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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93 : 조선의 역사 335 (제22대 정조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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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93 : 조선의 역사 335 (제22대 정조실록 1)

두바퀴인생 2012. 12. 8. 07:20

 

 

 

 

한국의 역사 793 : 조선의 역사 335 (제22대 정조실록 1)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제22대 정조

 

정조(正祖, 1752년 음력 9월 22일 ~ 1800년 음력 6월 28일)는 조선의 제22대 임금이다. 는 산(祘), 는 형운(亨運), 는 홍재(弘齋)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10세에 요절한 백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했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1776년부터 180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776년부터 1780년까지 홍국영실권을 잡았고 홍국영을 축출한 해인 1780년부터 180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을 등용,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였으나 한편으로 노론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으며,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된 노론벽파와의 정치적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노론벽파의 일원인 김종수,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는 등 복잡한 측면이 있다. 또한 홍국영의 기용 이후, 특별히 중용한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세도 정치의 폐단을 남기기도 한다.

 

재위기간 중 중앙집권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군주로 평가된다. 서예에도 능했고, 그림에도 능하여 필국화도, 매화도 등을 남기기도 했다.

 

박지원 등의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문장에 반대하였고, 서인성리학자이자 예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평소 존경하여 즉위 후 그를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능은 수원(水原)의 건릉(健陵)이다. 학문적으로는 안정복김종수의 문인이다.

 

 

 

생애

 

세손 시절

 

 

 

정조어서, 정조가 세손 시절인 8세때 직접 쓴 한글 편지

 

 

정조는 1752년(영조 28년) 음력 9월 22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혜빈 홍씨(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손이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元孫)으로 호가 정해졌다. 그의 형인 의소세손이 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으므로 그는 바로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아 사서삼경을 암기하니 할아버지 영조가 그를 각별히 총애하였다. 1759년(영조 35년) 음력 윤 6월 22일 명정전(明政殿)에서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761년(영조 37년) 음력 3월 10일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음력 3월 18일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며, 이듬해인 1762년(영조 38년) 음력 2월 2일 어의궁(於義宮)에서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인 청풍 김씨(淸風 金氏)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3세에 이미 글을 알아보기 시작하였으며, 영조는 어린 손자의 사부로 김종수안정복을 세손궁 사부로 임명한다. 김종수는 붕당으로는 노론이었음에도 노론의 당론을 따르지 않고 사도세자와 정조를 영조의 정통 계승자로 규정하였다. 뒤에 사도세자가 사형당한 뒤에도 김종수는 어린 세손을 영조의 정통 계승자라 천명하고 충성을 맹약하였으므로 정조 즉위 후 그의 지우를 받게 된다.

 

안정복남인 실학자로 그 학통이 이황과 조, 정구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남인성리학의 대가이자 실학자, 역사가로 성리학자 겸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문하생이었다.

 

 

동궁 시절

 

 

 

할아버지 영조

 

 

아버지 사도세자소론에 동정적이었지만 그의 외가는 노론으로 외할아버지 홍봉한, 외종조부 홍인한노론의 지도급 인사였다. 어머니 혜경궁은 친정 쪽을 지지하고 남편 사도세자를 외면하였다. 노론의 지지를 받던 영조는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아들 사도세자를 못마땅히 여겼고, 정신이상이라는 핑계로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살려줄 것을 청하다가 병사들에 의해 끌려나가고 부친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부왕과 다른 정견을 피력하다가 죽임당한 것을 안 그는 일체의 정치적 발언을 삼가고 개유와라는 독서실을 짓고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개유와를 통해 그는 다양한 책을 수집, 다양한 독서를 한다. 성리학에서 병서, 그리고 청나라 사신들이 들고 온 서구의 서적도 접하게 된다. 그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것을 불안하게 여긴 홍봉한 가문과 또다른 외척인 정순왕후 가문, 고모 화완옹주와 그녀의 양자인 정후겸 등은 세손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세손궁의 막료로 배치된 홍국영이 기민한 재주로 그들의 음모를 차단한다. 한 번은 세손이 읽던 강목에서 서자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조는 서자에다가 천한 무수리 출신의 아들이라는 것에 오랫동안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영조가 세손이 공부하는 책을 불시에 검사하려 하자 노론측에서는 그가 강목을 읽었다고 보고했고, 노론의 무고를 예상한 홍국영은 서자 라는 부분을 모두 종이로 가려버렸다. 세손은 서자 라고 쓴 부분은 가리고 읽지 않았다고 했고, 강목의 해당 부분은 흰 백지로 가려져 있었다.

 

 

대리 청정

사도세자의 죽음에 개입된 노론내 명문가인 홍봉한가, 김한구가, 정후겸가 에서는 그를 제거하려고 간자를 심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외종조부 홍인한, 정순왕후의 친정인 김귀주, 김관주 일가, 고모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 파벌, 숙의 문씨의 일족 등이 세손을 공격했다. 세손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으나 외할아버지 홍봉한은 세손에게 상당히 비호의적이었다. 노론벽파는 세손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노론사도세자에 동정적이었던 유척기 계열과, 김상로의 조카손자뻘이지만 세손의 스승이던 김종수 계열, 사도세자와 평안도관찰사의 연락을 주도하다 사사된 조재호의 친족인 조재한 등은 그를 지지하였다.

 

1775년 24세가 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하자 좌의정 홍인한이 극구 반대했다. 홍인한은 부사직 심상운을 사주하여 반대 상소를 올리기도 했고, 경연장에 직접 나서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려는 영조의 말을 가로막고, 승정원 도승지와 승지들을 가로막고, 사관의 기록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영조는 세손의 손을 들어주어 대리청정을 하게 된다. 동시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얼마 뒤, 영조는 세손에게 병권과 순감군권을 넘겨주고, 부표를 넘겨준다. 이때 노론은 당론으로 들고 일어나 영조의 병권 이양을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할아버지 영조는 세손에게 병권을 넘겨준다.

 

할아버지 영조는 만년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금등 문서를 세손에게 공개한다. 금등 문서에 의하면 홍계희, 김상로, 김한구, 김귀주, 홍인한, 홍봉한 등이 사도세자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영조의 금등 문서 공개 정보를 입수한 노론은 세손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1776년 음력 3월 5일 영조가 경희궁(慶熙宮) 집경당(集慶堂)에서 83세로 승하하자, 음력 3월 10일 숭정문(崇政門)에서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조어서, 정조가 직접 쓴 글씨

 

 

3월 5일 영조가 경희궁의 집경당에서 사망한 후 5일간 애도기간을 거친 뒤 즉위하였다. 세손의 지위가 탄탄하지 못한 것을 염려한 영조는 그에게 군사의 점고와 순감권, 부표를 세손 대리청정 시에 이미 넘겨주었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홍국영을 시켜 병조한성부의 병력을 장악한다.

 

정조는 즉위 당일인 1776년 3월 10일 조회에서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하여, 종통은 비록 영조의 명에 의해 효장세자를 잇게 되었으나, 사도세자 또한 국왕의 생부로서 존중해야 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어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양아버지 효장세자를 진종 효장대왕으로 추숭하고, 양어머니 효순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상하였으나, 이어 청나라로부터 양부 효장세자에게 내려진 각민왕이라는 시호를 받아들였다. 물론 청나라에서 진종의 시호를 보낼 때 직접 맞이하는 등의 태도를 보였으나, 후일 정조에 대한 사후기록에서 정조는 이 당시의 진종 추숭을 그다지 마득지 않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다. 후에도 그는 원릉과 함께 사도세자의 묘역인 화성 현륭원에는 자주 방문해도 진종의 능침인 파주군 영릉에는 별로 방문하지 않는다.

 

즉위 초 세손 시절 세운 개유와를 본따 규장각을 설립한다. 규장각의 각신에는 과거 시험 급제자가 아닌 이들도 선발되었고, 서자와 중인 계층에서도 각신이 선발되었다. 이후 규장각은 기존의 노론계열 훈신과 척신들 위주로 채용된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을 대신할 그의 친위 문신세력 양성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