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817 : 조선의 역사 359 (제23대 순조실록 6) 본문
한국의 역사 817 : 조선의 역사 359 (제23대 순조실록 6)
|
제23대 순조실록 ( 1790~1834년, 재위 : 1800년 7월~1834년 11월, 34년 4개월)
5. 조선왕조 세도정권을 부정한 '홍경래의 난'(계속)
홍경래의 난(계속)
조선 사회는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급격하게 변화되어 갔다. 광범위하게 진행된 토지 겸병과 농사법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었고,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일당 독재로 삼정이 문란해져 농토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금 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일부 농민들은 농업 기술과 상업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여 부농이나 지주가 되는 등 양극화 현상이 일어났다.
신분질서가 급격하게 와해되어가던 당시에 이렇게 성장한 부농들은 지방의 유지로 활동하면서 사회 변동의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상업에서도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들이 등장하여 대상인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홍경래의 난에서도 지도층 가운데는 이렇게 성장한 부농층과 대상인이 다수 끼어 있었다.
세도정권에 의한 과거제도와 국가 기강의 문란, 삼정을 통한 관리들의 횡포과 수탈에 대항하여, 몰락한 양반과 지식인 등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새로 등장한 부농과 상인들의 물력과 조직력 등을 결합화여 10여 년간의 준비 끝에 일어난 것이 '홍경래의 난'이다.
평안도 용강 출신의 홍경래는 본디 양반 출신으로 과거에 수차례 떨어지면서 그것이 서북인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 대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과거를 포기한다. 당대의 제도적 모순에 눈을 뜬 그는 평안도 가산에서 서자 출신 지식인 우군칙과 만나게 된다. 현실에 대한 두 사람의 불만은 곧 변혁의 의지로 바뀌어 봉기를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이들은 우선 평안도 내의 부농층에게 접근하여 그들과 제휴하였고 자금 마련을 위해 부유한 상인들과 자주 접촉하였다. 상인들은 평소에 중앙정부에 불만이 많은 계층이었다. 그들은 또 가산 다복동의 부호 이희저를 포섭하여 봉기를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풍수적으로 천혜의 요새인 그곳을 근거지로 삼는다. 또 봉기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운산 촛대봉에 광산을 열어 유민층을 흡수하여 군대로 만들었다. 이 밖에도 당시 세도정권에 대하여 불만이 깊었던 재상 출신의 김재찬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평안도 일대의 지역 실력자 및 지방 관속들, 그리고 유랑 지식인과 유민 계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포섭하여 봉기 세력으로 조직하였다.
1811년 12월 20일을 거병일로 잡고 홍경래는 자신을 '평서대원수'라 칭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사전에 새어나가자 거사일을 12월 18일로 앞당겨 출병하였다.
그들이 출병에 앞서 내건 격문은 크게 세 가지로, 첯째가 서북인에 대한 차별 철폐, 둘째가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타도, 셋째가 신인 정씨가 출현하였으니 그를 참임금으로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진군, 북진군으로 나뉜 봉기군은 거병한 지 열흘 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가산, 정주, 곽산, 선천, 철산 등 청천강 이북의 10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는 특히 각 지역의 내응 세력들이 적극 호응해준 결과였다. 내응 세력은 죄수, 별감, 풍헌 등 관리와 별장, 천총, 별무사 등의 무장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부농이나 상인들로 돈을 내고 신분 상승을 이룬 계층이었다.
그러나 곧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의 추격이 시작된다.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박천, 송림, 곽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된다. 봉기군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세력이 약화된 것은 봉기군 자체의 취약성 때문이었다. 봉기군은 대다수가 급여를 받는 임금 노동자 및 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해관계와 봉기 지도층인 부호, 상인, 지식인층이 가지고 있는 이해관계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소농, 빈민층이 삼정의 문란을 혁파하고 다시 정착 농민으로서 안정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바랐다면, 지도부는 단순한 제도개혁 차원이 아닌 정권 전복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세도정권의 횡포에 대해 일어선다는 공동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표가 각기 달랐기에 하층민들의 자발적인 유도를 얻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정주성에 들어간 봉기군은 이제까지 소극적인 참여자나 돈받고 고용된 군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와는 다른 적극적이고 사나운 군대로 변모하였다.
소극적이던 봉기군이 이렇게 갑자기 강인한 군대로 변화된 것은 관군의 잔혹한 초토화 작전으로 정주성 일대의 양민이나 농민들이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게 된 것에서 기인하였다. 관군의 횡포와 무자비한 살육을 피해 정주성으로 들어온 농민들이 적극적인 반군 세력이 되어 싸웠고 봉기군 지휘부도 부자들의 재산에 대한 징발을 단행하여 농민 각자에게 평등한 분배를 제공했기 때문에 지휘부에 대한 농민들의 신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비자발적 참여자로 이루어진 봉기군의 사기가 낮아지고 하나둘 정주성을 빠져나갈 때에 이렇게 주변 농민들이 합세하자 정주성의 봉기군은 순식간에 자발적인 농민 봉기군으로 전환되었다.
여기서부터 홍경래의 난은 불만 세력의 정권 전복 기도가 아니라 자발적인 농민항쟁의 성겨을 띠게 된다. 그렇게 결속된 봉기군은 보급로가 끊기면서도 군비나 숫자면에서 몇 배나 우세한 관군을 맞아 4개월간이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관군의 화약 매설로 1821년 4월 19일 성이 폭파되고, 1917명의 농민군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잡혀 처형당하였다. 이리하여 그해 1월 초부터 시작된 정주성 항쟁 전투는 3개월 15일 만에 마감되고 홍경래의 난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체제를 표방함으로서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주어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가 죽은 뒤에도 전국 각지에서 난들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는가 하면, 홍경래의 난에서는 소극적인 입잗을 취하였던 소농, 빈민들이 철종 조에 일어나는 임술민란에서는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 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난에 대한 평가는 시기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950년 이전에는 당쟁사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서북인에 대한 푸대접에 대한 반발이라던가 홍경래 일파의 정권 탈취 기도로 평가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는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생긴 향촌 부호, 경영형 부농, 시민 지주, 사상인, 몰락한 양반 및 지식인 등의 지도층이 임금 노동자와 빈농을 동원하여 일으킨 반봉건 농민항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홍경래의 난에 대한 평가가 당쟁사적 평가냐, 농민항재사적 평가냐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 당시 수탈당하던 농민들이 지배계층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반면 부유하고 여유는 있었지만 지배계층으로부터 천시와 소외를 받고 있던 중산계층은 체제개혁과 정권 전복을 위한 도구로 농민 계층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서로 목표가 달랐고 추구하는 이상이 다른 무리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
홍경래
홍경래(洪景來, 1780년(혹은 1771년) ~ 1812년 음력 4월 19일)은 조선 순조 시대의 평안도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평안도 룡강군 다미면(多美面)에서 태어났다. 몰락 양반 출신이라고 전해지지만 거의 평민 수준으로 곤궁하게 살았다. 그는 유교, 병법, 풍수지리 등을 익히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1798년 사마시(司馬試)에 실패하고 집을 나가 방랑하면서 거사를 꿈꾸었다.
1811년 홍경래는 조선 정부에 대항하는 농민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매우 잘 방어되는 정주를 비롯하여 서북 지방 상당수를 지배했다. 이를 홍경래의 난이라고 한다. 세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때는 청천강 이북을 거의 지배했다.
1812년 음력 4월 19일 관군에게 정주성이 함락될 때 관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의 심복들인 우군칙(禹君則, 1776년 ∼ 1812년)과 홍총각(洪總角, 1785년 ~ 1812년)은 관군에게 체포되어 주살되고 말았다.
홍경래 난 당시 세계 정세
이 당시 세계 정세는 청나라 7대 가경제(嘉慶帝)이며 즉 인종(仁宗) 16년이며 서력 1840년에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제1차 아편전쟁이 일어났으며 즉 아편전쟁은 홍경래 난이 일어난 후 29년이 지나서 일어났다.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은 1867년에 시작하였다 즉 일본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서양 세력의 압력에 마침내 굴복하여 모든 분야를 개방하였다 이로 인하여 봉건사회는 끝내고 근대국가로 시작한 것이 바로 명치유신이다 즉 명치유신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후 56년이 지나서 일어났다.
그러나 조선 26대 고종 때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물리치고는 척화비(斥和碑)를 1871년(고종 8년)에 세웠다. 이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후 60년이 지나서 일어났다. 구미열강은 대원군의 강경한 쇄국정책에 부딪혀 실패하였지만 일본은 운요호사건의 결과로 무력적 위협과 함대시위로 즉 운요호사건의 그 다음해 1876년 2월 26일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 즉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또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체결하는 길을 열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모든 체결조건은 우리나라에 불리하게 되었으며 그 후의 구미열강과의 체결도 모두가 우리나라가 불리하게 되었으며 곧 우리나라의 백성의 보호는 뒷전으로 밀리고 치외법권을 허용하고 말았다 임진왜란 후 또다시 역사와 국사를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결국 다가오는 서구세력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하고 나라를 잃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894년은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즉 청일전쟁은 홍경래 난이 일어난 후 83년이 지나서 일어났다.
* 1804년에 순조가 15살이 되자 정순왕후(경주 김씨이며 영조의 비)가 수렴청정을 거둠으로써 순조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 정순왕후가 운명하자 그의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 등 벽파(辟派: 영조편)가 물러나고 시파(時派)인 정조편에 서 있던 장인인 안동 김씨인 김조순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 안동 김씨가 조정의 요직을 다 차지해버렸다. 이에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정권은 부패하게 되었다. 이에 뇌물수수 인사 과거제도 등이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신분 질서가 급속하게 와해하자 왕조가 약해지게 되었다.
* 정치기강이 문란해져 탐관오리 등이 횡행하고 농민층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자 농민층의 항거가 일어나게 되었다. 즉 안동김씨의 세도정권과 삼정이 문란해져 이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5차례나 일어났으며 마침내 1811년(순조 11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 서북인의 차별대우 철폐와 세도정권의 가렴주구(苛斂誅求: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고 재물을 빼앗음) 혁파와 정도령의 출현 등을 기치로 일어나게 되었다.
* 10일 만에 여러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나 관군의 추격을 받아 4개월 만에 제압되었다. 때는 1812년 4월이다
* 홍경래의 난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사회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큰 것이었다. 즉 조선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체제를 내세우게 되었으며 농민층의 자각을 가져왔고 또한 조선 후기의 사회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이 홍경래의 난을 서북인의 푸대접에 대한 반발이며 세도정치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삼정문란으로 인한 지식인 지도층이 노동자와 빈농을 동원하여 일으킨 반봉건 농민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819 : 조선의 역사 361 (제23대 순조실록 8) (0) | 2013.01.03 |
---|---|
한국의 역사 818 : 조선의 역사 360 (제23대 순조실록 7) (0) | 2013.01.02 |
한국의 역사 816 : 조선의 역사 358 (제23대 순조실록 5) (0) | 2012.12.31 |
한국의 역사 815 : 조선의 역사 357 (제23대 순조실록 4) (0) | 2012.12.30 |
한국의 역사 814 : 조선의 역사 356 (제23대 순조실록 3) (0) | 2012.12.29 |