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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1 : 조선의 역사 343 (제22대 정조실록 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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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1 : 조선의 역사 343 (제22대 정조실록 9)

두바퀴인생 2012. 12. 16. 05:21

 

 

 

 

한국의 역사 801 : 조선의 역사 343 (제22대 정조실록 9)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제 22대 정조실록(1752~1800년, 재위 :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3. 실학의 융성과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사람들

 

 

북학파의 거장 박지원(1737~1805년) : 계속

 

 

박지원은 1737년 한성 서쪽 반송방의 야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와 고관을 배출한 명문이다. 5대조 박미는 문예 서도의 대가로서 선조의 부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박필균은 정2품의 지돈녕부사를 지냈다. 하지만 아버지 박서유는 그가 어릴 때 미처 관직에도 임용되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며, 어머니 역시 일찍 세상을 떴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원 탓으로 조부에 의해 양육되었다. 조부 박필균은 노론측 인사였지만 당쟁을 싫어했던 탓에 당론 시비에 휘말리는 일이 없었고 또한 청렴하여 축재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가난하게 살았다. 이런 조부의 기르침을 받으며 그는 건강하고 영민한 청년으로 성장해 1752년 16세 때 이보천의 딸과 결혼했다. 이보천은 비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사람 보는 눈이 좋고 성품이 뛰어난 선비였다. 그는 박지원의 인물됨됨이를 알아보고 교리로 있던 아우 이양천에게 부탁하여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는 이양천에게 주로 <사기>를 비롯한 역사 서적을 배웠고,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였으며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그리고 처남 이재성과 학문을 교제하며 서로 충실한 조언자 역활을 하였다.

 

1760년 조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 그리고 1765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고, 이후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집을 팔고 백탑 근처로 이사하였는데 그곳에서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학문적 교유를 가졌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자주 토론하였고 또한 유득공, 이덕무 등과 어울려 서부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정국은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있었고, 그 때문에 노론 벽파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어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위험을 피해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 은거하였는데, 이때부터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연암협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1780년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러 있다가 삼종형 박명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 사절 정사로 북경에 갈 때 수행하여 압록강을 거쳐 북경,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때 보고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 바로 <열하일기>이다.

 

그가 자원하여 청을 다녀온 것은 홍대용의 영향 때문이었다. 홍대용은 그에게 중국 여행담을 들려주면서 그곳의 산업과 과학, 그리고 신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그가 쓴 열하일기는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요동의 성경(봉천)과 산해관을 거쳐 북경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 청황제가 머물고 있는 피서진인 열하에 도착하였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오는 8월 20일까지 약 두 달 동안의 여행 체험을 날자별로 기록하고 있으며, 특별한 부분은 별도 항목을 만들어 덧붙여놓았다. 이 저술로 인해 그의 명성이 선비들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된 비판을 받았다.

 

그 후 1786년 정조 10년 50세에 음서로 선공관 감역에 제수되면서 녹봉을 받는 관리가 된다. 1789년에는 편시서주부, 1791년에는 한성부 판관, 이듬해에는 안의현감, 1797년에는 명천군수, 그리고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805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안의현감 시절에 북경 여행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는데, 명천군수 재직시에는 <과농소총>, <한민명전의>, <안설> 등을 저술한다. <열하일기>와 더불어 이 책들 속에는 그의 현실 개혁에 대한 포부가 잘 나타나 있다.

 

북학사상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비록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긴 하지만 청의 문명이 우리의 현실을 풍요롭게 한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청이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인식을 비판하면서 그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역대 중국인들의 우리 민족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같은 그의 현실주의적인 사상은 노론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정조 대의 젊은 선비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수용되어 북학파를 형성하는 중심 사상이 되었다.

 

그의 현실 개혁적 사상은 <연암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허생전>, <민옹전>, <광문자전>, <양반전>, <김신선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 등의 소설 속에 잘 용해되어 당대와 후대 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소설들은 대개 시대상을 풍자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양반전>에서는 조선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며 군림하려는 사대부 계층이 처한 현실과 한계점을 잘 지적하고 있고, <허생전>에서는 허위적 북벌론을 배격하면서 중상주의적 사상을 통해 이상향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소설들은 그의 사상을 나타내는 이론의 근거이자 배타적으로 인식한 조선 사회의 현실과, 이상향으로 추구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염원을 표출한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지배층의 사고방식과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그의 저술들이 오랫동안 불온한 서적으로 취급된 이유가 되었다.

 

그의 문집이 처음 공간된 것은 그가 죽은 지 1백 년이 지난 1900년이었다.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을 지낸 인물이었지만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연암문집>은 그때까지 간행되지 못하다가, 20세기 벽두에 김만식을 비롯한 23인의 학자들에 의해 겨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열하일기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박지원이 44세 때인 1780년(정조 5년)에 삼종형(8촌 형)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칠순 잔치) 사절로 북경(당시의 연경)에 갈 때 따라가서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견문기이다.

 

열하(熱河)는 지금의 청더(승덕)이며, 최종 목적지는 열하행궁 또는 피서산장으로 불리는 건륭제의 여름 별궁이었다.

 

 

                                 

                                                                               <열하일기>의 출발지 압록강

 

 

 

체계

 

26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정본 없이 필사본으로만 전해져오다가 1901년 김택영이 처음 간행하였다. 현대문 제목은 북한의 리상호가 번역한 것을 따랐다.

    1. 제1권 압록강을 건너서 : 도강록(渡江錄) - 압록강을 건너 심양까지의 기행이다. 1780년 음력 6월 24일~음력 7월 9일
    2. 제2권 성경의 이모저모 : 성경잡지(盛京雜誌) - 심양에서 광녕까지의 기행이다. 음력 7월 10일~음력 7월 14일
    3. 제3권 : 일신수필(馹汛隨筆) - 광녕에서 산해관까지의 기행이다. 음력 7월 15일~음력 7월 23일
    4. 제4권 관내에서 본 이야기 : 관내정사(關內程史) -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기행이다. 〈호질(虎叱)〉 수록. 음력 7월 24일~음력 8월 4일.
    5. 제5권 북방 여행기 : 막북행정록(漠北行程論) -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는 길이다. 음력 8월 5일~음력 8월 9일
    6. 제6권 태학관에 머물면서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열하에서의 일정이다. 음력 8월 9일~음력 8월 14일
    7. 제8권 북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1.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음력 8월 15일~음력 8월 20일.
      2. 북경에서 다시 조선 땅으로 들어오는 여정은 기록을 하지 않았다.
    1. 제7권 구외이문(口外異聞)
    2. 제9권 금료소초(金蓼少抄)
    3. 제10권 옥갑야화(玉匣夜話) - 〈허생전〉 수록
    4. 제11권 황도기략(黃圖記略)
    5. 제12권 알성퇴술(謁聖退述)
    6. 제13권 앙엽기(像葉記)
    7. 제14권 경개록(傾盖錄) - 열하의 태학에서 묵었던 엿새 동안 그곳의 학자들과 문답한 내용을 기록한 것. 열하일기 등장인물에 대한 짧은 기록들이다.
    8. 제15권 황교문답(黃敎問答)
      1. 황교문답, 반선시말, 찰십륜포는 티벳과 달라이라마에 관해 들은 기록이다.
      2. 박지원은 황교문답에서 청의 이민족 통치와 유학자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9. 제16권 행재잡록(行在雜錄)
      1. 건륭제에게 바친 문서와 건륭제가 내린 칙유 등의 기록이다.
      2. 실례를 들어가며 청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조선이 가진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10. 제17권 반선시말(班禪始末): 청 고종(건륭제)의 반선(판첸 라마)에 대한 정책 소개. 황교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심도있게 고찰했다.
    11. 제18권 희본명목(戱本名目)
    12. 제19권 찰십륜포(札什倫布):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
    13. 제20권 망양록(忘羊錄): 열하에서 왕민호ㆍ윤가전과 함께 음악에 대해서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부분. 토론에 열중하느라 윤가전이 미리 마련해두었던 양고기가 식는 것도 잊어버렸다는 데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14. 제21권 심세편(審勢篇): 조선의 오망(五妄)과 중국의 삼난(三難)에 대한 논평. 주자학과 중화주의에 대한 그의 관점이 담겨 있다.
    15. 제22권 곡정필담(鵠汀筆談): 곡정 왕민호 및 그의 주변 인물들과 주고받은 필담.
    16. 제23권 동란섭필(銅蘭涉筆)
    17. 제24권 산장잡기(山莊雜技): 열하의 산장에서 보고 들은 내용에 대한 서술.
    18. 제25권 환희기(幻戱記): 중국 요술쟁이의 신묘한 갖가지 연기들을 구경하고 그 느낌을 적은 글.
    19. 제26권 피서록(避署錄): 열하의 피서 산장에서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과 주고받은 시문에 대한 글.

 

 

 

내용

 

연암은 이 글에서 조선이 빈곤한 주요 원인을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데에서 찾고 있다.[1] 정확히는 수레나 배로 대표되는 유통수단의 미흡함, 도로망 건설의 소홀이 조선이 가난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암은 조선의 수레가 바퀴가 거의 둥글지도 못하고 자국은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는 지적과 함께, "수레를 만들지 않으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라며 직접 수레는 만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 비판부터 하고 보는 정신 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또한 연암은 당시 조선에서 수입하는 청의 털모자 수입에 대해서 조선의 은을 낭비하는 행위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평가

 

현재 남아있는 《열하일기》의 필사본은 아홉 종. 당시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지를 보여준다. 연암은 조선의 토속적인 속담을 섞어 쓰거나 하층 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기록했다. 당대에 '점잖은 글'이랍시고 일상에서 상투적으로 쓰던 판에 박힌 것 같은 글과는 전혀 다른 문체, 한문 문장에 중국어나 소설의 문체를 쓰기도 하고 거기다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가미해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켰다는 분석이 있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열하일기》에는 절실히 녹아 있었던 점이 지식인들에게 어필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뿐 아니라 문체나 그 내용의 파격성으로 《열하일기》는 당대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정조가 패관잡기를 불온시하며 순정문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이른바 문체반정의 서곡을 올린 중심에도 《열하일기》가 있었다. 정조는 직접 하교까지 내려서 박지원의 문장을 저속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요즘 문풍이 이따위로 된 것은 박 아무개의 죄가 아닌 것이 없다. 《열하일기》는 과인도 벌써 익숙하게 읽어봤는데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것인가?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하더니 문체가 이 따위로 변했다. 마땅히 사고를 친 자가 해결해야 할 것이다. 속히 한 가지 순정한 글을 지어 곧바로 올려보내어 《열하일기》의 죄를 속죄한다면, 비록 남행(南行)의 글이라 한들 어찌 아까울 것이 있으랴?

정조의 이같은 호령에 박지원은 변명이라고 격식을 잔뜩 갖춘 속죄문을 써서 정조에게 바쳤는데, 이 글이 또 보기 드문 명문이라서 정조가 또 웃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세상을 떠난지 약 80년이 지난 뒤인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열하일기》는 학술 서적으로서뿐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이 책은 조선 왕조 일대를 통하여 수많은 연행문학(북경 사신 및 그 일행이 사신행을 하면서 지은 문학) 중에서 백미적(白眉的)인 위치를 점하는 책이다.

 

실학의 대표학자로 박지원은 중국의 문물을 유심히 관찰하며 앞선 기술을 배우고 선진 제도를 본받으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