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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0 : 조선의 역사 342 (제22대 정조실록 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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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0 : 조선의 역사 342 (제22대 정조실록 8)

두바퀴인생 2012. 12. 15. 10:30

 

 

 

한국의 역사 800 : 조선의 역사 342 (제22대 정조실록 8)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제 22대 정조실록(1752~1800년, 재위 :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3. 실학의 융성과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사람들

 

 

북학파의 거장 박지원(1737~1805년) : 계속

 

 

학문 연구와 정치 활동

 

정치 활동과 낙향

박지원은 청년 시절에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하여 불면증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이란 이름으로 편찬했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그들과 교류하였고, 이후 그들과도 깊은 학문적 교유를 가졌다. 후일 박제가, 유득공 등은 그의 문인이 되었다. 또한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과도 만나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하여 자주 토론하였으며, 이무렵 유득공, 이덕무 등과 서부지방을 여행하기도 했다.

 

1776년 정조 즉위 직후 정조의 측근 근신인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으면서 같은 노론이지만 벽파(僻派)를 공격하면서 벽파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777년(정조 1년) 권신(權臣) 홍국영에게 벽파(辟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듬해 황해도 김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때 그는 개성유수로 부임한 교우 유언호에게서 생활하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린 것도 이에 연유한다. 박지원은 이곳에 생활하는 동안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으며,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청나라 방문과 열하일기 저술

 

 

 

열하일기 본문

 

 

 

열하일기

 

 

1780년(정조 4) 44세 때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북경을 갔다. 1780년 6월 25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거쳐 베이징, 열하를 여행하고 4개월간 돌아본 후 그해 10월 27일 귀국하였다. 이때 건륭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의 실학 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근본(도덕)보다 말단(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책이 《열하일기》이며, 베이징, 열하, 만주 등에서 그가 본 풍경과 현지 주민의 생활,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하였으나, 어떠한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여 이상한 글을 쓴다는 이유로 문단의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북학파 활동

그는 노론임에도 열하베이징을 여행하고 돌아온 후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문물과 청나라의 기술 중 성곽 축조, 제련 기술 등을 적극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상행위를 천시할 것이 아니라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무역항을 개설해야 한다는 것과 화폐를 이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문하생을 길러내 노론당 내에서도 북학파라는 학파/정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문하생에도 양반, 중인, 서자를 차별하지 않고 학문을 배우려는 자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며 능력과 실력에 따른 균등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서얼 차별에 대해 그는 '서자를 금고하는 것은 왕조를 세운 초기에 어떤 좀스런 신하가 기회를 타서 앙갚음한데 지나지 않는다.'며 서얼을 차별할 이유가 없다고 부르짖었다.

 

 

 

생애 후반

 

관직 활동

 

 

 

과농소초 (1798년)

 

1786년 50세 때 음보로 처음 출사하여 조정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그해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監役)에 제수되고, 1789년 사복시 주부主簿), 1790년 부도사, 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 판관을 거쳤다. 이후 안의(安義) 현감 · 면천(沔川) 군수(1797년)를 거쳐 양양(襄陽) 부사(1800년) 등 지방 수령으로서 자신의 이용후생론을 실험하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구체화하였다.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기 위한 이용후생론을 제시하며, 조선 사회의 편견과 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배청의식 속에서 수용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안의현감 시절은 열하 여행의 경험에서 본 것으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시절에는《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안설 按說》 등을 저술하였다.

 

정조 15년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직접 응하지는 않았다. 정조 21년(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은퇴와 죽음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배우고 신기술을 유치해야 하며 장사는 천한 것이 아니라는 이른바 북학파의 영수가 되어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하였다. 그는 작품에서 아무 실속 없이 양반이라는 자존심에 사로잡혀 허세부리는 자들을 조롱하고, 힘써 일하지 않는 게으른 풍조가 양반, 중인, 평민에게까지 확산되는 것을 지적했다. 또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자신의 작품에 실음으로서 논란거리가 되고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1798년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였다.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책을 지어 정조에게 바쳤으며,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정조가 죽자 노론벽파가 집권했음에도 1801년 치사(致仕)하고 물러났다.

 

순조 5년(1805)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사후 영향

그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그의 제자 중 한사람인 박제가는 윤가기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순조 즉위 후 노론벽파가 집권하면서 노론 북학파 사상 역시 이단시되어 정계에 발탁되지 못하거나 오히려 추방당했다. 후일 우의정을 지냈던 그의 손자 박규수는 그의 실학 사상을 계수하여 개화 사상을 열어준 인물로 비중이 크다. 그가 가지는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 그의 문집은 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였고, 사후에도 간행되지 못했다. 그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는 고종우의정에 올랐지만 그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다.

 

그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은 1900년에 비로소 초록 형태로 처음 서울에서 공간될 만큼 간행이 늦었다. 1910년에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의 시호를 받았다. 1900년 김만식(金晩植) 등 23인에 의하여 경성부에서 처음 그의 문집을 초록한 형태로 간행되었고, 1910년 조선이 멸망한 뒤에 비로소 그의 저서와 학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사상과 신념

양반 특권에 대한 비판

박지원은 소설 양반전을 써서 양반의 특권과 횡포를 신랄히 풍자했다. 그에 의하면 양반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해도 꺼리낄 것이 없으며 죄를 묻지 않는 이상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늘이 백성을 낳았는데 그 백성이 넷이다. 그 중 으뜸은 사(士)로다. 양반이라고도 일컬으며 이익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밭을 갈지 않고 장사를 하지 않으며, 글과 역사를 조금만 공부하면 크게는 문과에 합격하고 적어도 진사가 된다. 문과의 홍패는 두 자에 지나지 않지만 온갖 물건을 얻을 수 있으니 돈자루라고도 할 수 있다. 진사는 40세에 첫 벼슬을 해도 큰 고을의 남항(南行, 음직, 음서 제도와 같은 말로. 학식과 덕행이 특출하여 추천되었거나, 가문 덕에 하는 벼슬) 수령으로 가서 잘만 풀리면 귀가 양산 그늘에 휘어지고, 배는 종놈의 대답 소리에 저절로 불러지고, 방에는 노리개로 기생을 두고, 뜰에는 명학을 기른다.'며 양반의 무위도식을 조롱했다.

 

또한 시골의 선비, 혹은 낙향해서 생활하는 선비들에게도 풍자를 가하였다. '궁한 선비가 시골에 살더라도 꺼리낄 것이 없다. 이웃 소를 함부로 가져다가 먼저 밭을 갈고 마을 사람들을 함부로 불러다가 김을 매도 누가 감히 거역하겠는가? 네 코에 재를 붓고, 뜨거운 물을 붓고, 함부로 상투를 꺼들고, 수염을 뽑아도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정쟁에서 초연하거나 불의를 보고 낙향한 것처럼 행세하던 선비들 역시 낙향한 시골에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고결함을 가장한 위선을 질타하였다.

 

 

평가

홍대용·박제가(朴劑家)와 함께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써 독특한 해학(諧謔)으로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문학 세계

 

 

저서의 하나인 연암집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暉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 可也, 復謂之赤烏, 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날개보다 더 검은색이 없긴 하나 얼핏 옅은 황금색이 돌고, 다시 연한 녹색으로 반짝인다. 햇볕이 비추면 자주색으로 솟구치다, 눈이 어른어른하면 비취색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저 사물은 본디 정해진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리는 것이다. 어찌 그 눈에서만 판정할 따름이랴? 보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에서 미리 판정해 버린다.

 

박지원의 문학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그만의 독특한 글투를 지향했다. 이러한 그의 글쓰기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연암체’라고 불렀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일러 ‘조선풍(朝鮮風)’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노래’란 뜻이다.

 

그는 자신의 실학 사상을 소설을 통해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자신이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 양반들이 실속 없이 허울 좋은 이름만 내세우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10편의 한문 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이들을 풍자하였다. 〈양반전〉은 조선 왕조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士) 계급의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위의식을 배격하면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한 〈광문자전(廣文者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등은 양반 계층과 도학자의 도덕적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여 사회 개혁 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로운 성정(性情)을 표현하기 위해 신문체를 수립함으로써 이덕무, 박제가 등의 한학신파의 4가를 낳게 했으며 문학을 통해 양반계급의 해체를 통찰하고 이를 비판, 새로운 현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문학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사실주의 문학을 수립했다. 청나라 문학인들과 사귀며 정치·음악·천문·경의(經義) 등에도 관심을 갖고 연경에 갔다온 기행을 쓴 《열하일기》의 대문장 26권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마장전>,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비록 그 표기가 한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빛나는 걸작들이다.

 

그는 <양반전>을 통해 몰락해 가는 조선 사회를 풍자했으며, <호질>에서 유학자의 전형적인 위선을, <민옹전>에서 몰락해가는 무인들의 울분을 반영하여 당시 사회의 이면사(裏面史)가 되어준다. <허생전>에서는 전시대의 허균이 쓴 《홍길동전》과 함께 현실과 유토피아 세계를 교착시키며 날카로운 사회비판의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은 근대적 비판의식의 소산으로, 여러 가지 인간 유형을 통해 리얼리즘의 전통을 이룩하였고,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써 양반계급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등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인물평

 

 

박지원

박지원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의 아들인 박종채가 《과정록(過庭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큰 키에 살이 쪄서 몸집이 매우 컸으며 얼굴은 긴 편이었고, 안색이 몹시 붉었으며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눈에는 쌍꺼풀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현재 남아있는 박지원의 초상화와도 거의 일치한다. 또한 박지원은 목소리가 몹시 커서 그냥 말을 해도 담장 바깥의 한참 떨어진 곳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박지원 자신의 중년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한 점 있었지만 연암은 그 초상화가 본래 자신의 모습의 7할도 못 미친다며 없애버리게 했고, 다시 그리자는 아들의 간청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박지원은 다른 사람과 쉽게 타협을 할 줄 몰랐던 성격이었다. 김기순은 박지원에 대해 "연암은 순수한 양기를 타고 나서 반 푼의 음기도 섞여있지 않으니, 지나치게 고상해서 매양 부드럽게 억누르는 공력이 모자라고, 지나치게 강해서 항상 원만한 면이 부족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박지원 자신도 "일생 동안 이런 저런 험한 꼴 다 겪은 것은 모두 내 성격 탓이다", "이는 내 타고난 기질의 병이라서 바로잡으려고 한 지 오래되었지만 끝내 고치지 못했다."라고 인정하고 있기까지 하다. 실제로 박지원은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 안의현감이나 면천군수 등의 관직을 지내긴 했지만, 끝내 조정의 요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박필균(朴弼均, 돈령부지사 역임, 시호는 장간)
  • 아버지 : 박사유(朴師愈)
  • 어머니 :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창원(李昌遠)의 딸
    • 형 : 박희원(朴喜源, 1730년 - 1787년)
    • 누나 : 반남 박씨
  • 부인 : 전주 이씨, 이보천의 딸
    • 첫째 아들 : 박종의(朴宗儀, 1766년-1815년) - 박지원의 형인 박희원의 양자로 입적.
    • 둘째 아들 : 박종채(朴宗采, 1780년-1838년)
      • 손자 : 박규수, 박종채의 장남
    • 아들 : 박종간
  • 장인 : 이보천
    • 처남 : 이재성(李在誠) : 열하일기에 '중존'(仲存)이라는 자로 논평을 달았다.
  • 처삼촌 : 이양천
  • 외할아버지 : 이창원(李昌遠)
  • 삼종형 : 박명원(朴明源)
  • 친족 : 박준원
    • 친족 : 수빈 박씨, 정조의 후궁, 순조의 생모.

 

 

주요 저서와 관련서

  • 열하일기》(1780-1793) : 호질, 허생전 수록
    • 리상호 역, 열하일기. 보리. 1780-1793/1955/2004  : 완역
    • 김혈조 역, 열하일기. 돌베개. 1780-1793/1955/2009  : 완역
    •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역,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 (하). 그린비. 1780-1793/2008  : 발췌역
  • 《연암선생 서간첩》(1796-1797)
    • 박희병 역,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베게. 1796-1797/2005
  • 《과농소초》(課農小抄, 1799)
    • 최홍규 역, 국역 과농소초. 1799/1987. ISBN 2004246000419
  • 《과정록》(過庭錄, 1826) : 차남 박종채가 쓴 박지원 평전
    • 김윤조 역주, 역주 과정록. 태학사. 1826/1997
    • 박희병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1826/1998
  • 연암집》(1900년 초간) : 양반전 수록
    • 신호열/김명호 역, 연암집. 돌베게. /1900/2007  : 완역
    • 홍기문 역,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 보리. /1900/2004 : 발췌역
  •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주요 문학작품

  • 《마장전(馬駔傳)》
  • 《민옹전(閔翁傳)》
  • 《양반전(兩班傳)》
  •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 《허생전(許生傳)》
  • 《호질(虎叱)》
  • 《우상전(虞裳傳)》
  • 《광문자전(廣文者傳)》
  •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 《김신선전(金神仙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