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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89 : 조선의 역사 331 (제21대 영조실록 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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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89 : 조선의 역사 331 (제21대 영조실록 11)

두바퀴인생 2012. 12. 4. 04:56

 

 

 

 

한국의 역사 789 : 조선의 역사 331 (제21대 영조실록 11)            

 

                       

                                                                                      영조의 원릉

 

제21대 영조실록(1694~1776년, 재위 : 1724년 8월~1776년 3월, 51년 7개월)

 

 

 

4. 실학의 선구자들

 

역사학의 아버지 순암 안정복(1712~1791년) 

 

안정복은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낸 안극의 아들로 성호 이익의 문인이다. 그는 1712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으며, 1717년에 외조모상을 당하여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영광의 월산에 갔다가 그곳 농장에서 2년간 생활한다. 그리고 1717년 조부 안서우가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남대문 밖 남정동으로 이사와서 10세가 되던 1721년부터 학문을 시작한다.

 

그는  그 뒤 할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전전하다가 1736년 25세 때 선영이 있는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에 정착하였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남인 가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남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때부터 당쟁에 휘말려 벼슬길이 끓겼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경학은 물론 역사, 천문, 지리, 의약 등 다양한 부분에 걸쳐 깊은 식견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단 한 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닦은 학문을 바탕으로 26세때 <치통>, <도통> 등의 책을 엮었다. 전자는 우리 나라 역대 왕조의 변천을 기록한 것이며, 후자는 유교사상의 계승 전통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3년 뒤에는 그동안 연구해온 고전에 관한 연구서로 <하학지남>이라는 저서를, 31세 때에는 여성의 행동 규범에 관한 책인 <여범>을 저술하였다.

 

이 같은 저서를 만든 이후에 그는 자신의 학문이 미진함을 깨닫고 35세에 스스로 남인 집안 출신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익은 문하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심취하였던 학문은 이황의 사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황의 보수적 경향이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당시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던 이익을 찿게 되었다.

 

안정복은 비록 늦깍이로 이익을 찿았지만 그의 학자적 기풍과 사상의 위대성을 흠모하였기에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로 배움에 임했다. 그가 이익의 문하로 찿아들었을 때 이익은 이미 66세의 고령이었지만 학구적 열정만은 대단하였다. 그리고 성실한 자세로 자신에게 학문의 진리를 구하는 제자에게 열정을 쏟아부었다.

 

이익은 그의 질문에 대해 세세하고 정확하게 대답하였으며, 혹 대답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여지없이 그에게 편지를 섰다. 그는 이익의 이러한 세밀하고 성의 있는 가르침 덕분으로 학문의 연구 방법을 터득하였으며,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고와 사회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실천적 행동의 법위 등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

 

비록 재야에 묻힌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 전반에 대해 당시의 어떤 학자보다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익혔던 사학, 천문, 지리, 의약, 종교 등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자주 교류하는 유생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뛰어난 자질과 학구적 능력에 대한 소문은 어느새 한성에가지 퍼져 그는 1749년 38세의 나이로 처음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이때 그가 받은 직책은 강화도에 있는 영조의 별장인 만령전의 참봉이었으며, 이어 내직으로 들어가 조정의 식량 창고의 참사. 중종의 묘를 지키는 직장, 사헌부 감찰, 익위사익찬 등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나와 65세 때 목천현감이 되었다.

 

괸리생활 중 특히 한직에 속했던 중종의 묘지기 시절에 그는 왕릉이 있던 경기도 광주의 역사 및 지리에 관한 자료를 모아 <광주지> 두 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이익의 영향을 받아 집필한 최초의 실학적 성과로서, 상세하고 정확하게 작성되었기에 전국 각 부와 군, 현의 지방지 편찬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이 기간에 그는 또한 역사학에 심취하여 <임관정요>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지방행정에 관한 위대한 정치가와 학자들의 교훈을 담은 '정어', 지방행정의 모범적인 사례를 기록한 '정적', 그리고 현실 속에서 지방행정의 이상형을 묘사한 '시조' 등 세 편으로 되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실학자들의 정책론을 집약하는 한편 부패한 지방관리의 범죄적 행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안정복의 획기적인 성과는 <동사강목>의 집필이었다. 1756년 45세에 집필에 들어간 이 본격적인 역사서는 그의 사상뿐 아니라 이익의 사상도 포함되었다. 그는  이 책을 쓰기에 앞서 여러 번에 걸쳐 스승 이익과 역사 문제에 대해 토론했으며, 스승의 호응 속에 집필을 진행하였다.

 

집필 도중 그는 종이값이 모자라 작업을 중단해야 하는 지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스승 이익의 격려를 구했다. 물론 이익 역시 엄청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므로 제자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목차를 만들어 결점을 지적해달라고 하면 마다 않고 이에 응해주었고, 초고를 보내 잘못된 것을 지적해달라고 하면 역시 정성을 다하여 이에 응해주었다. 스승의 극진한 애정과 격려로 가까스로 집필을 이어가던 안정복은 작업을 시작한지 3년 만인 1759년 드디어 20권의 <동사강목>을 완성하게 된다.

 

<동사강목>은 상고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그 서술 내용이 과거의 것과는 판이하였다. 우선 이전의 역사서들이 한결같이 <삼국사기>나 <고려사>, <동국통감> 같은 정사를 베끼거나 추려낸 것인 데 비해, <동사강목>은 이 정사에 잘못 기록된 내용들을 찿아내 통렬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그때까지 일개 스님의 저작으로 사서 편찬에 전혀 참조조차 하지 않았던 일연의 <삼국유사>의 내용과 고대사에 관련된 야사들을 과감하게 인용하였다. 그리고 각 책들을 대조하면서 그 문헌의 출처를 명확히 하고 내용에 대한 비판을 곁들였다. 한 예로 전라도에서 '기'씨와 '기자조선'의 '기자'와는 전혀 무관하며 이는 기씨 자손들이 스스로 기자의 자손인 것처럼 꾸며 역사를 위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이 책을 완성한 후에 다시 한 번 대단히 위험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당시 일체 금지되었던 조선의 역사에 대한 책을 집필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당시로 보면 현대사의 기술에 착수했다. 이 책의 이름은 <열조통기>였다. 조선 태조로부터 영조까지의 조선사에 대한 이 책의 편찬을 위해 그는 9년 동안 자료를 모으고 그 사료들을 기초로 1767년 56세 때 집필에 들어갔다. 그는 역대의 각종 저술에 있는 논설을 발췌하여 그대로 인용하고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전혀 첨가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 책을 편찬하였다. 말하자면 철저한 객관적인 시각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이미 이익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기에 그를 격려할 사람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의 고독한 작업은 계속되어 마침내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위대한 저서는 세상에 유포되지 못한 채 초고 상태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다만 그의 독특한 편찬 방법은 세간의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역사서 편찬 방법에 일대 전환을 가져다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밖에 야사적인  측면이 강한 <잡동산이>, <성호사설유선> 등도 안정복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저작들이다. 또한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고>, <천학문답> 등은 그의 주변을 위협하던 천주교 박해와 그와 비슷한 전통적 조선 학자의 서학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살면서 사상적으로 무던히도 고민하였던 그는 이 같은 많은 저서를 남겨놓고 1791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선의 전통적인 봉건체제가 위협받고 중국으로부터 서학이 밀려들어 가치관이 혼제되고 세계관이 충돌하는 가운데, 그는 유교적 견지에서 제도적 모순을 해결하고 사회를 합리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위대한 학자였다. 하지만 세계의 변화에 아주 민첩하지는 못하였고, 여전히 유학에만 매달려 있었기에 자체적인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끈질긴 실학사상은 후대로 이어져 민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 형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