은 할머니인 순원황후 김씨와 안동 김씨에게 있었다.

 

재위기간 중 천주교의 발호에 반하여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승인하기도 하였다. 사후 시호는 헌종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憲宗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이며 이후 대한제국 때 성황제(成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헌종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憲宗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이다.

 

1834년부터 1849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834년부터 1841년까지 할머니 순원황후 김씨(純元皇后 金氏)가 섭정을 하였고 1841년부터 1849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생애

 

헌종은 1827년 음력 7월 18일 창경궁(昌慶宮)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효명세자(익종)과 신정왕후 조씨의 아들로 태어나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그가 태어날때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는 익종이 옥을 아로새긴 나무를 담은 갑(匣)을 주는 꿈을 꾸고 나서 잉태하셨고, 탄생하신 날에는 한 무리의 학(鶴)이 전상(殿上)에서 날아 오래 돌다가 갔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권돈인(權敦仁)이 지은 행장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 백일이 되기 전에 능히 일어섰다 한다. 유아기 때에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千字文)》 중에서 1백여 자를 통하셨는데, 아버지 효명세자는 여러번 봐서 눈에 익혀진 것이리라고 생각하여 다른 글에서 시험하시면 문득 그 전부터 알던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아무자입니다. 하니, 효명세자가 이를 매우 기특히 여겨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앞으로 나보다 낫겠다.’ 하였다.

 

1830년(순조 30년)에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동궁에 책봉되어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1834년에 순조가 승하하자 8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으나 15살이 되던 해에 직접 친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권은 할머니인 순원왕후에게 있었고,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 김씨와 그의 외가인 풍양 조씨간에 암투가 벌어졌다.

 

 

치세

 

정치

헌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 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또 수재와 전염병 때문에 삶이 점차 어려워져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하다 보니 임금을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킨 모반 사건이 2번에 걸쳐 일어났다. 1836년에는 충청도에 있던 남응중이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했으며 1844년에는 민진용이 역시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번의 모반 사건 모두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과 몰락한 양반들이 일으킨 것으로 이 시기에는 누구나 왕권에 도전할 수 있었을 만큼 임금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

 

 

대외 관계

1845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조정의 허락 없이 제주도와 서해안을 측정하고 돌아가는 일이 있었으며, 1846년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로마 가톨릭 탄압을 구실로 삼아 군함 3척을 몰고 와 임금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848년에는 외국의 배들이 경상도와 전라도, 황해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이 크게 동요했다. 바로 이 때부터 조선은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호 개방 요구를 맞게 되었지만, 조선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탓에 별다른 대책도 세우지 않고 각 당의 권력 장악에만 신경썼다.

 

 

천주교 박해

1831년(순조 31년) 천주교 조선대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승인되고, 서양인 천주교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피에르 모방(1836년)·자끄 샤스탕(Jacques Chastan, 1836년)·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1837년) 등이 들어와서 천주교의 교세가 회복되고 신도는 증가되어 갔다.

 

조정에서는 천주교에 우호적인 안동 김씨에 대항해 보수적인 풍양 조씨가 집권하자 다시 박해 의논이 일어났다. 성리학적 가르침을 받고 자라난 헌종도 천주교에 대한 배격 논리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직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1839년(헌종 5년), 피에르 모방 신부 등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천주교 선교사들과 유진길, 정하상 등의 평신도들이 새남터에서 대거 처형(→기해박해)되었고, 1846년에는 한국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김대건 신부가 순교(→병오박해)하는 된서리를 맞았다.

 

 

 

사망

 

서화도 그렸으며 특히 서예에 능하여 몇편의 서한과 서예작이 전한다. 9년 동안의 친정 기간 동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 투쟁에 휘말렸던 헌종은 국내는 물론, 조선 주변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다가오는 열강 세력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병환이 더욱 위독하여 자리에 누웠다. 1849년 6월 6일, 23살의 나이로 창덕궁(昌德宮)의 중희당(重熙堂)에서 사망하였다.

 

10월 28일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구릉의 유좌(酉坐)인 언덕 효현왕후(孝顯王后) 묘소 옆에 장사하였다.

 

 

 

사후

 

묘호는 헌종(憲宗)으로, 《헌종실록》에 따르면 널리 듣고 다능(多能)함을 의미한다. 시호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이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장숙왕(莊肅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대한제국 수립 후 고종장조, 정조, 순조, 익종이 각각 황제(皇帝)로 추존됨에 따라 그에 대한 추존 여론이 나타나면서 순종에 의해 1908년 성황제(成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가 되었다.

 

 

 

가족 관계

  • 조부 :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 조모 :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김씨
  • 부 :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 익종(翼宗)
  • 모 :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조씨
  • 원비 : 효현성황후 김씨(孝顯成皇后 金氏)
  • 계비 : 효정성황후 홍씨(孝定成皇后 洪氏)
  • 후궁 : 순화궁 경빈 김씨(順和宮 慶嬪 金氏)
  • 후궁 : 숙의 김씨(淑儀 金氏, 1906년(광무 10년) 숙의로 책봉되었다.)
    • 딸 : 옹주(翁主)
  • 후궁 : 경빈 김씨,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의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