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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96 : 조선의 역사 338 (제22대 정조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796 : 조선의 역사 338 (제22대 정조실록 4)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사후
그가 죽자 다산 정약용은 솔피시를 지어 그가 독살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경상북도의 남인계 선비 장현경 등은 그가 독살당했다고 주장하여 거병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기도 한다.
그는 생전에 아버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숭하지 못했지만 후일 가계상 그의 증손뻘이 되는 고종이 1898년(광무 1년) 장헌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한다. 그리고 그가 황제로 추존될 때 생부 장종 역시 장조 의황제로 추존한다. 생부를 복권, 추존하려던 그의 노력은 그로부터 120년, 정조 자신의 사후 98년만에 결실을 보게 된다.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으로 정해졌으며 그의 실록은 본래 정종실록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인 고종이 가계상 그의 증손자뻘이 되므로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면서 묘호를 종(宗)에서 조(祖)로 바꾸어 정조 선황제(正祖 宣皇帝)가 되었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공선왕(恭宣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능묘
정조는 생전에 부친 곁에 묻히고 싶어하였는데, 본래 능은 건릉(健陵)으로 아버지 장조가 묻혀 있는 융릉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1821년에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영돈녕부사 김조순은 현재의 건릉 자리가 흉지이므로 능을 천장하여 합장해야 한다고 순조에게 건의했고, 건릉은 현재의 자리로 천장되어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일화
- 조선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왕릉은 한양 4대문에서 8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88리 떨어진 현재의 수원으로 이장하려 하자, 대신들은 이장지가 한양 4대문에서 88리 떨어진 곳이라고 반대하였다. 이에 정조는 “이제부터는 수원을 80리라고 명하노라.”라고 하였다고하며, 그때부터 수원은 한양에서 80리가 되었다고 한다.
저서 및 작품
저서
- 《증보동국문헌비고》
- 《국조보감》
- 《대전통편》
- 《문원보불(文苑黼黻)》
- 《동문휘고(同文彙考)》
- 《규장전운(奎章全韻)》
- 《오륜행실(五輪行實)》
-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 《무예도보통지》
그림
- 필국화도
- 매화도
작품
- 충무공 이순신 신도비명(1794년)
-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
- 글씨, 정조어서
- 글씨, 근묵
연표
- 1752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차남으로 출생.
- 1758년 성균관에 입학
- 1759년 왕세손에 책봉됨
- 1762년 음력 2월 김시묵의 딸과 결혼,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 비명으로 사망, 동궁 정립
- 1762년 개인 도서관 개유와 설치
- 1764년 조부 조선 영조에 의해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의 양자로 입양됨
- 1765년 동궁에 책봉됨
- 1775년 대리청정 시작
- 1776년 영조 사망, 왕위에 오름
- 1776년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순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존, 사도세자에게는 장헌이라는 존호를 추숭
- 1776년 사도세자 사당 복구, 홍국영에게 승지와 숙위소대장직을 맡겨 친위세력을 강화함
- 1779년 원빈 홍씨의 죽음을 애도하여 손수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를 쓰다. 이는 국왕이 후궁의 행장을 직접 쓴 것은 유례없는 일이라고 한다.
- 1779년 홍국영을 축출하고 친정(정사 직접 주재)
- 1781년 규장각을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 1782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박팽년을 추모, 노량진에 조선육신 이라는 신도비를 세움
- 1789년 장헌세자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수원에 화성 쌓음
- 1793년 정조는 특명을 내려 임진왜란 때의 장수 이순신을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함
- 1794년 직접 이순신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으며 박지원등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문체에 반발, '문체반정' 주도
- 1795년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을 간행할 것을 명했다
- 1799년 아버지 장헌세자 저술 손수 편집, 예제 3권 남김
- 1800년 사망
가족 관계
- 증조부 : 조선 제19대 왕 숙종
- 증조모 : 숙빈 최씨
- 조부 : 조선 제21대 왕 영조
- 조모 : 영빈 이씨
- 부 : 장조(장조의황제) - 사도장헌세자(추존)
- 모 :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
- 양부 : 진종(진종소황제 효장세자)
- 양모 : 효순소황후 조씨(현빈 조씨)
- 왕비 : 효의선황후 김씨(孝懿王后 金氏:1753년~1821년)
- 후궁 : 의빈 성씨(宜嬪 成氏:1753년~1786년)
- 아들 : 문효세자 향(文孝世子 享:1782년~1786년) - 조졸
- 딸 : 옹주 (1784년 ~ ?) - 조졸
- 후궁 : 현목수비 박씨(顯穆綏妃 朴氏:1770년~1822년)
- 아들 : 순조숙황제 공(純祖 玜)
- 딸 : 숙선옹주(淑善翁主) : 영명위 홍현주에 하가
- 후궁 : 원빈 홍씨(元嬪 洪氏:1766년~1779년) - 홍국영의 누이. 인숙(仁淑)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나 곧 폐해짐.
- 양자 : 상계군(常溪君:1769년~1786년, 생부는 양부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
- 후궁 : 화빈 윤씨(和嬪 尹氏:1765년~1824년)
사상
송시열에 대한 관점
그는 평소 우암 송시열을 존경하여 그의 영정에다가 친히 어제시를 남겼다. 이는 송시열 생전인 1683년에 작성된 영정들 중 송시열 자신이 자신 스스로를 경계하는 사자성어를 쓴 영정의 중앙부 상단에 친필로 기입하였다. 즉위 후 정조는 송시열을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라 하여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하고 송시열의 문집과 자료를 모아 국비를 들여 송자대전으로 간행하였다.
“ | 송부자(宋夫子 우암 송시열) - 정조대왕 御製시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 하였다. |
” |
그가 송시열을 추모하며 친히 지은 어제 시 한수가 전한다. 이 시에서 정조는 송시열이 아니면 주자와 공자를 알수 없다고 표현하여 송시열이 아니고서는 바른 학문을 알수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송시열의 문하 사람인 김종수 (1728년)김종수가 세손 시절의 정조의 스승으로 그를 지도하였고, 노론의 당론에 저항하여 세손을 보호한 바 있다.
문체혁신에 대한 거부
박지원 등을 중심으로 고문과 옛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글이 발표되자 이를 경계한 정조는 문체반정을 선언하고, 박지원 등을 불러 견책을 준 뒤 고문, 옛 형식대로 따르도록 강제하였다.
평가
정조기는 문화적으로나 토지생산성으로나, 그 이후의 시기인 19세기에 비해 더 번영한 시기였다. 때문인지 19세기 세도정치로 왕권이 약화된 시점에서 이미 과거에 존재했던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여겨졌다. 후대 임금인 헌종이나 고종이 친정을 선포할 때 정조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도 이와 연관이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1990년대 이후 왕권 강화를 통해 노론 벽파를 견제하고 중앙집권화를 꾀한 점에서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이는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등의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고 이는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박시백 화백은 역사만화 조선왕조실록(휴머니스트)에서 정조를 빈틈없는 행정가, 유학과 무술 모두 완벽한 인물로 이해한다.
조갑제는 충무공을 역사속에서 살려낸 두 권력자가 정조와 박정희라 하였다. 조갑제는 정조를 김유신-세종대왕-정조-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실용-자주론자로 평가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정조와 다른 실용-자주론자들은 외래사상을 원산지보다도 더 극단화하고 신격화해왔던 명분론자들의 위선을 경멸하고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서 스스로 악당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이라 평가하였다. 또한 정조는 세종대왕, 광해군, 이승만, 박정희 등과 함께 권력을 잡고도 국민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과 약자의 편에 대한 동정심과 강한 자에 대한 정의감을 보존했던 이들이라며 높이 평가하였다. 그에 의하면 권력자의 부패하지 않은 이런 정신과 혼은 실용과 자주로 표현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기타
조선에서 내린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그는 조선의 기준으로 보면 정종이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황제로 추존되면서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正祖)로 바뀐 것이므로 정조는 대한제국에서 본 시각이다.
이름
정조는 아들을 많이 낳기 위해서 발음을 이산에서 이성으로 바꾸었다.
독살설
정조 사후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8월 18일 경상도 안동의 남인 출신 거족 여현 장현광의 후손 장현경과 그의 친족인 장시경 3형제 등은 정조의 독살을 주장하며 원수를 갚겠다고 거병하였다가 실패하고 일족이 처형당하였다.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된 정약용은 솔피시에서 고래(정조)가 해달(노론)에게 죽임당하였다고 하여 정조의 독살설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젊은 관료였던 정약용은 궁중의 내부 사정에 통달할만한 지위에 있지 못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정조 사후 정약용과 그의 당파인 남인이 몰락한 것과 관계 깊은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이후 소설가 이인화는 그의 저서 영원한 제국에서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였고, 김성진의 저서 박정희 시대, 이덕일의 저서 등에서도 노론에 의한 정조 독살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반론으로는 수은중독설, 약물중독설 등이 전한다. 정조 독살설의 원인으로 제기되는 것은 정조 사망 당시 정순왕후가 정조의 침전을 지키고 있었다는 점과 정조의 어의 중에 심환지의 일족이 있었다는 것 등이 제기되고 있다.
유봉학의 저서 정조대왕의 꿈에서는 독살설을 부정하고 있는데, 급서한 것이 아니라 거의 한 달에 가까운 투병이 있었고, 처방에 정조 자신이 관여한 것, 간병을 지휘한 사람이 소론 시파의 우의정 이시수였다는 것을 들어 독살설을 부정하였다. 수은 연기를 쐬는 연훈방을 처방한 의관 심연도 심환지와 성은 같은 심씨이나 일가친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정조의 사돈인 시파 김조순 등에 의해 벽파가 일망타진되었던 1806년 이른바 병인경화(丙寅更化)의 시기에도, 이후에도 정조의 독살설에 대해 이와 관련된 문제제기가 나온 적이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라는 저서에서 인조 반정 이후의 상황을 들어 선조 독살설을 부인했듯이 유봉학도 시파의 집권 과정의 상황을 들어서 독살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2009년 2월 정조가 심환지 등에게 보낸 어찰이 발견되면서 정조 독살설에 이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휘(諱)에 대한 논란
정조의 휘(이름)를 '성'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최신 연구에 따르면, 원래 산이었던 이름 글자를 정조 20년 자손을 번영을 기원하여 성으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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