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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94 : 조선의 역사 336 (제22대 정조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794 : 조선의 역사 336 (제22대 정조실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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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 세도
정조가 그가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한 것은 노론대신들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갑사 전흥문 등을 시켜 자객을 들여보냈고, 사도세자를 탄핵, 사형에 이르게 한 한사람인 홍계희의 8촌동생 홍계능과 홍계희의 조카 홍상간 등 홍계희 일족이 자객을 보내 그를 살해하려 하였으며, 정조의 외삼촌인 홍낙임 일가가 그를 제거하고 은전군을 추대하려 했다. 또한 정후겸과 그의 수하들 역시 정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된다. 정조는 홍국영을 각별히 신임하였는게 그를 시켜 이들 외척, 벽파 세력 제거에 착수한다.
즉위 초반 그는 세손 시절 세손궁 막료인 홍국영과, 노론 중 사도세자를 지지했던 유척기의 문하생들 그리고 자신의 세손 시절 스승인 김종수를 등용한다. 김종수는 노론이었음에도 원칙론자였고 당론에 반대하고 세손을 지지하였다. 세손 시절 스승이던 김종수는 즉위 초 그에게 아버지이면서 임금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되라고 충고한다. 아버지이면서 임금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되라는 김종수의 충고는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정조는 세손 시절에도 학문 연구와 독서를 즐겼지만 즉위 이후에도 경연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갈만큼 학구열을 보였다. 그의 유교 소양은 성리학과 이전의 유학의 가르침을 대부분 숙지했고, 직접 과거 시험을 주관하거나 성균관 관학 유생들과 사부학당(四部學堂)의 유생들을 찾아가 직접 시험할 수준이었다.
그는 홍국영에게 정승직을 임명하지는 않았지만 정사와 병권을 맡겨 노론벽파의 탄핵과 제거를 유도한다. 그러나 홍국영의 세도가 막강해지자 소론의 서명선과 노론 김종수 등은 홍국영의 권력이 과도하게 비대해짐을 알리며 그에게 경계할 것을 주문한다.
사도세자 복권 노력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사도세자에 대한 복권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임오화변 이후 금기의 대상이 된 사도세자는 국왕의 생부로서 금기, 언급기피의 대상에서 해제된다. 동시에 사도세자를 추숭할 추숭 도감(追崇都監)을 설치했다. 노론에서는 그가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음을 공언하며 그에게 압력을 가한다. 이어 사도세자의 묘호와 사당 이름을 정할 봉원 도감(封園都監)을 설치하려 했다가, 추숭도감에 통합시켜서 운용한다.
사도세자에게는 장헌이라는 존호를 더하여 사도 장헌세자로 일컫었고, 생모를 지칭하던 호칭을 혜빈궁(惠嬪宮)에서 빈(嬪)자를 가려 혜경궁(惠慶宮)으로 고쳤으며, 혜경궁의 조정문안 순위 역시 왕대비 다음이나 중궁보다는 앞서게 했다.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 수은묘(垂恩墓)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올리고,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그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려 격상시켜다. 그해 4월부터 8월까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개건, 수리하여 9월에 완공한다.
경상도 안동의 유생 이도현(李道顯)이 사도세자를 추숭하자는 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도현 부자를 사형을 처함으로써 즉위 초기 노론 벽파의 의구심에서 벗어나려 했다. 1776년 12월 그는 사도세자에게 태묘(太廟) 보다 조금 낮은 지위, 생모 혜빈에게는 역시 대비보다 조금 낮은 지위를 올린다. 그러나 이 자리에 동시에 사도세자의 추존 논의는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이후 생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계속 하였으나, 그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려 할 때마다 노론은 격하게 반발하였다. 결국 사도세자를 명예회복하고 시호를 내리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노론, 남인, 소론 중용과 친위세력 구성
1728년 이인좌의 난 이후 정계에서 소외된 남인과 소론을 발탁하였다. 특히 세손시절 스승의 한사람인 안정복을 중용하고, 그의 천거를 통해 정약용, 채제공 등을 중용하여 측근으로 두게 되었다. 이인좌의 난 이후 역적으로 몰려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노론의 탕평파와 원칙론자들을 등용하였다. 노론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특히 세손시절의 스승 중의 한사람인 김종수를 중용하여 자신의 측근으로 두고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는 노론의 당원이면서도 노론, 소론계 인사들의 일거수일투족과 그들의 성격, 특징 등을 정조에게 은밀히 보고하였고 이는 자신이 죽기 전까지 누설하지 않았다. 노론에서 당론으로 사도세자의 후손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유척기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김종수만이 당론에 도전하여 세손을 적극 감싸기도 했다.
특히 스승 김종수의 사상은 그에게 감동을 주었다. 김종수는 세손시절부터 그에게 아버지이면서 통치차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될 것을 여러 번 권고하였는데, 스승 김종수의 사상에 깊이 감명받은 그는 세손 시절부터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김종수는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등이 같은 서인이었음에도 인조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불의를 묵인하지 않고 공격했던 것과,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및 석견, 석철 3형제의 복권을 위해 노력한 점,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등이 인조와 효종 때부터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및 석견, 석철 3형제의 복권을 주장한 점, 서인 산림 김홍욱이 서인 공신세력과 귀인 조씨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민회빈 강씨의 복권과 석철의 석방을 주장하다가 장살된 것을 그에게 주지시켰다. 그는 김귀주-김관주 가문, 홍봉한-홍인한 가문, 화완옹주 가문, 숙의 문씨 가문 등 외척 세력의 타도와 공정한 절차로 인재를 선발하여 요순시대의 정치를 동방에 재구현해야 함을 늘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김종수는 외척 세력에 대항할 이로 심환지와 산림 송능상, 송덕상, 송환기, 김종후 등을 그에게 천거하였다.
노론 벽파 숙정작업
그후 영조 말년 이래 집권하여 오던 외척당 일당을 숙청하고 노론 청명당 계열을 등용한다. 이에 모역하다 발각된 홍상간(洪相簡)·정후겸(鄭厚謙)·윤양로(尹養老) 등을 주살하거나 유배하는 한편, 즉위 이듬해 그를 시해하고 은전군 찬을 추대하려다 발각된 홍상범(洪相範) 일당을 주살하였다.
정조는 즉위 초기 대리청정을 방해하고 세손의 오른날개(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고모 화완옹주는 신분을 강등시키고 홍인한, 정후겸 등에게 사사를 명하였다. 숙의 문씨의 오라비 문성국 일가를 참수하고 그 어미는 제주도의 여종으로 보내고 숙의 문씨 역시 사사시켰다.
한편 영조 외척당의 실세이자 세손의 외조부인 홍봉한도 탄핵을 받았으나 정조는 끝내 그를 보호해 주었다. 정조의 외숙인 홍낙임은 1777년 홍상간 등의 궁궐자객침투 사건에 연루자로 이름이 올랐으나, 혜경궁의 요청으로 직접 국문 끝에 정조는 홍낙임을 석방한다. 이 사건에 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 이찬의 이름이 추대 대상자로 올라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그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이찬은 처음에는 자결을 거부하다가 끝내 사사당했다.
그 와중에 능력과 학식 있는 인물을 위주로 대거 등용하여 국왕 친위 세력을 키워 나갔다. 특히 왕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경호해 온 홍국영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궁궐을 호위하는 숙위소 대장과 도승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1780년에는 홍국영을 지방으로 방출시켰으며 이후부터 노론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정조는 영조가 왕실 척족들을 중용해 외척당이 득세하게 한 것과는 반대로, 12년에 이르는 동안 외척 세력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켜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홍국영 숙청과 친정 체제 구축
홍국영에게 숙위소 대장과 승정원 도승지를 겸하게 하고 병권까지 부여하였으나 그의 권력 농단이 강해지자 원칙론자인 김종수 등을 통해 비판하게 한다. 홍국영은 1778년 음력 6월 자신의 누이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인 후 왕실의 외척 자격으로 권력을 행사하였고, 왕실 계승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1779년 음력 5월 원빈 홍씨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강화도에 이배된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 담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들이게 한다. 노론 대신들은 왕의 나이가 젊음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홍국영은 상계군의 양자 입양을 강행했고, 상계군 담은 완풍군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러나 1780년 원빈 홍씨가 효의왕후의 손에 죽었다고 의심한 홍국영이 나인을 시켜 효의왕후전 수라간과 주변에 독을 풀어놓은 것이 발각되면서 그를 제거한다. 처음에는 자발적인 은퇴 권고로 흑두봉조하를 만들었다가 뒤에 방출시킨다. 이후 그는 김종수와 서명응, 채제공 등을 등용하여 친정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홍국영은 숙청되었으나 왕이 특별히 신임하는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세도 정치의 폐단을 남기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정조는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 세력을 형성시켜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다. '우문지치'는 문치주의와 문화국가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정조는 많은 책을 출판하도록 하였다. '작인지화'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규장각에서 정조가 유생들을 모아 그 중에서 젊은 문신(文臣)을 뽑고, 뽑힌 신하들을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시험을 보게해서 평가하였다.
한편으로는 각 당의 원칙론자들을 등용하면서 노론의 원칙주의자도 포섭, 송시열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고 노론의 강경파 중 청렴한 인물인 김종수 등을 신임하기도 했고, 그와 홍국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재야의 산림학자인 송덕상, 송능상, 김종수의 형 김종후 등을 중용하기도 했다. 정조는 개인적으로 원빈 홍씨를 총애하였는데 원빈이 죽자 정조는 손수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을 썼다. 국왕이 후궁의 행장을 직접 쓴 것은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학문적 치적
그는 또한 영조 때부터 시작된 문물 제도의 보완 및 정비 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정조는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2차례씩 시험을 치렀으며 상과 벌을 직접 내리기도 했는데, 소외받던 남인과 영남계 인사들도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또한 서북인(西北人)을 채용하였으며, 서인(庶人)도 기용했다. 특히 남인학자를 우대하여 주자학의 공리 공론적인 학풍을 배격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實學)이 크게 발전하였다.
왕세손 때부터 활자에 관심이 깊어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는 한편으로 서적 편찬에도 힘을 기울여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文苑黼黻)》, 《동문휘고(同文彙考)》, 《규장전운(奎章全韻)》, 《오륜행실(五輪行實)》 등을 간행하게 했고, 정조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도 완성했다. 또한 그는 이덕무와 박제가를 시켜 실제 전투 기술을 다룬 훈련서인 《무예도보통지》를 펴내기도 하였다.
제도 개편에도 힘써 형정(刑政)을 개혁, 악형을 금지시켰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 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 한편 빈민의 구제를 위해 자율전칙(字恤典則)을 반포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중인 이하 평민에게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조 시대는 양반은 물론, 중인, 서얼, 평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 문화를 크게 꽃피운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했다.
정치 문제와 천주교
안동 김씨들이 정치 일각에 집권하면서, 나중에 세도 정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당시 사회 문제로 대두된 천주교에 대해서는 정학(正學), 즉 성리학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그러나 충돌이 전혀 없지는 않아 1791년에는 신해교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즉, 정조는 천주교를 성리학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는 일시적인 종교현상으로 보아 호의를 보이거나 온건하게 대하였으나, 권상연과 윤지충이 조상의 신주를 소각하고 천주교 예식으로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진산사건에 대해 사형으로 강경하게 처벌함으로써 외래종교인 천주교가 유교전통을 부정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는 강온정책을 실시한다.
게다가 정조 사망 이후 정치적으로 정조와 대립하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조선 천주교회는 대부분 천주교 신도인 남인들이 제거된 신유박해(1801년), 오가작통법 실시 등의 조직적 탄압이라는 수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주로 시파였던 안동 김씨, 풍산 홍씨 일파 등은 벽파에게 박해를 많이 받았다.
왕권 강화책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인 수은묘를 처음에는 영우원으로 격상켰다가, 다시 양주에서 수원으로 천장하여 현륭원이라 이름짓고 정기적으로 참배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정조는 암행어사를 비밀리에 자주 파견하여 지방 사회의 문제점을 직접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들에 대한 정부의 통치력이 강화되었다. 또한 왕실 직속 친위대인 장용위를 신설하였는데, 초반에는 5위와 비슷한 위로 출발하였으나 곧 장용영으로 격상시켰다. 장용영의 설치를 통해 친위대 설치는 물론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임금의 최고 통수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장용영 설치는 군대를 장악한 노론을 견제하려는 정책이었다.
1782년 정조는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박팽년을 추모하여 노량진에 조선육신 이라는 신도비를 세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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