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811 : 조선의 역사 353 (제22대 정조실록 19) 본문
한국의 역사 811 : 조선의 역사 353 (제22대 정조실록 19)
수원 화성 능행도
수원 화성 팔달문
제 22대 정조실록(1752~1800년, 재위 : 1776년 3월~1800년 6월, 24년 3개월)
5. 정조 시대의 평가(계속)
아래는 드라마 '이산'에 대한 역사 왜곡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역사 평론가들이 역사 왜곡이라는 것도 결국은 실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실록 자체도 승자들인 노론측 사관들에 의해 자료가 수집되고 정리하여 편집하였으며 감수까지 하여 작성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확한 진실 그 자체는 아무래도 가감되고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 작가나 제작 관련자들도 역사 왜곡에 대해서 모를리는 없을 것이나 상업성을 고려하여 구성과 내용을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유발하여 시청율을 높여야 하는 입장에서 다소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양한 내용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실록과 비교하여 다른 내용을 무조건 왜곡이라고 평가절하하기에는 역사를 보는 내면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조선의 임금과 왕후, 세자나 왕자, 후궁 등이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경우는 대부분 독살과 관련되었다고 생각되며 당사자의 정확한 증세와 사망 경위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록이 부족하거나 남아 있지 않고 사후에도 그에 대한 처벌이 모호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일부 전직 대통령을 영웅시하려거나 고대포장하여 전기를 만드는 등 추종자들의 왜곡된 행태는 진실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쉬운 것처럼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에 따라 역사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후세 사가들은 오늘날의 의학 상식으로 시체가 독살이 분명함에도 실록에 독살과 관련된 내용이 없으면 독살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또 삼국 사기의 백제의 역사 기록에서는 반역이나 반정이 일어난 경우 천제지변 상황을 비유하여 기술하는 등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도록 기록하고 있다. 또 많은 역사서나 관련 사서들이 사라져 실제적인 정확한 내용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드라마의 역사 왜곡이라는 것도 사실은 알고보면 안개 속의 역사를 오로지 기록으로만 인정하려는 경직된 사고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를 보는 사람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다. 드라마의 역사를 실제 역사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어치피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역사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 그렇게나마 역사를 이해한다는 점에서는 다행이다. 역사 왜곡이던 아니던 정조 시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이러한 평가도 포용하는 자세도 필요할 것이다.
드라마 '이산'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로 극화하기 위해서 작가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만의 평가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극은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드라마 <이산>을 즐겨보는 입장에서 극적 긴장감으로 드라마에 몰입하면서 보다 보면, 실제로 영조 말기의 상황이 저러했는가에 대한 의문점을 지울 수가 없다. <이산>이라는 드라마는 그야말로 극적인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면서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역사적 상황에 대한 고증에서는 상당히 왜곡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어떤 경우에는 역사 속 인물이 이름만 같을 뿐 역사 속에서 활동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드라마 속에서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시청자들이 역사적으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내용이 역사적으로 있었던 일이고, 어떤 부분이 허구적인 내용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고서는 드라마를 통해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전적으로 역사적인 사실로 믿을 수도 있다.
MBC는 사극을 방영하면서 허구적인 상상력에 대해 한없이 자유스럽고 너그럽다는 생각을 해 본다. MBC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사극 <주몽>이 그랬고, <태왕사신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상의 세계인 환타지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갔다.
시청자들은 정통 사극(물론 정통 사극 역시 역사 왜곡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과는 달리 빠른 전개와 극적인 긴장감이 높은 현대적 감각의 사극에 매료되는 듯하다.
영조와 정조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산>이 완성도 높은 드라마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내용에 대한 철저한 고증보다는 드라마의 극적 긴장감만을 추구하는 모습에 몰두하는 것 같아서 아쉬움과 우려감을 지울 수 없다.
영조에 대한 역사적 비판 속에 ‘매병’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매병’을 기정사실로 드라마를 전개하고 있다. 11일(월) 방영분에서는 영조가 교서를 내려 정순왕후를 폐서인으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실제로 정순왕후는 정조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이산이 역모를 꾸민 사람들을 용서하려하자, 혜경궁 홍씨는 펄쩍 뛰며 절대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살려달라고 찾아온 숙부인 홍인한에게 세손이 용서하더라도 자신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영조까지 찾아가는 단호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인 홍인한이 억울하게 모함받았다는 변명을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역사 속의 혜경궁 홍씨와 드라마의 혜경궁 홍씨는 상당히 다른 모습인 것을 알 수 있다.
정통 사극은 대부분 역사적인 오해가 있을 법한 부분에 자막이나 해설을 통해 바로 잡아주지만, 최근 MBC에서 시도하는 현대적 감각의 사극에서는 해설이 거의 없다. 시청자들이 알아서 상황을 파악하기를 바라고 있다. 가끔가다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 상황에 대한 판단을 알려주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산>이라는 드라마는 구성이나 완성도, 그리고 시청율면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겠지만, 역사적인 고증 부분에서는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드라마로 기억될 것 같다.
TV 드라마를 가지고 역사 왜곡 문제를 들먹이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의견도 있겠지만, TV 드라마를 통해서 인식된 이미지 하나가 역사적인 사실이나 진실보다 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에게는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형성된 이미지가 상당히 작용했다고 한다. 단순히 드라마의 재미나 극적인 긴장감을 추구하다보면 역사적인 사실을 잘못 볼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이다.
역사 속의 인물과 드라마 속의 인물이 완벽하게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드라마를 제작하는 제작진에서 역사와의 거리감을 인식하고 시청자들을 위해 배려해 준다면(자막이나 해설) 역사의 인물과 드라마의 인물 사이의 거리감이 있다 하더라도 시청자들이 그 거리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다시쓰는 드라마 '이산'
MBC 드라마 <이산>이 어느 순간부터 드라마가 역사에 대한 검증은 포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라면 어느 정도 역사적인 내용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데 <이산>은 그야말로 당시 역사의 인물의 이름만 차용하고, 그 인물들이 걸어간 역사의 길은 마음대로 갖다 붙이는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조선시대의 중흥기를 열었던 영조와 정조의 시대를 그리는 <이산>은 과거 <주몽>이나 <태왕사신기>의 역사왜곡 문제와는 별개로 더욱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주몽>은 고구려 건국에 대한 이야기로 고대사의 사료가 그다지 많지 않았고 ‘퓨전 사극’을 표방하면서 시작된 역사 드라마였다. 그리고 <태왕사신기>는 출발부터 판타지였기 때문에 역사 왜곡의 문제는 조금 다르게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산>은 ‘퓨전’도 아니고 ‘판타지’도 아니다. 사료도 엄청나게 풍부한 시대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주몽>이나 <태왕사신기>보다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산>을 제작하는 이병훈 PD는 그야말로 MBC가 자랑하는 흥행제조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를 통해서 <이산>은 시청자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다.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에 드라마에 몰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정도로 이야기의 전개는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산>은 역사 드라마이다.
<대장금>이나 <다모>와 같이 가상의 인물이 역사 속에서 활약하는 방식의 드라마에는 자유스러운 극의 구성이 가능하다. 이러한 자유도는 가상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가상적인 상황 설정이 가능했던 <허준>에서도 가능했다. 그런데 <이산>은 역사적으로 조선의 임금이 된 이산(정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제작진인 이병훈 사단은 <이산>에서조차 과거 자유스러운 극의 전개 방식을 선택했다. 그 결과 드라마의 재미는 건졌지만 역사적 사실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이나 그 당시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은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동생인 홍인한이었다. 그는 역사적으로 1776년 1월에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영조의 의중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다. 당시 좌의정인 홍인한은 “동궁은 조정 논의를 알 필요도 없고 인사 문제를 알 필요도 없으며, 국사는 더욱 더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며 반대하고 나설 정도로 세손을 반대하는 노론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드라마 <이산>에서는 노론 벽파 세력에서 줏대 없는 인물로 그려졌으며, 세손이 왕위에 오를 분위기로 진행되자 혜경궁 홍씨를 찾아가서 비굴하게 살려달라고 간청하기도 했으며, 결국 세손에게 반기를 든 혐의로 잡혀와서는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못난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한편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억울했으며, 세손을 음해한 세력은 비록 숙부라고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강직한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훗날 <한중록>을 통해서 자신의 숙부인 홍인한이 억울하게 모함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서 완전 결백을 주장하기는 힘들다는 견해도 있다.
역사에 대해서 관심있게 살펴보고 찾아보는 사람이 아닌 이상, 역사 드라마를 보면서 어느 정도 선입견이 생기게 된다. 드라마 <이산>을 통해서 하나의 가능성으로 여겨지는 영조의 치매는 사실로 확정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치매가 단순히 기억 상실 증세로만 작용되는 독특한 증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로 그려진 것은 치매라는 병 자체에 대해서도 왜곡적으로 그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결과적으로 정순왕후가 정조의 최대 라이벌이 된 것 같은 흐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조에서 정조로 권력이 옮겨가는 과정에서 정순왕후가 그렇게 엄청난 우먼파워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도 당시에 조선왕조의 상식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조선은 엄격한 유교의 나라였다. 비록 왕비라 할지라도 여성이 대신들을 쥐락펴락하는 위치에 있었을까? 물론 정순왕후가 보여준 카리스마(정조가 죽은 이후 권력을 장악한 것)를 보면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적인 상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드라마를 보면서 당시의 역사적 현실도 드라마와 같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특히 한번 보기 시작하면 몰입하는 매력을 갖고 있는 드라마는 더욱 그러하다. 제작진은 시청자들을 위해서 자막으로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올바르게 알려주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6. <정조실록> 편찬 경위
<정조실록>은 총 56권 5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776년 3월에서 1800년 6월까지 정조 재위 24년 3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800년 12월에 시작하여 1805년 8월에 오나료되었다. 편찬 인원은 총재관 이병모, 이시수, 서용보를 ㅁ비롯하여 도청당상 2명, 각방당상 21명, 교정당상 9명, 교수당상 2명, 도청낭청 20명, 각방낭청 64명, 분판낭청 10명 등 총 131명이었다.
정조 시대 당시의 세계정세를 보면 중국의 청에서는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혼란이 일어났고, 일본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한 후 나폴레옹에 의해 혁명전쟁이 이어졌고, 미국은 독립을 쟁취하고 위싱턴, 제퍼슨 등을 대통령으로 세웠다. 이 시기는 무엇보다도 프랑스와 미국의 시대였다.
독일에서는 '슈투름 운트 드랑' 적인 사상이 과격한 양상으로 치닫자 괴테와 실러 등에 의해 조화와 정제미를 추구하는 고전주의 문학이 모색되고 있었고, 베토벤이 등장하여 고전파 음악의 완성과 함께 낭만주의 음악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813 : 조선의 역사 355 (제23대 순조실록 2) (0) | 2012.12.28 |
---|---|
한국의 역사 812 : 조선의 역사 354 (제23대 순조실록 1) (0) | 2012.12.27 |
한국의 역사 810 : 조선의 역사 352 (제22대 정조실록 18) (0) | 2012.12.25 |
한국의 역사 809 : 조선의 역사 351 (제22대 정조실록 17) (0) | 2012.12.24 |
우면산의 겨울 8 : 새로운 시대는 전개될 것인가? (0) | 2012.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