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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85 : 조선의 역사 327 (제21대 영조실록 7) 본문
한국의 역사 785 : 조선의 역사 327 (제21대 영조실록 7)
영조의 원릉 |
제21대 영조실록(1694~1776년, 재위 : 1724년 8월~1776년 3월, 51년 7개월)
드라마 '동이'를 통해 본 숙빈 최씨에 대해서......
아래는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로 실었다. 조선의 역사를 바꾼 그녀는 사실 베일 속에 감추어진 여자이다. 실록에도 자세한 이야기가 없으며 사실 여부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과연 그녀는 누구이며 숙종, 장희빈, 인현왕후, 김춘택, 서인과 남인들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는지를 비록 픽션이지만 드라마 동이와 같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블로그에 조선의 역사를 올리면서 지난번 방영되었던 드라마 동이 60회를 다시보기로 열심히 보았다. 드라마 동이가 처음 방영될 때는 동이가 누구인지 별로 관심도 없었고 볼 시간도 없어 보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보기로 동이를 보면서 실록과 비교하여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숙종, 경종, 영조 시대를 기술하면서 실록도 100% 진실이 아니지만 드라마도 100% 진실은 아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체적인 내용이나 흐름을 살펴보면 실록에 충실하였고 숙빈 최씨가 어떻게 천출에서 출발하여 후궁에 오르기까지 그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면서 숙종의 총애를 받았고 자신의 아들 연잉군을 노.소론, 남인들 사이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도 살아남게 하였고 후일 왕위를 잇게 만들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해 주었다.
또 드라마의 구성과 내용은 작가의 상상력과 결부되어 충분한 가능성 있는 내용으로 표현된 것 같다. 숙종은 희빈 장씨, 인현왕후, 노소론 대신들 사이에서 시차를 두고 벌어지는 궁중내 갈등의 회오리 가운데서 고뇌하면서도 동이를 만나 때뭍지 않은 정신적 참신함을 보고 스스로 위로를 얻고 기쁨을 느끼게 된다.
한편 희빈 장씨와 남인 세력들의 끓임없는 권력 추구는 결국 궁중에 파란을 몰고 왔다. 그것은 장씨 소생의 왕자의 왕위 계승이었다. 그녀의 이러한 권력 추구욕은 남인 세력을 포함하여 그녀의 오빠 장희재 및 가족들이 노론측 세력을 포함하여 인현왕후와 숙빈 최씨와 대적하면서 인현왕후, 숙빈 최씨, 그리고 연잉군을 제거하기 위해서 갖가지 부도덕한 방법의 음모와 모략이 병행되어 진행됨에 따라 결국은 그들 스스로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결국 신당과 화재, 숙빈 및 연잉군 살해 음모 등이 발각됨에 따라 모두가 희빈 장씨의 사주로 드러나고 이에 분노한 숙종은 결국 희빈 장씨와 남인 관련자들을 모두 사사하게 된다.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사사하기로 결심하기까지 숙종의 고뇌는 대단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희빈 장씨를 사사시킴은 어쩌면 세자를 폐위시켜야 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사후 연산군 시대를 재현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그동안 희빈 장씨의 죄상이 너무나도 엄청나고 왕실의 분란을 초래한 주역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었던 모양인지 그러한 결정을 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인현왕후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는 물론 숙빈 최씨의 치밀한 정보전이 가세하여 모든 증표가 만천하에 드러나도록 만든 숙빈 최씨의 노력이 결부되어 숙종이 모든 사실을 보고받고 확인한 후 내린 결정이었다.
희빈 장씨가 사사된 후 세자는 그 충격으로 질병에 시달리고 숙종을 포함하여 숙빈 최씨의 주변 인물들은 숙빈 최씨를 중전으로 올리기 위해 고심하고 노력하지만 소론 대신들의 반대가 극심하다. '천출은 중전이 될 수가 없으며 천출의 피가 흐르는 연잉군도 왕위를 이을 수 없다.'는 중론이 비등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고민하던 숙종이 숙빈 최씨를 찿아가자, 숙빈 최씨는 숙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중전이 되면 세자를 배제하고 연잉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한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숙종은 물론 세자의 위상이 흔들릴 것이며 조정의 대신들이 극력 반대하는 등 혼란에 빠질 것이며 조정 대신들에게 시달리는 등 숙종이 많은 난관과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면서 그래서 자신은 이러한 왕실의 혼란과 비극을 끓기 위해서 중전이 되지 않겠다고 말한다. 숙빈 최씨는 자신은 더 높은 것보다 소중한 것을 잃지 않으려 하며 모두에게 불행을 막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세자와 연잉군 둘 다 왕이 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숙빈 최씨는 세자가 반드시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숙종은 숙빈 최씨의 말을 듣고 그녀의 생각에 놀라면서 깊은 고심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중전이 되었을 때 숙종이 겪을 어려운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연잉군이 기존의 세자를 배제하고 왕위를 잇는다는 것도 순리가 아니라면서 반대했다. 숙빈 최씨는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숙빈 최씨를 바라보던 주변 사람들은 숙빈 최씨의 그런 결정은 불가능하다면서 탓하지만 숙빈 최씨는 흔들림 없는 자신의 신념을 주장한다.
이에 숙종은 숙빈 최씨의 생각과 선택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래서 고심끝에 결국 숙종은 새로운 중전을 간택하게 되고, 새로 간택되어 중전에 오른 인원왕후는 젊은 나이지만 깐깐한 성격으로 이미 숙빈 최씨의 소문을 듣고 연잉군으로 하여금 세자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경계한다.
그러는 한편 새로운 중전은 연잉군을 궐에서 내쫓는 방법으로 연잉군이 혼례를 치루고 사가로 내 보낼 것을 숙빈에게 이야기한다. 중전은 이는 세자를 위한 일이라며 숙빈과 숙종을 압박하고 숙종은 새 중전의 주장을 거절하지 못한다. 연잉군의 출가와 사가로 나가는 문제를 두고 숙종과 숙빈, 그리고 주변 인물들은 연잉군의 안위를 걱정하지만 숙빈은 그러한 걱정을 잠재우고 대세에 따르기로 한다. 그래서 중전을 찿아가서 궁궐의 사례에 따라, 연잉군의 간택은 숙빈 최씨 본인이 직접하겠다며 중전에게 주청하자, 망설이던 중전은 결국 숙빈의 주청을 허락하게 되고 숙빈이 연잉군의 간택을 주관하게 된다.
숙빈 최씨는 간택을 하면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명문귀족의 딸이 아닌 일개 진사 출신이며 초야에서 훈장을 하고 있던 서종제의 딸을 연잉군의 비로 선택하게 된다. 숙빈 최씨는 서종제에게 말했다. 자신은 '힘있는 가문이나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군림하지 않으며 빼았지 않으며 부끄러움을 알고 염치를 아는 힘,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힘이 세상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연잉군에게 그러한 힘을 주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연잉군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자 숙빈 최씨의 선택을 보고 조정 대신들이 모두 놀라고 바보스런 선택이라고 조롱하지만 그 내막은 기가막히는 것이 그 집터가 선조, 성종, 의경세자가 기거하거나 훈육을 하던 왕기가 서린 집터라는 이야기다. 민심이 동요하고 연잉군을 왕재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확산될 것이라면서 대신들은 숙빈의 의도 파악에 심한 동요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조정 대신들은 숙종에게 주청하여 연잉군의 사가 출합을 거두고 결혼하더라도 궁궐에 남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연잉군의 사가 출가로 인한 위험성은 사라지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노력은 숙빈 최씨와 주변 인물들의 노력에 따른 것이었다. 숙빈은 연잉군이 사가로 나가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고 생각했다. 그래서 숙빈은 지혜롭게도 대신들이 연잉군의 출합을 방대하도록 그러한 방법을 선택하였는지도 모른다.
한편 숙종은 숙빈 최씨에게 '연잉군의 어미로서 연잉군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하느냐'며 묻는다. 그러자 숙빈은 '세자가 보위를 잇도록 해야 한다면서도 연잉군도 왕위를 잇도록 해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숙종은 고민에 빠진다. '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왕위를 잇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업무를 전폐하고 숙종은 장고에 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세자와 연잉군을 모두 살릴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결국 그것은 바로 연잉군을 세자의 세제로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세자가 후사가 없고 새 중전도 후사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고를 끝낸 숙종이 찿은 것은 중궁전, 숙종은 중전에게 말하고 편전 회의를 소집한다. 숙종은 편전 회의에 세자와 함께 참석한다. 그 자리에서 숙종은 자신의 결심을 발표한다. 그것은 바로 '다음 보위에 오를 사람은 세자뿐이다.'면서 그것이 숙종 자신의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 세자를 편전 회의에 참석시키고, 다른 하나는 숙빈 최씨를 사가로 내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조정은 술렁인다. 결국 숙빈을 몰아내고 세자의 후계구도를 탄탄하게 되었다면서 .....그러나......그 속내는......조정과 주변 모든 사람들로부터 숙빈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나고 세자의 후계구도에 대해 안도하면서......숙빈은 아무런 말없이 이러한 숙종의 조처에 순순히 따르게 된다. 반전과 반전의 드라마가 진행되고 이러한 반전은 상대를 안심시키며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고도의 술책으로 전개된다.
숙종은 이어 비밀 교지를 내린다. 숙빈이 사가로 물러나기 전에 먼저 숙빈 주변 인물들도 모두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는데, 그 이유는 중전을 포함하여 세자, 그리고 세자를 밀고 있는 조정의 소론 세력들은 대부분 안심할 것이고 다음 보위는 세자가 이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숙종이 세자에게 보위를 물리려는 선위를 발표하게 된다. 그러자 세자와 조정은 선위를 반대하며 거둘 것을 주청한다. 이러한 비밀 교지가 내린 가운데 숙종은 행궁으로 나가서 청나라 사신을 만나 선위를 언급하며 청나라 황제의 인가를 요청하게 된다.
숙종이 행궁에 나가 있는 동안 숙종의 비밀 교지 내용을 파악한 소론측 병조참판은 숙빈 최씨와 연잉군을 숙종이 궁궐에 없는 틈을 이용하여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음모를 진행한다. 이러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한편, 중전은 숙빈을 찿아와서 '왜 숙빈이 중전에 오르지 않았느냐'며 묻는다. 그러자 숙빈은 '중전이 이이 알다시피 궁중의 분위기가 연잉군과 자신이 왕위를 탐내려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한편 숙빈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던 소론측 병조참판은 중전에게 숙빈이 세자를 제거하려 한다면서 이것은 숙빈의 음모라고 고변하고 중전을 이용하여 숙빈을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 그래서 병조참판은 중전에게 숙빈을 지금 당장 빨리 사가로 내보내라고 종용한다. 이에 중전은 병조참판의 말을 믿고 숙빈에게 당장 출궁하라고 지시한다. 한편 숙빈은 시간을 끌면서 자신이 만약 사가로 나가는 사이 어떤 변고가 발생할지 알수가 없는 상황에서 궁궐의 군사들 움직임이 수상하다고 판단하고 먼저 연잉군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할 군사들이 없자 감찰 궁녀들을 배치한다. 그리고 주변 인물을 동원 행궁에 나가 있는 숙종과 내금위장에게 연락병를 보내 숙빈의 위험한 상황을 전달한다. 한편 위기를 의식한 숙빈은 병조참판의 의도 파악에 고심하며 대처 방안을 강구하는데, 그것은 바로 중전을 설득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숙빈은 중전을 찿아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병조참판의 음모를 이야기 하며 자신을 도와줄 것을 청한다. 숙빈의 말을 듣고 고심하던 중전은 숙빈이 세자를 진정으로 위하고 다음 보위를 탐내지 않는다는 진정한 마음을 알게 되고 그래서 궁궐내 군사를 긴급 동원할 수 있는 내명부 중전의 표찰을 숙빈에게 주면서 병조참판의 음모를 분쇄하도록 한다. 그래서 음모를 진행하려던 병조참판은 결국 숙빈의 지혜로운 조처로 결국 체포되고 이어 숙종이 행궁에서 숙빈의 긴급한 연락을 받고 정예 군사를 신속히 이동시켜 소론측 관련자들을 불시에 모두 일망타진함으로서 이 사건은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면서 종결된다.
결국 사가로 나온 숙빈은 천인들을 대변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제는 남은 생은 그들을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하기로 결심한다. 천민들의 고통을 해소하고 노력하는 숙빈 최씨의 헌신적인 모습에 천민들이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끼며 감사하는 마음의 표시로 천민들이 사가로 와서 정자를 지어준다. 연잉군은 스승과 같이 숙빈의 사가로 나와서 숙빈의 진정한 백성을 위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게 된다.
숙빈은 중전과 세자에게 연잉군을 전적으로 맡김으로서 그들이 스스로 연잉군을 보호하며 지키게 된다. 숙빈은 숙종에게 버림받고 쫓겨난 게 아니라 연잉군을 위해서 스스로 사가로 나온 것이었다. 숙빈의 이러한 겸허하고 욕심이 없는 자세와 태도는 세자와 중전을 감화시켰고 자신은 사가에서 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며 사가로 찿아오는 연잉군과 숙종의 끝없이 넘치는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마지막 장면은 아들 연잉군이 경종에 이어 영조로 등극하여 숙빈의 묘소를 돌아보며 자신의 어머니 숙빈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드라마 동이는 끝을 맺는다.
드라마에 나온 숙종은 진정으로 숙빈 최씨를 사랑하였던 왕이었다. 그녀가 숙종에게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만이 가진 특출한 참신함과 진정함, 그리고 탐욕을 부리지 않고 겸손하였으며 고난이 닥치면 물러나지 않고 정면 돌파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와 태도, 그리고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고 아래 사람들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을 선택하는 태도와 자세, 그리고 진정으로 주변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은 물론 뛰어난 지혜와 예지력으로 상대편의 음모와 모함을 사전에 대비히는 통찰력 등이었다. 스스로 중전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중전을 인정하며 진정으로 세자를 위하며 세자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사가로 나가면서 연잉군을 살리는 방안을 선택함에 숙종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던 인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녀는 비록 천출이었지만 숙종에게 무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마음과 태도를 가진 여성이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후일 왕위를 잇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몇년 후 사가에서 숙종과 연잉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란만장한 세월을 마감하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최숙빈은 조선의 역사에서 조선 최고의 영민한 왕을 탄생시킨 참으로 영특한 후궁이었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던 위대한 어머니였다. 대부분 귄문세가 출신의 중전이나 후궁들이 눈 앞에 보이는 권력과 재물을 움켜쥐기 위해 지나친 탐욕을 부리다가 대부분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혈족까지 비참한 말로를 초래한 것과 비교하면 많은 교훈을 느끼게 한다. 그녀의 인생역전은 어쩌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권력과 부를 탐하려는 탐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삶과 비교하여 한 번쯤은 본받아야 할 지혜로운 삶이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조선 역사를 바꾼 후궁 숙빈최씨(淑嬪崔氏1670년~1718년)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시대는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고 고쿠카와 가문이 주도하는 막부체제가 일본열도를 장악하는등, 전반적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매우 안정적이었다.
숙종 임금은 이런 안정적인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당쟁으로 얼룩졌던 국내정치를 일신하고, 왕권강화와 세력균형을 목표로하는 정치변혁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정치적 격변의 시대 중심에 섰던 인물중에는, 장희빈이나 인현왕후같은 중전이나, 송시열 남구만 같은 정치적 인물 외에 숙빈 최씨가 있었다.
7세의 나이에 궁인으로 입궁한 숙빈 최씨.
숙빈 최씨에 대한 조선왕조의 기록은 매우 빈약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이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이기에, 조선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가볍지 않다. 또한 영조는 경기도 파주시 소령원에 신도비를 세웠을 뿐 아니라, 재위 중 직접 소령원까지 행차하여 제를 올린 일도 수차례 있었을 정도로 생모였던 숙빈최씨를 각별하게 기렸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숙빈 최씨가 영조에게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인현왕후의 복위와 장희빈의 몰락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장희빈을 중심으로 남인체제로 굳어져 갔을지도 모를 조선역사를 바꾸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우선 드라마 동이에서는 그녀가 천민 출신이고, 보모를 일찍 여의고 궁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 생활을 거쳐 감찰 궁녀로 승급하는 스토리로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드라마 상의 설정일 뿐이고, 실제로는 선도비에 숙종(1661~1720) 16년인 1676년 7세의 나이로 궁궐에 들어 왔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다만 숙종 당시 정황을 쓴 이문정의 수문록에는 그녀가 바느질을 담당하며 인현왕후의 시종을 들었다고 나와 있어, 궁중에 들어와서는 주로 그일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생모 신도비에 직접 글씨를 쓴것으로 알려진 거승로 내용은 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조선국화경숙빈소령원)이라 되어 있다. 영조가 그녀에게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려 화경숙빈(和敬淑嬪)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묘(墓) 또한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했다. 조선시대 능묘제도에서 원(園)은 왕이나 왕비 무덤에나 붙일 수 있는 능(陵) 다음 칭호이다.
하루밤의 역사
숙빈 최씨가 내명부에 품계를 받은 것은 숙종 19년인 1693년이다. 당시 24세로 이미 나이가 찬 상태였지만, 1689년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서인으로 삼는 한편 장희빈을 빈으로 승격시키고 그녀의 아들을 세자로 삼는 등, 온통 조야의 관심은 장희빈에 쏠려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현황후 지지파인 서인 정권 계열의 인사들이 유배되거나 사사되는 등 거친 정치적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장희빈의 지지파인 남인정권이 정권을 장악하자, 어느 누구도 인현황후의 복위문제를 쉽사리 거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숙종은 서인에 의해 정권이 독점되는 것을 견제하려 하였듯, 장희빈을 중심으로 한 남인 정권의 권력 독점도 바라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당시 평범한 나인에 불과하였던 숙빈 최씨와의 만남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숙빈 최씨는 당시 인현왕후의 생일을 맞아, 밤늦게까지 침방에 불을 켜 놓고 인현왕후를 위한 음식을 장만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중 나인들의 모든 처소에 불이 꺼진 상태에서, 유독 한 곳에만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숙종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었고, 그날밤을 같이 지내게 되었다.
그녀의 그러한 행동이 서인 정권의 계획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그녀 스스로 숙종의 눈에 들기위해 일을 꾸몄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주장이든, 당시 장희빈이 궁궐안을 장악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 계획이 아닐 수 없다. 즉 진심으로 인현왕후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결코 벌일 수 없었던 일이다.
또한 폐서인이 된 이후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며 거친 음식만을 먹고 있었던 인현왕후의 안타까운 사정을 고하여 숙종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은 실록에 근거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야기 전개가 좀 황당하다. 궁궐에서 밤 늦게 불을 켜고 말단 무수리가 음식을 차려 놓고 축원하다가 숙종을 만나 같이 자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임금이 밤늦게 궁녀들 침방을 돌며 보초 순찰을 돈 것도 아니고 일개 말단 무수리가 침방에서 밤늦게 불을 켜놓고 음식을 차려 놓고 축원했다는 것, 그리고 숙종이 그녀의 방에 들어가 이야기를 하다가 범했다는 것도 타당성에 맞지 않는 이야기다. 말단 무수리가 왕 앞에서 당당하게 인현왕후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당시의 정서나 순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다는 말이다.
아마 숙종이 동이 드라마에서처럼 궁궐 밖으로 나가 우연한 사건에 봉착하여 위기를 만나게 되고 그때 최숙빈을 만나 위험을 벗어나고 왕인 줄도 모르고 대하는 꾸밈없고 과단성 있는 미모의 그녀를 보고 숙종이 점차 인연을 맺게 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특히 그녀는 1693년 숙원(淑媛내명부의 종4품 품계)으로 임명되었데, 1694년 9월 그녀는 연잉군(영조)을 출산한 것을 계기로 하여 숙원에서 숙의(淑儀내명부의 종2품 품계)로, 다시 귀인(貴人종1품 )을 거쳐 1699년 숙빈(정1품) 으로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숙종의 애정이 장희빈에게서 서서히 최숙빈에게로 옮겨가자, 자연스럽게 인현왕후의 복위문제도 탄력을 받기 시작하였다. 결국 1694년 서인 계열의 소론파가 주도하는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이 성공하였고, 최씨는 숙원에서 숙빈으로 품계가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장희빈 그리고 최숙빈의 대결
인현왕후의 복위로 모든 문제가 일단락 되는 듯 싶었지만, 아직 궁중안은 장희빈이 장악하고 있었다.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는 제주도로 유배갔지만, 여전희 장희빈과 내통하며 재기를 꿈꾸었고 남인 정권도 완전하게 몰락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인현왕후가 복위한지 2년이 지났지만, 인현왕후은 폐비 시절 얻었을 것으로 예측되는 지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그런데 인현왕후의 사망은 폭풍을 몰고오게 되었다. 바로 '무고(巫蠱)의 옥'으로 불리는 조선시대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인현왕후가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장희빈은 중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었지만, 한동안 더 내명부를 더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인현왕후가 병환을 앓고 있던 2년동안 단 한번도 문병을 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중전의 처소를 중궁전(中宮殿)으로 부르는 일도 없었고, 심지어 중전으로 복위된 인현왕후를 여전히 폐비로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철저하게 장희빈이 궁중안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시녀들사이에서는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현왕후가 폐비였던 시절부터 남다른 담력을 보여 주었던 최숙빈은 장희빈의 세도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장희빈은 취선당 서쪽에 몰래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무당을 불러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는데 지극히 빈틈없이 일을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장희빈의 동태를 면밀하게 살피던 최숙빈은, 마침내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무고(巫蠱)하고 있는 현장을 찾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숙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1701년 장희빈을 비롯한 그 일파는 모두 최후를 맞게 되었다.
역사속의 그녀 최숙빈
숙빈 최씨는 숙종이 사망하기 2년전인 1718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출신 성분이 무엇이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현왕후의 복위와 장희빈의 폐위 과정에서 보여준 그녀의 행보는, 조선시대 여성으로선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대담하다. 여기에는 다소 정치적으로 해석하거나, 장희빈을 결국 죽음으로 몰고갔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은 과장된 관점으로 보인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일은 분명한 사실로 당시로서는 대역죄에 해당한다. 이것을 밝히고 죄지은 자를 벌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거대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였던 그녀의 의지가 무엇보다 돋보인다. 특히 그녀의 아들인 연잉군이 훗날 영조임금이 되었던 면을 생각해 볼 때, 그녀의 삶은 장희빈이나 인현왕후보다도 조선후기 역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동안 낮게 평가되었던 그녀의 삶을, 현대적 관점에서 다시 밝히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장희빈 일파가 몰락한 이후 숙종은 숙빈 최씨가 거처하는 처소도 크고 넓게 지었으며, 연잉군을 위해서도 따로 저택을 마련하는등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고 한다. 더구나 1717년엔 30세 나이로 장성한 장희빈의 아들을 뒤로하고 연잉군으로 하여금 편전에 참석하여 정사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때 이미 숙종의 마음은 연잉군쪽으로 기울었지만, 장자우선승계라는 명분론에 밀려 장희빈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20대 임금인 경종이 되었다. 그러나 경종은 폐서인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왕위정통성이 매우 취약하였다. 또 어머니의 사형 장면을 목격한 정신적 충격과, 후사를 갖지 못한 점, 그리고 왕위시절 방탕한 생활로 인해 재위 4년만인 1724년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후사가 없던 경종의 뒤를 이어 1724년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이 21대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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