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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90 : 조선의 역사 332 (제21대 영조실록 12) 본문
한국의 역사 790 : 조선의 역사 332 (제21대 영조실록 12)
영조의 원릉 |
제21대 영조실록(1694~1776년, 재위 : 1724년 8월~1776년 3월, 51년 7개월)
5. 실학의 선구자들
홍대용은 누구인가?
홍대용(洪大容, 1731년 음력 4월 7일 ~ 1783년 음력 10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과학 사상가이다.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과 홍지(弘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북학파(北學派)의 학자인 박지원, 박제가 등과 우정을 쌓았으며, 학풍은 유학보다도 군국과 경제장려에 치중하였다.
생애
북학파의 선구자로서 일찍이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 배워 당대의 국학(國學)으로 인정되던 주자학이 담헌의 학문적 기초를 이루었다.
1765년(조선 영조 41년) 35세 때 숙부인 홍억(洪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3개월여를 북경에 묵으면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담론하며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한편 천문학·지리학·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쌓고 서양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또 천주당(天主堂)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 학습하고 독일 사람으로 청나라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을 하는 할레르슈타인(劉松齡)과 흠천감 부감(副監) 고가이슬(鮑友管) 등을 만나 면담했으며, 청나라 관상대(觀象臺)를 여러 번 방문, 견학하여 천문지식을 습득해 오기도 했다. 홍대용의 이와 같은 북경 방문은 당시의 여러 북학파 학자 중에서도 제일 처음의 일로서 실학의 도입에서 그 선구적 업적이 크다.
귀국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론을 기록한 유포문답과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답을 지었다. 지구의 자전설과 경제 정책의 개혁,과거 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를 통한 인재 등용 등 혁신적인 개혁 사상을 제창하였다. 또한 박지원,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과 교유를 계속하면서 정치·경제에 관한 학문을 연구하였다.
1774년영조 50 44세 때 귀국 후 수차 과거에 실패하고 음서 제도음보로 선공감 감역이 되고 그 뒤 세손익위사의 사직, 사헌부감찰·태인현감 등을 거쳐 1780년 영주군수 등을 지내면서 자기의 학설을 사회에 구현해 보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시대 환경에 억눌려 별 성과 없이 사망했다.
사상
북학파의 선구자로, 당시 조선에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개념이 없었으나, 처음으로 지구(地球)의 자전설 (自轉說)을 대중에게 설파하였다. 토지 등을 균등하게 분할하는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을 주장했으며, 특히 실사구시 정신에 따라 신분 제도 개혁을 위해 과거제를 없애고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를 고루 등용하며, 신분 등에 관계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과감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홍대용은 그의 저서 《의산문답》에서 보여 주듯이 인류의 기원, 계급과 국가의 형성, 법률·제도 등에서부터 시작하여 “놀고먹는 귀족 계급이 나라와 백성을 좀먹는다(所謂遊民倖位耗國病民 : 《계방일기》.”라며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양반계급에 대한 공격을 했는가 하면, 천문·율력(律歷)·산수 등 과학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이론을 전개했다. 천문 분야에서도 지구지전설을 주장하였는데, 17세기에 중국이 서양에서 이를 전해받았을 때 지지를 받지 못한 것과 대조된다.
저서
- 《담헌서》
- 《담헌설총》
- 《사서문의》
- 《의산문답》
- 《건정필담》
- 《주해수용》
가족 관계
- 사촌 : 홍대현
- 조카딸 : 군부인 남양홍씨
- 조카사위 : 은신군, 사도세자의 서자, 흥선대원군의 양할아버지
- 조카딸 : 남양홍씨
- 조카사위 : 김노경, 문신·추사 김정희의 양아버지
새 하늘을 연 홍대용(1731~1783년)
홍대용은 서인 노론파로서 목사를 지낸 바 있는 홍역의 아들로 1731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덕보, 호는 담헌, 홍지이다. 그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전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하였으며, 이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대의 유학자 김행원으로부터 배웠으며, 그의 사상은 북학파의 실질적 모체인 박지원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몇 번에 걸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774년 43세 때 음보로 종9품의 선공감 및 세손익위시직이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다. 이어 1777년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며 그 뒤 태인현감, 영천군수 등을 지내다가 1783년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그가 이른바 '북학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1763년 겨울에 북경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던 덕분이다. 성인이 된 뒤 천문학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던 그는 선진의 학문과 서학을 접하고 싶은 욕구에 가득 차 있었고, 이 때문에 평소 청나라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그 기회가 찿아온 것이었다.
조정이 정기적으로 파견하는 청나라 사절단에 그의 숙부인 홍억이 서장관으로 지명되자 그는 홍억의 비서역으로 북경을 방문한다. 12월에 북경에 도착한 사절단 일행은 이듬해 2월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그곳의 학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홍대용과 교류를 나눈 사람은 육비, 엄성, 반정균 등 청나라 문인이었다. 그는 이들과 필담을 주고받으며 유학에 관한 이론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역사, 종교, 풍속 등에 고나해 집중적으로 토론하였다. 그는 이 필담을 정리하여 <건성필답>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한편 그는 북경에 체류하면서 청나라 국립 천문대인 '흠천감'을 방문하여 그 책임 부서에 있는 두 명의 독일인에게서 서양의 지식을 직접 전해듣고, 자신이 홀로 연구해온 천문학에 관한 의견을 들려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소개로 북경의 천주교 교회에 있던 많은 천문학 전문서와 천체 관측시설을 들아본다.
흠천감에서 특히 그의 눈길을 끈 것은 관상대였다. 그 내부는 외부인에게 공개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그는 밤을 새우며 그곳 관리에게 부탁해 마침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에는 중국 역대 천체 관측기구는 물론이고 유럽에서 들여온 것들도 많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그는 기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한 감동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후 북경에서 돌아온 홍대용은 청에서 사권 친구들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 받으며 자신의 학문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자신의 경험담에 감동을 받아 북경 방문을 염원하던 이덕무, 박제가 등이 사절단으로 청나라를 방문할 때 북경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들의 안내를 부탁하기도 했다.
홍대용은 북경의 세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들을 모아 <항전척독>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엮었다. 그리고 북경 방문 내용을 집약시켜 <연기>를 편찬했는데, 이는 박지원에게 영향을 미쳐 <열하일기>를 탄생시키게 된다.
또 그의 과학사상을 담은 <의문산답> 역시 북경 방문에서 얻은 과학적 지식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의무려산에 사는 실옹과 조선의 학자 허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글은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모든 저서들은 60여 일 동안 머물렀던 북경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곧 그에게는 북경 방문이 새 하늘을 열리는 일이었고, 새 땅을 꿈 꿀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고, 그런 그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문집이 <담헌서>이다. 여기에서 그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전설을 주장했고, 인간도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생명론,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는 무한하다는 '우주무한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상대주의적 자연관에 근거한 것으로 정치, 경제, 사회, 사상에 이르기까지 확대된다.
그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중국과 서양을 모두 같은 선상에 놓고 상대화하여 서구에 대한 오랑캐 개념을 부정하였으며,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이든 더 우월한 존재는 아니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종래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상대화하여 평등한 존재로 보았다. 또한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면서 교육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직업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회 정치 이론을 펼쳤다.
그의 사상과 과학관은 당시로서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물론 서양 과학과 도교사상의 영향이 컸겠지만 양반 가문에 태어난 학자가 계급 철폐를 주장하고, 균등한 교육과 능력에 따른 관리 등용을 주장한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전설과 우주무한론 등은 비록 그 감상주의적 일면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과학 발전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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