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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3 : 조선의 역사 345 (제22대 정조실록 11) 본문
한국의 역사 803 : 조선의 역사 345 (제22대 정조실록 11)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제 22대 정조실록(1752~1800년, 재위 :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3. 실학의 융성과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사람들(계속)
실학의 최고봉 정약용(1762~1836년) : 계속
정약용(丁若鏞)은 1762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은 진주목사를 지내다가 그가 태어날 무렵에 대다수의 남인들과 마찬가지로 당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묻혀 살고 있었다. 그러나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정권에서 좇겨났던 남인들이 다시 등용되기 시작하자, 정재원도 호조좌랑에 임명되어 복직하였다.
정약용은 아홉 살이 되던 1770년에 어머니 윤씨를 여의고 1776년 정조가 등극하던 해에 승지 홍화보의 달과 결혼했다.
한양에 올라온 그는 외가를 자주 찿았다. 그의 외조부 윤두서는 문인으로 명망이 높았고, 잘 알려진 문인 화가 이기도 했으며 장서가로도 유명하였다. 정약용이 외가를 드나들었던 이유는 바로 윤두서가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읽기 위해서였다.
그는 열정적인 독서를 통해 고전을 섬렵하는 한편 친형 정약전과 그 친구들과의 교유를 통해 많은 짓기을 쌓았다. 정약전의 친구 가운데 이승훈이 있엇고, 이승훈의 소개로 이익의 종손 이가환을 알게 되었다. 이가환은 이익의 실학을 계승한 유능한 학자로 당시 젊은 유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교제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호조좌랑이 된 아버지는 곧 다시 전라도 화순 지방관으로 발령이 났고, 그도 역시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1781년 스무 살 때 과거를 치렀지만 떨어졌고, 이듬해 다시 응시하여 초시와 회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생원으로 벼슬길에 오른 지 3년 뒤인 1784년 정조의 부름을 받아 경연석에서 <중용>을 강의하면서 파란 많은 삶이 시작되었다.
이후의 그의 삶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 데, 제1기는 정조의 홍애를 한 몸에 받으며 벼슬살이를 하던 득의의 시절이었고, 제2기는 정권에서 밀려나 귀양살이를 하던 시절이었으며, 제3기는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던 시절이다.
정약용은 생원이 된 이후 1789년 3월에 정조 앞에서 치른 전시에 합격하여 초계문신의 칭호를 얻었으며, 그해에 종7품의 부사정을 거쳐 정7품의 가주서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큰 배를 이용하여 강에 나란히 띄워 가교를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그리고 실제 배다리를 준공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1791년 정6품의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에는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수원성 수축에 책임자로 발탁되어 설계를 도맡았으며, 거중기를 제작해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도 하였다.
1793년 수원성 수축 도중에 아버지 정재원이 임지 진주에서 세상을 뜨자 그는 이듬해 7월까지 상을 마치고 다시 정5품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왕의 특명을 맏아 경기 암행어사가되어 연천지방의 서용보 일당의 범죄 사실을 보고하여 그를 해직케케 했다. 하지만 이때 해직당한 서용보는 앙심을 품고 혈안이 되어 여러 차례 그를 죽이기 위해 모략을 꾸미게 된다.
암행어사의 일을 마친 그는 1795년 정3품의 병조참의에 오른다. 하지만 이대 청나라 신부 '주문모 잠입사건'이 발생해 충청도 금정의 찰방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규장각 교서로 다시 돌아와 편찬과 교정 업무에 종사하였고, 천주교 문제가 다시 정쟁의 핵심으로 떠올라 1797년 6월 재차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되어 떠나야 했다. 이 곡산부사 생활을 하며 그는 뛰어난 목민관의 자질을 드러내어 곡산군민들의 칭송과 추앙을 받게 된다. 또한 이때 전국적으로 천연두가 창궐하자 서학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적절한 치료책을 세우고 <마과회통>이라는 의학서에 담아 편찬, 보급하였다. 그때까지 천연두에 대해 전혀 무방비 상태였던 민간에서는 그의 치료 대책에 힘입어 많은 환자를 구할 수 있었고, 이것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이 책을 보급하게 되었다.
1799년 그는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병조참지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요직을 제수받은 것을 반대한 정적들은 그를 천주교인으로 몰아갔다. 이 때문에 그는 해명서인 '자명소'를 올린다. 그는 자명소에서 자신은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서양의 학문, 특히 천문, 농정, 지리, 건축, 수리, 측량, 치료법 등의 과학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서학에 접근했다면서 이를 위해 서학에 능통한 천주교 신자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사퇴 건의서를 함께 제출하였다. 정조는 애써 그를 달래어 조정에 머무르게 했지만 그의 사의는 완고하여 1800년 봄 처자를 데리고 낙향했다. 그 후 정조의 재촉으로 일시 상경하였지만 정조가 그해 6월에 죽은 바람에 그는 다시 향리로 돌아왔다.
정조가 죽은 후 그의 인생은 제2기가 시작된다. 조정은 노론 벽파가 완전히 장악하였고,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 정약전, 정약종을 비롯한 이가환, 이승훈 등이 투옥되어 이가환, 정약종, 이승훈 등이 죽고 서용보의 간언으로 정약용도 유배되었다.
1801년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오로지 독서와 창작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져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서학 관련자들이 사형당했지만, 정약용은 그의 형 정약전의 공적을 존중한 조정 내부의 사람들에 의해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래서 정약전은 전라도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떠났으며,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유배지 강진에 도착한 그는 1801년 11월부터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유배지 주막에서 거처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만덕사의 혜장선사와 인연을 맺는다. 1803년 봄 소풍길에 만덕사의 혜장선사를 알게 되어 유교와 불교를 서로 교환할 기회를 갖는다. 이후 혜장선사의 주선으로 1805년 겨울 거처를 고성사로 옮기고, 다시 9개월 후에 목래 이학래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길 때까지 약1년 반 동안 머물게 된다.
1808년 봄 정약용은 다산에 있는 한 정자를 얻게 되었는데, 그곳은 윤박이라는 선비의 별장이었다. 거기에는 1천여 권의 장서가 있어 그가 책을 집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초당에 기거하면서 그는 자신의 아호를 '다산'이라 붙였다. 그리고 자신이 머물던 곳을 '다산초당'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11년 동안 다산초당은 정약용 학문의 산실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비롯하여 <시경강의보>,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대학공의>, <중용자잠> 등 수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1818년 유배가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오면서 정약용은 다시 제3기 인생이 시작된다. 유배생활 중에 쌓은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흠흠신서>, <상서고훈> 등을 비롯한 많은 책을 집필했다. 그의 저서는 <여유당집> 250권, <다산총서> 246권과 나머지 책들을 포함하여 약 508권에 달했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없어져버렸고, 1934년에서 1938년에 걸쳐 신조선사(新朝鮮社)에 의해 <여유당전서>가 출간되었다.
감히 한마디로 업적을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저작물을 남겨놓은 정약용은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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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과 서용보
조선 순조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徐龍輔 : 1757-1824)라는 인물이 있었다. 역사는 그를 가리켜 ‘철저하게 당파에 휩쓸려 자기만을 아는 이기주의자였으며, 철저하게 훈련된 기회주의자이기도 했고, 극치의 아부로 영의정까지 오른 대표적인 가렴주구(苛斂誅求)의 관리’ 라고 말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 정조의 명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여러 지방을 두루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아랑곳하지 않는 관리들의 행태를 한탄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읊은 시가 있다.
“마른 목은 길쭉하여 따오기 같고 / 병든 살갗 주름져 닭살 같구나 / 팔다리는 아직도 움직일 때련만 / 걸음을 혼자서 옮기지 못하네 / 관가의 돈 궤짝 남이 볼까 숨기기 바쁜데 / 우리들 굶주리게 한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 관가 마구간 살찐 저 말은 / 다름 아닌 우리들의 피와 살이네……(하략)”.
정조는 자신이 사는 시대를 “대소변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대승기탕(大承氣湯)’이라는 극약을 써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정약용 같은 젊고 유능한 인물을 등장시켰다. 지식과 재능, 정직과 덕망을 두루 갖춘 정약용은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런데 정약용이 젊었을 때 암행어사로 나가 당시 최대 명문가인 달성 서씨 집안의 벼슬아치인 서용보의 불법사실을 적발해냈다. 서용보가 서원의 토지를 불법으로 자기소유처럼 만들었는데 이 사실을 적발했고, 서용보는 이를 계기로 정약용에 대한 직접적인 반감을 가졌다. 서용보는 또 당시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정조의 총애를 받는 정약용에 대한 질투심에 정약용이 정책건의를 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를 헐뜯었다.
정약용을 천주교 신자라 하여 유배를 보내 전남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했다. 정약용의 유배기간이 길어지자 조정에서는 그의 유배를 풀어주자는 요구가 이어졌다. 하지만 좌의정의 높은 지위에 있던 서용보는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 이 논의를 번번이 틀어막았다. 서용보는 정치적 동기보다는 정약용에 대한 지난날의 앙심으로 보복을 한 것이다.
세상에서 무상한 것이 권력이다. 높은 지위에 오르고 권력을 잡아 세상을 주무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지만, 그런 권력도 한때, 시간이 지나면 무상한 것이 권력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을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고 남을 음해하고 보복을 한다든가, 또는 자신의 사욕을 위해 사용한다면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제5공화국’ 은 증언하고 있다.
또 하나, 영의정이라는 신하로서의 최고의 지위에 있던 서용보는 가렴주구의 전형적인 벼슬아치로 역사는 평가하고 있지만, 그렇게 핍박받던 정약용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학자로 후세에서는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역사의 방향이며, 교훈인 것이다.
달성 서씨 대종회의 서용보에 대한 평가
순조19년(1819) 1월, 좌·우의정을 몇 번이나 역임하다가 관직을 버리고 향리에서 10여년을 은둔하던 서용보가 왕의 부름을 받고 나와 영의정에 올랐다. 그런데 나라의 정세는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았고, 세계는 근대화의 물결로 파고가 높고 거셌다.
19세기에 접어들어 말기증세를 보인 조선은 백성들의 기강이 풀어져 재해가 빈발하였고, 삼천리강산은 목숨을 잇고자 산적이 되어 소란을 피우는 도적떼들 차지가 된 것같았다. 순조9년(1809)부터 겹쳐 발생한 재난과 민란은 과히 민심을 흔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2월에 함흥에 큰 불이 일어나 민가 1800여호가 불타버렸고, 같은 달 전라도 보성에서 역시 화재가 발생, 창고가 불타 2900여석의 곡식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3월에 경상도 울산에 화재가 발생, 민가 500여채가 불탔고, 제천에서도 큰 화재가 일어 그 피해를 가늠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6월에 개성에서 민란이 일어나 세상을 시끄럽게 했고, 미곡상들 농간으로 쌀값이 폭등, 큰 소란이 일자, 급기야 상인들의 곡식 사재기를 엄금하였다.
이듬해 순조10년, 7월 함경도지방에 홍수가 져 민가 700여호가 잠겼고, 평안도 의주에서도 홍수로 민가 1900호 가까이가 수몰 되어 양민 260여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순조11년 2월, 황해도 곡산에서 부민 박대성(朴大成)을 대표로하는 난민들 수백명이 민란을 일으켜 관청을 습격, 감옥을 부수어 죄수들을 풀어 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도 있었다. 그해 12월, 드디어 평안도 가산에서 홍경래(洪景來)가 농민군을 지휘, 가산군수 정저(鄭著)와 그의 아버지 노(魯)를 죽이고 군청을 점령해 버리는 사달을 시작으로 민란을 일받았다. 홍경래가 창고를 부수고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먹거리를 나눠주자, 민심이 일시에 쏠려 불과 5~6일만에 박천·곽산·정주·선천·태천·용천 등 청천강 주변의 8읍이 쉽게 홍경래의 손안에 떨어져버렸다. 이듬해 6월에야 가까스로 난은 진압 되고, 조정 중신들은 큰 전승이라도 거둔 듯 논공행상에만 욕심을 부릴 뿐, 민란 재발 대책은 세울 줄 몰랐다.
이런 어수선한 정세 속에서 국정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서용보는, 순조년간의 민심수습에 심혈을 기울인 대신으로 꼽혔다.
서용보는 영조의 장인 서종제(徐宗悌)의 현손으로, 할아버지 서인수(徐仁修)는 부사, 아버지 서유령(徐有寧)은 판서를 두루 거쳐 총융사를 몇차례 중임 한 뒤, 우참찬까지 올랐던 조정의 중신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서용보는 영조50년(1774) 열여덟살 약관의 나이로 문과에 올라, 뛰어난 재질과 든든한 배경에 힘입어, 장래가 보장 되는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관직이 승승장구, 40대 초반에 벌써 판서직에 오르고, 1800년 6월, 순조 즉위와 함께 우의정에 발탁 되니, 나이 44세, 남달리 일찍 정승으로 국정의 핵심에 몸을 담은 셈이 되었다.
순조2년(1802) 좌의정으로 승차하고, 곧 이어 판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순조5년 사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 온 뒤 이듬해 2월 두 번째 좌의정자리에 복직하였다. 그러나 두달 후인 4월, 서용보는 다시 우의정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관직을 그만 두고 향리로 돌아가 오랫 동안 둔피(遁避) 생활로 시끄러운 세상에서 벗어 나고자하였던 것이다.
순조19년 정월, 혼탁한 세상을 피해 숨었던 서용보가 영의정에 올랐다. 그해 전국 호구조사 결과 나라의 전체 가구는 153만3,515호, 인구는 651만2349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8년전인 1801년 조사결과 나타난 가구 175만 7973호에 비하면 무려 22만 여호가 줄었고, 인구는 751만3791명 보다 100여만명이 감소한 것으로, 큰 변란을 겪은 나라처럼 사람 머릿수가 줄어든 꼴이 되었다. 이는 사회가 해체 되어 잠적으로 통계에 잡히질 않는 인구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이처럼 불안한 시대를 맞은 조선의 양반사회는, 급진적으로 깨우쳐가는 서구 문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점점 뒤쳐지는 꼴로 주저 앉는것 같았다.
1816년 독일은 연방의회를 열었고, 이듬해 영국의 리카도가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를 지어 근대국가의 지침서가 됐다. 같은 해 미국의 5대 대통령 먼로가 취임하여 이른바 ‘먼로주의’를 발표, 신생 미국이 유럽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외교정책 원칙을 선언하였다. 18세기 초 독일은 본대학을 개설했고, 미국의 서배너호가 26일간 항해 끝에 증기선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하였다.
불안했던 시대 국정을 맡았던 서용보는 영의정에 오른 이듬해, 실권을 놓고 영중추부사 자리에 임하였다가, 순조24년 8월 68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심후하고 기량이 있었으며, 과묵하고 행동 거지가 신중하였다. 익헌공(翼獻公)으로 시호가 내려진 그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 군사분계선 안의 숲에 덮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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