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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15 : 조선의 역사 357 (제23대 순조실록 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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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15 : 조선의 역사 357 (제23대 순조실록 4)

두바퀴인생 2012. 12. 30. 04:37

 

 

 

한국의 역사 815 : 조선의 역사 357 (제23대 순조실록 4)  

 

 

             
                                                                     순조의 인릉

 

 

제23대 순조실록 ( 1790~1834년, 재위 : 1800년 7월~1834년 11월, 34년 4개월)

 

 

4.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성립

 

세도는 본래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뜻으로서 중종조에 조광조 등의 사림들이 표방했던 통치원리였다. 그것이 정조 초에 이르러 세도의 책임을 부여받은 홍국영이 조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독재를 하기 시작한 데서 변질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나 외척들이 독단으로 정권을 휘두르는 것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정조 대는 실학 사상가들에 의해 북학론적인 정책이 건의되고, 천주교와 서양 문명에 호의적인 진보적 지식인의 역활이 높아져갔기 때문에 보수적 정치 세력들은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안으로부터의 변화와 도전에 불안해진 보수 정치 세력은 정조의 죽음과 어린 순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진보 세력인 실학 사상가 및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당파에 의한 당쟁의 시대가 종식되고 집권자의 일족만이 정권을 독점하는 세도정권이 형성된다.

 

순조, 헌종, 철종에 걸친 60여 년간의 정권을 독점한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은 정조로부터 순조를 잘 부탁한다는 유탁을 받은 김조순으로부터 시작된다.

 

정조가 죽고 1800년 11세의 어린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자 그때까지 당색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김조순은 시파계임에도 불구하고 벽파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협조함으로서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데 성공한다. 대비의 수렴청정 기간에는 대비의 외척인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벽파계가 정권을 잡는다. 그러나 1804년, 순조가 15세가 되던 해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다음 해 죽자 순조의 외척이 된 r김조순의 안동 김씨 일문이 세력을 잡는 데 성공한다.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일파는 시파의 대가인 풍양 조씨, 남양 홍씨, 나주 박씨, 여흥 민씨, 동래 정씨 등과 제휴해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으로 조만영의 딸을 간택한다. 이 때문에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잠시 풍양 조씨 일문에게 잠시 권력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효명세자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순조의 왕비이자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어 다시금 안동 김씨 일문이 정권을 잡게 된다. 또한 철종의 비까지 안동 김씨 일문에서 냄으로써 안동 김씨의 외척 세도정권은 대원군이 등장할  때까지 거의 60여 년간 이어진다.

 

순조시대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농단하다가 헌종 대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에게 넘어가고, 그것이 철종 대에 와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에게로 넘어간다. 세도정권의 특징이라면 당쟁시대와는 달리 견제 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치에세 배제시켜버리는 세도정권의 전횡을 가능케 했으며, 그 결과 관료사회의 부패와 백성을 상대로 한 수탈, 민생의 피폐가 극심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독재정권에 강력하게 맞선 것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보게 되는 농민층이었다. 막바지에 몰린 농민들의 불만은 결국 순조 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비롯, 19세기 중엽 이후 전국적인 민란으로 폭발했다. 이러한 민란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을 궁지로 몰아넣는 한편, 그에 불만을 품고 있던 조대비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밀약으로 고종의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 60년 동안의 세도정권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한다.

 

조선 후기 60여 년 동안 계속된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조선을 급격하게 내리막 길로 치닫게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안동 김씨 세도정권은 순조-헌종이 이어 철종이라는 어리고 힘없는 왕을 옹립하여 놓고 왕 위에 군립하면서 왕권을 빙자하여 조정의 대소사를 처결하면서 한 가문이 대를 이어 권력을 독식함으로써 국가보다는 가문을 우선시 하였고 백성보다는 가문의 부귀영달을 추구한 정치를 하였다. 그래서 안동 김씨 일문의 전횡으로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부패가 심회돠어 갔고 관리들의 매관매직이 성행함으로써 지방에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들의 발호가 극치를 이루었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면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조선은 이미 탐관들의 수탈과 전횡으로 토탄에 빠진 백성들의 상황이 돌이킬수 없을 정도로 심화된 상태였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바로 고종 대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항쟁인 '동학난'이었다. 이 동학난이 일어나면서 조정은 진압 능력이 상실된 상태라 외세를 빌어 난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결국 일본군이 동학난을 진두지휘하여 진압하자 청국이 일본군의 조선 출병을 간섭하였고 이는 청일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동북아 국제 전쟁인 청일전쟁에서 내우외환으로 국운이 기울어가던 청국이 일본에 패배함으로서 일본은 청국의 조선 지배를 물리치고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가 시작되는 비극의 역사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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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

 

세도 정치(勢道政治)는 조선시대 왕의 신임과 직접적인 위임(委任)을 받는 형식으로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일이다. 세도 정치는 그 형태에 따라 정조 이전과 이후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양반정치의 파탄과 세도

영조·정조와 같은 뛰어난 군주가 탕평책을 쓰고 있는 동안은 어느 정도 정치의 안정을 기할 수가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정조 초년에는 정조를 보호한 공이 있는 홍국영이 도승지로 있으면서 정권을 농단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아 정권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외척세력은 왕권을 압도하고, 이른바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즉 순조 초에 정조의 유명(遺命)으로 안동 김씨인 김조순이 국구(國舅)로서 정치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는데, 이에 따라 그의 일족은 모두 영달하여 노론인 안동 김씨는 많은 관직을 차지했다.

이렇게 권력을 독점하던 안동 김씨의 전권 시대는 풍양 조씨라는 강적을 만나 일시 후퇴하였다. 그것은 익종(翼宗)의 비(妃)가 조만영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헌종 때에는 조씨 일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조씨는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비가 김문근의 딸이었으므로 다시 세도가 안동 김씨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형세였으므로 종실(宗室)이라하더라도 김씨 일문의 세력에 억눌려 살아야 했으며, 다른 세력이 안동 김씨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정치에 참여할 기회 또한 희박해졌다. 따라서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서 유교적인 관료 정치라는 무너지고, 붕당 사이의 세력 투쟁 시대로부터 척족(戚族)이 정권을 농단하는 시대로 변화한 것이다.

 

왕실의 외척이 정권을 독차지함으로써 척족의 가문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여 정치 기강이 더욱 문란해졌다. 그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피해는 더욱 커졋으며, 많은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그 대가를 농민에게서 짜 내어 자신의 이익만을 얻어 갔다.

 

당시 재정을 확충하는 제도는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이었으며, 통틀어 삼정(三政)이라 한다. 세도 정치와 맞물려, 삼정은 날로 문란해졌다. 전정에서는 삼수미·대동미·결작·도결 등의 폐해가 극심했고, 군정에서는 황구첨정·백골징포·족징·인징 등의 각종 편법이 생겨서 농민을 괴롭혔다. 환곡 또한 고리(高利)로 이익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반작·허류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농민을 괴롭혔다.

 

이러한 삼정의 문란은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까지 위협했고,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정조 이전

정조 때 홍국영이 세도 정치를 하기 전의 세도(世道)는 단순한 정치권력보다는 어떤 지도이념과 공정한 언론을 주체로 하여 세도인심(世道人心)을 바로잡으려는 사상적·도의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학식이나 덕망을 가져야만 되었고, 따라서 왕도 높은 관직을 주어 우대하였다.

 

예를 들면 중종 때의 조광조는 교학(敎學)의 최고위 직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거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효종·헌종 때의 송시열은 예조참판에서 신임을 받기 시작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뒤에 우의정·좌의정 등의 요직에 있으면서 세도의 신임과 위임을 받았다.

 

 

정조 이후

그러나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치세(治世)의 도리를 주장하여 정신적으로 왕을 보좌하기보다는 실지로 정치권력의 행사를 위임받아 권세를 부리는 정치 형태로 변질되면서 세도(世道)는 흔히 세도(勢道)로 일컫게 되었다.

 

 

홍국영의 세도

정조 때의 홍국영은 정조가 왕세손으로 있을 때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 등의 위협에서 그를 보호하여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한 공으로 도승지 겸 금위대장에 임명되어 왕의 신변 보호를 맡는 한편 모든 정사도 그를 거쳐 상주(上奏)하고 결재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래서 요즘 흔히 쓰이는 뜻으로서의 세도 정치는 홍국영에서 시작된다.

 

홍국영 이후 세도 정치의 특색은 대개 척신(戚臣)으로서 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면 관직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지명되었으며, 치세의 도리보다는 상하의 민정과 신임의 동향을 조사 보고하고 인사 행정에까지 직접 참여하여 권력의 남용을 초래함으로써 외척(外戚)의 발호를 보게 된 데 있다.

 

 

홍국영 이후의 세도

홍국영의 세도는 그의 부정과 부패 때문에 1780년(정조 4년)에 추방당하고 말았지만 정조가 죽고 순조가 불과 12세에 즉위하게 되자, 대왕대비였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수렴청정을 통하여 경주 김씨 중심의 세도 정치를 시작하였으나 수렴청정을 거둔 이후 정조의 유탁(遺託)을 받아 김조순이 정권을 잡아 경주 김씨 세력을 숙청하고 이듬해에 그의 딸인 순원왕후가 순조의 비가 되면서부터 외척 안동 김씨가 행하는 세도 정치의 기틀이 잡히게 되어서 중앙의 요직은 그의 일족(一族)이 모조리 독점하였다.

 

그 뒤 익종의 비(妃)로서 조만영의 딸(신정왕후)이 들어서면서 헌종 때에는 잠깐 풍양 조씨가 일시적으로 세도를 이루기도 하였다.

 

철종이 즉위하고는 그 비(妃)인 철인왕후김문근의 딸이었으므로 다시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게 되었다. 비록 왕족이라 하더라도 김씨의 세도에 억눌려 살아야 되었으니, 가령 왕족인 이하전이 과거 시험장에서 김씨의 자제와 싸워 패하고는 뒤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온갖 협잡이 성행하여 정치의 기강은 문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권을 잡고 안동 김씨의 세력을 꺾어, 한때 독재적인 세도 정치를 이룩하여 외척이 발흥하는 세도 정치의 폐단이 없어지는 듯하였으나 얼마 뒤에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축출되고부터는 다시 한말까지 여흥 민씨 일족이 외척의 세도 정치가 그대로 지속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뒤에도 국가의 요직을 차지한 민씨가 1천 명을 넘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비록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갑오개혁, 독립협회 등 민씨 이외의 세력들이 활동하기는 했지만, 이전 민씨의 세도정치와 그로 인한 개혁의 미비함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요인 중 하나임은 부인 할 수 없다.

 

 

 

 

주요 가문

 

 

안동 김씨

 

구 안동 김씨와 신 안동 김씨

철종이 즉위하여 김문근의 딸이 왕비가 되자 김씨는 또다시 정권을 잡게 되어 김좌근(金左根) · 김재근(金在根) · 김수근(金洙根) · 김병익(金炳翼) · 김병국(金炳國) 등이 국정을 좌우하는 중심 인물이 됨으로써 김씨의 세력은 절정에 달했는데,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김씨 세력은 몰락하게 되었다.

 

안동 김씨(安東 金氏)는 대한민국안동을 본관으로 삼은 서로 다른 두 씨족이 존재한다. 김은열의 둘째 아들 숙승(叔承)을 시조로 하는 세칭 구(舊)안동과 고려 태사(太師) 김선평(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新)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이 두 ‘안동’은 조선시대에 정승 19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배출하였다.

 

 

구 안동 김씨

구 안동 김씨 (舊安東金氏)
관향 안동
시조 김숙승 (金叔承)
주요 중시조 김방경
주요 집성촌
주요 인물
인구(2000년) 425,264명 / 132,645가구 (18위)

구(舊)안동 김씨는 신 안동김씨처럼 경주 김씨에서 파생된 씨족으로 경순왕 김부(金傅)의 손자인 평장사(平章事)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경순왕의 8대손으로 고려의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삼는다.

 

충렬공은 고려조에 삼별초를 평정하여, 벼슬이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에 이르고,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져 구 안동김씨를 일명 상락 김씨(上洛金氏)라고도 한다.

 

 

 

 

 

 

 

 

신 안동 김씨

신 안동 김씨 (新安東金氏)
관향 안동
시조 김선평
주요 중시조 김극효
주요 집성촌
주요 인물
인구(2000년) 47,702명 / 15,068가구

신라 말 안동의 성주로 있다가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어 고려 태조로부터 안동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태사공(太師公)에 봉해진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한다. 김선평(金宣平)은 고려 태조로부터 성을 하사 받은 안동 권씨(권행), 안동 장씨(장정필)와 함께 안동의 3태사묘에 모셔져 있다. 조선 중기에 도정(都正)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을 지낸 김극효(金克孝)를 서윤공파의 중시조로 삼는다. 조선말기 세도정치의 주요 가문이다. 조선이 몰락한 근세사에서 언급되는 안동김씨는 바로 이 안동김씨다. 이 안동김씨를 구안동김씨와 구별해 신(新)안동김씨라고도 한다.

 

신 안동 김씨는 조선 후기 순조·헌종·철종의 3대에 걸친 왕의 외척으로서 조정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세도 정치를 행하였다.

 

정조 때 홍국영이 세도 정치를 행한 이래 역대 제왕은 나이가 어려 세도 정치가 더욱 본격화되었다. 순조가 11살에 즉위하자 김조순이 자기 딸을 왕비로 삼아 외척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많은 안동 김씨 일파가 요직에 앉았는데, 1827년(순조 27년) 세자가 정치를 대리하고 풍양 조씨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한 때 정권을 빼앗기기도 했다.

 

 

본관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부의 지역으로 예천(풍기) 밑에 있고 고대에는 창녕국(昌寧國)인 소국이었다. 신라가 이곳을 정복하고 고타야국(古陀倻國)으로 불렀고, 757년(경덕왕 16)에 고창군으로 개칭하였다. 또 석릉(石陵), 능라(綾羅), 지평(地平), 일계(一界), 등의 별호가 있었다. 조선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 안동군이 되고 1896년에 경상북도 안동군이 되었다. 안동면에는 일직(一直)면이 있어 안동을 관향으로 하는 본관들이 일직(一直)을 관향으로 하기도 하였다.

 

 

 

 

풍양 조씨

 

풍양 조씨(豐壤 趙氏)는 한국의 성씨이다. 안동 김씨와 함께 조선 후기의 세도 가문 중 하나였다.

 

기원

시조 조맹(趙孟, 837년 ~ ?)의 원래 이름은 바위 또는 바우(岩,이두로는 破回)이다. 그는 풍양현(현 경기도 남양주시 북부)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 은둔해 살았던 도인이었다. 당시 신라를 정벌하던 왕건은 영해(현 경상북도 영덕)지방 전투에서 신라군에 참패를 당하여 휘하의 장군들을 모아놓고 중지를 모았을 때 한결같은 대답은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도인의 지략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왕건이 그를 찾으니 당시 나이가 70세이었다. 이때부터 신라정벌의 길에 올라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자 태조 왕건이 조씨 성과 맹으로 이름을 내렸다.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이르렀고, 지금도 천마산에는 왕건을 만났다는 암굴(巖窟)이 있으며 현성암(見聖庵)을 세워 그를 수호하여 온다.

 

 

파계

시조 직후 세계(世系)가 실전되고 후손 전직공 조지린(趙之藺)을 계조(系祖)로 하는 호군공파, 회양공파, 금주공파와 마찬가지로 후손인 평장사 조신혁(趙臣赫)을 계조로 하는 평장사공파, 상장군 조보(趙寶)를 계조로 하는 상장군공파로 총 5개의 파가 있다. 각 계(系)는 서로 촌수를 가릴 수 없어 항렬을 따로 사용한다.

  • 전직공계(殿直公系) - 조지린(趙之藺)
    • 조사충(趙思忠)을 중조로 하는 호군공파(護軍公派)
    • 조신(趙愼)을 중조로 하는 회양공파(淮陽公派)
    • 조임(趙袵)을 중조로 하는 금주공파(錦州公派)
  • 평장사공계(平章事公系) - 조신혁(趙臣赫)
    • 조신혁(趙臣赫)을 중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또는 평장공파(平章公派)
  • 상장군공계(上將軍公) - 조보(趙寶)
    • 상장군공 조보(趙寶)를 중조로 하는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강진 조씨로 알려졌었으나 시조 조맹의 후손임이 밝혀진 후 대부분 풍양 조씨로 환적

 

풍양 조씨는 조선 후기 헌종 대를 통해 왕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아 세도 정치를 행하였다.

 

1827년(순조 27년)에 왕세자가 부왕의 신병 요양으로 인하여 정치를 대리하게 되자 조만영의 딸을 비(妃)로 삼아 조씨 일파는 김씨 일파와 세력 다툼을 벌여 한동안 세도를 잡았으나, 그들간의 불화 반목으로 세도가 무너지게 되었고, 철종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인물

  • 조익 - 성리학
  • 조엄 - 조선 후기의 문신. 한국 역사상 최초로 고구마 재배
  • 조만영, 조인영 -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
  • 신정왕후 - 조선 익종의 비
  • 조남철 - 바둑기사
  • 조순 - 前 서울특별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