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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4 : 조선의 역사 346 (제22대 정조실록 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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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4 : 조선의 역사 346 (제22대 정조실록 12)

두바퀴인생 2012. 12. 19. 04:14

 

 

 

한국의 역사 804 : 조선의 역사 346 (제22대 정조실록 12)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제 22대 정조실록(1752~1800년, 재위 :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3. 실학의 융성과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사람들(계속)

 

 

신세계를 염원한 석학 박제가(1750~1805년) 

 

박제가(朴齊家, 1750년 11월 5일 ~ 1815년 4월 25일)은 조선 후기정치가, 외교관, 통역관, 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이다. 자는 재선(在先), 차수(次修),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否), 위항도인(葦杭道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 수용과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1779년 정조에 의해 규장각검서관으로 특채되어 이후 청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그 뒤 전설서 별제와 1791년 임시 군기시정, 1792년 군기시정 등을 거쳐 1794년(정조 27년) 2월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하여 오위장(五衛將), 영평현령, 부여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밀무역에 대한 제재를 줄이며, 화폐를 유통할 것, 서양인들을 조선으로 초빙하여 화포 제작, 성곽 축조, 선박 건조, 양잠 등의 신기술을 적극 도입, 유치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맹목적인 근검절약은 병폐이며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이라는 현실을 인정한 기반을 쌓고 상업·수공업·농업 전반의 생산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국가경제를 일으킬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상업무역을 천시 여기던 당대의 사대부들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

 

박제가는 네 차례에 걸친 청나라 사행(使行)을 통해 100명이 넘는 중국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 안목을 갖춘 글로벌 지식인이었다. 박지원이관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정조윤행임 등의 배려로 청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여러번 다녀왔다. 정조의 서얼 중용 정책에 의해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조 사후 1801년(순조 1년) 그와 친분이 있던 윤행임노론벽파의 공격을 받고 몰락하면서 유배되었다. 원래 당색은 소북(小北)이었으나 노론북학파로 전향하였다. 연암 박지원, 이관상의 문인이다.

 

 

 

 

박제가

 

 

생애

 

출생과 가계

초정 박제가는 1750년 승정원우부승지를 지낸 박평(朴坪)의 서자한성부(지금의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고려 충렬왕 때 내부시승(內府侍丞)을 지낸 충헌공 박척(朴陟)의 후손이었다. 그의 가계는 소북 계열로 박율(朴栗)의 6대손으로, 5대조 박심(朴尋)은 사헌부장령을 지냈고, 고조 할아버지 박수문(朴守文) 역시 사헌부장령을 지냈으며 증조할아버지 박순(朴純)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고, 할아버지 태동(台東)은 세자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박평승정원우부승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서자였다.

 

서자라는 천대를 받았음에도 아버지 박평은 만년에 얻은 서자인 그에게 각별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11세 때 죽고 본댁에서 나오게 되면서 가난해졌으나 그림에 능해 유명해졌다. 그의 가계는 당색으로는 소북이었으나 박제가는 박지원의 문인이 되면서 노론 북학파로 당적을 옮겼다.

 

 

소년기

1760년 그들 모자를 돌보아주던 아버지 박평이 사망하자 본댁에서 나와 거처를 자주 옮겨다니며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박제가는 밤을 새워가며 품풀이하여 공부시키는 어머니의 지극 정성을 가슴깊이 새겼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례를 위하여 모든것을 바쳤다. 박제가는 당시의 생활을 회상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해본다. 과부로 가난하게 살면서 10여년동안 성한 옷을 입어보지 못했고 입에 맞는 음식을 자셔보지도 못했으며 밤을 새워가며 삯바느질을 하여 공부하는 이 아들의 뒤바라지를 하였다. 내가 사귀는 사람중에는 이따금 선생과 나이 든 분, 그리고 세상에 알려진 인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반드시 그들을 초청케 하여 술과 안주를 극진히 대접한 관계로 그 아들을 대하는 사람으로서는 집안형편이 빈한한것을 모를 정도였다.


이와 같은 사회적환경과 가정정황은 그가 커서 사회적 천대와 멸시, 양반 제도와 계급적 모순에 대해 불만을 갖고 비판하며 빈곤한 농민과 서민을 동정하는 입장에 서게 하는데 대해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우연한 기회에 연암 박지원(朴趾源)을 만나 그의 문하에 출입하게 된다. 또한 이순신의 5대손인 선비 이관상(李觀祥)의 문하에도 출입하는데,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재주를 아깝게 여긴 이관상은 1766년 자신의 첩이 낳은 둘째 서녀를 박제가에게 출가시켜 서녀사위로 삼는다.

 

 

 

학문 연구와 개혁운동

 

수학과 학문 연구

1766년 16세에 이관상의 서녀와 혼인하고 한때 그의 집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비록 서출이고, 서녀의 남편이었지만 이관상은 그를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고 독서를 지원할만큼 그를 아꼈다.

 

19세 때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많은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 많은 실학자와 만났다. 이중 이덕무와는 절친한 벗이었다. 1776년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 세 사람과 합작(合作)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의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관료, 외교 활동

1778년(정조 2년)인 29세 때는 청에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따라가 청나라의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 등의 학자들과 학문을 교류하고 귀국해서 도구의 개량과 사회, 정치 제도의 개혁에 관한 내용인 《북학의》 내외편을 저술했는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내편(內篇)에서는 실생활에서의 기구와 시설의 개선을 다루고, 외편(外篇)에서는 정치·사회제도의 전반적인 모순점을 지적하여 서정(庶政)의 개혁 방안을 서술했다. 1779년 서자였으나 적자와 서자를 가리지 않고 등용하려는 정조의 방침에 따라 규장각 검서관 등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많은 저서를 썼다. 1786년 음력 1월 박제가는 조선 사회를 뒤흔들 만한 장문의 개혁책을 정조에게 올렸다.

 

1785년 전설서별제(典設署別提)가 되었다. 1786년 정조가 왕명으로 관리들에게 시정의 폐단을 고칠 방안을 구언하는 한편 폐단을 고칠 구폐책(救弊策)을 올리게 했을 때, 전설서별제의 직에 있으면서 '병오소회 丙午所懷'를 상소로 올렸다. 여기서 그는 상공업 장려, 신분차별 타파, 해외통상, 서양인 선교사의 초청, 과학기술교육의 진흥 등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당시 지배층의 이해와는 상반된 것이었으므로 묵살되었으며, 오히려 노론 벽파 세력의 심한 반발과 비판을 받았다. 또한 노론은 그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고 공격, 당시의 심한 당쟁에 휘말려 비판을 받고 급기야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사상정화운동의 원인의 하나가 된다.

 

1790년 5월 건륭제의 팔순 잔치를 축하하는 진하사절이 파견될 때 박제가는 진하사(進賀使) 황인점(黃仁點), 부사 서호수(徐浩修)의 수행원으로 유득공 등과 함께 청나라에 갔다.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고 돌아오던 도중 원자(元子, 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해준 건륭제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한 정조의 특명으로 정3품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시로 임명되어 다시 말머리를 돌려 연경에 다녀왔다. 귀국 후 군기시정(軍器寺正)이 되고, 다시 동지사(冬至使)가 파견되자 동지사를 수행하여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2년 부여현감으로 나갔다가 1794년에는 춘당대 무과(春塘臺 武科)에 장원급제를 해서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 현감(永平縣監)이 되었다. 1794년(정조 27년) 2월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으로 급제,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가 영평현령으로 부임하였다. 1798년에는 왕에게 바치기 위해 《북학의(北學議)》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했다.

 

 

상업, 무역과 사회 발전론

박제가는 상업과 무역의 장려와 개선을 주장했다. 그는 청나라를 오가며 아랍, 베트남 등의 무역상들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면서 그는 새로운 문물 전파와 문화 교류 방법의 하나는 상업과 무역이라고 봤다. 따라서 그는 농업보다 상업에서 사회발전의 계기를 찾으려 했다. 상업과 무역을 천시하는 것은 잘못이며 이러한 장사와 무역이 국가 경제 개선에 도움을 준다고 봤다. 그는 무조건 근검절약만이 미덕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당대의 지배층들로부터 사치를 권장하느냐는 반박을 받았다. 그는 상업을 발달시키려면 대부분의 실학자들조차 미덕으로 여겼던 봉건적 절검사상을 배격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그는 자신의 저서 <<북학의>> 내편 시정(市井)조에서도 '소비는 단순한 소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을 자극하는 것'이라 주장했고, '생산과 소비의 유기적 관계'를 해명함으로써 이를 연결하는 장사와 무역의 중요성을 천명했다. 따라서 그의 생각도 상업이 발달하면 농업과 수공업도 아울러 발달한다는 중상적 경제이론에 도달해 있었다.

 

또한 화폐 유통을 정조에게 여러번 건의하였다. 화폐 유통은 장사와 무역을 활발하게 돌아가게 하는 수단이었다. 박제가의 화폐경제 발달론의 본질은 국가의 경제력을 증대시켜 이용후생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상업이 주가 되면서 농업·공업이 유기적으로 발전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상인들과 무역상들에 대한 지나친 천대와 편견을 자제할 것, 수공업자에 대한 국가적 수탈의 금지, 대량 생산체제의 구축, 농업기술의 개량을 통한 농업생산성의 증진과 상업적 농업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국가경제를 강화하기 위해 해외통상을 통한 재화의 증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밀무역을 근절할 방안으로도 국가가 상업과 무역에 대한 천대와 경멸, 제재를 줄여야 된다고 건의하였다. 무역과 상행위에 대한 제재가 사라진다면 밀무역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근절될 것이라고 하였다. 밀무역을 양성화시켜 정상적인 외국무역을 발전시킬 것과 개성, 인천과 충청도·전라도 일대의 서산, 태안, 장진, 은진, 강경, 여산 등지의 강가를 끼고 있는 지역에 무역항을 열고 남중국 및 산둥(山東) 지방과 통상을 확대하고, 상권이 커지고 국력이 자라면 일본·안남·위구르 등 무역대상국을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생애 후반

 

은퇴와 저술 활동

시·그림·글씨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였는데, 청대(淸代) 사고전서 (四庫全書)계열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대련형식(對 聯形式)을 수용해왔고 글씨는 조선말기의 서풍과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구 실을 하였으며,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文氣)가 짙게 풍기는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의 산수 인물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그는 시 재주를 청나라의 문인들로부터도 인정받아 생전인 1801년을 전후해서 그의 시문집인 『정유고략(貞유藁略)』이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1798년(정조 22년) 다시 부여현감이 되었으며, 그해 영조가 적전(籍田)에 친히 농사에 참여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가 널리 농서를 구하자, '북학의'의 내용 일부를 발췌, 골자로 한 '응지농정소(應旨農政疏)'와 '소진본북학의(疏進本北學議)'를 올렸다.

 

 

최후

10여년의 검서관 생활은 그의 시력을 악화시켰다. 밤늦게까지 독서했고 어두운 방에서도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쓴 것이 원인이었다. 만년의 그는 안경을 썼는데, 왼쪽 눈이 상하여 안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몇해 뒤에는 오른편 눈의 시력마저 희미해졌다. 또한 시집간 둘째 딸이 그보다 먼저 죽는 일도 겪었다.

 

1800년 정조 사후 노론 벽파에게 소론, 남인과 실학파 계열 학자들은 대부분 숙청되었다. 그는 소북에서 노론 북학파로 당적을 옮기고 전향했으나 1801년에는 청나라에 네 번째 연행을 갔다 돌아왔다가 사돈이었던 윤가기(尹可基)가 주모한 흉서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북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를 갔다. 사돈인 윤가기의 흉서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 중에는 그의 청나라행을 후원했던 윤행임도 연루됨으로써 그 역시 윤가기, 윤행임의 당여로 몰렸다. 1805년 풀려났으며 1815년 4월 25일 병환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사망 년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사후

그의 사후 북학파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으로 이어지며 중상주의와 통상론을 계속 건의하였고 이는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등의 노론출신 개화파로 이어지게 된다.

1997년 7월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저서와 작품

 

주요 저서

  • 북학의》(北學議)
  • 정유집》(貞否集)
  • 《정유각집》
  • 명농초고》(明農草稿)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 백동수, 이덕무와 공저.
  •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 시고(詩稿)

 

 

그림

  • 목우도(牧牛圖)
  • 의암 관수도(倚巖 觀水圖)
  • 어락도(魚樂圖)
  • 야치도(野稚圖)

 

 

 

사상과 신념

 

 

북벌론 비판

그는 북벌론이 당시 조선의 국력과 경제적, 군사적 현실을 외면한 공리공담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조선이 북벌(北伐) 대상으로 지목한 청나라가 오랑캐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과 서양과학으로 무장한 문명국임을 직시했다. 청나라를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박제가의 주장은 '우물 안 개구리'였던 조선 지식인들의 낡은 생각을 뒤흔든 혁명적 발상이었다.그러나 북벌론에 대한 비판은 노은 물론 남인 강경파에게도 반감을 초래하는 이유가 되었다.

 

 

서양 기술 도입론

박제가는 조선의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과의 통상과 신기술 도입을 주장했다. 서양의 신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역과 상권 형성으로 자연스럽게 서양인들이 유입되게 하자고 하였다. 박제가는 1786년 1월 22일 조정의 조회(朝會)에 참석해서 통상과 신기술 도입을 건의한다. 그는 중국에 사신을 파견해 '일본과 유구, 안남과 서양 등이 모두 중국의 복건·절강·교주(交州)·광주(廣州)에서 교역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여러 나라처럼 뱃길을 이용해 통상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하자고 제안했다.

 

특히 서양인을 초빙해 천문 관측과 농잠(農蠶)·의약·궁궐과 성곽과 다리를 짓는 법, 구리나 옥을 채굴하고 유리를 구워내는 법, 화포를 설치하는 법, 수레를 통행시키고 배를 건조하는 법을 가르치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서양인들을 조선에 받아들여 그들로부터 농잠, 의약 제조, 성곽 축조, 선박 축조 등의 기술을 배우게 하자는 것이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는 이유로 "나라에 (학문을 공부한답시고) 놀고먹는 자가 갈수록 불어나는 것은 사족(士族)들이 날로 번성하기 때문"이라면서 "물길과 뭍길을 이용해 장사하고 교역하는 모든 일에 사족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양인을 귀신이나 괴물로 여기던 당시의 집권층은 그가 사술을 꾸민다며 반발한다.

 

 

가족 관계

그의 어머니 전주이씨는 서녀로 아버지 박평의 첩이었다. 부인 덕수이씨는 장인 이관상의 둘째 서녀였다.

  • 할아버지 : 박태동(朴台東)
    • 숙부 : 박형(朴珩)
    • 숙부 : 박성(朴珹)
  • 아버지 : 박평(1800년 - 1860년)
  • 어머니 : 전주 이씨
  • 부인 : 덕수 이씨, 이순신의 5대손 이관상의 서녀
    • 아들 : 박장림(朴長稔)
    • 아들 : 박장름(朴長廩)
      • 손자 : 박효선(朴孝善)
    • 아들 : 박장암(朴長馣)
    • 아들 : 박효석(朴孝錫)
  • 처부 : 이관상
  • 이복 형 : 박제도(朴齊道)

 

 

 

평가와 비판

청나라 문인 이조원(李調元)은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문집에 쓴 서문을 통해 그의 인물됨됨이를 평했다. '그 사람은 왜소하지만 굳세고 날카로우며 재치있는 생각이 풍부하다 그의 문장에는 찬란하기가 별빛 같고 조개가 뿜어내는 신기루 같고 용궁의 물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