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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16 : 조선의 역사 358 (제23대 순조실록 5) 본문
한국의 역사 816 : 조선의 역사 358 (제23대 순조실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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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순조실록 ( 1790~1834년, 재위 : 1800년 7월~1834년 11월, 34년 4개월)
5. 조선왕조 세도정권을 부정한 '홍경래의 난'
홍경래의 난
홍경래의 난(洪景來의 亂)은 1811년(순조 11년) 음력 12월 18일부터 1812년(순조 12년) 음력 4월 19일까지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넓은 의미에서의 농민 반란이다.
배경
조선 후기에 사회·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교육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지식인이 양산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사로서 입신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정부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지만, 종래의 관직 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포섭할 수 없어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 발전과 역동적인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지역민들의 불만이 더욱 컸다. 그리고 농민들의 차별대우가 있었다
원인
표면적인 이유로는 조선 시대에 서북인을 일반적으로 문무 고관에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격문에서 홍경래는 “임진왜란 때 재조(再造)의 공이 있었고, 종묘의 변에는 양무공(襄武公 : 정봉수)과 같은 충신이 있었다. 돈암(遯庵 : 선우협)·월포(月浦 : 홍경우)와 같은 재사가 나도 조정에서 이를 돌보지 않고, 심지어는 권문세가의 노비까지 서북인을 평한(平漢)이라고 멸시하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완급(緩急)의 경우에는 서북인의 힘을 빌리면서도 4백 년 동안 조정에서 입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였다.
조선에서 사실상 서북인을 중요한 자리에 임용하지 않았으나 이것이 정책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선조 때 이이가 서북인의 수재(守宰 : 지방관)가 되는 자가 적으므로 지방 인재의 등용을 상책(上策)한 것은 이를 증명한다. 다만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는 서북인의 불평불만을 이용하여 거사의 첫 조건으로 내세워 민심을 얻기로 꾀하였던 것이라고 하겠다.
다른 기록에 보면 사마시에 실패한 뒤 그 급제한 자를 보니 모두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당시 과거 제도도 크게 부패하여 권문세가의 자제는 무학둔재(無學鈍才)라도 급제의 영예를 차지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쉽게 성공할 수 없으며, 특히 평안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있으니, 이것이 홍경래로 하여금 개조범상(改造犯上)의 뜻을 굳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남양 홍씨가 조선에 들어오면서부터 위정자에 대한 불평, 즉 권력적 감정이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분노를 품은 홍경래는 일찍이 집을 떠나 각지로 방랑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던 것이다.
홍경래의 난
계획
홍경래가 뜻을 결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당시의 국정에 비위가 거슬린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각지의 부호·명사들을 농락하면서 기회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가산(嘉山)에 있는 재략이 풍부하고 풍수복좌를 업으로 하는 우군칙(禹君則), 가신의 역속(驛屬)이며 졸지의 부호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李禧著), 문재(文才)가 뛰어난 곽산의 진사 김창시(金昌始) 등을 심복으로 하여 거사에 참여시켰으며, 태천의 김사용(金士用), 곽산의 홍총각(洪總角), 개천의 이제초(李濟初)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그 밑에 평양의 양시위(楊時緯), 영변의 김운룡(金雲龍) 등을 비롯한 장사들을 모두 선봉장 겸 군사 지도자로 하였다. 이 장사들은 주로 홍경래의 조직활동에 의해 봉기의 인근 지역뿐 아니라 멀리 평안도 남부 및 황해도로부터 모여든 인물들이었으며, 봉기 당시 30∼40명 가량이 적극적으로 항쟁하였다.
박천의 김혜철(金惠哲), 안주의 나대곤(羅大坤) 등 상인들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특히 봉기 준비 단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군졸을 모으는 데 절대적인 성과를 올렸다. 주도 세력은 또한 철산의 정경행(鄭敬行), 선천의 유문제(劉文濟) 등 청천강 이북 각처의 권력을 쥐고 있는 명망가들과 행정 실무자들을 포섭하여 내응세력으로 삼았다. 그들은 봉기군을 맞아들이고 자기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가산의 대정강(大定江) 인근 다복동(多福洞)에 비밀 군사 기지를 세워 내응세력을 포섭하고, 거사하기 전부터 이곳에 옮겨와 금광 채굴을 구실로 유민을 꾀어 장정 일꾼을 모아들였다.
이리하여 준비를 하면서 기회를 보다가 1811년(순조 11년)에 종래에 없었던 큰 흉년이 들게 되어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서 궁민(窮民)을 끌어들여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우군칙을 참모로 한 본대는 가산·박천을 함락시킨 후 한양으로 남진케 하고, 1대는 김사용을 부원수, 김창시를 참모, 박성간(朴聖幹)을 병참장(兵站長)으로 하여 곽산·정주를 점령하고, 선천의 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안주를 공략할 방책으로 거병하였다.
경과
1811년 음력 12월 18일 삼경에 이희저의 일대가 가산군청을 습격하여 군수 정저(鄭著)와 그의 아버지 정노(鄭魯)를 죽이고, 군청을 점령하고 난을 일으켰다.
홍경래가 평서대원수로서 본대를 지휘하여 안주군 방면으로 진격하고, 김사용은 부원수로서 의주 방면을 공략하고, 김창시와 우군칙이 모사, 이제초는 북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남진군 선봉장, 이희저는 도총(都摠)을 맡았다. 결약을 맺어 서명한 인원에서 자의가 아니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없는 농민이나 임금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봉기군 본대는 가산군과 박천·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한 후 어려움 없이 선천·철산을 거쳐 이듬해 음력 1월 3일에는 용천을 점령함으로써 의주를 위협하였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봉기군은 청천강 이북의 여러 읍에서 기세를 올렸으나 요해처인 영변에서 내응세력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경계태세가 정비됨으로써 병영이 있는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홍경래군은 남하하는 제1관문인 안주를 공략하기 위하여 박천의 송림리(松林里)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안주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후(李海愚)와 목사 조종영(趙鍾永)이 필사의 각오로 천여 명의 병사를 모아 2대로 나누어 음력 12월 29일에 송림리의 홍경래군을 공격하였으며, 곽산 군수 이영식(李永植)의 원군의 도움으로 홍경래군은 대패하여, 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되었다.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행동하자고 역설하였기 때문에 정주성에는 박천·가산의 일반 농민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다.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金見信)·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는 관군에게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패전함으로써 군사를 해산하고 주요 인물들은 정주성에 들어갔다.
한편 이 변보가 음력 12월 20일 평양에 전해지자 평안감사 이만수(李晩秀)는 22일 순안의 병사를 안주로 향하게 하고, 다시 열읍(列邑)의 병사를 계속 동원하게 하고, 도내의 곳곳 요새를 굳게 지키게 하며, 만일을 위하여 창의(倡義)의 유생·문사를 모집하여 평양을 방비하게 하고 일부는 출정시켜 안주의 관군에 부속시켰으나 송림리 전투에서 적을 추격·섬멸치 않았다는 이유로 이만수는 파면되었다.
정부에서는 병조참판 정만석(鄭晩錫)으로 양서위무사 겸 감진사(監賑史)에 임명하여 반란지를 위무케 하고, 난군에게 귀순을 권고하였다. 24일에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요헌(李堯憲)으로 양서순무사에 임명하고, 박기풍(朴基豊)을 중군으로 삼아 서적(西賊) 토벌에 관한 군무를 보게 하고, 27일 선봉대로 한양을 출발하여 이듬해 음력 1월 3일 정주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이는 송림리 전투 후 5일 만이다.
이와 전후하여 곽산에서도 관군이 이겨 박천·가산을 회복하였으며, 8읍 중 정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회복하였다. 따라서 정주성은 완전히 고립하게 되었으며, 관군은 사방의 의병과 더불어 전세가 유리하였다. 그러나 홍경래군은 성을 굳게 지키고 여러 번 성 밖으로 돌격하여 나왔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고 농성을 계속하였다.
이에 정부군은 땅굴을 파들어가 화약으로 성의 아래를 폭발시키고 성내로 돌입하여 함락시키니 음력 4월 19일로 농성한 지 100여 일, 거병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이때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우군칙·홍총각 등 다수는 포로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음력 5월에 참형되었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와 소년을 제외한 1,917명 전원이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실패한 이유
홍경래의 계획이 일부 어그러져 실패를 가져오게 하였다. 박종일(朴鍾一)로 하여금 한양에서 난을 일으켜 중앙의 혼란을 꾀하였으나 주살되고, 창성(昌成)·강계(江界)·초산(楚山)·위원(渭原) 등지의 포수(砲手)들의 내원을 기대하였으나, 모두 체포되었으며, 점령한 8읍이 함락되어 정주성이 고립되고, 붙들린 포수들이 정주성 공격을 도왔으며, 호병(胡兵, 청나라 군대)을 청하려 하였으나 부하의 번의로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의의 및 평가
지도자들이 내세운 봉기의 이념은 세상을 구원할 정진인(鄭眞人)을 받들어 사업을 벌인다는 참위설이 가장 중요한 몫을 하였으며, 토호 관속을 향해서는 지역 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토지 문제 등 사회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여 전개 과정에서 일반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지 못하고, 단지 곡식 분배 등을 통해 빈민을 불러모으는 데 그친 것이 커다란 한계였다.
홍경래의 난은 극도로 피폐한 조선 말기의 생활불안과 억울한 감정에서 오는 위정자에 대한 반항이라는 평가도 있다. 비록 정부의 힘으로 평정되기는 하였으나, 정치의 폐단이 가시지 않고 1813년(순조 13) 음력 11월에 제주도의 양제해(梁濟海)의 음모 사건, 1816년(순조 16) 음력 10월 성천읍의 승려 학상(學相)이 홍경래의 여당이라 자칭하며 흉패한 행위를 한 것 등으로 보아 홍경래 난은 일시 돌발적인 군란(軍亂)이나 민란에 그치지 않았다. 그 여파가 파급되어 민중의 동요는 걷잡을 수 없이 되었으며 철종 때 곳곳에서 민란이 계속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아래는 홍경래의 난과 진주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조선 후기의 삼정의 문란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삼정의 문란
삼정의 문란(三政-紊亂)이란 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 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 제도)이 문란해졌음을 말한다.
전정의 문란
우선 전정의 문란은 임진왜란의 참화로 말미암아 더욱 심해졌다. 전란으로 많은 땅이 황폐해진 데다가 궁방전·둔전 등 면세지와 양반·토호가 조작한 은결(隱結 : 대장에 오르지 않은 땅)의 증가는 국고 수입을 격감시켜, 결과적으로는 무력한 농민의 부담만 과중하게 만들었다. 농민은 땅 1결(結)에 전세 4말을 내고, 그에 더하여 삼수미 2말 2되, 대동미 12말, 결작(結作) 2말을 내야 되었는데, 그 위에 또 여러 가지 명목의 부가세와 수수료를 바쳐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관리들은 황폐해서 못 쓰는 땅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심지어는 백지징세라 하여 공지(空地)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도 있었다.
도결
도결(都結)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지방의 서리가 공금이나 군포를 사사로이 사용하고서 이를 미봉하기 위하여 결세(結稅)를 정액 이상으로 마구 징수하거나, 정해진 액수보다 많이 징수하던 것을 말한다.
백지징세
백지징세(白地徵稅)는 조선 중기 이후 관리의 농민 착취 현상이 빚어낸 위법 징세의 일종이다. 실제로는 전혀 토지가 없는데 가전적(假田籍 : 가짜 장부)을 만들어 징세하거나 세(稅)를 부과할 수 없는 황폐한 진전(陳田)에 대해서 납세하는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군정의 문란
다음으로 군정은 장정이 직접 병역을 치르는 대신 군포를 내던 것을 말하는데, 영조가 이를 반감하여 장정 1명에 포(布) 1필로 정하고 어염세·선박세·은결의 결전(結錢) 등으로 부족액을 보충하기로 하는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원래 양반·아전·관노는 병역이 면제된 데다가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도 세력가에게 매달려 군역을 기피하는 반면에 무력한 농민을 대상으로 황구첨정·백골징포 등의 협잡이 성행하여 전보다도 더 심한 고통을 받았다.
황구첨정
황구첨정(黃口簽丁)은 조선 후기 군정(軍政)의 폐단 가운데 하나이다. 철종 때에 이르러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자 이는 곧 사회경제적인 심각한 위기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전지(田地)에 대한 과다한 세금 부과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던 농민으로서는 또다시 군포의 부담까지 져야 했으므로 그들은 유망(流亡) 또는 도망으로 자구책을 찾게 되었으며, 세포(稅布)의 징수에 대한 책임을 진 지방관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부족액을 보충하기 위하여 유아에 대해서까지 세포 징수의 대상자로 간주하였다. 이를 황구첨정이라 하며, 이와 같이 진행된 군정의 이면에는 극도의 부패상이 도사리고 있었다.
백골징포
백골징포(白骨徵布)는 조선 후기 수취체제 문란이 가열됨에 따라 야기된 군정상의 폐단이다. 철종 때에 이르러 국가의 재정적 기반이었던 삼정이 정치 기강의 문란과 서로 인(因)과 과(果)가 되어 극도로 문란해져서 농민들은 이중 삼중의 과중한 부담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유망민(流亡民) 또는 도망민으로 변하였고, 한 지방의 군적(軍籍)은 하나의 허부(虛簿)와 다름이 없어서 관청의 호적 기록상 정남(丁男)의 수는 실제보다 훨씬 많아졌다. 호구(戶口)의 증가와 정남 수의 확보로 국가 재정을 담당해야 했던 지방의 수령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한 방법의 하나로 심지어는 사망자에 대해서까지 세포(稅布) 징수를 하는 악랄한 수법을 부렸는데 이것을 백골징포라 한다.
족징
족징(族徵)은 조선 후기 군정의 폐단으로 인한 독소조항의 하나이다. 삼정(三政)의 문란(紊亂)으로 인하여 호적이 사실상의 허부(虛簿)나 마찬가지가 되고 과세 대상의 출입이 무상하였음에도 지방 수령들은 이러한 토지대장과 호적에 준하여 과세의 강제징수에 온갖 수단을 다 부렸다. 또한 국법에 사족(士族)·이서(吏胥)·공노(公奴)에게는 군역(軍役)을 면하기 때문에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지게 되고 이것을 면하기 위해 권세가는 관아에 청탁하는 자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도망자·사망자·행방불명자의 체납분을 친족에 강제 징수하기도 했다. 이로써 농촌은 더욱 황폐해졌다.
인징
인징(隣徵)은 조선 후기에 군포를 징수할 때 부정한 수단의 하나이다. 군포 부담자가 관리와 결탁하여 면제를 받으면 결국 약한 농민에게로 부담이 전가되었으며, 이러한 부담을 짊어진 농민은 이중의 질곡 속에서 결국 토지나 주거를 버리고 달아나게 되었다. 이러한 도망자와 사망자 및 유망자의 체납분을 이웃 사람에게 대납토록 하여, 지방의 수령이나 관리들은 그들의 의무를 벗고 또 수탈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환정의 문란
환곡(還穀)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구휼(救恤) 제도 가운데 하나로서, 흉년 또는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주고 풍년·추수기에 되받는 진휼제도이다. 환자(還子) 또는 환상(還上)이라고도 불렀고, 환곡에 관한 일을 환정(還政)이라고 불렀다.
환곡은 본래 가난한 농민에게 정부의 미곡을 꾸어 주었다가 추수기에 이식(利息)을 붙여 회수하는 것으로, 빈민의 구제가 목적이었던 것이 후기에는 고리대인 “장리”로 변하여 그 폐단이 삼정 가운데서 가장 심하였다.
유래와 연혁
환곡과 비슷한 진휼(賑恤) 제도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시대인 194년(고국천왕 16년)부터 시행되었는데, 음력 3월에 곡식을 대여하고 음력 10월에 환납하였다고 한다.
고려는 태조 때에 흑창(黑倉)을 두어 빈민을 구제하였고, 986년(성종 5)에 이를 의창으로 개칭, 각 주·부에 설치하였으며, 993년(성종 12)에는 상평창을 양경(兩京)·12목(牧)에 두어 진휼사업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 제도를 긴급 조치로 설정한 데 불과하며 항구적인 제도로 고정시키지 않았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간헐적으로 시행되다가 어느 정도의 정비를 보게 되었다. 인조 때(1626년)에 이르러 상설제도로 정착하였다. 이 제도를 상설 시행한 이유는 임진왜란과 그에 뒤 이은 호란으로 말미암아 국가 재정이 황폐해지고 농촌의 삶이 곤궁해졌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일제 강점기인 1917년까지 이어졌다.
운용
원래 환곡의 기능은 흉년에 대비하는 비황(備荒)과 궁민의 구제를 위한 대여, 물가의 조절, 정부보유양곡의 교환 및 각 관청의 재원(財源) 확보 등이었다.
의창은 고려 때 관곡(官穀)을 주로 사용하였으나 이것만으로는 구호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어 1023년(현종 14)에는 일반 백성에게서 양곡을 충당하였다.
1392년(태조 1)의 의창 설치 당시에는 이자 없이 대여하였으나, 1417년(태종 17)에는 그 총량이 4백 15만 5천 4백 1섬 2말에 이르렀으나, 점차 대여의 수수료·보유 양곡의 자연적 소모량 등 손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연 1~2할의 이식을 징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성의 낭비와 관리의 소홀로 점점 재고량이 줄어 국고(國庫)의 고갈을 초래하여 세종 때에는 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승려로부터 정전(丁錢)을 징수하거나 절의 토지를 몰수, 또는 향리(鄕吏)의 위전(位田)을 폐지하고 어염세(魚鹽稅)를 양곡으로 징수하거나, 사창(社倉)을 따로 설치하는 등의 정책을 세웠고, 1451년(문종 1) 국가재정의 궁핍과 각 지방의 환곡에 대한 요구가 격증하자 의창을 보조하는 기구로 각 촌락에 사창(社倉)을 독립적인 구호기관으로 삼아 경상도 지방에서 먼저 실시하였다. 그 이식은 1섬(15말)에 3말이었는데 이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의창의 이식을 10말에 2되로 고정하였다. 그러나 세조 때는 의창의 미곡이 아주 없어지게 되었다.
그 후 이들도 별로 성과를 얻지 못하여 중종 때 진휼청을 설치하여 1525년(중종 20)에는 일체의 구호사무를 통일하고 의창은 폐지되었다.
또한 1458년(세조 4)에는 흉년에 대비하여 상평창을 설치하였으나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상설기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1626년(인조 4)에 진휼청에 통합되어 평시에는 상평청으로 물가조절을, 흉년에는 진휼청으로 곡식의 대여를 담당하였다.
이와 같이 환곡의 사무는 의창이 주체가 되어 사창을 보조 기관으로 삼고 보유 양곡과 군량미의 융통으로 이를 운영하였으나 원활히 실시되지 않았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력은 극도로 소모되고 세제(稅制)는 문란하여져 국고 수입은 감소하고 또한 군비의 확장이 시급한 문제로 되어 환곡의 이식을 국비(國費)에 충당하고자 매관(賣官)·이곡(利穀) 등의 방법으로 곡식을 확보, 그 이식으로 경비를 충당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리하여 각 관청·군영이 자기가 보유한 곡식을 대여, 그 이식으로 경비를 조달하게 되자 이미 환곡은 대여·구제의 방편이 아니라 과세(課稅)·이식을 위한 수단으로 변하였다. 따라서 백성의 필요 여하를 불구하고 대부를 강제하였으며, 그 이식도 높아 점차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본래 의창에서 담당하였는데, 이때에는 빌려준 원곡만을 받았기 때문에 곧 원곡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자를 붙이게 되어 점차 구호기관에서 대여기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특히 의창을 운영하는 관리들이 아전(衙前)이나 지방의 부호(富豪)들과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취하여 실제적으로는 백성들의 부담이 커지게 되어 폐단이 극심하였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탐관오리의 횡포가 심하여 중기 이후 삼정(三政)의 문란 중 가장 폐단이 심한 상태를 발생케 하였고, 각처에는 민란이 일어나 사회적 혼란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1867년(고종 4) 대여 양곡의 회수 규칙을 엄하게 하여 이식은 1할로 고정, 사창을 다시 두었다. 1895년(고종 32) 이를 사환미(社還米)로 개칭, 조례(條例)를 발표하여 자치적 색채를 명백히 하고 이식을 종전보다 섬당 5되씩을 감하여 환곡 제도의 완벽을 꾀했으나 도식(盜食)·유용(流用)·횡령이 계속되어 1909년(융희 3) 내부(內部)·탁지(度支)의 양부대신은 훈령을 내려 규칙의 엄수를 명하였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자본주의적 정치 기구와 화폐 경제의 침투로 이미 환곡 제도는 무력화하여 1917년 사환미 조례를 폐지하고, 사환미를 각 부락의 기본 재산으로 전환시켰다.
번작
번작(한자: 反作)은 조선 후기의 환곡 출납 관계에 대한 허위 보고서이다. 환곡은 원래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실시된 대여곡 제도였으나 철종 때 세정(稅政)이 극도로 문란하게 되어 환곡은 고리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겨울철 회수기와 봄의 반배기(頒配期)에 각 지방의 수령은 이서(吏胥)들과 결탁하여, 대여곡을 회수 또는 반배한 것처럼 허위 문서를 작성하고 그 양곡에 대하여 쌀 1섬마다 동전 1냥씩 징수하여 착복한 것이다.
장리
환곡은 처음에 곤궁한 농민을 구제하려고 시행된 무이식 제도였으나, 그 뒤 상평창에서 담당하면서, 원곡에 모곡이라는 이자를 받게 되었다. 환곡을 되받을 때 붙이는 모곡은, 처음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에 2할(20%, 연리 40%)였고, 조선 후기에는 6개월에 1할(연리 20%)였다. 이러한 모곡은 원곡의 소모분을 감안하여 책정되었고, 오늘날에 비해 다소 고리였으나 가혹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관리가 부패함에 따라 가난한 농민은 춘궁기에 환곡을 얻기가 어려워졌고, 그에 따라 환곡의 이자가 높아져 갔다. 결국 봄에 꾸어 가을에 갚되 빌린 곡식의 절반 이상을 이자로 물게 되었다. 이와 같이 6개월 이율이 5할(50%)를 넘기는 때에 장리라 불렀으며, 주로 쌀이 대상이었기 때문에 장리쌀이라는 말도 쓰였다.
허류
허류(虛留)는 조선 말 환곡의 폐단 가운데 하나이다. 전임(前任) 관리나 지방의 아전이 결탁하여 창고에 있는 양곡을 횡령·착복하고 장부상으로는 실제로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기재하여 후임 관리에게 인계하는 것을 말한다. 국법에는 이러한 경우 엄격한 처벌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허위 문서의 작성자와 인수자가 서로 공모하여 은폐시켜서 환곡의 폐단은 국가 재정의 궁핍화를 가속화시켰다.
영향
지방관들은 그들대로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아전들의 부정부패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또 봉급을 받지 못한 아전들은 그들대로 자연히 농민들을 착취하고, 나아가서는 공금(公金)이나 관곡(官穀) 등을 횡령하는 등, 온갖 협잡을 하였다. 중앙에서는 암행어사를 수시로 보내서 지방관들의 부정행위를 조사·보고하도록 하였으나 고질화된 악습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암행어사는 실질적으로 실패하였다. 그리고 삼정의 문란은 철종 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홍경래의 난, 진주 농민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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