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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12 : 조선의 역사 354 (제23대 순조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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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12 : 조선의 역사 354 (제23대 순조실록 1)

두바퀴인생 2012. 12. 27. 03:13

 

 

 

 

한국의 역사 812 : 조선의 역사 354 (제23대 순조실록 1)  

 

                              

                                                                        순조의 인릉

 

 

제23대 순조

 

순조(純祖, 1790년 음력 6월 18일/양력 7월 29일 ~ 1834년 음력 11월 13일/양력 12월 13일)는 조선의 제23대 임금(재위 1800년-1834년)이다. 는 공(玜), 본관전주(全州), 는 공보(公寶), 는 순재(純齋), 사후 시호는 순종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이다. 이후 철종 때 정원용(鄭元容)의 의견에 따라 묘호가 순종에서 순조로 바뀌었고, 1897년 숙황제(肅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순조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이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선각왕(宣恪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정조(正祖)의 차남이자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아들이다. 1800년부터 1834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800년부터 1803년까지 계적증조할머니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가 섭정을 하였고 1803년부터 1804년까지 장인 김조순(金祖淳)이 섭정을 하였으며 1804년부터 1827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827년부터 1830년까지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1830년 아들 효명세자가 훙서(薨逝)하자 다시 친정을 하였고 그 친정 체제는 1834년 붕어(崩御)할 때까지 이르렀다.

 

 

 

생애

 

즉위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비(妃)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이다.

 

1800년(정조 24)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803년까지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繼妃)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폐위를 주장했던 오빠 김귀주(金龜柱)를 비롯한 벽파(僻派)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時派)의 숙청에 주력했다.

 

또한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1801년 1월 오가작통법을 시행했으며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천주교 탄압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을해박해)과 1827년에도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세도 정치와 봉건왕조의 모순 심화

순조는 1803년 12월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이 장악했다. 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김이교(金履喬)·김조순·김문순(金文淳)·김희순(金羲淳)·김명순(金明淳)·김달순(金達淳) 등이 주요인물로, 이들은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세도 정치로 뇌물수수 등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동 김씨 일족에 줄을 대는 것이 지름길이 되었다. 이에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양반관료체제가 안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중간수탈의 가중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조세체계도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의 중간수탈이나 토호(土豪)의 세금 전가는 주로 일반 농민층에 집중되어 그렇지 않아도 지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경래(洪景來) 등이 부농(富農)·사상(私商)을 규합하여 봉건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더불어 1811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홍경래의 난은 무력에 의해 이듬해 진압되었으나, 정부는 사회경제적인 근본 수습책을 마련하지 않았으므로 이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세도 정치 견제 시도

안동김씨 세도 정권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순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했다. 1819년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을 삼은 것을 계기로 풍양 조씨(豊壤趙氏) 일문을 중용했으며, 1827년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翼宗)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세자는 조만영을 비롯한 풍양 조씨의 세력을 끌어들여 김노(金潞)·홍기섭(洪起燮) 등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하고, 김조순을 평안도관찰사로 내보내는 등 안동 김씨를 멀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1830년 세자가 젊은 나이로 죽으면서 안동 김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대리청정기에 정국을 장악했던 인물들은 유배되었으며, 순조의 안동 김씨 견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안동 김씨 일문은 풍양 조씨의 협력을 얻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갔다. 순조는 재위 34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양선의 출현

조선은 후기에 와서 일부 이양선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순조 실록에 기록된 이양선 출현은 총 3번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영길리국(영국)의 배였다. 이양선이 출현했을 때는 대부분 최대한 빨리 바다로 내보내고, 이들에 대한 기록을 청나라 조정에게 보고하는 것이 조선의 이양선에 대한 기본 대처방안이었다.

 

순조 16년 7월 19일에 충청 수사 이재홍의 장계가 올라왔는데, 충청 마량진 갈곶 밑에서 영길리국의 이양선이 출몰하였다고 했다. 첨사 조대복과 지방관 비인 현감 이승렬은 이양선에 있던 낯선 사람들과 언문이나 한자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장계에서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들의 배에 들어가보니 내부는 무척 컸고,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배는 무척 빠른 속도로 바다를 빠져나갔습니다." 라고도 했다. 이들이 영국인임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준 한 폭의 서전에서 영길리국이라는 국명이 나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순조 32년 7월에도 홍주의 고대도 뒷바다에서 이양선이 나타났는데, 이들과는 한자로 대화를 하였다고 했다. 이들은 영길리국의 배이며, 청나라와 국력이 대등하여 조공을 바치치도 않는다고 했다. 영길리국의 정보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조선에게 교역을 하고 싶다는 청을 여러번 했으나, 조선 측에서는 이에 대해 강력히 거부하며, 이들이 원하는 물품들을 제공하고 보냈다고 했다.

 

 

능묘

 

 

 

인릉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인릉(仁陵)으로 왕비인 순원왕후와 합장되어 있으며 인근에는 태종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이 위치해 있다.

 

 

 

가족 관계

  • 부 :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 모 : 효의선황후 김씨
  • 사친 : 현목수비 박씨
  • 왕비 : 순원숙황후 김씨(純元王后 金氏)
    • 아들 : 문조 익황제(文祖 翼皇帝)
      • 손자 : 헌종 성황제(憲宗 成皇帝)
      • 양손자 : 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
    • 장녀 :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0.13 ~ 1821.6.13,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에게 하가)
    • 차녀 :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0.26 ~ 1832.5.12,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에게 하가)
    • 아들 : 대군(1820.2.23 ~ 1820.5.26)
    • 삼녀 :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6.10 ~ ?,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에게 하가)
    • 양자 : 철종 장황제(哲宗 章皇帝)
  • 후궁: 숙의 박씨(淑儀 朴氏)
    • 딸 :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10.11 ~ 1829.4.8)

 

 

 

제23대 순조실록 ( 1790~1834년, 재위 : 1800년 7월~1834년 11월, 34년 4개월)

 

 

1. 순조의 등극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시작된 순조 대는 17, 18세기를 통한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사회의식이 성장하는 시기였다. 그런가 하면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정치의 기강이 문란해져서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각종 비기와 참설이 유행하는 등 일대 사회 혼란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순조 대의 정치적 사건의 대표적인 예는 후에 외교적인 분쟁으로까지 비화하는 천주교 박해를 들 수 있다. 벽파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으면서 정적인 시파와 남인들을 치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박해', 순조의 친정 뒤에 이어진 '을해박해'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묵숨을 잃는 참사가 이어졌다. 또한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끓임없이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하던 시기였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이며, 수빈 박씨의 소생이다. 1790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공, 자는 공보, 호는 순재였다.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 난 문효세자가 일찍 죽자 1800년 정조 24년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이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던 인물이었다.

 

옥새를 거머쥔 정순왕후는 우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판직에 않히고 벽파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권력을 잡은 김관주,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살육함으로서 벽파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장순왕후는 즉시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하였다. 이는 곧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엇다.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탄압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첯째가 왕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군신 간의 상하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 윤리인 유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미연에 막는다는 것이요, 둘째가 천주교를 공부하거나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주교도를 잡아들이는 것은 곧 유교 윤리를 받든다는 명분도 얻을 뿐 아니라, 반대파의 정적을 제거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실권을 잡자마자 척사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순조 1년에 들어서자마자 정순왕후는 곧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위해 오가작통법을 썼다. 이는 본래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서 서로 강도, 절도 같은 범법 행위를 감시하고 범법자를 가려내는 치안 유지법이었다. 그 방법이 천주교 색출에 동원하여 다섯 집끼리 서로 천주교도가 있는지 감시하고 고발하게 하였다. 그 중에 한 집이라도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다섯 집이 모두 화를 당하는 악명 높은 오가작통법을 써서 전국을 피바다로 몰아넣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전국적으로 수만 명이 넘었는데 이 중에는 진짜 천주교 신자도 있었지만 애매하게 연루되어 죽은 사람도 많았다.

 

당시 잡혀 죽거나 귀양을 간 시파나 남인계 인물로는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등이 있다. 신유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가리켜 '신유사옥'이라 하는데 이 사건으로 정순왕후는 완전히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시파였던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맞아들인 일이었다. 1800년 정조 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이 결정되었으나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 이때 정순왕후의 6촌 오라버니인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가 있었으나, 결국 1802년 순조 2년 2월에 왕비로 간택되어 책봉되었다. 이 순간 조선의 명암을 가르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은 싹을 터기 시작하였다.

 

한편 왕의 친정 뒤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 을해년에는 경상, 충청, 강원도의 신자들이 잡혀 죽었고, 1827년에는 충청도, 전라도의 천주 교인들을 검거해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조선의 역사 물줄기를 바꾼 정순왕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1745년~1805년 음력 1월 12일)는 조선의 21대왕인 영조(英祖)의 계비이다. 정식시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정현소숙정헌정순왕후(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正顯昭肅靖憲貞純王后)이며 오흥부원군 김한구(金漢耉)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이다.

 

 

생애

영조 시대

소현세자비 강빈(姜嬪)의 신원을 주청하다 장살당한 김홍욱(金弘郁)의 현손인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1745년, 현재의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1757년,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하자 영조는 부왕인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를 책봉하지 않고 1759년 6월 9일, 김한구의 딸인 정순왕후를 왕비로 간택하여 같은 해 6월 22일,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렸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로 조선 개국 이후 가장 나이 차가 큰 혼인이었고 그가 왕비에 책봉될 때 부모 내외는 물론 조부 김선경도 생존하고 있었다. 심지어 1735년에 태어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보다 10살이 어렸다.

 

간택 당시의 일화로 영조는 간택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는 답을 했지만 유독 정순왕후는‘인심이 가장 깊다’고 답하여 영조의 눈길을 사로 잡았으며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로 영조를 감탄시켰다고 한다. 왕비 책봉 이후에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답하여 어린 나이에도 왕비의 체통을 중시하였던 그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정조 시대

영조기 영조의 양대 척신 가문인 정순왕후의 친정 오라비 김귀주 및 경주 김씨(慶州金氏)측과 혜경궁 홍씨 친정 풍산홍씨측은 영조 말년에 계속적으로 대립했다. 정조는 즉위하자 홍인한, 정후겸 등 영조 척신 일파의 숙청을 단행했다. 정순왕후의 동기인 김귀주는 영조 시기에 후일 정조가 중용하는 청명당과 함께 행동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한성판윤을 제수받고 홍인한-정후겸 탄핵에 동참했다. 그런데 정조는 홍인한-정후겸에 대한 처분이 마무리되자마자 김귀주가 혜경궁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흑산도로 귀양보냈다. 이 날 연석에서 정조는 김귀주를 귀양보낸 실제 이유는 영조때 김귀주가 외조부 홍봉한을 탄핵한 데 있음을 밝혔다.

 

이로 인해 정조와 정순왕후 사이에 어떤 긴장 관계가 생겼는지 여부는 현재로선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듬해 홍인한-정후겸 처분에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홍보하기 위한 책《명의록》을 편찬하였을 때, 이 책 속에서 '세손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내전이 안에서 세손을 도와 세손이 무사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을 수록하여, 그가 정조 즉위에 공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밝혔다. 이 부분은 정조 사후 간행된 《정종대왕행장》과 정순왕후 사후에 간행된 그 자신의 《행장》등에서 재확인되는 내용이다.

나의 자전(慈殿)이 과인의 몸을 보우(保佑)하였음은 인원성후(仁元聖后, 인원왕후)가 선대왕(영조)을 보우함과 같았습니다.
정조어제 오흥부원군 김한구(정순왕후 부) 치제문 중

흔히 세간에는 정순왕후와 정조가 극심한 대립관계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득록》에는 정순왕후를 향해 친밀한 감정을 나타내는 기록이 전하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행록을 쓰며 정조가 자신을 극진히 공양했음을 과시하고 있다.

 

 

수렴청정(순조 시대)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아들인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대왕대비로서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행하였다. 이 시기에 정순왕후가 여군(女君), 여주(女主)를 자칭하는 것을 두고 본인이 여자국왕/여자임금임을 자처한 것이라는 해석이 한동안 주류를 이뤘으나 이는 완전한 오류이다. 여군/여주는 모두 동양권에서 왕후 등이 사용하였던 용어이며[3], 정순왕후 외 조선의 다른 대비들이 사용한 기록이 다수 존재한다.[4] 정순왕후는 정조 생전에도 여군(女君)을 자칭한 기록(정조10년 12월 1일)이 있으니 이것이 '여자 임금'이라는 의미일 수는 없는 것인데, 전술한 통설은 이러한 점을 완전히 간과한 오류를 범하였다.

 

정순왕후는 자신과 대립되는 소론 시파들을 대거 숙청하였으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을 처형시켰고 정조가 설치한 장용영을 폐지하였으며 정조가 묵인하던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여 남인과 소론 시파들을 축출하였다. 또한 정조가 내쳤던 김관주(金觀柱)와 김용주(金龍柱)등의 노론 벽파 관료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1802년, 정조의 유지에 따라 소론 시파인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책봉하고 김조순을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하고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1803년 12월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조순에 의해 대부분의 벽파관료가 숙청되고 자신의 영향력도 약화되어 허망한 말년을 보냈고 1년 뒤인 1805년 1월 12일, 창덕궁 경복전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으로 영조와 함께 묻혀있다.

 

 

 

신유박해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며 천주교를 묵인한 정조와는 달리 천주교를 강경하게 탄압하였으며 급기야는 1801년 음력 1월 10일, 사학(邪學, 천주교)의 엄금을 하교하여 세계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큰 교회박해인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켰다.

아래는 1801년 음력 1월 10일, 천주교 엄금에 관해 정순왕후가 하교한 내용이다.

“선왕(先王)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치성(熾盛)해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와 수령은 자세히 효유하여 사학을 하는 자들로 하여금 번연히 깨우쳐 마음을 돌이켜 개혁하게 하고, 사학을 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징계하여 우리 선왕께서 위육(位育)하시는 풍성한 공렬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개전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 종사(從事)할 것이다.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劓罰)을 시행하여 진멸함으로써 유종(遺種)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이 하교를 가지고 묘당(廟堂)에서는 거듭 밝혀서 경외(京外)에 지위(知委)하도록 하라.”

이러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정책은 천주교를 묵인하던 정조의 천주교 해법론을 오히려 천주교를 확산시키는 무능한 해법으로 규정하여 정조의 천주교 해법론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정적인 남인과 시파(時派)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숙청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 출신인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과 이승훈이 처형되었으며 이미 배교한 이가환도 장살당하였으며 정약용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신유박해 이후 정약현(丁若鉉, 정약용의 맏형)의 사위인 황사영(黃嗣永)에 의해 황사영 백서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탄압은 더욱 거세어졌다.

 

그러나 상기의 <명의록>이나 <행장록> 등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정순왕후와 정조 간에 골이 깊은 앙금이 없다고는 볼 수가 없다.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 간의 대립이라던가, 그녀의 친정 오라버니인 김귀주를 유배보내는 등 혈족을 처단한는데도 아무런 감정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순왕후가 정조 사후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 대에 실시하던 대부분의 개혁 정책을 폐기하고 정적이었던 시피를 포함하여 남인들과 실학파를 위시한 정조의 개혁 정책 주도하던 세력을 대부분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처형하거나 유배보내는 등 숙청하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서로 간에 깊은 앙금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은 조선의 역사를 되돌려 놓은 일대 전환점이 되었으며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고 말았다고 판단된다.  

 

 

가족관계

  • 할아버지 : 김선경(金選慶)
  • 아버지 :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
  • 어머니 : 원풍부부인(原豊府夫人) 원씨(元氏)
    • 오빠 : 김귀주(金龜柱)
  • 숙부 : 김한기(金漢耆)
  • 시아버지 : 조선 19대 국왕 숙종
  • (법적) 시어머니 : 인원왕후
  • (실제) 시어머니 : 숙빈 최씨
  • 시숙 : 조선 20대 국왕 경종
  • 남편 : 조선 21대 국왕 영조(英祖)
  • (재종숙 : 7촌 아저씨) 김한신 - 영조의 부마, 화순옹주의 남편
  • (종숙) 김한록
    • (6촌 오빠) 김관주(金觀柱)
  • (일족) 김흥경(金興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