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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84 : 조선의 역사 326 (제21대 영조실록 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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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84 : 조선의 역사 326 (제21대 영조실록 6)

두바퀴인생 2012. 11. 29. 05:30

 

 

 

 

한국의 역사 784 : 조선의 역사 326 (제21대 영조실록 6)            

 

                       

                                                                                      영조의 원릉

 

제21대 영조실록(1694~1776년, 재위 : 1724년 8월~1776년 3월, 51년 7개월)

 

 

 

3. 영조의 가족들

  

영조는 6명의 부인에게서 2남 7녀의 자녀를 얻었는데 정비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 등은 아이를 낳지 못해 적출이 없었고,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를 비롯 1남 1녀를,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비롯 1남 3녀를, 귀인 조씨가 1년, 숙의 문씨가 2녀를 낳았다. 아래는 영조를 낳고 왕위에가지 오르게 만든 숙빈 최씨의 지혜로운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 동이와 숙빈 최씨와 염문을 뿌린 당대 최고의 멋쟁이면서 풍운아인 선비 김춘택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당시 세간에는 영조가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고 한다. 이에 영조는 어마니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점과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에 평생을 고통 속에 지내면서 자신의 정통성 확보에 많은 심혈을 기울인다. 결론은 인간에겐 누구에게나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인재를 선택함에 계급적으로 차별하거나 천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족 관계

  • 조부 : 조선 제 18대 왕 현종(1641년 ~ 1674년)
  • 조모 : 명성왕후 김씨
  • 부 : 조선 제 19대 왕 숙종(1661년 ~ 1720년)
  • 모 :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
  • 사친 : 숙빈(淑嬪) 최씨(崔氏)
  • 원비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년–1757년)
  • 계비 :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년–1805년)
  • 후궁 :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4년 - 1721년)
    • 화억옹주(和億翁主) - 조졸
    • 진종 행(眞宗 緈,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년–1728년)
    • 화순옹주(和順翁主) -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에게 하가(下嫁).
  • 후궁 :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 1764년)
    •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 1748년) - 금성위(錦城尉) 박명원에게 하가(下嫁).
    • 화덕옹주(和德翁主, 1728년 - 1728년) - 조졸
    • 옹주(翁主, 1730년) - 조졸
    • 옹주(翁主, 1731년) - 조졸
    •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년 - 1752년) - 영성위(永城尉) 신광수에게 하가(下嫁).
    • 장조 선(莊祖 愃,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思悼世子) 1735년-1762년)
    •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 1808년) - 일성위(日城尉) 정치달에게 하가(下嫁).
  • 후궁 : 귀인 조씨(貴人 趙氏, 1707년 - 1780년)
    • 옹주(翁主) - 조졸
    • 화유옹주(和柔翁主, 1741년 - 1777년) - 창성위(昌城尉) 황인점에게 하가(下嫁).
  • 후궁 : 폐 숙의 문씨(廢 淑儀 文氏, 1717년 - 1776년)
    • 화길옹주(和吉翁主, 1752년 - 1772년) - 능성위(綾城尉) 구민화에게 하가(下嫁).
    • 화령옹주(和寧翁主, 1754년 - 1821년) - 청성위(靑城尉) 심능건에게 하가(下嫁).

 

 

정성왕후 서씨(1692~1757년)

달성부원군 서정제의 딸이다. 1704년 13세의 나이로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지고, 1721년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가 없어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되자 동시에 세제빈에 봉해졌으며, 1724년 영조가 즉위함에 따라 왕비에 봉해졌다.

 

1740년 혜경이라는 존호가 올려졌으며, 175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소생은 없으며 능은 홍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정순왕후 김씨(1757~1805년)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759년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그녀는 소생은 없었으며, 영빈 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고 굶어죽게 하는 데 지대한 역활을 하였다.

 

그 후 조정이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사파와 그의 치죄를 당연시했던 벽파로 나누어지자 시파를 미워하고 벽파를 옹호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으며, 이때에 벽파인 공서파와 결탁하여 시파의 신서파 대신들을 모함하였고, 또한 시파 인사들이 많이 관여했던 천주교에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가환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과 그의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시켰다.

 

그녀는 이렇게 정계의 중심에서 당파와 어울리다가 1805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영조와 함께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원릉에 묻혔다.

 

 

 

효장세자(1719~1728년)

영조의 맏아들이며 정빈 이씨의 소생이다. 비는 좌의정 조문명의 딸 효순왕후이다. 1724년 경의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28년 10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한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영릉이다. 

 

 

 

사도세자(1735~1762년)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효정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세자에 책봉되고, 10세 때 홍봉한의 달 혜빈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

 

그는 3세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독파했다. 또한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눠줬으며, 10세 때 이미 소론측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옥사를 비판했다고 한다.

 

1749년 15세 때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대리하였는데, 이대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그를 무고하였다. 성격이 과격하고 급했던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고, 이로 인해 그는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왕궁을 바져나가 관서지역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장인 홍봉한은 그의 병증에 대해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고,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하였다. 이 같은 말에 비추어볼 때 사도세잔는 일종의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에 영조는 분개하여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하라고 명한다. 하지만 그가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영조는 그를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어 죽게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가 죽은 뒤 영조는 세자를 죽인 것을 후화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현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그의 무덤은 처음에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다가, 정조 때 수원 화산으로 이전되어 현륭원이라 하였다가 장조로 추존된 뒤에 융릉으로 정해졌다.

 

 

혜빈 홍씨(1735~1815년)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에 추존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 왕후에 추존되었다.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795년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