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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가을 7 : 역동성이 사라진 닫힌 사회

두바퀴인생 2012. 12. 17. 14:54

 

 

 

우면산의 겨울 7 : 역동성이 사라진 닫힌 사회

 

  

                                                                                         고속도로변 설경

 

지난주에는 눈이 내렸고 또 비가 내렸다. 주말에는 기온이 올라가 영상에 가까운 날씨가 되어 자전거를 타고 새벽길을 나섰다. 눈이 녹은 길을 골라 천천히 달렸다. 도로변 가에는 시커먼 먼지가 눈과 범벅이 되어 지저분하다. 저런 분진이 눈이 내리지 않는 날에는 공기중에 떠 다니며 도시를 오염시키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마시게 만든다고 생각하니 끔직하다.

 

요즘 블로그 올리고 있는 역사는 정조시대를 마감하려 하고 있다. 그동안 정조시대를 기술하면서 드라마 '이산'을 다시보기로 보았다. 전편에 흐르는 내용은 영정조 시대를 가로지르며 지난 역사를 비교적 잘 보여주고 있다. 성송연이란 후궁과 정조의 사랑이 전편에 흐르면서 갖가지 음모와 반전, 그리고 개혁군주 정조의 위대한 치세를 보여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홍국영의 죽음과 후궁 성씨의 죽음이 방영되는 날에는 시청율이 최고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던 시청자들의 울음이 흘러나오고 안타가워하는 모습이 당시의 뉴스에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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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에서는 드라마 이산에 대해서 실록에 비해 과도한 설정과 가상 인물 등장과 대립각 구도, 그리고 홍국영에 대한 재평가 설정 등에 대해서 일부 전문가와 역사학자들은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면에서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면도 없지 않다. 실록의 기록은 대부분 정조 이후 정권을 장악한 노론측 사관들에 의해 사료가 수집되고 기록되었고 감수를 맡아 작성된 것으로 모두가 진실이라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치부는 철저하게 감추고 삭제하였을 것이며 정조 사후 정조 시대의 모든 개혁정책은 어린 순조 즉위 후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에 의해 대부분 폐기되고 조선은 다시 영정조 시대 이전으로 되돌려졌기 때문이다.

 

정순왕후와 노론측의 끈질긴 정조 제거 음모, 충직한 군인이며 성연을 사랑한 대수, 후궁 성연의 출신과 만남, 그리고 성연의 정조에 대한 한없는 깊은 사랑, 노론측 재야 선비의 등장과 조정의 농성, 화완옹주와 정후겸의 정조 암살 음모, 각종 난국을 타개하는 정조의 정치력, 서얼 출신 등 열린 인재 등용과 친위 세력 양성소 규장각 설치와 정약용, 박제가 등 실학자들의 등장과 활약, 배다리와 수원 화성 축조, 사도세자묘 이장, 장용영 등 근위 군사력 증강 등 정조의 왕권 강화책, 사회 경제 및 전염병 창궐 등 사회 개혁에 대한 정조의 개혁정치 등을 살펴볼 수 있는 드라마였다. 이서연, 한지민 등 배우들의 열연과 정조의 서민적인 면과 후궁 성씨의 청순함이 가세되어 두 사람의 사랑이 더욱 돋보이게 만든 것도 드라마의 진가를 발휘하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 특히 어린 세자를 잃고 자신 마져 다시 임신한 상태에서 후사를 낳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후궁 성씨의 죽음은 모든 시청자들 뿐 아니라 드라마를 보던 나 자신도 눈물이 났다. 사랑이란 시대를 초월하여 이처럼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며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 사후 약 23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는 발전을 거듭하였으나 내면적인 시스템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여전히 부자 양반과 가난한 백성인 서민들이 나누어져 살고 있다. 정조 시대는 양반 반, 서얼 반을 이룬 사회였으나 지금의 우리 사회는 양반 5%, 서얼 95%를 이루는 양극화를 이루고 있는 사회다. 그만큼 부의 편중이 심화되었고 소수의 가진자들이 다수의 가난한 자를 지배하며 살고 있는 사회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가 도입되면서 벌어진 현상이지만 가난한 자가 부자로 진입하기에는 사회의 역동성이 사라졌고 부의 대물림이 심회되면서 개천에서 용나기는 글렀다는 점이다.

 

대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누가 되던 95%의 가난한 서민을 당장 부자로 만들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모두가 부자가 되는 길은 드라마 이산에서 나오는 대화처럼 "백성 모두가 근심과 걱정없이 좋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진보라는 빌미하에 이념의 함정에 빠져 적과 동침을 꿈꾸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정치구태를 벗어나기 힘든 멍에를 쓰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북의 당면한 적과 주변 강대국들의 야심을 잠재울 능력이 보이지 않고 산적한 경제적인 난국을 돌파할 지혜가 부족해 보이고 사회 곳곳에 심회된 비리와 부패의 골수를 처단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 갈등을 통합하고 산적한 현안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사람이 우리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러나 누가되던 사회 현안에 매달려 미래를 위한 조선의 정조처럼 개혁적인 정치를 펼치기에는 우리 정치가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비전이 없고 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들도 비젼이 없고 꿈이 없다는 결론이다. 유권자는 흩어진 군중이다. 군중은 이성을 상실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사회의 신분 제도

 

조선 사회의 신분 계급은 학자에 따라 다르게 분류될 수가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양반(兩班)·중인(中人)·상인(常人)·천인(賤人)의 넷으로 대별(大別)되고 있다. 이와 같은 체제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사회적인 전통 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서, 조선의 집권적인 정치체제의 확립 및 제도의 정비와 더불어 점점 굳어져 갔다. 즉, 조선의 신흥 귀족(新興貴族)들은 고려의 귀족을 대신하여 지배 계급으로 성장하면서 양반계급을 형성한 반면, 그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중인계급으로 남게 되었다.

 

피지배 계급으로는 여전히 상인·천인이 있었으며, 양반과 이들 사이에서 일정한 세습적인 직업을 가짐으로써 하나의 계층으로 고정된 중인이라는 특수한 신분 계급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보면 같은 신분층에도 여러 가지 차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계급과 계급의 한계를 짓는 데에도 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양반이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총칭하던 말로서, 이들은 농(農)·공(工)·상(商)에 종사하지 않고 유학만을 공부하여 과거를 거쳐 아무 제한 없이 고급 관직으로도 승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관료가 되면 토지와 녹봉(祿俸) 등을 국가에서 받게 되므로 지주계급(地主階級)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들 양반 가운데서 조선의 건국 이래 속출된 각종의 공신(功臣)들과 고급 관료들은 그들에게 여러 가지의 명목으로 지급된 광대한 토지를 점점 세습·사유함으로써 대지주가 되었으며, 이런 경제적인 기반을 토대로 삼아 권문세가(權門勢家)의 문벌을 이룬 양반도 생기게 되었다. 같은 양반이라도 문관은 무관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일반적인 요직은 물론, 군사 요직까지도 문관이 장관이 되면, 무관을 그 아래 두었던 일이 많았다. 양반의 서얼(庶孼) 출신자에게는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않았던 반면에, 무과에는 천인만 아니면 누구든지 응시할 자격을 준 결과 적서(嫡庶)의 차별과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얕잡아 보는 사회적인 인습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편 양반 신분의 세습에 따른 그들의 수적(數的) 팽창은 한정된 국가 정치기구에의 참여를 둘러싸고서 서로 이권과 이념을 달리하는 파벌을 짓게 하여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이란 피비린내 나는 대립 항쟁을 일으키게도 하였다. 중인은 외국어(外國語)[3]·의학(醫學)·천문학(天文學)·법률학 등 특수 기술을 배워 세습하였다. 중인과 양반의 서얼 출신자를 합하여 중서(中庶)라고 해서 양반 이외의 관료가 될 수 있는 계급이었지만, 법으로써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제한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낮은 관직에 그치고 말았다. 중기 이후에 이들의 한품서용(限品敍用)에 대한 제한을 철폐하려는 기운이 싹트기도 하였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서얼들은 출세의 길이 막힌 것에 불만을 품고 서로 무리를 지어 반역이나 도둑의 주동자가 되기도 하여 사회의 여러 가지 파문을 던졌다.

 

이들보다 하위(下位)의 신분층으로 이서(吏胥)·역리(驛吏)·군교(軍校) 등이 있었는데 말단(末端)의 행정·경찰사무를 담당하여 직접 평민들을 지배하는 실권을 쥐고 있어 사회적으로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상인은 농(農)·공(工)·상(商)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하지만, 그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이들은 국가에 대하여 조세(租稅)·공부(貢賦)·군역(軍役) 등 각종의 의무를 부담한데다가 지방관이나 향리 등의 착취대상이 되어 그 생활은 일반적으로 몹시 비참하였다. 이렇게 시달리는 생활 속에서 서로 단결하여 살길을 찾기 위한 움직임은 농촌 공동체를 만들게 하였으며, 상호부조를 목적한 여러 가지 계(契)가 조직되었다.

 

한편 말기로 내려오면서 더욱더 심해지던 관리들의 수탈에 대한 반항으로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니 홍경래(洪景來)의 난, 철종 때의 민란, 동학혁명(東學革命) 등의 주체는 농민이었다. 공업·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노비(奴婢)가 거의 전부였다. 이들은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상속 등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는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의 둘로 대별(大別)될 수 있었지만 이들 가운데에도 여러 계층이 있었다.

 

이 밖에 창기(娼妓)·무당·광대 등도 천인에 속하였으며, 불교의 몰락과 함께 승려도 천인의 대우를 받았다. 천인 중에서도 가장 천대를 받은 신분층은 백정(白丁)으로서 이들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으며 특수부락(特殊部落)을 이루어 일반인과도 격리된 가운데서 도살(屠殺)·유기장(柳器匠) 등의 작업을 세습하며 살았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의 신분 계급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지배체제는 형성 유지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로 다소 변천이 생겨 평민이나 천인으로서도 전공(戰功) 또는 납속(納贖) 등의 수단을 통하여 당상(堂上)·당하(堂下)의 위계(位階)나 직명(職名)을 얻는 경우도 많았으나, 특전이란 군역을 면제받는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그것도 일신(一身)에만 한한다는 제약이 있었다. 이와 같이 엄격한 신분체제는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 이후 신분 계급의 타파가 제도화됨으로써 점차적으로 소멸되어 갔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 서얼들의 설움 

 

조선 시대는 명목상 일부일체제 사회였으나 실제는 일부다처제 사회였다. 일부다처제란 한 남자가 여럿 부인을 거느리고 사는 것을 말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유교의 성리학으로 무장한 유교종교적인 사회였다. 그래서 그들은 성리학에서 제시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또 명분과 충, 효, 의를 숭상하던 선비들은 평생을 무위도식하며 벼슬에 나가는 게 유일한 인생의 목표였으며 그렇지 않으면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경치 좋은 산중이나 바닷가. 강가에 정자와 별장을 짖고 시나 읊으면서 세월을 보냈고 통상 능력에 따라 한 두 명이나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고 살았다.

 

물론 농사와 살림은 노비들이 맡았고 경제적인 능력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에 부의 근거를 두었으며 양반 행세는 물론 평생 무위도식하면서 명망잇는 선비에게 경전을 읽고 배우며 과거를 보아 관료로 진출하거나 아니면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허울좋은 성리학에 빠져 공리공론을 일삼으며 살았다. 평생을 노동이란 천한 것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경제적인 여유가 되는 양반들은 틈나면 기생집이나 들락거리며 큰소리치고 살았다. 몰론 일부는 열심히 사서삼경을 읽고 외워 과거를 보아 관료로 진출하여 출세를 하면 더 많은 부를 쟁취할 수 있었고 자손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호의호식하면서 살거나 아니면 헛된 욕심에 사화나 당쟁, 역모, 반정에 가담하여 세상을 뒤집어려다가 실패하면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경우도 하다하였다. 그런가운데 양반들은 능력에 따라 여러 명의 부인과 첩을 거느리고 일부다처제가 근세까지 성행되던 우리나라가 일부일처제가 정착된 것은 최근이다. 아직도 일부 농촌에서는 마누라를 두 명씩이나 데리고 사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첩의 자식이다. 그들은 서자라 하여 벼슬길은 물론 공직에 나갈 수도 없었고 물론 과거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마디로 조선은 오로지 양반들만을 위한 사회였으며 철저한 신분제가 강요되던 사회였다. 그래서 서출들의 불만이 많았고 사회에 대해 반항적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로인한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광해군 시절에 발생한 '칠서의 난'이다.

 

 

                                                                         천안 휴게소

 

 

서얼 출신 광해군의 왕권 강화를 위한 정적 제거 과정

광해군 시대에는 왕권에 대한 위협이 극대화되어 있었다. 선조 이후 적자가 아닌 서자가 왕권을 이어 방계 승통이라는 오점을 남긴 데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민간에 이씨 시대가 끝나고 정씨 시대가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게다가 광해군 역시 서자였고 세자 책봉과정에서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선택된 터라 중국의 고명을 받지도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유영경의 모략 때문에 선조의 선위 교서를 받지 못해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겨우 왕위를 넘겨받은 처지였다.

 

게다가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도 명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그의 왕위 세습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한 데다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존재하였기에 왕권에 대한 위협은 한층 심화된 상태였다. 왕권에 대한 이 같은 위협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 제거 작업에 몰두하게 했으며, 광해군 지지파였던 대북파가 이 작업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고 실천하게 된다.

 

광해군의 왕권 안정책은 그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임해군의 제거 작업부터 시작되었다. 임해군은 세자 책봉에 탈락된 이후 줄곧 광해군을 헐뜯어온 인물이었다. 이런 그의 처사는 광해군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게다가 그의 광폭한 성격으로 인해 민간이 피해를 입는 일도 잦아졌다. 그런 와중에 광해군의 집권을 반대하던 서인과 소북 세력은 은밀히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세자 책봉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집권당인 대북파는 임해군이 말썽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그를 유배보내야 한다고 간언했다.

 

하지만 임해군 이외에도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적지 않았다. 특히 적자인 영창대군과 신성군의 양자 능창군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광해군과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서 '김직재의 옥'을 일으켰고, 능창군을 제거하기 위해서 '경희의 옥' 일으켜 제거하게 되었다. 또 '칠서의 옥'을 이용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재남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보냈다가 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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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회

 

'칠서의 옥'

 

1613년 문경새재(조령)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7명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리였다.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한 바 있는데, 이것이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無倫黨)'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변장하여 행세하면서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은밀히 밟아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타진되었다. 하지만 이 '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의첨 등 대북파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의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후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조작된 자백을 받아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의 하나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모두가 대북파의 사주에 의해 이루어졌다.

 

박응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은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려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의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재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 저주했다는 일도 발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재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불을 떼서 뜨거운 방안에서 죽이는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흔히 '계축옥사'라 한다.

 

대북파의 또 다른 숙청 대상은 능창군이었다. 능창군은 선조의 다섯재 서자 정원군의 아들로서 인빈의 소생이자 한때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로 책봉될 뻔했던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당시 17세로서 주변에서 그를 중심으로 역모를 감행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 뿐만 아니라 '능창군은 기상이 비범하다." 든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혹은 임빈의 무덤 자리가 좋다."는 등의 말들이 소문을 통해 광해군의 귀에도 들어왔다. 따라서 대북파와 광해군은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왕권 위협 세력을 거의 모두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이유는 다음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정적의 제거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적을 양산했는데도 이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한 것이 첯재 이유이고, 둘째로 대북 세력이 조정을 독점함으로서 전체를 균형 있게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금과 명군의 전투에 명군을 원조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여 출전시키는 바람에 도성과 궁궐의 치안을 소홀히 한 점 등이다. 

 

이처럼 적자가 아닌 서자가 왕위에 오르는 바람에 왕위는 불안하였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과도한 정적 제거로 인해 결국 광해군은 폐륜 임금이라는 낙인이 찍혀 서인들의 반정 빌미를 주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들은 첩을 여럿 데리고 살면서 첩이 자식을 낳으면 모든 혜택에서 제외되며 사회 진출이 차단되는 사회, 이같은 사회는 역동적인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역동성이 사라진 닫힌 사회

 

고대 로마 제국은 최고 권력인 집정관에 초기에는 순수한 로마인들이 차지하였으나 나중에는 정벌 지역의 원주민 출신들도 집정관에 오르는 열린 사회였다. 그래서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를 쳐들어 와서 16년 동안 종횡무진으로 로마연합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하면서 로마군 7만 명을 전멸시킨 '칸네 전투' 등 로마군과 접전을 벌였는데 로마군은 접전시마다 한니발에게 패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병력과 여러 명의 집정관. 원로원 의원들이 전사하였으나 로마군은 또 다른 집정관을 세우고 식민지 각지역에서 병력을 차출하는 등 한니발이 아무리 로마군을 전멸시켜도 로마군은 끓임없이 나타나곤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서 식민지 카르타고 군대와 전쟁에서 연승하던 영웅 스키피오 장군이 이끄는 4만 명의 로마군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본국을 쳐들어 가자 한니발은 본국의 긴급 호출로 결국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북아프리카 평원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이 자신보다 12살이나 어린 로마의 젊은 스키피오 장군에게 일생일대에 그 전투에서 패전함으로서 카르타고는 로마에 항복하고 결국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처럼 열린 사회는 무궁한 자원이 가능하며 서얼이나 천ㅌ출이라 천시하는 사회는 닫힌 사회로 사회적 역동성이 사라지고 국가의 역량을 결집할 수가 없으며 위기를 극복하는 지도층의 자세도 자기 몸 사리기에 바쁘고 국가적 위기에 지도층이 앞장서지 않는 나라는 망국의 길을 간다는 점이다.

 

우리는 조선 사회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함부로 비판할 수는 없지만, 서얼 차별과 양반 , 중인, 상인, 천민으로 구분되어 차별이 엄격하여 그만큼 역동적이지 못했고 인재풀이 가동되지 못한 닫힌 사회였다. 그래서 결국 조선은 노론 세력이 200년 동안 집권하는 사이 역동성이 사라지고 심회된 부패와 권력 다툼과 국론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제에 결국 망하고 말았다.

 

조선의 서얼들이 관직에 나갈 수 없었듯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 서얼들은 95% 가난한 일반 서민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조상들이 못났던 자신이 못났던 지금의 가난은 대물림되었고 그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직장을 다니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휴일도 불사하고 근무하지만 내 집을 마련하기는 하늘에 별따기다. 치솟는 물가, 사교육비, 각종 부채의 이자, 남에게 잘보이려고 입고, 신고, 바르고, 먹고, 타고 다니는 차량 등에 투자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 노후는 커녕 당장의 자녀 학비 조달에 부부가 목숨을 건다. 아무리 발버둥처도 지금의 가난을 극복할 방법이 없다.

 

우리 사회는 여권이 신장되고 여성상위시대로 접어든 듯하다. 가정이 파괴되고 결혼이 어려우며 이혼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자살자가 나이와 세대를 불문하고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자녀 양육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치솟고 고공행진의 물가는 서민들을 옥죄고 있다. 부동산은 거품이 터질날 만을 기다리고 있고 하우스 푸어가 넘쳐난다. 각종 상품에는 거품 가격이 잔뜩 들어 있고 사교육비는 고급화.귀족화되고 있다. 노인층이 늘어나면서 노인 문제가 심각하게 증가하고 있고 노후 문제도 기약이 없다. 서얼이 천시되는 사회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조선 시대는 과거라도 보아 개천에서 용나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그것도 글렀다. 성공자로 부러움을 사던 사법고시 출신의 법조계도 잘나가는 그랜저 검사 등 일부를 제외하고 밥을 굶는 변호사, 이혼 당하는 변호사가 넘쳐난다.

 

이런 사회의 역동성을 되살리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들 모두가 곰곰히 생각해 볼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