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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7 : 조선의 역사 349 (제22대 정조실록 15) 본문
한국의 역사 807 : 조선의 역사 349 (제22대 정조실록 15)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제 22대 정조실록(1752~1800년, 재위 :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4. 노비의 신분상승 운동과 노비정책의 변화(계속)
노비의 경제적 성장
조선의 노비에게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는데, 재산이 많은 노비는 다른 노비를 부릴 수도 있었다. 이들 노비는 비록 신분은 주인이나 나라에 예속된 상태였지만 경제적으로 보다 자유로운 상태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상업의 진전과 농업 생산력의 증가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렸해진다. 이는 곧 노비의 신분이 점차 상승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노비의 경제적 성장으로 인한 독립노비의 수적 증가는 노비제의 붕괴 현상을 가져왔고 심지어 경제적 부를 획득한 노비는 자신의 노비문서를 돈으로 사들여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많아졌다. 또한 노비의 재산 역시 그 자손에게 상속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극히 일부지만 노비 중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가진 부자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조선 후기로 갈 수록 더욱 심화되어 갔다. 이는 조선 후기 인구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양반의 얼자녀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어머니가 천비 출신인 관계로 비록 노비 신분에 묶여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양반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재산을 상속받는 경우가 많아졌다. 따라서 노비 신분으로 부농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얼자였을 것이고, 이는 곧 다른 노비들을 부농으로 끌어올리는 역활을 하였다.
노비의 신분 상승
이러한 노비들의 재산 증식은 사회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는데, 조정의 노비정책에도 변화가 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영조대 이후부터 노비에 대한 조정의 정책은 현격하게 달라진다. 조선 초기에는 공노비와 사노비의 노동력은 국가와 상전들에 의해 마음대로 수탈되었다. 노비는 물건처럼 취급되어 그들에게 소유된 것이기에 이 같은 현상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꾸준히 성장한 노비들은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함부로 노동력을 수탈당하지는 않았다. 물론 개인에게 속한 사노비는 예외가 되겠지만 공노비의 경우에는 그 이전처럼 국가의 공역에 의무적으로 동원되는 일이 없어졌던 것이다. 영조 대에 편찬된 <속대전>이 조정이 국가 사업에 필요한 인력은 임금을 주고 데려다 사용했음을 밝혀놓고 있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공노비중에서 독립노비의 경우 원래 노(奴 : 남자 노비)는 면포 2필, 비(婢:여자 노비)는 1필 반을 자기가 속한 기관에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종 8년인 1667년과 영조 31년인 1755년에 이 같은 신공은 각각 반 필식 줄어든다. 그리고 영조 50년인 1774년에는 비의 신공은 완전히 없어지고 노의 신공도 면포 1필로 줄어든다. 이는 양민 장정이 국가에 내는 세금과 같은 것으로 노비는 이때부터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노비에 대한 신공 규정은 물론 사노비와 공노비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자유를 위한 탈출 : 도망
이 처럼 노비의 신분 상승이 꾸준히 이뤄졌지만 전국 각지에서 노비가 도망가는 일이 급증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노비들은 이제 단순히 경제적인 부담을 벗어던진 데서 만족하지 못하고 신분적인 상승을 꾀하여 자유로운 몸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신분해방의 가장 빠르고 확실한 것은 노비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었다. 도망가는 곳은 변방의 섬이나 깊은 산속 등 인간의 발자취가 드문 곳이었다. 도망은 개인만 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한가족 전체가 야반도주하는 형태였다. 도망을 가서도 생업을 마련해야 했으므로 여러 방법으로 그 지역에 터전을 닦았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힘센 세도가나 관가에 몸을 맡기는 것이 있다. 노비주가 도망간 곳을 알고 찾아와도 공권력에 의지하고 있는 노비를 잡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남자 노비가 가족을 남겨둔채 홀로 도망가는 경우에는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상업활동에 뛰어들어 경제적 지위의 향상과 그것을 바탕으로 양인이 되는 길이 있었다.
도망간 노비는 일반적으로 뇌물을 사용하여 호적에서 빠지거나 국가가 보호할 수 있는 보충대와 같은 특수 병종에 속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다. 도망간 노비들이 주인에게 다시 잡혀가지 않고 생활할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국가에서 노비주에게 도망노비의 추적을 자주 금지시켰기 때문인데, 이는 국가적으로 보아서 노비의 양인화는 새로운 조세원의 생성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가에서는 노비주에게 사적인 형벌을 가하지 못하게하여 노비의 권익이 점진적으로 개선되는 추세였다.
도망친 노비들은 지역을 옮겨가며 생계를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노비의 도망 사태가 급격하게 증가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비의 도망이 급증했다는 증거는 대구의 한 지역의 노비 인구 비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1690년 숙종 16년부터 1858년 철종 9년까지 대구에 머무르던 노비 가구의 비율은 37.1%에서 1.5%로 극감한 것이다. 물론 이런 경향은 다른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노비의 감소가 곧 도망이라는 형태로만 이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노비들이 상전에게 노비문서를 사들이는 형태를 취하엿고, 그 마을을 떠남으로써 노비에서 해방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비 격감의 절대 다수는 도망 사태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노비들이 도망치는 사태가 급증하자 전국적으로 노비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망친 노비들에 대해 강력한 조처를 내렸지만 그다지 튼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노비추쇄사업' 전개 : 도망친 노비 추적 체포
도망 노비들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국가의 고민이었다. 그만큼 국가의 노동력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은 노비의 수가 급격히 줄어 국가와 양반들의 경제 기반이 흔들리게 되자 이른바 '노비추쇄사업'을 실시하게 된다. 즉 도망간 노비들을 색출하여 다시 노비 신분으로 돌려놓는 작업을 감행한 것이다. 제1차 노비추쇄사업은 병자호란 얼마 후인 효종 때 시작되어 현종 때 마무리 된다.
1655년(효종 6) 1월에는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하고 도망간 노비를 본격적으로 조사하였다.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노비 명부에 등록된 공노비 19만명 중에서 신공을 바치는 자가 2만7000명밖에 되지 않은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각 도에 어사를 파견하여 도망 노비를 찾아 나섰고, 자수하는 노비는 이전의 신공을 면제해 주었다. 효종 8년까지 거행된 추쇄 사업 결과 42만7000여명의 노비가 확보되었다. 효종은 노비 추쇄사업을 마무리하고 그 결과를 ‘추쇄도감의궤’로 제작하였다. 의궤로 남긴 것은 노비의 추쇄를 국가 중대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비추쇄사업 이후에도 노비의 증가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노비의 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영조 대에도 역시 각 지방에 추쇄관을 보내 노비추쇄사업을 실시했지만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영조는 추쇄관 파견제도를 폐지하고 각 도의 노비 수를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비총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비총법 실시는 노비의 도망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미 노비의 수가 대폭 줄어든 상태에서 비총법이 실시되자 남아 있던 노비들의 부담이 커지게 되고, 이를 참지 못한 노비들이 도주하는 일이 늘어났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노비제도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노비제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를 피부로 느끼고 있던 조정은 본격적인 노비면천 작업을 실시하였다. 다섯 명 이상의 도적을 잡는 자, 덕행을 실천한 자, 효성이 지극한 자, 정절을 지킨 여자 등에 대해 면천을 실시하는가 하면, 부유한 노비들이 다른 노비를 매입하여 충당하고 자신은 면천되는 '대구속신제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조정의 이 같은 정책은 국가 공역에 필요한 최소한의 노비 숫자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노비들에게 면천의 기회를 열어주자는 취지에서 이뤄졌다.
또한 변방의 서북지역에 노비추쇄를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변방민을 늘려 국방을 안정시키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도망간 노비들은 대개 노비추쇄가 금지된 변방으로 모여들었고, 조정은 공공연히 이를 인정하고 있엇다. 또한 남해의 각 섬에도 추쇄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친 노비들은 섬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영토정책의 일환으로 도망한 노비들의 섬 정착을 허용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노비들이 도망하여 정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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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사진. 양반 마님이 나들이를 떠날 때 가마꾼들이 동행하고 있다. |
노비의 면천과 신분상승
이 같은 노비의 면천은 영조 대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정조 대에 가서는 노비들의 신분상승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노비의 숫자가 극감했지만 비총법에 따라 노비의 신공은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고 노비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의 고통은 더욱 극심해졌다. 이에 따라 노비들이 은신하거나 도망가는 사태가 극을 달리게 된다. 이 같은 현상은 정조 8년인 1874년의 비변사 기록에서 잘 나타나 있다.
"노비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도망하여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을 바꾸는 등 간계를 다 하는데, 한 사람이 행하면 모든 사람이 동정한다. 이러한 일은 모든 고을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니 어찌 노비의 숫자가 줄지 않겠는가.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신공의 마련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노비라는 천한 명칭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노비문제는 이처럼 커다란 사회문제로 확대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노비제도를 혁파하려는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노비 혁파의 첯 번째 대상은 궁궐노비인 내시노비였다. 하지만 정조 대에는 남인과 시파들의 반대로 내시노비혁파론은 실천되지 못했다. 하지만 정조가 죽은 이듬해인 1801년 순조 원년 정권을 잡은 노론 벽파에 의해 전격적으로 내시노비가 혁파된다. 이때 양인신분으로 전환된 노비 신분층은 내수사를 비롯한 각 궁방의 내노비 36, 974명과 중앙 각 사(司)의 시노비 29,093명 등 모두 66, 067명이었다.
이 같은 내시노비의 혁파는 다른 공노비와 사노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꾸준히 노비들의 신분상승운동이 전개되어 1894년 고종 31년에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신분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어 제도상으로는 조선 사회에서 노비가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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