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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86 : 조선의 역사 328 (제21대 영조실록 8) 본문
한국의 역사 786 : 조선의 역사 328 (제21대 영조실록 8)
영조의 원릉 |
제21대 영조실록(1694~1776년, 재위 : 1724년 8월~1776년 3월, 51년 7개월)
숙빈 최씨와 염문설, 문제의 인물 김춘택, 그는 누구인가?
숙빈 최씨와 김춘택, 그리고 영조
옛날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김춘택이 등장하지만, 최근 드라마 동이에서는 김춘택이 등장하지 않는다. 숙빈 최씨와 조선 21대 군주 영조에게는 아주 절대적인 존재 김춘택이 드라마에서는 거의 취급되지 않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김춘택이란 인물 대신 장악원이 숙종과 숙빈 최씨(동이) 연결고리로 나온다. 다분히 정치적이고 다분히 정략적인 김춘택이란 인물 대신 가볍고 경쾌한 음악이 살아 숨쉬던 조선의 역사물로 드라마 동이가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이고 픽션은 픽션일 뿐이다.
인현왕후가 머물던 사가 감고당 자리(지금은 덕성여고가 들어서 있다.)
감고당 골목, 이 부근 어디에서 김춘택과 숙빈 최씨 첫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김춘택은 누구인가?
김춘택(金春澤, 1670년 ~ 1717년)은 조선후기의 문신, 외척, 작가이다. 자(字)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본관은 광산이다.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손자이다. 종조부인 김만중의 문하생이다.
인경왕후의 친정 조카로, 당색은 서인이었다가 노론이 되었다.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에 공을 세웠으나,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와 간통한 뒤 그로부터 정보를 빼돌렸고 이때문에 소론과 남인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장희재를 제거하려는 과정에서 세자에게 위협을 가하려 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된다. 고종 때 복권되어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로 추증되고 광령군(光寧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문이다.
김춘택은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노론의 환국 모의를 주도했다. 결국 환국에는 성공했으나 그 방법이 옳지 못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귀양까지 가야 했다. 장희재의 처를 통해 남인 내부의 중요 정보를 획득, 인현왕후의 복위와 노론의 집권 확정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나 방법이 잘못되었다며 비판을 받고 몰락했다. 종조부 김만중의 문집을 한자로 번역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생애
아버지는 인경왕후의 친정 오빠인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종조부인 김만중에게 문장을 배웠는데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여 김수항의 탄복을 받았다고 한다.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훈신과 적장자를 우대하는 전례에 따라 일찍이 음서로 출사하여 대호군에 제수되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최씨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가 후궁 최씨를 결박해 심하게 때린 후 거꾸로 세운 큰 독 안에 가둬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왕비 장씨의 핍박을 받는 최씨로서는 서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김춘택은 인현왕후의 친정과도 친밀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소론은 김일경의 옥사 당시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 하여 영조에게 충격을 주기도 한다.
남인 제거 계획
비밀 계획
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종조부 김만중과 가문의 당파인 서인이 실각하여 자신도 수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숙종의 첫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친정 조카인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여전히 궁 출입도 자유로웠다. 이러한 배경 조건과 재물을 이용해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甲戌獄事) 직전 인현왕후 복위를 은밀히 추진하여 갑술환국과 폐비 민씨의 복위를 성공시켰다.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를 유혹하여 간통한 뒤 그로부터 남인측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고, 갑술옥사 이후 1701년의 무고의 옥으로 남인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서인들은 노론·소론 할 것 없이 정권 탈환에 부심했다. 노론에서는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손자 김춘택(金春澤)이 환국(換局) 모의를 주도했고, 소론에서는 승지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韓重爀)이 주도했다. 서인들은 ‘장다리(장씨)는 한철이고 미나리(민씨)는 사철이다’ 같은 동요를 만들어 퍼뜨렸다. 노론 김만중(金萬重)은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어 왕비 장씨를 비난하고 폐비 민씨를 옹호했다. 『사씨남정기』는 명나라의 유현(劉炫)이 정실부인 사씨를 내쫓고 첩인 교씨(喬氏)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교씨의 간악함을 깨닫고 사씨를 정실로 맞이하고 교씨를 죽인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사씨가 폐비 민씨, 교씨가 왕비 장씨를 뜻하는 것인데 훗날 실제로 이 소설의 내용대로 전개된다. 『사씨남정기』를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은 이 소설 내용이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서인들의 염원이었다.
1695년(숙종 20년) 3월 23일 우의정 민암이 숙종에게 서인들이 불령한 무리들과 불법 정치자금을 모아 환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음모에 가담했던 함이완(咸以完)이란 인물을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위협해 폭로하게 한 것이었다. 남인 정승 민암의 고변으로 김춘택·한중혁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숙종 20년 3월 29일에는 서인의 사주를 받은 유학(幼學) 김인(金寅)등이 맞고변했다. 우의정 민암과 병조판서 목창명, 신천군수 윤희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김인의 고변 중에 왕비의 오빠 장희재가 김해성(金海成)에게 돈을 주어 김해성의 장모로 하여금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김해성의 장모는 숙원 최씨의 숙모였다. 하지만 남인 정권 아래에서 남인들을 역모로 고변한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함이완의 고변은 사실로, 김인의 고변은 무고로 정리돼 가고 있었다.
첩보와 투옥, 정권탈환에 성공
장희재의 처와 내연관계를 갖고 그로부터 정보를 일부 빼냈는데 남인에서 이를 일부 눈치챘다. 김춘택은 수감되어 형문을 당했고, 남인은 이 기회에 김춘택을 물고하려 했다. 그러나 숙종 20년 4월 1일 밤 2고(二鼓:밤 9~11시)에 승정원으로 갑자기 내려진 숙종의 비망기(備忘記)가 전세를 뒤집었다.
“군부(君父)를 우롱하고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직을 삭탈해 문외출송(門外黜送)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국청에 참여한 대신들을 모두 쫓아내라는 명으로서 정권을 다시 서인으로 갈아치우겠다는 뜻이었다. 남인들이 장악한 승정원에서는 급히 복역(覆逆) 장계(狀啓)를 작성했다. 임금의 잘못된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이 복역(覆逆)이었다. 그러나 막 작성한 초안을 올리려고 할 때 다시 숙종의 비망기가 내려왔다.
“비망기가 승정원에 내려진 지 이미 오래돼 경고(更鼓)가 반이나 지났는데 전지(傳旨)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그 머리를 모아 서로 상의하며 (대신들을) 반드시 구제하려는 정상이 극히 분통스럽고 놀랍다. 입직(入直:숙직) 승지와 옥당(玉堂:홍문관)을 모두 파직하라. 이번 복역(覆逆) 의논을 집에 있는 승지와 삼사(三司)라고 모를 리 없으니 마찬가지로 모두 파직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승지 전원과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킨 것이다. 또한 숙종은 입직한 오위장(五衛將) 황재명(黃再命)을 가승지(假承旨)로 삼아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등을 쫓아내고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병권 장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숙종은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각각 서인 서문중(徐文重)과 신여철로 갈아치웠다. 이조판서 이현일도 유상운으로 갈아치워 문관 인사권도 서인에게 주었다. 서인이 정권을 장학하면서 의금부에 감금되었던 그는 석방된다.
이때 그는 장희재의 처와 내연관계를 갖고 그로부터 정보를 일부 빼냈는데, 환국 유도 과정에서 그의 내연관계 역시 의금부와 사헌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시중에 유포되었다. 무고의 옥 직후 그는 노론으로부터 환국의 공로자로 칭송받았지만, 노론 일부와 소론으로부터는 음모를 이용한 파행적인 정치활동을 행하였다, 부도덕한 계략을 썼다고 비난받았다.
비판과 유배
그러나 소론과 남인은 그가 장희재의 처와 간통한 것을 끈질기게 물고늘어졌고, 노론에서도 그의 행동이 부적절했다며 비난 여론이 일부 나타났다. 노론의 절대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탄핵을 받다가 1697년 10월 금천으로 유배되었고, 1701년 무고의 옥에 대한 수사 중에 갑술환국 전에 장희재의 처와 간통하여 간자로 삼았었다는 증언이 발고되어 다시 소론의 공격을 받고 전라북도 부안(扶安)으로 정배되었다. 1706년에는 장희재의 처와 내통한 것은 장희재를 죽이려는 목적때문만이 아니라 장차 세자(뒷날의 경종)를 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상소가 빗발쳤는데, 우의정 김창집의 강력한 보호에도 불구하고 끝내 김춘택은 제주도(濟州道)로 무기 유배되었다. 1710년 제조 민진후가 숙종에게 감률 품지를 올려 육지로 이배되었다가 1712년에 방송되었다. 고종시대에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를 추증받았으며 광령군(光寧君)에 추봉되었고, 충문(忠文)의 시호를 받았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한다. 일설에는 숙빈 최씨와도 내연 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이 주장은 이인좌의 난 때 소론과 남인 인사들에게서 주로 채택되었다. 그에 의하면 영조는 그가 무수리인 숙빈 최씨와 사통한 뒤 숙종에게 보내졌다는 것이다.
숙종때부터 영조 때까지도 그가 숙빈 최씨와 사통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악형을 금지한 영조였지만 영조 때 이를 언급하는 자에게는 예외로 심한 형문을 가하였다. 사생활과 과격했던 정치활동 등으로 정적은 물론 노론 내부에서도 비난 받았지만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재주와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종조부 김만중의 언문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배포하였다. 저서로 <북헌집>과 글씨 <호판 김진귀 표>가 있다.
작품으로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이 전한다. 《별사미인곡》은 작자가 제주도로 귀양가 있을 때 지은 가사인데, 그 시대에 한문 숙어가 거의 없는 순한글체로 언어 구사의 평이성을 살린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글씨로는 《호판김진귀표(戶判金鎭龜表)》가 있다.
사후
사후 경기도 시흥군(현 군포시 대야미동)에 안장되었다.
고종 때 복권되어 이조판서 겸 성균관좨주에 추증되고 광녕군에 추봉되었으며, 부조추증지전을 받았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
- 북헌집
- 시문 10 책
- 만필(漫筆) 1책
작품
- 《별사미인곡 (別思美人曲)》
- 《호판김진귀표 (戶判金鎭龜表)》
가족 관계
- 아버지 : 김진구
- 어머니 : 한산이씨
- 누이 : 김씨
- 매부 : 임징하
- 부인 : 완산이씨(完山李氏)
숙빈 최씨와 김춘택의 만남
김춘택은 1670년 숙빈 최씨와 같은 해 태어났다. 숙빈 최씨가 채소장사를 하던 중하위층 최효원에서 태어난 것에 비해 김춘택은 광산 김씨 명문 자재로 태어났다. 숙빈 최씨(동이)가 당시 희빈 장씨의 미모를 능가할 만큼 미인이었다면 김춘택은 당대 댄디(멋장이)라고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여인들, 특히 북촌의 사대부 여인들에게 인기를 얻던 사내였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1689년 희빈 장씨가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정비 인현왕후가 감고당으로 쫓겨난 뒤 인현왕후를 모시던 숙빈 최씨는 북촌을 들락거리며 남인이 득세하던 정국을 반전 하려던 김춘택과 감고당 골목 어귀에서 만났을 듯하다.
김춘택은 당시 가장 멋진 사내로 여인들 마음을 설레게 했다
김춘택은 숙종의 첫째 왕비 인경왕후가 고모다. 그러니 숙종의 조카인 셈이다. 할아버지는 숙종의 장인 김만기, 종조부는 구운몽의 작가로 유명한 김만중이다. 아버지 김진구는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작은 아버지 김진규는 대제학에 오른 거물 정치인이다. 서인의 대표적인 명문 가문. 그런데 장희빈이 등장하면서 이 집안이 갑자기 멸문지화 한 것이다.
김춘택은 몰락한 집안과 서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북촌의 명문 집안 서인 세력들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북헌이 북촌에 나타나면 하루 만에 도시는 음험한 기운이 가득했다." 당시 북헌 김춘택의 위력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김춘택과 숙빈 최씨 사이 사랑의 미로 시기는 1689년에서 1693년 약 4년 사이. 1693년 4월 23일 숙종이 통명전에서 무수리 동이(숙빈 최씨)를 품고 하룻밤 사랑을 나눌때까지 숙빈 최씨를 대궐로 이끈 인물도 김춘택이고 그래서 임금의 눈에 뜨이게 한 것도 김춘택이다. 김춘택은 북촌 뿐 아니라 대궐에 들어서면 궁녀들이 난리였다.
그만큼 김춘택은 궁녀들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매력 있는 사내였다. 김춘택은 미남계를 동원해서 궁녀들을 모두 자기 손아귀에 넣고, 또한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첩도 건드려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중년의 여인은 정적이지만 너무도 멋진 김춘택에게 모든 정보를 바쳐가며 사랑을 얻는다. 그러나 김춘택은 이런 고급정보를 숙빈 최씨와 숙종 하룻밤 관계에 모든 재료로 사용한다.
1701년 장희빈이 숙종의 미움을 받고 10월 10일 죽음을 맞이할 때도 김춘택은 궁녀들을 동원해서 그녀가 인현왕후를 저주해서 궁궐 내 저주의 물건(이상한 물건)들을 땅에 묻었다고 조작해서 장희빈을 죽게 만들었다. 김춘택의 이런 정치적 모략은 대개 서인 정권의 안정과 숙빈 최씨의 궁궐 내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김춘택은 인생의 3분의 1을 귀양지에서 보냈다. 김춘택은 영조 탄생 비밀의 핵심 당사자다. 숙빈 최씨와 사랑을 나누던 김춘택이 임금의 씨가 아닌 자기 씨앗을 숙빈 최씨(동이)에게 잉태시켜 그래서 태어난 것이 영조라는 것은 당시 18세기를 살던 조선 사람들 태반이 믿던 소문이었다. 김춘택은 숙종 시절 내내 도성 출입이 금지된 인물이었다. 1705년 남해에서 제주도 귀양을 간 뒤 그곳에서 5년 동안 제주도 자연의 풍광을 읊었던 김춘택.
그의 사십대 행적은 역사에서도 그 자취를 찾기 힘들만큼 묘연하다. 이십대 중반 갑술환국(서인정국) 주도하고 삼십대 중반부터 마흔여덟 죽을때까지 귀양지를 떠돌던 그는 1717년 4월 22일 객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718년 3월 9일, 숙빈 최씨(동이)도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김춘택이 죽은 뒤 원인 모르게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숙빈 최씨. 그녀의 죽을 때까지 소원은 자기 아들 연잉군(영조)가 임금이 되는 것이었다.
숙빈 최씨가 잠든 소령원 전경
조선국 후궁숙수양 숙빈최씨지묘, 영조는 이 묘비 하나 세우는데도 신하들과 논쟁을 거듭하며 글자 하나하나 바꾸었다.
김춘택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불편한 이름이다. 영조의 출생의 비밀, 혹은 의혹은 역사학계에서는 전혀 언급도 하지 않는 이야기다. 그가 죽은 뒤 170년이 지난 뒤 서인에서 노론으로 김춘택이 그토록 일당독재를 원했던 그 당이 200년 이상 집권했지만 그의 이름은 복권되지 않고 죄인의 신분으로 있었다. 노론측 입장에서는 그가 무척 불편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를 복권할 경우 그와 관련된 의문이 어쩌면 조선이 영조 이후 김씨 왕조라는 사실의 치부가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존재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를 영원히 죄인의 신분에 묶어 둠으로써 그러한 사실을 영원히 덮어두려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1886년 12월 4일 고종은 영의정 심순택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불천위 죽어도 그 공이 사라지지 않으니 그를 영원히 받들어 모시라'는 전교를 내린다. 그 이유와 과정이 어떠했는지는 앞으로 살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1689년 감고당 언덕길 어느 모퉁이에서 숙빈 최씨(동이)와 북헌 김춘택은 푸릇푸릇한 청춘 스무 살로 사랑을 나눴을 것이다. 그리고 불과 4년 만에 한 사람은 임금의 총애를 받아 후궁 자리를 차지했으며 한 사람은 서인 정권을 당시 등장시켜 최고 권력 막후 실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그것이 두 사람 모두 불과 스물셋 이란 나이였다. 영조의 출생은 그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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