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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10 : 조선의 역사 352 (제22대 정조실록 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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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10 : 조선의 역사 352 (제22대 정조실록 18)

두바퀴인생 2012. 12. 25. 04:04

 

 

 

한국의 역사 810 : 조선의 역사 352 (제22대 정조실록 18)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제 22대 정조실록(1752~1800년, 재위 :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5. 정조 시대의 평가(계속)

  

 

새로운 신도시를 꿈꾼 정조 

 

정조대왕, 새로운 신도시를 꿈꾸다.
조선제 22대 임금 정조대왕은 4대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성군으로 손꼽힌다. 18세기 정조대왕에 의해 축조된 화성은 그의 애절한 효심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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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3호인 화성(華城)은 당쟁의 회오리 속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사도세자를 아들인 정조대왕이 수원의 화산(華山)으로 옮긴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당쟁으로 인해 28세의 나이로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 죽고 만다. 정조는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이를 슬퍼해 왔다.

훗날 조부 영조 뒤를 이어 즉위하자 그는 부친의 고혼을 위로하기 위해 양주 땅 배봉산에 묻혀있던 아버지의 유해를 수원 남쪽 화산으로 천봉하였다. 그리고 묘를 옮긴 5년 후에 성곽을 축성하게 된다. 정조가 신도시 화성을 세운 명분 중의 하나가 바로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의 보호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곳을 자신이 이상으로 꿈꾸는 신도시로 건설하고자, 당시 정조는 ‘아버지의 묘가 여기(수원) 있으니, 내가 왕에서 물러난 후에 이곳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러한 명분과 함께 정조는 화성을 기반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반대했던 노론세력을 누른 다음, 정치개혁을 이루려고 했던 야망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했다.

당시 정약용이 설계하고 벽돌과 거중기를 사용한 점 등은 과학과 건축, 예술을 통틀어 우리나라 성곽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세기 후반 들어서 전 세계적으로 신도시 건설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열풍이 불기 훨씬 전인 150여 년 전, 이미 우리나라에 계획적으로 세워진 신도시가 있었으니, 바로 수원 화성이다.  세계 최초이자 최고의 계획된 신도시, 수원 화성. 화성은 조선후기 성곽 건축의 최대 걸작품으로도 손꼽히고 있다. 당시 화성 축조에는 정조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담겨있다고 하는데...  정조대왕이 꿈꾸던 새로운 신도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나라 성곽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
‘기초를 튼튼하게 하라, 서둘러서 짓지 마라, 화려하게 만들지 마라’정조가 화성을 축조하면서 명령한 것이 크게 이 3가지로 요약된다.
화성의 축성에는 부친에 대한 효성이 밑바탕으로 깔려있지만, 정조의 마음은 새로운 사회의 변화를 꾀하면서 새로운 신도시 건설에 대한 야망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이 새로운 터전에 고을을 만들고 주민을 이주시켜 상업 활동을 적극 권장 하는 등 경제력을 갖춘 신도시를 건설하려는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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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화홍문]


정조 자신이 신도시 수원에 내걸었던 '호호부실, 인인화락’이라는 말처럼 집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립은 결국 수도를 보위하면서 국가 재정에도 보탬이 되는 도시의 기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즉, 정조는 이곳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어, 구세력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양과는 별도의 터전에서 신진세력들을 중심으로 개혁적인 정치를 펴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하게 된다.

그런데 수원 화성이 완성되고 나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49세의 한창 나이에 정조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조 24년, 1800년) 그가 꿈꾸었던 신도시가 제대로 피워보지 못할 때, 맞이한 정조의 죽음은 아쉬움이 남는다.

 

 

하나의 거대한 성(城)처럼 만들어진 신도시
화성(華城)은 정조의 명으로 조성된 신도시의 이름이자, 도시 외곽을 둘러싼 성곽의 호칭이다. 이처럼 현재 수원은 하나의 거대한 성처럼 도시가 형성돼 있다. 수원에는 동서남북 방향에 4개의 성문이 있으며 서울을 향한 북문이 장안(長安)문, 반대 방향의 남문이 팔달(八達)문, 그리고 동서에 각각 창룡(蒼龍)문과 화서(華西)문이 있다. 이 가운데 장안문과 팔달문은 수원성의 남북 대문을 하는 구실을 하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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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장안문]


장안문은 서울을 향하여 북향하고 서 있으며, 장안문과 반대 방향에 남향하여 서 있는 팔달문은 규모나 형태가 장안문과 동일하다. 성 주변의 사방을 조망하면서 장병들을 지휘하는 곳으로 서장대와 동장대가 있다. 특히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는데, 성의 안팎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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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장대]


서울에서 1~2시간 거리에 있는 수원은 교통도 무척 편리해 하루 탐방 코스로 다녀오기 좋다. 이번 방학, 수원 화성을 찾아 정조대왕의 꿈꾸었던 신도시의 면모도 살펴보고, 효의 정신도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정조대왕의 얼

 

 1. 정조는 지극한 효자

 정조는 어릴적 부터 책을 좋아하여 백일이 되기 전에 글을 보면 매우 기뻐하였다. 글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하여 사도세자는 직접 글을 써서 책을 만들어주었다. 어린 정조는 사도세자가 만들어준 책을 항상 옆구리에 끼고 다녀 종이가 모두 헤질 정도였다.


또한 어린시절부터 효심이 깊어 효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효자도〉, 〈성적도〉등을 보기를 좋아하였고, 그러한 효자들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였다. 


 정조대왕의 효심은 어린 시절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가 6~7살 겨울에 영조대왕이 병에 걸려 누워있을 때 정조대왕은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여 가슴아파하면서 병구완을 하고 하루종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조대왕은 할아버지인 영조와 어머님 혜경궁 홍씨가 병환이 생길 때 내의원의 의원들에게 치료를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의학을 공부하여 치료를 하였다. 이런 의술로 인해 정조대왕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의사라고 평가받는 허준이 저술한 『동의보감』 다음으로 평가받는 『수민묘전』이라는 의학서를 편찬할 정도였다.
 특히 어머님 혜경궁이 종기에 걸리면 종기에서 나오는 고름을 자신의 입으로 빨아내기도 하였다. 어머님이 편찮으시면 몇날 며칠을 잠도 주무시지 않으시고 곁에서 병간호를 하였다. 본인이 국왕이면서도 어머님에 대해서는 자식으로 효도를 다한 것이다.

훗날 아버님의 묘소를 양주의 배봉산(지금의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에서 수원으로 옮긴 이유도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 사도세자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땅으로 모시고자 하는 효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수원에 화성을 쌓은 이유중의 하나가 어머님 혜경궁이 70세가 되면 정조대왕 스스로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수원으로 내려와서 어머님을 편하게 모시려고 하셨던 것이다.


2. 정조의 위민정신

○ 정조의 위민정치사상
 정조가 추진한 개혁정책 중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이 서얼허통정책이다. 정조는 재위 2년 6월의 ‘경장대고’에서 개혁의 대의를 잘 드러내었다. “백성을 위하고” “백성들과 함께 은택을 누린다”는 위민정치론(爲民政治論)이 그것이다. 정조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하늘이 임금을 만들고 스승을 만든 이유는 백성을 위해서이며,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라고 한 말에서도 그의 위민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 서얼허통정책
 정조는 1777년(정조 1) 3월에 “필부(匹夫)가 원통함을 품어도 하늘의 화기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인데 하물며 허다한 서류(庶流)들의 원통함을 이대로 방치시킬 수 있겠는가”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서류 중에서 “뛰어난 재주를 지닌 선비”와 “나라에 쓰임이 될 만한 사람”을 임용하라는 “서류허통절목(庶流許通節目)”을 공표하였다

○ 신해통공
 정조는 시전상인들이 독점적으로 장사할 수 있는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혁파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할 수 있게 하여 경제활성화를 추진하였다. 이를 신해통공이라고 한다.

○ 자휼전칙
 정조는 즉위하면서 가뭄과 홍수 그리고 전염병을 통해 버려진 어린이들을 국가가 책임지고 기르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이를 자휼전칙이라고 한다.이전의 유기아나 행걸아의 구휼법령들에 비해 국가의 책임영역확대를 큰 특징으로 하고 있다. 자휼전칙은 조정에서 흉년을 당하여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걸식하거나 버림받아 굶주림으로 이들이 부모나 친척 등 의지할 곳을 찾을 때까지 구호하고 또 자녀나 심부름꾼이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양하게 하였다.

○ 흠휼전칙
 정조시대 형률완화정책으로 추진한 흠휼전칙(欽恤典則)은 정조의 위민정책중에서 형벌의 남용을 방비하여 악형에 의한 백성들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줄여주고자 했던 매우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3. 화성의 우수성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조선후기 문예부흥의 상징이자 정조시대 개혁정치의 산물이다. 정조는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기반도시로서 화성을 축성하였다. 더불어 조선시대 모든 문화적 역량을 동원하여 변화의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 화성을 건설하였다. 

 

정조는 모든 백성들을 평등한 신분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개혁정책을 펼쳤고 이를 완전하게 실현하기 위한 공간으로 화성을 축성한 것이다. 다시 이야기해 자신의 정치적 행위 공간을 서울의 창덕궁이나 경희궁이 아닌 화성의 화성행궁에서 추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조에게 서울은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정조는 자신이 새로 조성한 신도시 수원에서 상왕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호위하기 위한 성곽이 필요했고 이 성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보완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가 설계하고 마찬가지로 최고의 기술자들이 축성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화성에는 조선, 중국, 일본의 성곽 장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동서양의 모든 문화를 수용하여 그것을 조선화하고자 했던 정조와 당대 학자들의 포용력이 보여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남의 것을 배척하지 않는 열린 마음이 화성에서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식 건물인 듯 하면서도 조선식이요, 일본식 성벽인 듯 하면서도 조선식인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정조시대에 우리 산천을 고민하고 우리 민족의 삶을 고민하는 진경문화가 나타난 것이 우연이 아니고 조선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조선중화주의가 나타난 것이 바로 이러한 사상에 대한 포용과 관용 때문이었다. 이러한 포용정신은 화성 축성에 참여한 수많은 이들의 신분이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밑으로는 승려와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계층들이 망라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화성 축성에 참여한 이들은 신심으로 가지고 화성 축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그 결과 10년 예상의 공역이 3년이 채 안돼 마무리된 것이었다. 

 

또한 화성에는 당대 최고의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비롯한 왕실의 최고급 문화가 살아 숨쉬는 문화의 땅이다. 아울러 낙성연에서 보여주듯이 왕실문화와 산대희를 비롯한 평민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상하동락(上下同樂) 땅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조선 역사상 국왕이 직접 백성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쌀과 죽을 나누어준 민본주의의 산실이기도 하다.


4. 무예24기

 무예24기는 1790년(정조 14) 정조의 명령에 의해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24가지의 무예를 말한다. 정조는 조선의 군사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사도세자에 의해 정리된 18가지 무예와 마상무예6가지를 합하여 무예24기를 만들었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가 직접 편찬의 방향을 잡은 후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 ·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 백동수 등에게 명령하여 작업하게 하였으며 1790년(정조 14)에 간행되었다. 앞머리에 정조의 서문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이래 전투 기술의 대강과 한교 등 이 책의 바탕을 마련한 사람들의 간단한 전기와 관계 사실들, 인용서목 등을 담았다. 본문의 권1에는 장창 · 죽장창 · 기창(旗槍) · 당파 · 기창(騎槍) · 낭선, 권2에 쌍수도 · 예도 · 왜검, 권3에 제독검 · 본국검 · 쌍검 · 마상쌍검 · 월도 · 마상월도 · 협도 및 등패의 요도와 표창, 권4에 권법 · 곤봉 · 편곤 · 마상편곤 · 격구 · 마상재 등 총 24가지의 기술이 수록되어 있다.

 
무예24기는 무과 과거시험으로 선정되어 조선의 무사들은 반드시 익혀야 했다. 특히 수원에 설치되었던 장용외영의 군사들은 모두 이 무예를 익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