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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97 : 조선의 역사 339 (제22대 정조실록 5) 본문
한국의 역사 797 : 조선의 역사 339 (제22대 정조실록 5)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제 22대 정조실록(1752~1800년, 재위 :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문예 부흥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려 했다. 그의 이 같은 문화정치를 가능케 했던 것은 규장각과 실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론 권신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게 전개되었다.
정조는 1752년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으로 1759년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762년 아버지 시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횡사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왕 수업에 들어갔다. 이후 1775년 82세의 연로한 나이의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켰고,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그는 25세의 나이로 조선 제 22대 왕에 즉위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듯이 정조 역시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홍국영 등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나갔고,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살아야 했다. 그래서 '개유와'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나라 건륭 문화에 열중하면서 전혀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그의 태도는 달라졌다. 11세 이후 줄곧 가슴앓이로만 간직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횅하는 한편,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해 친위 세력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하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고,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었다. 도한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량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 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는 등 조정의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관리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으므로 이른바 '세도(勢道)'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홍국영의 세도정치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 지 얼마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조는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 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되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4년 세도정치 기간 동안 충실히 규장각을 확대하고 인재를 끌어모았다. 즉 모든 신하들의 눈을 홍국영에게 집중시킨 다음, 자신은 앞으로 평칠 문화정치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고의로 홍국영의 세도정치를 부추기거나 방치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가 규장각을 설치한 것은 단순히 왕실 도서관을 얻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는 규장각을 통해 인재를 모아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고 새로운 혁신정치를 펼치려 했다. 말하자면 규장각은 정조의 근위 세력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1776년 설치된 이래 규장각은 급속도로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기능도 다양해졌다. 창설 초기에는 사무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거나 편서, 간서 등의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외각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외각의 기능이 정착되자 3년 뒤인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그곳에 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배치하여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개국 이래로 능력과 학식에 상관없이 입신의 길이 막혀 있던 서얼들에게 조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터줌으로써 사회의 분위기를 집안과 당파 위주가 아닌 능력과 학식을 중심으로 끌고갈 수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운영하면서 당하관의 소장 관원 중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두 차례 시험을 실시하여 상벌을 내리는 방법을 택했다. 또한 각 신핟즐은 초계문신의 시험관이 되게 했으므로 규장각은 실질적인 경연관으로 왕과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등을 대리 찬술하는 일에서부터 편서와 간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했다.
1780년 홍국영이 제거될 무렵, 규장각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찿고 있었고 규장각에 모여든 인재도 적지 않았다. 그 무렵 정조는 친정체제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홍국영을 방출시킨다.
홍국영을 방출시키면서 친정 분위기를 정착시킨 정조는 그동안 시험 가동한 결과를 바탕으로 1781년부터 본격적으로 규장각 확대 작업에 돌입했다. 그가 후에 규장각 설립 취지에서 밝힌 바대로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그 선법이 헤이해져 종래의 타성에 젖어 있으므로 왕이의도하는 혁신정치의 중추로서의 규장각"이 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규장각
규장각(奎章閣)은 조선 후기의 왕실 학문 연구 기관이자 왕실 도서관이다. 역대 임금의 시문과 저작, 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보관하고 수집하였다.
세조 때에 양성지가 임금의 시문을 보관할 규장각을 두기를 청하였으나, 실시하지는 않았다. 이후 숙종 때에는 작은 전각을 마련하여 ‘규장각’이라 이름하였으나, 직제는 갖추지 않았다.
정조가 즉위한 뒤 1776년(정조 1년) 음력 9월 25일에 창덕궁 금원의 북쪽에 규장각을 세우고, 제학·직제학·직각(直閣)·대교(待敎)·검서관(檢書官) 등의 관리를 두었다. ‘규장’(奎章)은 임금의 시문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규장각은 그 이름대로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역할을 하였다.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文翰)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 시험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하였다. 규장각은 조선 후기의 문운을 불러일으킨 중심기관으로 많은 책을 편찬했으며, 여기에는 실학자와 서얼 출신의 학자들도 채용되었다.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으며, 규장각은 1910년 일제 강점기에 폐지되었다가, 해방 이후에 일부 남아 있는 도서가 서울대학교 규장각(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으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당시 왕권을 위협하던 척리(戚里)·환관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을 모아 경사를 토론케 하여 정치의 득실과 백성의 질고(疾苦) 등을 살피게 하는 데 있었다. 또한 문교를 진흥시키고 타락된 당시의 풍습을 순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 세력을 형성시켜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다. '우문지치'는 문치주의와 문화국가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정조는 많은 책을 출판하도록 하였다. '작인지화'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규장각에서 정조가 유생들을 모아 그 중에서 젊은 문신(文臣)을 뽑고, 뽑힌 신하들을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시험을 보게해서 평가하였다.
규장각의 구성
규장각에는 문관 총 6명, 잡직 총 35명, 이속 총 86(82, 86)명이 있었다.
품계 | 관직 | 정원 | 비고 |
---|---|---|---|
종1품 정2품 종2품 |
제학(提學) | 총 2명 | |
종2품 정3품 당상관 |
직제학(直提學) | 총 2명 | |
정3품 종3품 정4품 종4품 정5품 종5품 정6품 종6품 |
직각(直閣) | 총 1명 | |
정5품 종5품 정6품 종6품 정7품 종7품 |
대교(待敎) | 총 1명 | |
문관 총원 | 총 6명 |
잡직(雜職)으로 각감(규장각 청사 관리) 2원, 사권(도서 및 문헌 총괄) 2원, 검서관(도서 관리) 4원, 영첨(문헌의 이름표 관리) 2원, 사자관(문서 필사 관리) 8원, 화사(그림 자료 관리) 10원, 감서(서적 수량 관리) 6원, 검률(법률서적 관리) 1원과 임시직으로 겸검서(검서관 보좌)가 있었다.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이속으로는 서리 14인(대전통편에서 10인을 두었으나 대전회통에서 다시 14인으로 복원), 서사 2인, 겸리 6인, 정서조보리(조보의 비치와 관리) 2인, 각동 10인, 직 2명, 대청직 2명, 사령 15명, 인배 4명, 간배 4명, 조라치 2명, 방직 2명, 수공 2명, 군사 7명, 구종 6명, 정원사령 2명, 궐외대령사령 1명, 근장군사 2명, 검서관사령 1명이 있었다.
외규장각
1782년에 강화도의 외규장각(外奎章閣, 외각)이 완성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內奎章閣, 내각)으로 이르고,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면서 외규장각이 소실되고, 서적은 프랑스로 약탈되거나 불에 타버렸다.
기타
역대 임금의 시문과 저작, 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보관하고 수집하였다는 점에서는 국립 중앙 도서관과 비슷하며, 《일성록》 등의 특정한 주제의 기록물을 간행하는 일도 담당했다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국회 도서관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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