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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98 : 조선의 역사 340 (제22대 정조실록 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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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98 : 조선의 역사 340 (제22대 정조실록 6)

두바퀴인생 2012. 12. 13. 07:45

 

 

 

 

한국의 역사 798 : 조선의 역사 340 (제22대 정조실록 6)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제 22대 정조실록(1752~1800년, 재위 :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1781년 규장각 청사는 모든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도총부 청사로 옮기고,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하여 보관하도록 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학자들은 승지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저녁으로 왕을 문안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 하여금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우문지치(右文之治, 학문 중심의 정치)'와 '작성지화(作成之化, 만들어 낸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라는 규장각의 2대 명분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의 이 같은 규장각 중심의 정치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당쟁은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영조 때 형성되었던 외척 중심의 노론은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며 벽파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의 일부 노론이 시파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시파는 '시류에 영합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고 벽파는 '시류는 무시하고 당론에만 치우져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조는 학문적으로 육경 중심의 남인 학파와 친숙하였고, 예론에서도 왕권의 우위를 주장하던 남인 학파 내지 남인 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었다. 그리고 신권을 주장하였던 노론 중에서도 젊은 자제들이 북학사상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학자적 소양에도 호응하고 있었다.

 

정조가 중용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은 남인 계열의 채제공을 비롯하여 실학자 정약용, 이가환 등과 북학파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었다.

 

이처럼 정조가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모든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정국을 이끌어가자 조정은 당연히 정조의 통치이념에 찬성하던 시파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벽파는 자신들의 위기 상황을 실감하고 종전보다 더 똘똘 뭉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벽파는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를 기점으로 서서히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신해박해는 천주교 수용 여부에 대한 논란 끝에 결국 수용불가 결정이 나면서 일어났다.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은 양반으로서 천주교를 신봉하던 인물이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자 천주교를 의식에 따라 상을 치렸다. 이 일로 그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인척이자 같은 천주교이던 권상연이 그를 비호하고 나서면서 이 문제는 정치 쟁점화되어 조정은 서구 문화 수입을 공격하던 공서파(벽파)와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던 신서파로 갈라져 정면 충돌하였다.

 

이에 정조는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권성연과 윤지충을 국문케 하여 사형시켰다. 이 때문에 조정의 대세는 벽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4년 뒤인 1795년 중국의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으로 벽파는 또 한 번 기세를 떨치게 된다.

 

이때 남인의 실학자로서 차기 정권의 주자로 인식되고 있던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채제공이 죽자 남인 세력은 완전히 위축되었고, 이듬해 정조가 죽음으로써 남인은 거의 축출당한다. 그나마 친위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파들 역시 일부 노론 출신의 외척 세력만 남고 대부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24년 만에 정조의 문화정치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가 남긴 크나큰 업적들이 있었다.

 

우선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쥬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졌고, 영조 때부터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오던 문물제도 정비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 결과물이 이때 편찬된 속오례의,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들이었다.

 

한편 그의 문화정치는 중인 이하의 평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위항문학을 낳기도 했다. 인왕산의 경아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인 이하의 위항인들이 귀족문학으로만 인식되던 환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라는 그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 시집인 <풍요속선>을 발간하는 등 대단한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정조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 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였다. 그러한 문예 부흥을 가능케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댑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렸하게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는 '동국진체'라는 국서풍이 유행하였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 문화인 건륭 문화의 수입이 자극되어 조선 후기는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문예 부흥의 선봉에 서 있었던 정조는 1800년 6월, 49세가 되던 해에 지병으로 앓고 있던 종기가 도져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는 효의왕후를 비롯한 5명의 부인에게서 4명의 자녀를 얻었으며, 능은 건릉으로 경기도 수원시에 있다. 대한제국 성립 후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가 되었다.

 

 

 

 

2. 정조의 가족들

 

정조는 효의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5명의 부인에게서 4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효의왕후와 원빈 홍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 수빈 박씨가 세자 공(순조)과 숙선옹주, 회빈 윤씨가 딸 1명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이들 중 문효세자는 어린 나이에 죽은 탓으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생략하고, 효의 왕후의 삶을 간단히 추려 적는다.

 

 

가족 관계

  • 증조부 : 조선 제19대 왕 숙종
  • 증조모 : 숙빈 최씨
  • 조부 : 조선 제21대 왕 영조
  • 조모 : 영빈 이씨
    • 부 : 장조(장조의황제) - 사도장헌세자(추존)
    • 모 :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
    • 양부 : 진종(진종소황제 효장세자)
    • 양모 : 효순소황후 조씨(현빈 조씨)
    • 왕비 : 효의선황후 김씨(孝懿王后 金氏:1753년~1821년)
    • 후궁 : 의빈 성씨(宜嬪 成氏:1753년~1786년)
      • 아들 : 문효세자 향(文孝世子 享:1782년~1786년) - 조졸
      • 딸 : 옹주 (1784년 ~ ?) - 조졸
    • 후궁 : 현목수비 박씨(顯穆綏妃 朴氏:1770년~1822년)
      • 아들 : 순조숙황제 공(純祖 玜)
      • 딸 : 숙선옹주(淑善翁主) : 영명위 홍현주에 하가
    • 후궁 : 원빈 홍씨(元嬪 洪氏:1766년~1779년) - 홍국영의 누이. 인숙(仁淑)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나 곧 폐해짐.
      • 양자 : 상계군(常溪君:1769년~1786년, 생부는 양부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
    • 후궁 : 화빈 윤씨(和嬪 尹氏:1765년~1824년)

 

 

 

 

효의 왕후 김씨(1753~1821년)

 

좌참찬 김시묵의 딸이다. 1762년 10세 때 세손비로 책봉되어 정조와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오아비로 진봉되었다. 그녀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빈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기에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또 우애가 극진하여 고모인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혔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왕자그이 자녀들을 돌보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 사가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그래서 수진궁과 어의궁에 쓰고 남은 재물이 있어도 궁중의 물품은 공물이라 하여 일체 사가에 보내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채 1821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처례 존호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능은 경기도 수원의 건릉이다.

 

 

 

의빈 성씨(1753~1786년)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1786년)는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후궁으로,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를 낳았다. 본관은 창녕(昌寧). 정조의 다른 후궁들은 간택되어 들어온 후궁들이나, 의빈 성씨는 궁녀 출신의 후궁이다. 화빈 윤씨 처소의 궁녀 출신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는 없다.

 

1753년(계유) 음력 7월 태어났다. 1773년,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군주, 청선군주와 함께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였다. 이 책은 본래 규장각 소장이었다가 서울대를 거쳐 전쟁 중에 고서 수집가 홍두선이 입수했다.

 

1782년(정조 6년) 음력 9월 7일, 궁인 신분으로 왕자를 낳았고, 11월 27일에 왕자가 원자로 봉해지면서 한달후인 12월 28일에 정3품 소용(昭容)의 첩지를 받아 정식 후궁이 되었으며, 2달뒤인 1783년 2월 19일에 정1품 빈으로 승격되어 의빈(宜嬪)의 빈호를 받았다. 원자는 1784년(정조 8년) 음력 7월 2일에 정식으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에는 딸을 낳았지만 첫 돌을 넘기기도 전에 잃었다. 1786년(정조 10년) 음력 5월 11일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죽었고, 같은 해 음력 9월 14일 의빈 성씨도 세 번째 출산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갑작스레 사망했다.

 

이에 정조는 그녀의 상제를 영빈이씨 장례의 예에 따라 1등 후궁의 예로 치러 주었다. 같은 해에 죽은 아들 문효세자와 함께 효창원(현재 효창공원)에 묻혀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강제 이장되어 지금은 서삼릉의 후궁 묘역에 묻혀 있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무덤에 각각 죽음을 애도하는 어제 신도비(御製神道碑)를 내렸는데 현재 모두 서삼릉에 옮겨져 있다.

 

의빈 성씨는 MBC 드라마 '이산'에서 정조를 사랑한 녀로 나온 한지민씨가 연기한 바 있다.

 

 

가족 관계

  • 아버지 : 증찬성 성윤우(成胤祐) : 무관. 종2품 가선대부 벼슬까지 오름.
  • 남편 : 조선 정조
    • 아들 : 문효세자(1782-1786)
    • 딸 : 女(1784-1785)
  • 오라비 : 성담 (成湛) : 무과 합격
  • 오라비 : 성완 (成浣) : 아들 성순민(成舜民)이 첨정 벼슬에 오름
  • 동생 : 성흡 (成洽, 1762 임오-?) : 정조 8년(1784) 무과 합격

 

의빈 성씨를 연기한 배우

  • 한지민 (성년) - 2007~2008 MBC 드라마 이산 (5-74회, 마지막회 출연)
  • 이한나 (유년) - 2007~2008 MBC 드라마 이산 (1-4회, 마지막회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