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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14 : 조선의 역사 356 (제23대 순조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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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14 : 조선의 역사 356 (제23대 순조실록 3)

두바퀴인생 2012. 12. 29. 04:03

 

 

한국의 역사 814 : 조선의 역사 356 (제23대 순조실록 3)  

 

 

             
                                                                     순조의 인릉

 

 

제23대 순조실록 ( 1790~1834년, 재위 : 1800년 7월~1834년 11월, 34년 4개월)

 

 

3. 천주교 박해를 통한 벽파의 정권 장악

 

조선의 천주교는 숙종 이후 거의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식층에 전파되었다. 17세기에도 소현세자나 홍대용 등이 들여온 천주학 서적들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종교로 받아들여 정식으로 신자가 생긴 것이 18세기에 들어와서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승훈이었으며, 다산 정약용 형제들과 이가환, 권신철 등 재야 남인 세력들 사이에서 천주교는 조심스럽게 퍼저나갔다.

 

정조 대에 급격히 불어난 천주교도는 정조 말년에는 교인이 1만여 명에 달하는 등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천주교의 확대에 대해 보수 지배층은 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군신관계와 상하관계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성리학적 지배원리는 조선왕조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사상적, 통치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인 의례를 거부했으며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사상과 유일신 사상을 주장했으니, 그것은 유교사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또한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 양반층과 수탈과 횡포에 시달리던 서민층이 천주교 신앙을 통해 결합되는 것도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이에 심환지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에 의한 상소와 박해 운동이 일어났다. 그에 대해 정조는 "사교는 얼마 가지 않아서 자멸할 것이며, 이는 유학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는 논리를 폄으로써 박해를 피하도록 하였다. 또한 당시 남인 시파의 실권자이자 삼정승을 두루 거친 체제공의 묵인도 천주교의 보전에 큰 역활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조와 체체공이 죽고 정순왕후를 둘러싼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일대 박해가 벌어진다. 정순왕후 김씨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조 대에 수세에 몰려 있던 벽파는 정적이었던 남인 시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즉각 정치적인 대공세를 펼쳤고, 벽파의 충실한 후견인이었던 정순왕후는 1801년 언문 교지를 내려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전국의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였다.

 

오가작통법으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백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이 중에는 초기의 교회 지도자였던 남인 시파 학자들이 많았는데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이벽, 권철신 등이 그들이었다. 또한 단지 연구를 목적으로 한 학자들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정약용, 정약전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실학자 박지원, 박제가 등도 이때 관직에서 쫓겨났다.

 

1801년 순조 1년에 일어나 5백여 명의 크고 작은 희생자를 낸 신유박해는 인륜을 무시하는 사교를 뿌리뽑아 나라의 기강과 윤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 아래 정적인 남인 시파와 진보적인 사상가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대 정치적 숙청이었다. 이를 '신유박해'라 한다.

 

신유박해 이후 남인 시파는 정치적 중심에서 완전히 멀어졌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일당 독재인 외척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신유박해

 

신유박해(辛酉迫害)는 1801년(순조 1년)에 발생한 조선천주교회 박해 사건이다. 시파·벽파의 정치 투쟁에서 시파의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1800년 6월 28일 신해박해 이래 “정도(正道)인 유학은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소멸시킬 것”이라면서, 천주교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가 승하하였다.

 

1800년 7월 4일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순왕후수렴청정을 하여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벽파가 정순왕후를 움직이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박해의 진짜 이유는 남인·시파의 숙청이었다. 야당인 남인 중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중국인 천주교 신부이자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주문모를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종(다산 정약용의 형), 여성 평신도 지도자인 강완숙 등이 사형당했고,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념의 차이로 멀리한 정약용 등은 귀양보내져 박해 피해자는 수백 명에 달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오가작통법을 통해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가혹한 연좌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애꿎은 피해를 보았다. 이 옥사로 만 1년 내외에 박해 받아 죽은 신도만도 300명이 넘었다.

 

1801년 10월 5일 정약종의 조카 사위였던 천주교 신자 황사영(黃嗣永)이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정치적 숙청에 이용한다면서 신유박해의 실상과 대응 방안을 적어 청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던 밀서(密書)가 발각되었는데, 이를 '황사영 백서 사건'이라고 한다. 당시 황사영은 청나라의 무력을 빌어 조선의 종교적 자유를 얻고자 했기 때문에, 조선 천주교회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황사영 백서'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는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천주교신자 황사영이 중국 천주교회 북경교구의 천주교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기입한 밀서(密書)이다. 신유박해에 대한 귀중한 사료이다.

 

황사영은 경상도 창녕(昌寧) 사람으로 정약현(丁若鉉 : 정약용의 맏형)의 사위이다. 중국 천주교회 사제인 주문모(周文謨)신부에게 알렉산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1791년(정조 15) 17세의 어린 몸으로 진사에 합격하여 시험관을 놀라게 하였고, 정조로부터 그의 학문적인 재능에 대한 칭찬과 학비를 받았다.

 

1798~9년경에는 한양에 머물면서 나이 많은 여러 교우들에게 천주교회 교리를 가르쳐 주고, 교리서를 등사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들어오자 그를 도와 전교에 힘썼으며, 중국에까지 그의 심부름을 갔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북도 제천군 봉양면(鳳陽面) 배론(舟論)이라는, 토기를 만드는 천주교인들의 마을에 가서 토굴 속에 숨었다. 황심(黃心)이라는 열렬한 천주교 신자와 황사영이 연락이 닿아 위기에 놓인 조선 천주교회를 구출할 방책을 상의했다.

 

그들은 조선 천주교회가 박해받은 실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천주교회의 재건책을 호소하는 편지를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음력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중국 천주교회 북경교구의 주교에 전달하려고 하였으나 도중에 적발되었다.

 

백서에 사용된 편지지는 길이 62cm, 너비 38cm의 흰 비단이었으며, 한 줄에 110자씩 121행, 도합 1만 3천여 자를 먹으로 썼다. 백서에는 발송인 황심의 이름만이 씌어 있으며, 지은 날짜는 〈천주 강생 후 1801년). 달두 첨례 후 1일〉(음력 9월 22일 : 양력 1801년 10월 29일)이라고 적혀 있다.

 

이 밀서를 지은 황사영은 음력 9월 29일에 잡혀 한양으로 끌려올라와 음력 11월 5일에 처형되었으며, 가산을 몰수당하고 어머니는 거제도, 처는 제주도, 아들은 추자도에 각각 귀양 갔다. 먼저 잡힌 황심과 옥천희도 며칠 전에 각각 처형되었다. 백서는 관헌의 손에 넘어가 조정을 아연케 하고, 천주교의 탄압은 한층 엄준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사건 전말의 변명책을 보였다. 조정에서는 원 기록에서 불리한 중국인 천주교 사제 주문모 신부의 처형등에 관한 기사는 되도록 빼고 고쳐서 겨우 1행에 65자 15행, 도합 860여 자로 만들었는데, 이 편지는 동지사 겸 진주사(陳奏使)편에 북경 청나라 황제에게 보고되어 황제의 양해를 구하였다.

 

발견

오늘날 전하는 백서는 원본과 사본의 2종이 있으며, 이것은 신유박해 후 근 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뒤 발견되어 당시 조선 천주교회를 지도하던 뮈텔 주교의 손으로 넘어갔다.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복자 79명의 시복식이 거행될 때에 교황에게 전달되어 지금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고 있다. 현재 영인본이 있으며 불어로 번역된 것도 있다.

 

유적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에 있는 《배론 성지》는 황사영이 은거했던 토굴을 보존한 것이다. 이곳에는 백서의 실물 크기 복사본이 토굴 안에 전시되어 있다.

그는 능지처참형을 받은 후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있는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 위치한다. 1980년에 황 씨 집안의 후손이 사료 검토 작업과 사계의 고증을 거쳐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였다. 또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내용

백서의 내용 중 원문의 내용은 대략 3개 대목으로 나눌 수 있다.

  1. 당대는 천주교 교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박해때의 순교자 약전
  2. 중국인 천주교 사제인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수형(受刑)
  3. 정계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근본 건의책

이때 근본 건의책은 4개 항목으로 나뉜다.

  1. 서양 제국의 동정을 얻어 성교(聖敎,천주교)를 받들어 나가고, 백성들의 구제에 필요한 자본의 요구.
  2. 청나라 황제의 동의를 얻어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보낼 것.
  3. 조선을 청나라에 부속시키고 친왕(親王)에게 명하여 조선국을 감독케 할 것.
  4. 전쟁을 모르는 조선에 배 수백 척과 강한 병사 5~6만 명으로 서양 전교대(傳敎隊)를 조직해 와서, 선교사의 포교를 쉽도록 할 것 등이다.

이와 같이 당시의 상식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극단의 문구까지 사용하였으며, 뮈텔 주교도 불역본(拂譯本) 서문에서 “음모의 대부분이 공상적이며 위험천만한 것이며, 조선 정부가 필자에게 엄벌을 가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라고 논하였다.

 

 

 

'황사영 백서'에 대한 한국 교회사 기록

 

'황사영 백서' 원본이 신유박해 순교 200 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의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 동안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던 황사영 백서는 1801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참상을 기록하고 신교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재건하려는 자신의 개인적인 방안을 건의한 편지글로 한국교회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다.

 

조선 조정의 잔인한 박해로 겨우 움튼 한국교회가 참혹하게 찢겨져 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토굴 속에 숨어서 피눈물로 써 내려간 편지글, 가로 62㎝ 세로 38㎝의 흰 명주 천에 붓으로 쓰여진 깨알 같이 작은 해서체의 먹글씨, 122줄 1만3384자 앞에서 200년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황사영의 신앙적 열정을 느끼며 전율했다. 세월의 흔적이 어린 비단 위에 조금씩 번지기도 한 작은 글자들은 이제 우리들을 감격의 눈물로 역사 속에 젖어들게 하고 있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년)은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으며 남인 시파에 속하는 양반가문 출신이다. 정5품 정랑직을 역임했던 아버지 황석범이 일찍 돌아가시어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이소사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본관은 창원이요 자를 덕소(德紹)라 한 그는 명문가의 자손답게 영특하고 학문에 뛰어났다. 그의 11대 할아버지인 황침이 한성판윤을 지낸 이래 10대에 걸쳐 벼슬이 떨어진 적이 없는 명문가 출신인 그는 수염이 아름다운 귀공자로도 주변의 환심과 기대를 받고 있었다.

1790년(정조 14년) 황사영은 열 여섯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조 임금은 특별히 그의 학문적 재능을 칭찬하며 격려하여 스무 살이 되면 탁용하겠다는 중용을 약속하여 그의 장래를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더욱 학문에 전념하도록 급양비를 하사하였는데 이 때, 임금님이 그의 손을 잡아 주어 어무가 내린 영광을 입었다. 황사영은 이 영광을 표시하기 위하여 당시의 관례에 따라 비단으로 그 손을 감고 다녔다. 이로서 절대군주제도 아래 신분계급 사회였던 당시의 황사영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온전히 다 갖추었다.

황사영은 진사시에 급제했던 그 해에 혼인을 하여 정란주(보명은 명련)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이 결혼은 그의 인생에 있어 귀중한 전환점이 되게 하였다. 부인인 정란주는 진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그 명성이 자자한 정재원의 네 아들 중 맏이인 정약현의 맏딸이었다. 정약현은 한국 초기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정약종과 다산 정약용의 맏서형이 되니 황사영은 정약종과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 것이다.

황사영은 이 무렵인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으며 정약종, 홍낙민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고, 특히 처숙인 정약종 형제들로부터 교리를 익히게 되어 알렉시오란 세례명으로 영세입교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황사영은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교리연구에 몰두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그는 현세의 행복을 버리고 구원의 학문이 아닌 다른 학문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뒤 주신부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양반인 그는 평민신분의 양인들과 어울려 남송로, 최태산, 손인원, 조신행, 이재신 등 다섯 사람과 함께 명도회 단위 조직을 구성하여 이끌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 권일신, 최창현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서양선교사 파견 요청을 위한 일에 동참하였다. 그는 1798년부터 자신의 고향을 떠나 서울 애오개(아현동)와 북촌에 머물며 신자들의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해 갔다.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다. 그는 체포를 피해 신앙생활을 바로 할 곳을 찾아 방황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금령이 강화되니 친척과 친구들 가운데 천주교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온갖 성의를 다하여 신봉하게 되었다"고 증언한 바와 같이 그의 신앙을 지켰다. 그는 신앙생활 그 하나를 바로 하기 위하여 스스로 이씨 성을 가진 상주로 변장하고, 김한민과 함께 서울을 벗어나 충청도 제천 땅 배론으로 숨어들어 김귀동의 집 옹기가마 토굴에 은신하였다.

일찍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그는 이제 이름 석자도 밝히지 못한 채 토굴 속에 몸을 숨겼다. 진정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 이것뿐이기에 그 구원을 위한 학문 밖에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의 학문과 신앙이 조선 조정의 일방적인 박해로 모욕을 당하고, 신앙의 동지들은 형장의 죄수처럼 처형되고 있음을 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는 눈물과 기도로 신앙 동지들의 장한 순교의 모습을 정리해 두었으리라. 마침내 주문모 신부마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박해과정을 증언하고 조선 교회를 재건해야 할 사명을 통감했으리라! 그는 이 역사적 소명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유명한 백서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