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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8 : 조선의 역사 350 (제22대 정조실록 16) 본문
한국의 역사 808 : 조선의 역사 350 (제22대 정조실록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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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팔달문
제 22대 정조실록(1752~1800년, 재위 :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아래는 정조 시대를 풍미한 시대의 풍운아 홍국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드라마 이산에서도 보았듯이 홍국영은 정조가 동궁 시절부터 갖가지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였으나 홍국영의 영민함과 기지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정조도 홍국영의 보좌없이 왕위에 오르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영조의 강서 사건이나 노론측의 집요한 동궁 대리청정 방해공작을 무력화시킨 데는 홍국영의 기지가 절대적 역활을 한 것도 사실이다. 또 자객이 침투하여 정조의 목숨을 위협하였으나 홍국영의 사전대비로 막아낸 것 등 정조의 목숨을 지켜낸 최측근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정조 즉위 후 바로 최측근인 비서실장인 동부승지에 이어 도승지, 왕궁 호위부대인 숙위소를 만들어 대장에 임명되어 정조가 왕권을 공고히 할 때 까지 줄곧 정조의 최측근에서 왕을 보좌한 것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무소불위의 권력은 정조가 만들어 준 것이며 정조는 홍국영을 이용하여 노론측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각종 위협을 차단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면서 정조는 모든 시선이 홍국영에게 쏠려 있는 틈을 이용하여 규장각을 만들어 그의 문화정치를 실행하기 위한 근왕 세력을 양성하였고 측근 세력을 만들어 왕권을 공고히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홍국영의 세력은 도가 지나칠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는데, 그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는 한편 그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게 되자 조정의 주요 보직은 물론 팔도의 감사나 수령, 관리들까지도 홍국영에게 줄을 대기 위해서 갖가지 권력형 비리가 확산되었고 이는 조정은 물론 정조의 왕권에 대한 불안감까지 증폭시킨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관리들이 그의 말에 다라 움직였으므로 이를 두고 생겨난 말이 이른바 '세도(勢道)'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무소물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그가 결국 제거된 것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드라마나 야사를 통해 전해진 이야기는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그의 누이동생 원빈이 입궁한 지 얼마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라서 정조는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홍국영은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원빈의 죽음을 독살로 생각하고 그 배후로 효의왕후를 의심하고 독살하려고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된 점, 완풍군을 인빈의 양자로 삼아 동궁으로 만드려했다는 설 등이다. 이러한 행위는 결국 정의 분노와 왕권에 대한 불안감을 야기하였고 각종 탄핵 상소를 통해 홍국영이 탄핵을 받자, 결국 그는 1780년 집권 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되었던 것이다.
정조는 그를 내친 것이 마음 아파했으며 그를 잊지 못하였고 홍국영 또한 정조의 부름을 기다리면서 울화의 세월을 보냈다가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매일 술을 마시다가 울화병으로 죽었다는 설, 노론측 셀겨이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하였다는 설 등이 전해진다. 드라마 이산에서는 정조가 죽음을 앞 둔 그의 유배지를 찿아가 마지막 그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정조의 애도 속에 그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진정 정조 시대를 풍미한 시대의 풍운아였다.
4. 정조 시대를 풍미환 세도정치가 홍국영
홍국영(洪國榮, 1748년 ~ 1781년 음력 4월 5일)은 조선 영조,정조대의 세도 정치가.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덕로(德老)이다. 세손궁의 궁료(宮僚)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얻고, 정조 즉위 후 부홍파(扶洪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세간에는 흔히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 축출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축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생애 초반
서울 풍산 홍씨들의 비조격인 홍이상의 8대손,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6대손으로서, 역시 영안위 후손인 혜경궁 홍씨와 11촌의 동문이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그의 아버지 홍낙춘에 대해 "광증이 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는 대개 홍낙춘이 주류에 속하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조부 홍창한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고 백부인 홍낙순은 대과에 급제했고 숙부인 홍낙빈도 진사였으나, 홍낙춘은 원빈이 후궁이 되기 전에는 관직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홍국영은 도성의 경화사족 집단의 일부로서 그의 고조 홍중해는 인현왕후의 고종사촌이었고, 당대에도 정순왕후 김씨 외 이익보, 이정보, 홍계능, 조중회, 김이도 등과도 인척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예쁘장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며 시문을 잘 짓고 창을 부르기 좋아하였다 한다.
동궁 궁료 시절
1772년 9월 정시(庭試: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 로 급제하였다. 대과에 급제하고도 6개월간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계속해서 이 해 4월 정민시와 함께 한림소시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봉직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에서는 그가 사관으로 봉직할 당시 영조가 홍국영을 "내 손자"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쓰고 있다. 이듬해인 1774년 3월에는 동궁시강원 설서(說書)로 임명된다. 세간에 홍국영이 과거 급제와 동시에 설서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많이 퍼져있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정조와는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 당시 궁료들이 서연에서 아뢴 말들을 모아 《현각법어》(賢閣法語) 라는 책을 펴냈는데, 실제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홍국영의 언행이라고 한다. 《명의록》 등은 이 시기 홍국영이 "세손의 오른날개(右翼)"라고 불렸다고 적고 있다.
집권기
정조의 오른 날개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정적이었던 홍인한, 정후겸 일당을 숙청했다. 이어 당론서인 《명의록》을 펴내 이 조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홍보했다. 흔히 홍인한-정후겸이 정조의 즉위를 막았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으나 이는 와전된 내용이고, 이 책에서 밝힌 공식적인 죄명은 첫째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은 것과 둘째 세손의 오른날개, 즉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책에서 정조는 홍국영을 '의리의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신의 즉위과정을 도운 1등공신(소위 동덕회원同德會員)이자 최측신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정조1년(1777년) 홍상간, 홍계능 등이 모의하여 경희궁에 자객을 침투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을 처분하면서 다시 공초 내용을 《속명의록》에 수록하여 편찬하였다. 속명의록의 죄인들 역시 홍국영을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집안의 여인들까지도 홍국영의 저주에 동원되었을 정도였다.
집권기 활동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 3일 만에 그를 전격적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했다. 이어 7월에는 승정원 최고직인 도승지로 승진시킨다. 이후 그는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거의 줄곧 도승지직을 맡았으며(원빈 사후 약 2개월 동안 물러났던 적이 있었음) 이 당시 도승지의 별칭인 "지신사"는 곧 홍국영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문관으로는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홍문관 제학, 규장각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의 역임했다. 군문의 장임으로는 정조 즉위년 11월 수어사에 임명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잠시 총융사를 거쳐 1777년 5월에는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개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을 돌아가며 맡았다.(그러나 훈척만이 맡을 수 있는 호위대장에 임명된 적은 없다.)
1777년(정조1년) 7월, 전술한 홍상간, 홍계능의 궁궐자객침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사건 연루자에 호위청의 무사가 포함되어 있었던 이유로 호위청을 축소하였는데, 대신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홍국영을 그 대장에 임명 하였다. 정조는 숙위대장에게 특별히 대장패와 전령패를 차게 하며, 안으로 위장, 부장, 금군과 도감의 군병, 각문의 수문장ㆍ국별장과 밖으로 궁궐 담장 바깥에 삼군영의 입직하는 순라까지 매일 숙위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이런 보직들은 대개 겸직이었으며 그의 대표적인 보직은 도승지와 훈련대장/숙위대장, 약원부제조였다. 그외 각종 제거 역시 다수 겸직하였으며 잡류 제거직으로 인한 격무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록도 종종 보인다.
정조 초기의 가장 주요한 사업이라면 규장각 설치가 꼽히는데, 정조의 최측신이었던 홍국영 역시 규장각과 관련이 깊다. 그는 제일 처음으로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된 관료였으며, 유명한 규장각 서얼 사검서관의 서용 역시 홍국영의 천거와 설득으로 이뤄졌다. 다만 홍국영 축출 후 규장각 내각일기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삭제하여 새로 작성하게 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홍국영이 규장각에서 실제 이행했던 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외척
1778년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가 정조의 후궁이 된다. 이때 원빈 홍씨의 지위는 유례 없는 것이었다. 후일 이 모든 이례적인 처사는 모두 홍국영의 세도로 인해 일어난 일이란 식으로 설명되게 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홍국영이 자교(이 경우 후궁 간택령)를 내리게 했다"라고 쓰고 있다. 《한중록》에서는 이어 원빈의 입궁에 대해, 홍국영이 세도를 탐내어 제 누이를 들여보낸 것으로 자신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란 식으로 기록했다. 그간 이런 내용이 정설을 이뤘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정조)어제인숙원빈행장》(정조가 원빈 사후 작성한 원빈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글)에서는 혜경궁 자신의 진술과는 반대로 혜경궁이 원빈 생전 그녀를 총애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혜경궁 사후 간행된 혜경궁 자신의 행장(김조순 저)에는 원빈 사건 전후로 혜경궁과 효의왕후가 반목했던 사실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따라서 기존의 설들로는 당시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으나, 현재로선 이와 같은 자료를 취합하여 당시 상황을 추적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元嬪 洪氏)는 가례를 올린 지 1년이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한중록》에는 홍국영이 원빈의 죽음을 독살로 여기고 그 배후로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왕비의 나인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는 내용을 전하며 그 죄를 성토하는 대목이 있다.
원빈 사망 당일 정조는 자신의 서제 은언군 아들 완풍군을 원빈의 수원관으로 삼았다. 후일 홍국영이 이 완풍군을 "내 조카"라고 부르며 그를 통해 대계를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기록에 일관성이 없어 완전히 신뢰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 완풍군(完豊君) 준(濬)은 홍국영의 몰락 후, 상계군(常溪君) 담(湛)으로 개명(改名) 개봉(改封)되며 왕실 세력들의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 5년 후인 정조10년(1786년)에 생을 마감했다.
몰락과 죽음
은퇴와 방출
1779년 음력 9월 26일 홍국영은 자신이 맡고 있던 모든 조정의 실직(實職)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담은 은퇴 상소를 올렸으며, 정조는 당일 이를 수락한다. 이때 정조는 불과 32세의 홍국영에게 봉조하 직함을 내려주는데, 일찍이 백발의 봉조하는 있어도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있게 되었다고 하여 그는 “흑두봉조하”라고 불리게 된다. 《한중록》과 《정종대왕행장》 등 사후적인 기록에서는 공통적으로 홍국영이 자진 사퇴의 형식으로 물러난 것 자체가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어 정설로 통하나, 이와 같이 사퇴시킨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정조는 홍국영을 퇴진시키고 숙위소를 혁파시켰으나 동시에 그의 백부 홍낙순(洪樂純)을 정승에 임명했다. 따라서 한동안 그의 세력은 조정에 계속 건재했으며 그 자신도 계속 궁중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월에 홍국영의 당여들이 서명응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다가 반대로 조정에서 축출 당한다. 1780년 1월에는 홍낙순이 파직과 문외출송되고, 다음달 26일 김종수의 탄핵상소가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그는 방출 처분을 받았다. 김종수의 탄핵 상소를 시작으로 하여 홍국영에 관한 탄핵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한중록》은 김종수의 상소 역시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처음에는 강원도 횡성, 그 다음에는 강릉으로 방출되었던 홍국영은 결국 이듬해인 1781년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몰락 이유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서는 각종 설만 난무할 뿐,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탄핵의 포문을 연 김종수의 상소에서 언급된 공식적인 탄핵 사유는 '후궁 간택을 막았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원빈의 수원관)완풍군을 정조의 양자로 들여 동궁으로 삼으려 했다는 가동궁 사건설도 몇몇 군데에서 언급된다. 정조7년 문양해 반란사건 당시 '왕비의 목숨을 위협했다'라는 기록도 있고,《정종대왕묘지문》에는 홍국영이 은전군 찬을 죽게해서 몰락했다고 정조가 원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속설 중에 홍국영이 완풍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거나, 효의왕후 김씨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 발각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20세기에나 등장한 야사로 짐작된다.
사후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는 홍국영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묘소가 있었다고 한다. 1977년 발간된 《전국문화재총람》에는 〈강릉 전 홍국영묘〉라는 제목으로 홍국영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묘소가 설명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묘소의 넓이는 약 50평, 크기는 약 1미터 정도로 추정했으며, 1972년 후손들이 발견하였으나 아무런 유물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뒤에 강릉 종합 운동장으로 개발되었으며 지금은 홍국영 묘소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묘소 인근에는 홍국영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옥이 전하는데, 명확하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는 아직 없다.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홍창한(洪昌漢)
- 아버지 : 홍낙춘
- 누이 : 원빈 홍씨
- 매제 : 정조
정조시대의 세도가 '홍국영'
‘천하 모든 일이 내 손아귀에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
조선의 영조,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 제법 많았다. 붕당(朋黨) 정치의 물고 물리는 권력 다툼 속에 탕평책이 펼쳐지는가 하면 사도세자의 비극적 최후가 있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노력과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재들이 있었으며, 문화적 중흥의 기운도 있었다. 이 시대 정치 무대에서 짧지만 크게 활약한 인물로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이 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대부분에서 그는 정조를 보필하여 개혁을 추진한 인물, 뛰어난 지략으로 정치판을 새롭게 짠 인물 등으로 꽤 비중 있게 등장한다.
그런 홍국영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평가, 특히 그가 출세하기 전 시절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을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심낙수의 [은파산고]에 따르면, 홍국영은 용모가 준수하고 눈치가 빠르며 수완이 좋아 임기응변에 능했다. 자신이 글을 잘한다고 자부했으며, 실제로도 글에 재치가 있고 예리하면서도 자연스럽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격이 방종하여 술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모여 놀거나 얘기하기를 즐기고, 장기와 같은 잡기를 좋아했으며 시조와 창에도 능했다. 이 때문에 집안 어른들이 그를 질책할 때가 많았고, 명문가에서는 홍국영과 교유하려 하지 않았다 한다.
정치적 친소 관계나 상황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는 크게 윤색되거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들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홍국영이 학문에 전념하고 행실도 착실한 ‘모범생’ 사대부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친구들에게 ‘천하 모든 일이 내 손아귀에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 장담하고 다녔다는 이야기에서, 그가 일찍부터 정치적 포부를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얼굴 잘 생기고 다방면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는 재기 넘치고 자유분방한 젊은이, 그러면서 미래에 대한 포부도 큰 청년’이었던 셈이다.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 - 정조의 두터운 신임
홍국영이 그렇게 자신감 넘칠 수 있었던 요인에는 가문 배경도 있었다. 본관이 풍산인 홍국영 가문은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서울에 깊이 뿌리 내린 가문이었다. 홍국영의 6대조 홍주원은 선조의 딸 정명공주의 남편, 즉 부마 영안위(永安尉)였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 정조의 외조)은 홍국영에게 10촌 할아버지가 되며, 정조와도 멀기는 하지만 12촌 관계가 된다. 또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8촌 관계인 경주 김씨 가문 김면주의 어머니가 홍국영의 당고모(5촌)였다. 집이 도성 바깥 서강에 있었던 홍국영은 과거를 보기 위해 도성에 들어왔을 때 김면주의 집에서 기숙했다.
홍국영이 1772년(영조 48) 25세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왕 가까이서 일하는 예문관원(사관)이 되고 동궁을 보좌하는 춘방사서가 된 것에는, 이러한 가문 배경의 영향도 있었다. 영조가 홍국영을 아끼며 ‘내 손자다’라고까지 했다는 것도 이런 배경에 힘입은 일이었다. 그러나 홍국영은 어떤 정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기 주변에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키우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로지 정조밖에 없었다. 정조의 뜻이 곧 자신의 뜻이며,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뜻이었다.
정조가 홍국영을 신임하게 된 까닭은 빠르고 정확한 정세 판단과 정치적 감각 외에, 당쟁에 물들지 않고 파벌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도 있었다. 또한 홍국영은 궁궐 바깥 세상의 실상을 정조에게 알려주는 역할에도 충실했다. 정조가 시중의 여론과 상황을 가감 없이 접할 수 있는 소통 창구가 바로 홍국영이었던 것. 홍국영은 정조의 기대와 신임에 부응하여 외척인 홍인한과 정후겸(정조의 고모 화완옹주의 양자) 세력에 맞서 정조의 대리청정을 성사시켰다. 즉위 뒤 정조는 홍국영을 자신을 충직하게 보호한 ‘의리주인’(義理主人)으로 일컬으며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권력을 휘두르며 스스로 외척이 된 홍국영
홍국영은 1776년 3월 정조가 즉위한 지 며칠 만에 국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측근 비서, 즉 승지에 임명되었고 몇 달 후에는 도승지(오늘날의 대통령실장)가 되었다. 정조는 또한 친위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궁궐에 설치한 숙위소(宿衛所)의 대장으로 홍국영을 임명하고 훈련대장, 금위대장 등도 맡게 했다. 궁 안에 머물면서 왕의 경호부대를 지휘하고 훈련대장으로 군권까지 장악했으니, 국정의 주요 사안은 홍국영을 거치지 않으면 정조에게 보고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여기서 생긴 말이 '세도(勢道)'이다. 정조는 즉위 직후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에 대한 두터운 신임을 거리낌 없이 밝혔다.
홍국영은 홍인한, 정후겸, 윤양후, 홍계능 등을 사도세자에 대해 불경했으며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죄를 물어 숙청했다. 정조의 외척 홍봉한 집안도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 제거했다. 정순왕대비의 친동생 김귀주도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무너뜨렸다. 외척 세력을 배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뜻을 실행하는 행동대장이 홍국영의 모습이었다. 그런 홍국영은 1778년(정조 2)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원빈(元嬪) 홍씨다.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로써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 되었다.
그러나 원빈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이듬해 5월 세상을 떠났다. 서인 세력 특히 노론은 국혼물실(國婚勿失), 즉 왕실과의 혼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정략적 원칙을 지켜왔는데, 홍국영은 이러한 정략을 따랐던 것이다. 원빈이 죽은 다음에도 홍국영의 야심은 그칠 줄 몰랐다. 홍국영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인 이담(李湛)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으로 봉하여, 정조의 후계로 삼고자 했다. ‘완’은 전주 이씨, ‘풍’은 풍산 홍씨의 본관을 뜻하는데, 왕실 작호에 어머니 쪽 본관을 쓴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파격이자 홍국영의 야심을 반영한 처사였다.
홍국영의 실각, 자진 은퇴 형식을 빌린 추방
1779년(정조 3)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에게 입조(入朝)를 명했다. 홍국영도 정조의 갑작스런 명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을 법하다. 이 날은 7년 전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 날이었다. 정조를 만나고 돌아온 홍국영은 곧바로 은퇴의 뜻을 밝히는 소를 올렸다. “저는 7년 간 국가 일을 맡았는데, 그간 조정의 명령 대부분이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 신이 한 번 궐문을 나가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 하늘이 신에게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 자진 은퇴 형식이었지만, 실은 정조의 명에 따른 추방이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직상소를 즉시 허락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전과 이후 천 년 동안 군주와 신하의 이러한 만남이 언제 있었던가, 그리고 또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으나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흑발의 봉조하가 있게 되었다.”
봉조하(奉朝賀)는 은퇴하는 원로대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직함이었다. 죄를 물어 벌주지 않고 자진 은퇴 형식을 취하게 한 것. 정조가 홍국영에게 내린 마지막 은혜였다면 은혜였을까. 외척 세력을 철저히 배격하고자 했던 정조로서는, 그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왕위계승에까지 개입하려는 홍국영을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홍국영은 자기 세력을 구축하여 노론의 핵심으로 자리 잡으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그러한 홍국영의 행태는 지난 날 외척 세력을 척결하는 데 앞장섰던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자 왕에 대한 배신이었으며, 탕평 노선을 추구하는 정치 방향과도 맞지 않았다. 그는 정조의 정치 구상과 행보에서 치워내야 할 걸림돌이 되어 버린 것이다.
홍국영의 쓸쓸하고 허무한 마지막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홍국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홍국영이 우대했던 노론 산림 인사 송덕상이 나서 홍국영의 은퇴를 방관한 대신들을 비난했지만, 송덕상은 나중에 역적으로 몰려 제거되었다. 홍국영을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사들은 크게 득세한 반면, 홍국영의 은퇴에 대해 동정하거나 불분명한 태도를 취한 인사들은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홍국영 자신도 결국 도성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는 벌을 받고 재산도 몰수당했다.
이후 홍국영은 이곳저곳 방황하며 좀처럼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강릉 근처 바닷가에 거처를 마련해 술 마시는 것으로 소일하며 때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기도 하면서 울분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고 지낸 지 몇 달이 지난 1781년 4월, 홍국영은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병을 얻어 앓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울화병이었으리란 추측이 많다. 또는 노론측에서 그를 암살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는 29살 때부터 32살 때까지 약 3년 간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력을 누린 홍국영의 최후는 이렇게 쓸쓸하고 허무했다. 드라마에서 정조는 홍국영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다해 노력해주었던 그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정조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 거침없이 반대 세력을 제거할 때까지는 중용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세도가가 되어 왕위계승에까지 개입하려다가 철저한 척결 대상으로 급전직하하고 말았다. 홍국영은 자기 자신의 권력욕에 희생된 많은 권력자들의 전철을 밟았다. 정치와 권력의 무상함, 권력자의 처신, 왕과 신하의 관계 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삶이 아닐 수 없다. [영조와 정조의 나라](박광용 지음, 푸른역사)에서 영조와 정조 시대의 정치 상황과 붕당 관계, 다양한 인물들의 부침(浮沈) 등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
※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빈인 혜경궁 홍씨를 비롯하여 그녀의 부친인 홍봉한, 숙부 홍인한 등과 정조의 신임을 깊게 받아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국영, 나중에 외손인 정조를 암살하고자 했던 홍씨 일가들, 정조시대에 그 유명했던 풍산홍씨(豊山洪氏)..........풍산 홍씨의 시조 홍지경은 고려시대. 1242년(고종 29)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지냈다. 그가 경상도 안동 풍산(豊山)에 정착하여 세거하였으므로 풍산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시조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신성포 오산당에 있다.
정조와 홍국영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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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이산>에서 홍국영과 만난 세손 이산. | |
ⓒ M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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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에서는 홍국영과 이산의 만남이 홍국영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되었다. 정후겸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홍국영이 여러 날 동안의 저울질 끝에 결국 '잘 나가는' 정후겸 대신 '인기 없는' 이산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후 홍국영은 기민한 판단과 대담한 행동으로 세손의 기반을 굳히며 반대파들의 입지를 축소시켜 나간다. 정후겸은 "저 자를 내 편으로 만들든가 죽이든가 했어야 한다"며 이따금씩 아쉬워한다.
드라마 <이산>에 나오는 홍국영의 이미지는 역사 속의 홍국영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 같다. 외모도 그렇고 지능도 그렇고 언변도 그러하다. 외모 하나만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영조 48년(1772) 9월 21일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과거 합격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시력이 나쁜 영조가 "(홍국영의) 용모는 어떠하냐?"고 묻자 승지는 "매우 준수합니다"(甚精矣)라고 대답했다.
머리 좋고 책은 적당히 읽고 입은 좀 투박하고, 약간은 경망스러우면서도 외모만큼은 말끔한 홍국영의 이미지가 드라마에서도 비교적 잘 표현되고 있는 듯하다. 그에 비해 현재까지의 드라마 방영분을 보아서는, 그의 든든한 집안 배경이나 끝없는 욕심 등은 자연스레 표현되고 있지 않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이 드라마에서 극적 효과에만 치중한 나머지 홍국영과 이산의 처음 만남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홍국영이 어떻게 세손 이산을 보좌하게 되었는지, 세손 이산은 어떻게 그런 '재주꾼'을 측근에 두게 되었는지가 충분히 소개되지 않았다.
정조와 홍국영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둘의 처음 만남은, 어찌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지만, 이후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몇 년 안 가서 파탄 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어쩌면 처음 만남에서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만큼은 극적 효과에 치중하기보다는 사실관계에 비중을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홍국영과 정조의 만남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드라마 <이산>에서 세손을 열렬히 사랑하는 홍국영의 이미지를 본 시청자들은 정조가 즉위 이후 얼마 안 가서 홍국영을 내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을 실컷 이용하다가 '단물'만 빼먹고 팽(烹)하는 권력가라고 정조 이산을 오해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의 만남에 대해서만큼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홍국영과 이산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은 비교적 수월하게 도출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예문관 사관(史官)에 임명된 홍국영이 세손을 보좌하는 세자시강원 설서까지 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처럼 홍국영이 정후겸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이산을 선택하는 대단한 결단을 내린 것은 아니다. 과거에 합격한 지 얼마 안 되는 홍국영에게 세자시강원 설서도 겸하라는 임명장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 둘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조실록>을 보면, 국왕 영조가 사관 홍국영을 측근에 두고서 가깝게 대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홍국영은 관계에 진출하자마자 국왕과 세손을 함께 보좌하는 행운을 얻었다. <이산>에서는 영조가 세손의 추천을 받아 홍국영을 은밀히 만나게 되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영조와 홍국영이 먼저 만나고 그 다음에 세손과 홍국영이 만난 것이다. 이 시점은 이산이 등극하기 4년 전이었다.
과거에 장원 급제한 것도 아니고 11등으로 합격한 홍국영이 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행운을 얻게 되었을까? 단순히 말을 잘해서일까? 그저 머리가 좋아서일까? 홍국영의 집안 배경을 살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이산>에 자주 등장하는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의 성씨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홍국영은 풍산 홍씨라는 유력한 문벌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경주 김씨인 어머니 쪽도 정순왕후와 이렇게 저렇게 연결된 문벌 가문이었다. 또 홍국영은 영·정조와도 인척관계였다. 특히 정조와는 12촌 인척관계였다.
홍국영, 집안 배경이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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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에서 시니컬한 홍국영으로 분한 한상진. | |
ⓒ M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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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이 집권 외척 세력은 물론 국왕 및 세손과도 인척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그렇게 빨리 국왕·세손의 측근이 된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든든한 집안 배경이 그의 출세에 가장 결정적 기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산의 등극 4년 전에 과거에 합격하고 또 세자시강원에 배치된 것은 홍국영으로서는 그 시점으로 보아도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홍국영이 이산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또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만난 것도 아니다. 왕실과 이러저러하게 얽힌 홍국영의 든든한 배경이 두 사람의 만남을 가능케 한 가장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이다.
드라마에서와는 달리 두 사람의 만남은 이렇게 상당히 싱거운 편이었다. 홍국영이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서 빈약한 세손을 선택했다거나 혹은 세손을 보좌하다가 한때는 똥지게까지 지게 되었다는 것은 드라마의 재미를 돋우기 위한 극적 장치에 불과할 뿐이다. 아무튼 두 사람의 처음 만남은 드라마와는 달리 그렇게 싱거웠다.
이걸로 끝인가? 두 사람의 만남이 의외로 싱거웠다는 것으로 이 글은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의 만남이 싱거웠다는 사실로부터 중요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두 사람의 만남은 두 사람의 이별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둘의 만남이 홍국영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은, 홍국영이 처음부터 어떤 원대한 정치적 이상을 품고 세손에게 접근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집안 배경이 좋은 홍국영은 세손을 보좌하라는 임명장을 받았고, 좋은 머리를 바탕으로 이산의 등극을 도왔지만 결국에는 자기 세력의 확대만을 추구하다가 얼마 안 가서 정조의 버림을 받고 말았다.
드라마에서처럼 홍국영이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이산에게 접근한 것이라면, 정조 등극 3년만인 1779년에 허망하게 주군의 버림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은 배경에 힘입어 권력에 접근한 홍국영은 자신을 키워준 그 배경을 위해서만 열심히 일하다가 정조의 버림을 받고 만 것이다. 이는 그에게 별다른 정치적 이상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홍국영이 정조의 버림을 받은 이유
정조가 즉위한 지 얼마 안 가서 홍국영이 정조의 국정운영(특히 탕평책)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은, 홍국영이 애초부터 정조의 국정 비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홍국영이 단순한 권력욕을 떠나서 보다 더 원대한 포부를 품었다면, 그 좋은 머리로 정조의 정치적 포부를 얼마든지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정조도 자기처럼 권력에만 연연하는 사람인 줄로 착각했는지 모른다. '책을 대충대충 읽는다' 혹은 '경망스러웠다'는 평가처럼, 그는 사물의 본질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해해버리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식으로 정조를 대충 이해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정조와의 만남이 '준비된 만남'이 아니라 그저 '우연적인 만남'이었기에, 홍국영에게는 정조의 꿈과 고뇌를 이해할 만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홍국영과 이산의 만남이 그처럼 싱거운 만남이었기에, 그들의 만남은 얼마 안 가서 그렇게 쉽게 파탄에 이르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시대의 풍운아 홍국영, 세도, 하늘을 찌르다
홍국영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곤룡포는 정조가 입고 임금 노릇은 홍국영이 하는 것 같다. 조선 팔도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집중되고 있다. 하는 짓이 오죽 위험천만했으면, ‘가상의 악당’ 장태우마저 하도 기가 차서 정조에게 그의 난행을 고해 바쳤을까?
드라마 <이산>은 홍국영에 대해 그나마 호의적인 편이다. 정조 즉위 이후 홍국영이 자행한 온갖 일들만 다루어도, <주몽>이나 <태왕사신기> 못지않게 아주 재미있는 국민 드라마가 나올지 모른다. 그런 드라마에서 배울 것이라곤 딱 하나다. 권력 잡은 뒤에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조 등극 이후의 불과 몇 년 동안 홍국영이 저지른 ‘작태’. 작태, 좀 심한 표현이지만, 아래 내용을 읽다 보면 그 표현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그 ‘작태’ 중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청와대 바로 옆에 '청와대 분점'을 내다
정조 등극 후에 일약 제2인자의 반열에 오른 홍국영. 도승지와 숙위대장을 겸한 그는 모든 군국(軍國) 기무를 자기 손으로 직접 결정했다.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의 신분으로 말이다.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보다도 더 대단한 권세를 부렸다. 자기 손을 거치지 않으면 주요 국정이 집행되지 못하도록 했으니, 그를 ‘소통령’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조정의 삼정승·육판서는 물론이고 지방관들까지도 홍국영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의 말을 거역했다가는 어떤 재앙을 입을지 몰랐기 때문에 누구든지 홍국영 앞에서는 ‘일단 고개 숙여!’였다고 한다.
권력의 분점을 내용으로 하는 탕평정치에 심혈을 기울이는 자신의 주군을 외면한 채 자기가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를 열려고 했으니, 홍국영의 전횡을 지켜보던 그 몇 년 동안 정조 임금이 속으로 얼마나 참고 또 참았을까? 홍국영의 집무실이 정조의 거처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니, 청와대 바로 옆에 ‘청와대 분점’을 따로 낸 것과 뭐가 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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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 한국인들은 “중앙정보부 요원이 들을지 모르니, 입조심들 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도 사적인 대화에서 대(對)정부 비판을 조심하곤 했다.
정조 즉위 직후의 조선사회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까지도 사적인 대화에서 감히 홍국영을 들먹이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는 그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 대신 ‘지신사’(도승지의 별칭)라는 표현으로 홍국영을 가리킨 것이다. 그가 얼마나 횡포를 부렸으면 그런 현상이 생겼을까?
일반 백성들이 이야기하는 곳에 홍국영이 나타날 리 없는데도, 홍국영은 그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디든 존재하면서 온 백성을 감시하는 존재. 영어로 하면, 그는 유비쿼터스(ubiquitous)한 존재였다.
전주 이씨와 풍산 홍씨는 동격?
사도세자에게는 혜경궁 홍씨, 숙빈 임씨, 경빈 박씨라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다. 여기서 홍씨는 의소세자(어릴 때 요절)와 정조 이산을 낳았고, 임씨는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았다.
누이인 원빈 홍씨가 정조 3년(1779)에 사망하자, 홍국영은 은언군의 아들인 이담(정조의 조카)을 죽은 누이의 양자로 삼았다. 이담을 정조의 후계자로 삼아 자신의 세도를 연장하기 위한 장기적 포석이었다. 그런데 원빈의 양자가 된 이담에게 부여된 군호는 완풍군(完豊君)이었다. 완풍이란 군호는 홍국영의 작품이었다.
여기서 완풍이란 표현을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완’은 조선 왕실의 본관인 전주(완산주)를 가리키는 것이고, 풍은 홍국영의 본관인 풍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완풍이란 말이 전주 이씨와 풍산 홍씨를 동격에 놓는 ‘뼛골 오싹한’(<정조실록> 기록) 표현이었다고 한다. 주군의 가문과 자신의 가문을 동격에 둔 홍국영, 그는 걸어서 어디까지 가고자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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