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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87 : 조선의 역사 329 (제21대 영조실록 9) 본문
한국의 역사 787 : 조선의 역사 329 (제21대 영조실록 9)
영조의 원릉 |
제21대 영조실록(1694~1776년, 재위 : 1724년 8월~1776년 3월, 51년 7개월)
4. 이인좌의 난
개요
이인좌의 난(李麟佐의 亂)은 1728년(영조 4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이인좌(李麟佐, ? ~ 1728년)는 조선 영조 때의 역신(逆臣)이다. 본명은 현좌(玄佐), 본관은 전주이다. 과격한 소론 인사였던 그는 신임사화로 득세하였으나, 영조의 즉위로 소론이 몰락하면서 함께 실각했다. 그리하여 비밀리에 소론파를 규합하여 1728년, 정희량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청주를 함락하고 안성에 이르렀으나 도원수 오명항에게 대패하여 죽산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그칠 줄 모르는 추격으로 산사에 숨었다가 신길만(申吉萬) 등 마을 사람들에게 붙들려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해 음력 3월 26일, 친국에서 역모의 전모를 공술하고 다음날 대역모반죄로 군기시 앞에서 능지처참되었다.
1873년(고종 10)에 가서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중암 김평묵(金平黙)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정도전, 이현일, 윤휴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자 최익현과 김평묵은 이를 막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였다.
1873년(고종 10) 부터 1876년까지 최익현과 김평묵 등은 상소 등을 통해 "이현일,한효순,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追律, 반역죄)로 처단해야 하며, 남인(南人)인 윤휴(尹鑴) 이후로 우리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됐다. 만약 서양과의 조약이 성립된 후에 민암, 목내선, 이인좌, 정희량, 이현일의 후손들이 백성의 불인(不忍)한 마음을 이용하여 창을 들고 도성과 대궐을 침범한다면 올바른 선비들이 일망타진될 것이다"라고 주창하여 이들의 복권 여론을 끝까지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그 뒤에도 최익현과 김평묵은 남인과 이인좌의 난 관련자들의 복권을 결사 반대하였다. 결국 김평묵과 최익현이 모두 죽은 뒤 1907년(융희 2년)에 가서야 윤휴, 이현일 등과 함께 복권된다.
신임사화 이후 실각당하였던 노론이 영조의 즉위와 동시에 다시 집권하고, 앞서 노론 4대신을 무고한 바 있는 소론파 김일경·목호룡이 죽음을 당하자, 그 당의 나머지는 불만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 1727년(영조 3년) 음력 7월 1일 노론의 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 음력 3월에 이인좌·김영해·정희량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먼저 이인좌는 청주를 습격하고 이순신의 손자인 병사(兵使) 이봉상을 죽이고 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가 되어 사방으로 격문을 돌렸다.
“ | 경종이 억울하게 죽었다. 영조가 숙종의 왕자가 아니므로 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이탄 (李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 | ” |
— 이인좌의 격문 |
그리고 모든 군사가 흰 색의 옷을 입고 경종을 애도하는 것처럼 꾸미는 한편,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총융사 김중기·금군별장(禁軍別將) 남태징 등과 통모(通謀)하여 내외상응(內外相應)하려 하였으나, 용인에 퇴거하고 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가 이를 알고 크게놀라 조정에 고변(告變)하니 반군의 계획은 무너지고, 새로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임명된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의 관군에 의하여 반란은 진압되었다.
비록 단시일의 내란이긴 하였으나, 청주성을 중심으로 진천(鎭川)·죽산(竹山)·안성(安城) 등지는 그 형세가 몹시 위태로웠으며,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의 주모자들은 서울로 압송(押送)되어 처형되었고, 밀풍군 탄도 사사된다 (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소론이 이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긴 했다. 그러나 이 난의 주동자의 대부분도 소론의 급진세력이기에, 이 난으로 소론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진행과정
'이인좌의 난'은 1728년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의 과격 세력이 연합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무신난'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의 원인은 1717년의 '정유독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 세자 균(경종)이 병약한 점을 이유로 왕위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하여 노론 당수 이이명과 독대하여 연잉군(영조)으로 하여금 경종의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숙종이 죽고 나서 노론측은 그의 탁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한다. 그리고 경종이 죽자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영조이다.
경종이 갑작스럽게 죽자 소론은 정치적 위협을 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의 과격한 소론 세력은 숙종 대의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을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측 대신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독살 의혹이 있다는 것과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드리고, 이를 명분으로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자)을 왕으로 추대하여 모반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 같은 계획은 당을 결속시키고, 모반을 정당화하여 민심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일을 위해 1725년부터 박필현 등은 지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각 지방의 인물들을 선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성 내부와 각 지방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가담하였고, 평안병사 이사성, 금군별장 남태징 등과도 내통하였다.
이들은 경종의 사안에 대한 의혹을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경종 비 심씨의 동생 심유현의 말과 결부시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래서 전국 곳곳에서 이 같은 내용이 흉서나 괴서로 돌아다녔고, 이들은 이를 근거로 양빈, 노비, 화적 등을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모반 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들어서면서 약화되었다. 동조자가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최구서에 의해 모반 계획이 고변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양성 사람 김중만 등은 역모 세력들의 취군 동태를 파악해 고발하기도 하였다. 이에 영조는 모반 가담자들을 색출하는 작업에 돌입하였다.
모반 계획이 발설되었음을 안 반역 세력은 먼저 선수를 쳤다. 반란은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인좌는 스스로를 대원수로 자칭하고 상여에 무기를 몰래 싣고 청주성에 진입하여 충청병사 이봉상, 군관 홍림, 영장 남연년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접수했다.
청주를 장악한 이인좌는 권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삼고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민심을 동요시켰다. 이들은 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여 조석으로 곡배함으로써 반란의 명분을 세웟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주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이때 권서봉은 안성으로 진출하였으며, 신천영은 청주성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북상하던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도순무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또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 등에 의해 청주성에서 밀려나왔고 상당성에서 패배하였다. 이로써 이인좌의 난은 실패로 돌아갔고, 반란을 주도하였던 이인좌, 권서봉, 목함경 등도 생포되었다.
한편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영남지방은 정온의 4대손인 정희량이 장례를 구실로 모병하여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와 더불어 3월 20일 안음의 고현차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안음현감과 거창현감을 투서로 위협하여 쉽게 이 두 지역을 점령했다. 이어서 합천에 거주하는 정희량의 친척 조성좌 일족의 도움으로 합천, 함양 등 4개 군현을 석권하였다.
사태가 이렇듯 심각한 양상을 띠자 경상감사 황선은 성주목사 이보혁을 우병장으로, 초계군수 정양반을 좌방장으로 삼아 주변 관군을 통솔하여 반군을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반군은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전라도를 돌아 충청도의 반군과 합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호남지역의 반군은 태인현감 박필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그는 무장에 유배 중이던 박필몽 등과 내통이 되었으나, 전라감사와의 연결에서 실패하였다. 그래서 박필몽은 상주의 촌리에서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박필현은 고부군 흥덕을 거쳐 죽도에 잠복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처단되었다.
이로써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진압에 성공한 관군은 그해 4월 19일 도성으로 환군하였다. 이때 영조는 친히 숭례문까지 나가서 진압군을 영접하였다.
이인좌의 반란은 이후 정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소론측은 비록 진압에 앞장섰으나 반란군 주모자가 대부분 소론측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정 내에서는 입지가 약화되었다. 하지만 영조에게는 탕평책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명분을 주었기 때문에 왕권은 오로지 강력해졌다. 이인좌의 반란은 결과적으로 영조의 탕평정국의 기반을 다지게 하는 구실이 되었으며, 영조는 이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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