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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09 : 조선의 역사 351 (제22대 정조실록 17) 본문
한국의 역사 809 : 조선의 역사 351 (제22대 정조실록 17)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제 22대 정조실록(1752~1800년, 재위 :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5. 정조 시대의 평가
짧은 역사 지식과 얕은 역사관으로 정조 시대를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그 시대를 음미해보고 몇 사람의 전문가와 한가람연구소장 이덕일씨의 인터뷰 내용을 싣는다. 이명박 정부가 탄생한 바로 직후에 한 인터뷰라 시간은 지났지만 이번 대선에서 새로운 정권이 태어난 만큼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열망을 정조에 비유하여 나름대로 기대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정조 시대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실록에 기록된 내용이 전적으로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승자들인 기록자 사관들의 가감과 삭제에 의해 왜곡 기록된 점도 많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역사 왜곡이라지만 그 내용이 왜곡이라는 것도 대부분 실록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실록의 기록이 전부 진실이 아닌 것처럼 전문가들도 실록 이외에는 다른 기록이나 증빙될 자료르 찿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아직도 우리 역사학계를 주름잡고 있는 원로 학자들이 대부분 일제 식민사관을 추종하던 사학자들이 많기 때문에 비난과 반박이 되돌아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항변에 구체적으로 내놓을 증빙 자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도 고조선의 역사가 모호하고, 그 위치나 수도가 오리무중이다. 한사군의 위치라던가, 고구려 수도 평양성의 위치, 고구려의 영역, 패수와 살수의 위치, 백제 위례성의 위치, 대륙백제의 위치와 영역, 가락국의 탄생, 신라의 탄생, 발해의 계승국 문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처하는 우리 학계의 노력 등등 아직도 우리 역사학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의 마지막 불꽃, 영.정조 시대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쿠테타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창업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태종의 강력한 왕권강화책, 세종의 문화통치, 세조의 왕위찬탈과 측근정치 시대를 지나 150여 년이 지난 예종.성종 대에 문치를 이루면서 사림들이 등장하여 훈구세력과 대립이 극치를 이루더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여러 사회로 조선의 역사는 피로 얼룩졌다. 그 뒤를 이은 연산군의 패륜정치, 중종반정, 중종.인종.명종 대에도 사화와 옥사가 줄을 이었고 권력이 교체되면서 정치질서 무너지고 비리와 부패가 극에 달하더니 결국 선조 대에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었다. 조선군이 파죽지세로 무너지면서 조선 땅은 피빛으로 변하였고 백성들은 어죽을 당하는 등 망국의 직전에 천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한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을 포함한 충신열사들이 나타나 꺼져가던 조선의 명줄을 이었다.
임란 후 서얼출신 광해군이 즉위하여 당시 떠오르던 후금과 저물어가던 명과의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며 정통성에서 흔들리던 왕권강화를 위한 집권 대북파들의 과도한 정적 제거 과정에서 패륜군주로 낙인찍히면서 좇겨난 남인과 서인들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결국 실각하고 말았다.
왕권을 인수한 인조는 반정 세력에 휘둘리면서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냈고 집권 혁명 세력의 권력 집중과 내부적인 부패를 초래하였고 국론분열과 세력다툼 과정에서 막다른 길에 봉착한 반정공신이며 서북면 부사령관이었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인조가 공주가지 피난 가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다행히 반란군이 안산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스스로 무너짐에 따라, 서북면 방어 체제는 국고탕진과 맞물려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서북면 방어체제가 무너지자 후금의 침공이 결국 정묘.병자호란을 초래하였고 남한산성에서 버티던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면서 조선이 망국 직전에 다시 되살아났다.
인조에 뒤이어 즉위한 효종은 북벌에 온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의 때와 시기가 맞지 않고 사대부들의 비정적인 참여로 결국 북벌의 꿈을 이루지도 못한채 즉위 10년 만에 급서하고 말았다. 뒤이은 현종은 예송논쟁에 휘말려고 아까운 세월을 허송하고 말았고 뒤이은 숙종은 영민한 임금으로 환국정치를 통해서 왕권을 회복하려 노력하였으나 결국 당파의 거친 세력 다툼을 이용한 환국정치는 당쟁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 멍어리만 더 크게 남긴 꼴이 되고 말았다.
천인 출신인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숙빈 최씨를 이용한 소론과 남인들의 세력다툼 속에서 혼미를 거듭하던 조정은 숙종이 죽자 결국 희빈 장씨의 아들이 즉위하니 경종이라, 그는 지병으로 짧은 치세로 마감하자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이 즉위함에 그가 영조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내결고 당파의 세력 다툼을 조정하기 위해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등 많은 노력하였고 한편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서적 편찬 등 각종 문화사업을 활발히 펼친 왕이었다. 그래서 조선 창업 400여 년만에 최고의 융성기인 영.정조 시대를 맞아 국운융성을 위한 재기의 몸부림을 치던 시기가 도래하였던 것이다.
고독한 개혁군주, 정조
정조는 세종과 더불어 조선의 역사에서 대왕으로 호칭되고 있다. 그만큼 그는 개혁군주로서 그의 뛰어난 품성과 능력에서 비롯하여 포용성과 개혁성의 많은 치적이 후세인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일 것이다.
동서양의 역사를 둘러보아도 정조대왕(正祖, 1752-1800) 만큼 학문과 덕을 아울러 갖춘 군주는 드물다. 조선후기 실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조의 학술장려 정책이 큰 힘이 되었다.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학문도 정조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정조는 실학자를 키운 실학의 대부였다.
한가람 연구소 이덕일 소장 대담 자료 어떤 학자보다도 더 학문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더 백성을 사랑하는 선각적 군주였지만, 그 혼자만으로 조선의 역사를 개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정파적 이해관계에 골몰하는 대다수 신하와 유학자들은 정조의 정치적 비전을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다지 협조적이지도 않았다. 정조와 정치철학을 같이하는 실학자들은 수적으로 소수파를 면하지 못하였다. 시대를 앞서서 백성과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였던 정조는 고독한 지도자였다. 그는 위대한 군주이기에 앞서 불세출의 석학이었고 매력 있는 인간이었다. 또한 위대한 꿈과 강한 의지를 지닌 큰 리더였다. 우리에게 이런 큰 지도자가 다시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일까? 아래는 이덕일 소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조의 삶은 햄릿보다 더 드라마틱... 독살설, 소설적 상상만은 아냐"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 망하지 않았을 것"
정조는 조선과 중국의 역사에 대해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훌륭한 인물에 대해서는 힘써 배우려고 하였다. 그는 고금의 선비나 신하들을 보는데 있어서 단점에 가려서 장점을 놓치는 일이 없었다. 다소 단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장점이 크면 인정하고 포용하였다. 예컨대 어떤 신하가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공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다고 비판하자, 정조는 “마땅히 대체를 보아야 하니 어찌 조그만 잘못을 가지고 대뜸 평생을 단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류성룡을 감싸주었다.
소년시절부터 독서광이었던 정조는 정사를 돌보는 틈틈이 독서에 힘써서 역사와 경학과 문학 등 학문 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학문과 문장에 만 치중하여 문약(文弱)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조는 학문에만 밝은 것이 아니었다. 군사지식도 풍부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도 능숙하였다. 틈이 나면 활쏘기 연습에 힘써서 높은 명중술을 보여주었다.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한 무신을 높이 받든 것도 정조였다. 이처럼 그는 문과 무를 겸비한 리더였다.
정사와 학문에 혼신의 힘을 다할 뿐 일상생활은 할아버지인 영조를 본받아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아침상이나 저녁상의 반찬이 너 댓가지에 불과하였다. 법을 지키지 않은 백성에 대해서도 사안에 따라서는 관용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은혜를 베풀기도 하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올릴 산 꿩을 훔쳐 먹었다. 법에 따르면 그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 사실을 보고받고 그가 어리석고 무지해서 그런 죄를 범했다고 생각해서 그 죄를 용서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특별히 꿩 한 마리를 주도록 해서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였다. 백성에 대한 정조의 지극히 어진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정조는 한편으로는 치밀하고 주도면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영웅적인 것을 숭상하는 낭만적 심리도 있었다. 특히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왕양명(王陽明)을 사모하기도 하고, 장자(莊子)의 호쾌한 문장을 좋아하였고 송시열을 추앙하였다. 정조의 호(號) 홍제(弘齋)는『논어』에 나오는 “士不可以不弘毅”에서 따온 것으로 ‘넓고 큰 마음’과 ‘굳센 의지’를 뜻한다. 그의 뜻은 크고 높았으며 관심은 끝없이 넓었다. “내 마음은 여태까지 천고의 세월을 더듬어 올라가지 않은 적이 없고 팔방의 세계를 누비며 다니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바야흐로 '왕들의 시대'다. 드라마 <이산> <대왕 세종>을 비롯해 역사관련 서적들도 넘쳐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정조는 비극적이었던 일생만큼이나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조선왕 독살사건> <사도세자의 고백> 등 대중 역사서를 집필해 온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정조의 '재조명'에 힘을 쏟고 있는 대표적인 역사학자다.
이덕일 소장을 직접 만나봤다. 인터뷰에서 이덕일 소장은 "정조는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미래로 나아가려 했던 임금"이었다며 "정조 독살설은 소설적 상상력이 아니라 사실로 확신하게 하는 정황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포용 정치와 화성 건설, 서얼 등용, 과학기술 수용 등으로 봤을 때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그는 17대 대선 이후의 지금 상황을 '인조반정' 직후와 비슷하다고 말해 흥미를 끌었다. 이명박 당선인에게 "반대파를 포용하는 정조의 포용정치를 주문"하며 "독선의 정치로 흐른다면 불행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조언했다.
- 정조에 대한 애착이 큰 것 같은데 실제 정조는 어떤 임금이었나?
"정조는 '햄릿'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셰익스피어는 덴마크 왕자의 전설을 가지고 햄릿을 만들어 냈는데 우리에겐 그런 작가가 없어서인지 그 드라마틱한 삶을 극화하지 못해 아쉽다. 정조는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미래로 나아가려고 했던 임금이었다.
정조를 잘 모르는 사람은 '문체반정'을 들어 정조가 보수파로 돌았다고 하는데 그건 당시 상황을 거꾸로 이해한 거다. 실제로 정조는 천주교를 믿는 남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문체반정을 제기했다.
노론이 계속 천주교를 억압해야 한다고 하니까, 천주교가 발전하는 근본 이유는 문체가 잘못된 데 있다, 그런데 문체가 잘못된 놈을 따져보면 모두 노론 너희들이다, 이렇게 한 거다. 이슈가 천주교가 되면 남인들이 불리하게 돼 있다. 그러니까 문체반정이라는 의외의 어젠더를 제시해 천주교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하는, 고도의 정치적 의도였다.
또 세종과 비교해, 세종은 신하들을 다독이면서 끌고 갔는데 정조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세종 때는 당파가 없었고 정조 때는 가장 유력한 당파가 정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거대 정파를 상대로 정치를 한 게 정조다.
정조 시대의 '시대정신'이 있다. 성리학 일당 사상체계를 다원화하고, 노론 일당 정치체계를 다원화하고, 극심한 신분제를 완화하는, 이런 것들. 정조는 천주교를 옹호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보호해 다른 사상을 용인했고, 양명학도 이야기를 많이 했다. 정치에서는 남인 등 타 당파를 끌어들여 다당제를 이뤘다. 또 서얼을 등용해 신분제를 약화시켰으며 최첨단 서구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조선을 선진 사회로 만들려고 했다. 때문에 그를 조선 후기 들어 가장 훌륭한 임금이었다고 하는 거다."
- 저서 <조선왕 독살 사건>에서 정조의 독살을 주장했는데 역사학자 유봉학은 "소설적 상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진짜 정조는 독살됐나?
"독살됐다, 안됐다고 어느 쪽도 단정할 수 없다. 정조의 죽음 후 어의 심인이 왕을 독살했다는 지목을 받았고 정순왕후 등이 보호하려 했지만 결국 사형 당했다. 또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경상도 인동 지역에서는 정조의 복수를 하겠다는 봉기까지 일어났다. 내가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상황들이 있는데 그걸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정조가 죽는 '순간'이 이상하다고 해서, 그 장면 하나만 가지고 독살 당했다는 게 아니다. 정조 독살을 '사실'로 확신하게 하는 증거들이 있었던 거다."
- 선생은 정조뿐만 아니라 경종, 소현세자 등 8명이 독살됐다고 하지만 개연성이 미흡하다는 비판도 있다. 실록에는 정황만 있을 뿐 똑 부러지게 '독살됐다'는 말은 없지 않은가.
"독살에는 메커니즘이 있다. 왕과 집권 세력의 갈등이 극도로 고조됐을 때 왕이 죽는 걸로 갈등이 해소되고 대립했던 세력이 집권한다. 반대 세력들이 집권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목숨 걸고 비록을 남기지 않는 한 기록이 남을 수 없는 거다. 때문에 역사서는 행간이 중요하다. 승자의 기록에서 패자의 목소리를 읽어내는 것이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경종과 소현세자는 독살됐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정조는 그 선에 가깝지만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2% 부족한 면이 있다."
▲ <태종 이방원>의 필자 이정근 시민기자.
ⓒ 남소연
- 독살은 왕조에게는 '좌절'이지만 사대부들에게는 왕을 세우는 '택군'의 방법이라는 면도 있다.
"당쟁에도 장단점이 있다. 특히 '정당정치'적인 면은 세계사에서도 드문 사례다. 왕조 국가는 국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움직이는 메커니즘인데 뒤로 가면서 당파들이 왕을 선택하게 된다. 이쯤 되면 정당 정치의 순기능이 역기능에 먹히는 거다.
특히 조선 후기 들어 노론이라는 거대 정파가 택군의 정치를 했다. 자신들 맘에 드는 임금만 임금이라는 건데 사대부 지배체제가 그만큼 공고해진 거다. 또 사대부에서도 한 개 당파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임금마저도 수중에 넣고 흔들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정조는 그 정국을 파산내지 않으면서도 그쪽에 먹히지도 않고 정국을 상당 부분 의도한 대로 끌고 갔다."
- 정조가 택군 세력에 희생됐다고 보는가?
"그렇다. 1800년 정조의 시신을 땅에 묻고 돌아온 날부터 정조의 모든 치세가 부정된다. 가장 큰 정적이었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1801년 정월에 천주교를 섬기는 건 역적이라는 교서가 내려진다. 그 때문에 정조 때 성장한 남인 이가환, 이승훈 모두 사형을 당하고 정약용 형제는 유배를 간다. 한 왕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국이 확 뒤바뀌면서 반동의 정치가 행해진다. 이 때문에, 정조가 독살 당하지 않았느냐는 거다. 정조가 종기가 났을 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계 체제도 만들었을 거다."
- 사람들은 혜경궁 홍씨를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애쓴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선생은 "지아비를 죽음으로 몰고간 노론을 택한 비정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혜경궁 홍씨의 공과가 있다. 과는 남편을 죽이는 데 가담한 것이고 공은 남편은 버렸지만 아들은 버리지 못하겠다며 정조를 보호한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집안 자체가 노론의 명가로 노론 당파와 자기 집안이 사도세자와 부딪힐 때 당의 명령을 따랐다.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이 왜 그렇게 뼈아팠냐 하면 자신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극이 극대화되는 인물이 정조다.
혜경궁 홍씨나 영조는 사도세자는 죽였지만 정조는 지키려고 했다. <한중록>에도 정조를 죽이려고 했던 숙부 홍인한에게 편지를 보내 '그러지 마옵소서'라고 했다고 나온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을 버림으로써 조선 정치를 왜곡시키기도 했지만 정조가 즉위하는 데 도움을 준, 일장일단이 있는 인물이다."
- "정조를 과대하게 평가하는 것은 허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병자호란 때 임금이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치욕을 당한 후부터 조선은 뇌사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정조가 독살되지 않았다고 '식물국가' 조선이 달라졌을까?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은 멸망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 정조는 화성 건설 때 부역 대신 임금 노동제를 했다. 과거처럼 백성들의 고통 속에서 성을 쌓는 게 아니었고 오히려 임금을 주니까 흉년 들어 갈 곳 없는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테네시 강 사업은 높이 평가하면서 그보다 훨씬 전인 화성 건설에 대해서 평가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흔히 기중기를 정약용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조가 부친상으로 시묘살이를 하던 정약용에게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주며 무거운 걸 들어 올리는 기계를 개발하라고 했다. 이처럼 정조는 경학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첨단의 과학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가지 않기 위해 철저히 성리학자로 위장했지만 사실 정조는 성리학자가 아니었고 딴 사상도 용인했다.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아들이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그대로 왕이 됐다면, 다산 정약용 같은 인물이 정승에 올랐다면 조선은 멸망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사대부 계급 자체가 교체되지는 않았겠지만 사대부 내 주류 세력은 열린 세계관을 가진 실무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갖춘 집단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머리는 똑똑하지만 신분제 질곡에 억눌려 있는 서얼들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면서 조선 지식계를 뒤집어 놓은 것도 정조 아닌가?"
"지금 분위기 '인조반정' 직후와 비슷... 정조식 포용정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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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에게 정조를 닮으라고 했던 이덕일 소장. 이명박 당선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정조의 포용정치를 주문했다. | |
ⓒ 남소연 |
- 김대중 전 대통령을 '태종', 노무현 대통령을 '정조'에 비유하기도 했다.
"정확하게는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는 태종 식으로 과거와 단절하고 후기에는 세종 식으로 포용하며 가야 했다, 초기부터 세종처럼 끌어안으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뒤죽박죽이 됐다는 얘기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직후에는 '정조를 지향하라'는 글을 썼다. 정조는 부친을 죽인 노론이 우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들과 관계를 파탄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처한 정치 지형도 비슷하다고 봤다. 개인적인 아픔은 있겠지만 미래지향적인 어젠더를 가지고 통합의 수단으로 삼으라고 말한 거다. 나 말고도 노무현 대통령에게 정조를 닮으라고 주문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정조를 닮은 정치를 지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이명박 당선인을 조선사의 인물에 비유한다면?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 자체는 인조반정 직후와 비슷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박 당선인이 인조 식으로 가면 곤란해질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에 광해군의 정책을 뒤엎으면서 병자호란 같은 국가적인 어려움을 당했다.
노동이나 복지 부분에는 다른 철학을 가진 사람들을 등용하는, 반대파를 일정 부분 포용했던 정조 식의 '포용' 정치를 주문하고 싶다. 그렇지 않고 압도적으로 당선됐으니까 내 맘대로 하겠다는 독선의 정치로 흐른다면 또 한 번 불행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 지금 386 세력을 중종 때 조광조와 비교하기도 했다.
"조광조에게 권력은 하나의 수단이었다. 조광조의 목적은 지치주의(至治主義), 즉 성리학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후세의 기록을 보면 조광조가 정권을 잡았을 때, 대궐의 그 어느 권력자도 시골의 조그만 것을 침해하지 못했다고 나온다. 또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에는 조광조가 거리에 나가면 백성들이 붙잡고 만세를 부르고 '우리 상전 오셨다'고 환호했다는 구절이 있다.
조광조는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면서 권력자들을 철제하게 견제했고 그 때문에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일부 386들은 정권 권력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처신한 게 사실이다. 물론 일부고, 이것 때문에 386 전체가 억울하게 폄하되는 면도 분명 있다."
"왜 왕 얘기만 하냐고? 잘못된 주류역사 바꾸는 게 우선"
- TV드라마와 출판계에 역사물이 홍수를 이루면서 "역사의 눈높이를 낮췄다"와 "역사를 흥미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출판에서는 역사가 인문 영역에서 독립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우리 사회가 '역사'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반면 방송이 역사 대중화에 기여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시청률에 매달리면서 허구를 역사라는 이름으로 방영하는 것은 곤란하다. 구체적인 인명과 시대가 설정된다면 일정 정도 제한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은 이런 걸 너무 뛰어 넘으니까 논란이 되는 거다."
- 세종이나 정조 등 최근 역사물이 왕조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에 대한 조명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조선은 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쯤 이야기라고 생각해 상당히 가깝다고 느끼는 것 같다. 또 조선사는 내용만 있으면 일정 정도 보장이 되는데 고려시대나 특히 구한말 같은 경우는 전혀 반응이 없다. 생활사, 미시사적인 요구는 상당히 많다. <대장금>이 생활사냐는 논란은 별개로, 음식이라는 소재로 접근해 큰 호응을 얻지 않았나? 단순히 생활사가 인기가 없다는 게 아니라 작가의 부족이라는 면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생활사 접근을 망설이는 것은 선후의 문제 때문이다. 아직도 주류 역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 잘못된 역사의 정설, 주류설을 바꾼 다음 부분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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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독살설을 꾸준히 제기해 온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이정근 시민기자와 만나 정조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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