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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5 : 조선의 역사 347 (제22대 정조실록 1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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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5 : 조선의 역사 347 (제22대 정조실록 13)

두바퀴인생 2012. 12. 20. 05:23

 

 

 

한국의 역사 805 : 조선의 역사 347 (제22대 정조실록 13)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제 22대 정조실록(1752~1800년, 재위 :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3. 실학의 융성과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사람들(계속)

 

 

신세계를 염원한 석학 박제가(1750~1805년) : 계속

 

1750년에 태어난 박제가는 승지를 지낸 박평의 서자이다. 소년 시절부터 시, 서, 화에 뛰어난 문명을 떨쳤으며, 박지원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그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첩의 아들이기 때문에 어릴 대부터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11세 때 그나마 바람막이가 되어주던 아버지마져 사망하였기에 어린 그와 어머니는 버림받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는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가까스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고전에 밝았고, 남달리 시와 글씨에 두각을 드러내어 소년 시절에 쓴 글들이 명사들의 서재에 장식될 정도였다.

 

하지만 서얼 차대로 인해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다만 당대의 석학들인 이덕무, 유득공 등과 친분을 맺으면서 북학에 열을 올렸다. 그가 아홉 살 연상인 이덕무와 평생을 나누는 벗이 된 것은 그들의 출신이 모두 서얼인 데다가 시와 북학에 대한 열정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연을 맺은 뒤 줄곧 함께 활동했다. 그리고 둘의 뜻이 북학에 있음을 깨닫고 박지원을 찿아가 제자가 되었다. 도한 북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던 홍대용의 가르침도 구했다.

 

당시 북학을 추구하던 무리들은 한결같이 북경을 방문하여 그곳의 선진 문명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는 것을 소원하였다. 홍대용과 박지원 주위에 많은 청년들이 모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박제가는 그 청년 무리들 속에서 서얼 출신인 유득공과 양반 출신인 이서구를 만난다.

 

1776년 그의 나이 27세 때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왕위에 오른 정조가 즉시 규장각을 설치하여 많은 실력 있는 젊은 학자들을 그곳에 유치한 것이다. 이대 그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건언집>이라는 사가시집을 출간하여 청나라에까지 그 명성을 얻는다. 이듬해 정조는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서얼 차대를 없애기 위해 '서얼허통절목'을 공포했고, 이 덕택으로 박제가는 꿈에도 바라던 북경을 갈 수 있게 되었다.

 

1778년 그와 이덕무는 정조 등극 이후 영의정이 된 남인 채제공을 수행해 청나라 사은사 행렬에 합류했다. 북학에 조예가 깊고, 학문이 뛰어나다는 정평이 나자 방문단의 수행원으로 간택되었던 것이다.

 

3개월에 걸친 여행을 하면서 박제가는 대단한 열정을 보이며 청나라의 문명을 살피기 시작했다. 홍대용의 소개로 이조원, 반정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문명의 이기들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고, 그는 엄청난 충격과 감동으로 그것들을 접하며 체험한 모든 것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의 기록들은 귀국 후 <북학의>라는 대논문으로 묶여졌다. 내.외 두 편으로 된 이 책은 내편에는 수레, 배, 성, 벽, 궁실, 도로, 교량, 소, 말 등 생활에 필요한 기구와 시설 등이 서술되었고, 외편에는 전제, 농잠총론, 과거론, 관론, 녹제, 재정론, 장론 등의 정책과 제도가 서술되었다.

 

그는 이 논문 속에서 중국의 생활 도구와 조선의 것을 비교하기도 했지만 국가정책과 제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특히 과거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며 능력에 다른 관리등용제를 적극 주장하였다. 또한 경제 문제에 관해서도 생산보다는 소비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국제 무역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북학의>를 통해 북학의 개념을 정리한 그는 정조의 서얼차대 폐지책에 의해 1779년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의 서얼 출신들과 함께 규장각의 검서관이 되었다. 그는 이로부터 13년간 규장각에 머물면서 그곳에 비장된 서적들을 탐독하는 한편, 정조를 비롯한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과 사귀면서 수많은 책들을 교정하고 간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줄곧 정조에게 신분적 차별을 없애고, 국민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이를 위해 청의 선진적인 문물을 맏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790년 건륭제의 팔순절에 정사 황인점을 따라 두 번째 중국길에 올랐으며, 돌아오는 길에 왕명에 의해 연경에 파견되었다. 원자(뒤에 순조)의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검서관이었던 그를 정3품 군기시정에 임시로 임명하여 별자 사절로 보낸 것이다.

 

하지만 정조의 이 같은 배려에 정권을 쥐고 있던 양반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북학파가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여지없이 명나라의 은혜를 망각하고 침략한 만주족을 존중하는 것은 명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묵살해버렸다. 이에 그는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과거의 제도와 관습에 사로잡혀 안일한 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곤 하였다.

 

권력층과의 이러한 대립은 결국 그의 말로를 불행으로 몰고 갔다. 1800년 실학의 탄탄한 후원자였던 정조가 죽자 정권을 장악한 노론 벽파는 천주교 금지를 명분으로 남인 일파를 완전히 숙청하고, 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천주교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실학파 학자들을 대거 제거하였다. 박제가 역시 제거 대상의 주요 인물이었다.

 

노론 집권층은 '윤행임 반역사건(신유사옥)'을 조작해 그를 가담 인물로 지목했다. 그는 반역혐의를 끝가지 부정하며 묵묵히 고문을 받았으며, 결국 두만강변의 종성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1804년 유배에서 풀려나 향리로 돌아왔으나 이듬해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학자들은 박제가를 두고 지나친 개혁론자라고 비판하였다. 그것은 그가 봉건사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문물을 통해 조선 사회의 질서를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그의 개혁론은 권신들에 의해 번번이 묵살되었지만 정조는 언제나 그의 의견에 동조해주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의 개혁론을 전적으로 수용할 입장이 못 되었다. 그 때문에 박제가의 개혁론은 한낱 이상주의로 취급되고 말았다. 즉 지나치게 앞서갔던 탓으로 동조 세력을 많이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많은 선각자들은 박제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신분 차별 타파는 시대적 사명이고,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은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